제10장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 (3) 종결론자의 견해, 한 가지 설명?, 성령과 설교 / 싱클레어 퍼거슨
종결론자의 견해
종결론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해 볼 수 있다. (1) 회복주의는 교회가 존재해 온 장구한 기간 동안 어떤 은사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설득력 있는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믿음의 결여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영적.신학적 오만의 소산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성령이 자신의 은사들을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신다는 원리를 말하지 않더라도('연속주의자'들에 의해서 다른 맥락에서 많이 강조되었던 바) 이전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훌륭한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런 맥락에서, 20세기에 고전적인 종결론 '옹호'를 대표하는, 1918년에 출판된 워필드 박사의 [가짜 기적들](Countfeit Miracles)은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증명하는 성경 구절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채 논증되었기에, 이것은 논외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어버렸다. 이런 반박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하다. 첫째, 워필드의 강의는 주로 역사적인 것을 다루었다. 그의 주된 목적은 이 주제를 석의학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종결론자들이, 워필드의 의도가 철저한 성경적-신학적인 연구를 제시하고자 한 것처럼 그에게 쉽게 의존한 것은 조금 경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같은 이유에서, 그의 책에 대한 표준적인 비평은 그 핵심 요지를 곡해하는 것이다.
둘째, 어떤 교묘한 술책이 이 논쟁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어떤 쟁점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예를 들면, '신약 성경 어느 곳에서도 중단을 가르친 곳이 없다')를 내세움으로써 그 반대인 긍정적인 명제('신약 성경은 연속주의를 가르친다')를 뒷받침하려는 것은 논리적인 오류이다.
(2) 두 번째 요점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회복주의자나 연속주의자의 견해를 보면,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인 것은 모두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이요 규범적인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레 연속되고 있다고 어림짐작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에서 그러한 특별한 은사들은 성경 역사상 매우 짧은 기간에 제한되어 나타나며, 새로운 계시와 그 대사들을 확정하는 징표로 사용되고, 획기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변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면, 성경에 어떤 기적들이란 하찮은 것이요 교묘한 마술 수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오직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볼 때, 엘리사의 도끼가 떠오르는 일이나(왕하 6:1-5) 고기의 입에서 동전을 건져 내는 일이(마 17:27) 일관성 있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구약 성경에서 기적적인 증표-은사들(sign-gifts)이 나타난 것은, 구속 역사의 특정한 기간에 제한되어 등장하는데 언약적 계시의 새로운 단계가 도래할 때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어둠의 세력들에 의해서 멸절될 위험에 처하여 특별한 보호가 필요할 때였다. 곧 출애굽의 시기, 약속된 땅에 들어갈 때, 거기에 백성이 정착할 때, 엘리야와 엘리사와 선지자들의 사역을 세워 나갈 때 그리고 포로 시대다. 물론 하나님은 그 밖의 다른 때에도 계속해서 권능으로 역사하셨고, 때로 놀라운 방식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이런 증표적 행위는 결코 규범적인 것이 아니다. 구약 성경 어디에도 이런 증표적 행위가 구속 역사 전체를 통해서 줄어들지 않은 채 지속되어야 한다고 제시된 곳은 없다. 예레미야, 오바댜, 말라기, 아모스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의 기적이 어디에 있는가? 특별한 기적들은 그 특성상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이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변호하고 확정하는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발휘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유형과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의 사역과 제자들의 사역이 '기적들과 이적들'에 의해서 확증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행 2:22). 바울과 바나바 역시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행 14:3).그리스도는 바울을 통해서 많은 것을 성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여기서 유대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진의 중요성을 주목하라)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다시 한번 새로운 전진은 의미 심장하다)"(롬 15:18-20).
여기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것은, 이 특이한 현상들이 진정한 사도적 사역의 확증적인 증표로서(이것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바울에게, 그것은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고후 12:12) 가운데 하나가 된다. 비슷한 시각이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서도 제시된 바가 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3-4). 다시 한번 사도적인 사역과 그에 대한 특별한 확증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에 부여된 특별한 의미는 근본적으로 사도적 사역의 가장 중요한 특징과 관련되는 것이다.
이런 은사들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사된 반면, 그 체험이 그들에게만 제한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반론이 자주 제기되었다. 예컨대 스데반(행 6:8)과 빌립(행 8:6)의 사역에는 기적적인 표적들이 수반되었다.
하지만 스데반과 빌립은 사도의 대리인 곧 신약 성경에서 '복음 전하는 자'로 묘사된 자로 사역하였다(훗날 빌립은 특히 그렇게 지목되었다, 행 21:8). 비록 집사 사역의 구별화가 이 사건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도행전 6:1-7에서 나오는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을 볼 때 그들을 최초의 '집사'들로 생각하기보다는 이 같은 범주('복음 전하는 자')가 더 적합할 것 같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초점은, 이런 은사들이 오직 사도들에 의해서 행사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도적 복음과 사역의 확증적인 증거로서 독특한 기능을 했다는 점이요, 따라서 주어진 새로운 계시의 신뢰성을 뒷받침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런 현상들의 의미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로서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근거로부터 떠나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사도들은 합당한 증거가 주어진 토대를 놓는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교회에서 새로운 계시를 확증하는 표시로서 성령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은사들의 최우선적인 기능 자체가 그것들이 지닌 한시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이 처음 읽혀진 바로 그 시간을 정경이 채택된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이듯이,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이런 확증적인 이적들도 종결되었으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본질상, 그러한 종결은 정경의 수집과 편찬처럼 점차적으로 진행되면서 서서히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은사들의 점진적 종결은 그 은사들의 내적인 중요성이 시사하는 바로 그 패턴을 따르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은사종결론자들은 바울의 이 선언을 정경의 완성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해 왔으며, 이것과 함께 예언, 방언 그리고 계시적인 지식으로 대표되는 특별 은사들이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고전 13:8). 그 때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며,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멈출 것이다(고전 13:12; 본문의 배경에는 민수기 12:8이 있다. 이 구절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친밀하고 생생한 모세와 하나님의 교통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지식마저도 새 언약의 계시(고후 3:12-13)가 도래하였을 때와 비교해 보면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계시의) '온전한 것'과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고전 13:10) 방언과 예언의 중단을 수반할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현대 신학자의 대다수는 이런 유의 해석을 모두 거부하는데, 이는 바울의 경우 '온전한 것'이란 종말론적 개념이지 정경론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는 내가 완전히 알 것이요, 심지어 (하나님이 아시는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이라"(고전13:2)라는 내용은 오직 그 복된 소망만을 언급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구절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는 구절과 병행하기 때문에, 방언과 예언의 중단은 그 시대의 종결과 함께 이루어질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런 은사들의 이 시대의 마지막까지 연속됨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근거로서 제시되는 유일한 구절은 아니지만,1 만일 이런 해석이 옳다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에 대한 논쟁은 이미 해결된 셈이다. 하지만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온전한 것'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천국의 비전에 대한 것이 아니요 사도적 가르침 전부에 의해서 이 중간기에 가능하게 된 하나님을 아는 포괄적인(완전한) 지식에 대한 언급이라는 반론이다(이 견해는 현대 주석학자들 가운데 소수의 의견이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이나 예언뿐만 아니라 사도의 서신들도(결과적으로 신약 성경도)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될 것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3:8-12을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신 까닭에 결단코 폐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은사들, 즉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말씀은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한시적인 방법들이다. 지금 예언, 방언, 지식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완전한 모습을 알게 될 때 이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다. 곧 "온전한 것이 올 때, 불완전한 것은 폐하여질 것이다." "성장한 어른은 어린아이 때의 일을 벗어버린다."
방언, 지식의 말씀, 예언(고린도 교인들이 유명세를 떨친 것들)은 모두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산(産)'이란 상표가 붙은 거울마저도 다른 사람이 당신을 보고 아는 것과 똑같이 분명하게 당신을 보는 것에(따라서 분명히 알게 되는) 비해서는 형편없는 대용물이다.2 미래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계획하신 완전한 지식을 가질 때, 우리는 더 이상 방언, 지식의 말씀, 예언 등의 불완전한 거울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아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풀이는, '온전한 것'과 '내가 아신 바 된 것과 같이 충분하게 아는 것'이 재림(parousia) 및 '하나님에 의해서 알게 된 것'과 쉽게 동일시되어 온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하고, 그런 해석적인 질문이 어떻게 해결되든지 승리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믿음, 소망, 사랑은 계속되는 반면,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말씀은 부분적인 것이요 일시적이기에 멈추게 될 것이다. 그 때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언급되어 있다. 참으로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격언에 지나지 않는다(정확하게 바로 여기에서 다수의 은사 연속주의자가 킬빈의 격언 비슷한 말 즉 태양이 떠오르면 그보다 저급한 모든 빛은 소멸되고 만다는 말에 호소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과연 의미심장한 것인가?)
두 번째로, 종결에 대해 좀더 광범위한 질문을 던지기를 거부하는 해석학자들은, 이 구절이 단지 미래의 시점에 이런 은사들이 종결될 것을 일반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확한 시기는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온건한 연속주의자인 카슨(D.A. Carson)은 이런 말씀들은 "하나의 카리스마적인 은사가 재림(parousia) 이전에 보다 빨리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3고 언급하는 반면, 종결론자인 리처드 개핀은 '온전한 것'이라는 표현에 담긴 지평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 구절로부터 은사들이 재림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도출해 내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바울의 글을 읽을 때 너무 지나치게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오늘날의 논쟁점들에 비추어 해석한다....바울은 여기서 사도적이면서 기초적인 현대와 그 이후 기간 사이의 구별에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이 기간중 은사들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할 것이냐의 여부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믿음과 소망 그리고 특별히 사랑의 영속적인 가치(8, 13절)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올 때까지의 전 시대를 유념하고 있었다.4
만일 신약 성경이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면, 이런 특별 은사들의 기능이 그것들의 수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연속주의자-회복주의자의 견해는 신약 성경 자체에서 마지막 때를 사도 시대와 속사도의 시대 또는 차원으로 양분하고 있음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사역을 특징으로 하는 기초가 놓이는 시대가 있고, 그 후에 속사도의 시대, 즉 기초 작업 이후의 시대가 있음을 유념하는 것이다(엡 2:20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자의 시대에 일어난 현상들이 그 시대를 넘어서 지속되도록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치 모세, 엘리야, 엘리사의 기적들이 그들의 재능 많은 후계자들에 의해 이어지지 않은 점에 놀라지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
복음의 기적적인 증명들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의 교회에만 국한된 특별한 것이 아니고, 종결론자의 입장이 워필드의 발명품도 아니고 단지 20세기에 일어난 운동들에 대한 반작용도 아니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릴 때가 많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시대에 이 논쟁은 주요 쟁점으로 등장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제기된, 종교개혁에 대한 가장 엄중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그 운동이 전혀 기적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로마 교회는 자신의 교리의 진실성에 대한 주장의 일부 근거를 기적의 증거에서 찾으려 했다. 이에 대한 칼빈의 반론이,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낸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헌사에 들어 있으며, 이는 내용 면에서 볼 때 본질적으로 구속사적인 것이었다. 즉 새로운 언약은 엄청나게 쏟아부어진 기적들로 인하여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합한 증거이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 다른 엄청난 기적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5
(4) 어거스틴을 따르는 전통에서 사도 시대에 속한 것으로 보는 개개의 은사들의 견지에서는, 방언 회복론자들의 견해는 특별히 더욱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 말하는 것을, 외국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대의 방언들을 통상 외국어를 말하는 것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더구나 고린도전서를 제외하고는 이런 현상의 발생이나 통제 규정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26)는 구절에 의지하여, 방언의 한 실례를 설명하려는 것은 그것을 확대 해석한 것이다. 탄식은 방언과 다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말로 표현되는 언어와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물론 침묵을 근거로 논증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나 이 광범위한 침묵(고린도전서 외에는 방언에 대한 증언이 없다는 것), 특별히 목회 서신 가운데서의 침묵은, 이 책들이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를 위한 규칙을 분명히 쓴 것이기에, 방언 및 통역의 시대로부터 사도적 전통의 가르침의 시대로 이미 전환된 것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 같다(참고. 딤전 1:10-11; 3:9; 4:6; 6:3; 딤후 1:13; 2:15; 3:10-4:5; 딛 1:9; 2:1). 목회 서신이 예언이나 방언 등과 같은 은사의 사용에 대한 규칙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았음을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한다.
신약 성경에서, 통역된 방언은 예언과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졌다(한 가지 시례가 행 2:14-18에 오순절 방언에 대한 설명으로서 예언에 대한 언급에 들어 있다). 만일 통역이 없다면, 예언은 분명히 방언보다 우위에 있다. 그러나 통역이 있다면, 그 때에는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은 함께 공유케 되는 것이다(고전 14:6). 따라서 통역이 있을 때, 방언은 예언과 기능상 동등한 것이요,6 본질상 계시적 성격을 갖는다.
기독교 신학은 계시와 조명의 차이를 구별하였다. 똑같은 용어('계시')가 양쪽 모두에게 사용될 수 있지만, 개념상의 구별은 성경적인 것이다(시 119:18; 딤후 2:7). 계시는 특별한 의미에서 바울과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엡 3:5). 하지만 그는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알도록 계시의 성령을 가지게 될 것을 기도하였다(엡 1:17; 참고. 마 16:17). 공통 용어는 단 하나의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비적인 특징을 가진 두 개의 연관된 개념 중 하나를 뜻한다. 바울에 의해서 사용된 계시라는 용어는 진리를 주심과 그 의미를 조명함 이 두 가지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구별되는 현상이다. 사도적인 '계시'에 결부된 영속적인 권위와 주관적인 '계시' 혹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찾아오는 조명 사이에는 범주상의 구별이 있다. 비록 '계시의 성령이...너희가 그를 더욱 잘 알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여전히 완전히 정당한 것이지만(엡 1:17), 조직신학자들은 '계시'와 '조명' 사이에 어의적인 구별을 함으로써 이것을 현명하게 구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7 교회와 개인을 지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성경의 충분성이 여기서 논쟁의 주제로 떠오르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는 구속 계시의 각 단계마다 언제나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절정은 이에 상응하는 성경의 충분한 계시가 동반됨으로써, 구약 성경에 기초를 둔, 바울이 묘사한 성경의 충분성의 원리(딤후 3:16-17)가 이제는 신구약 성경 모두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기록되는 동안, 초대교회의 지침이 되는 원리 혹은 정경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즉, 구약 성경, 사도들의 명령, 예언들 그리고 이미 기록된 신약 성경의 일부분들이다. 이제 이렇게 복합적인 정경 혹은 생활과 믿음의 원리는 신구약 성경이라는 한 권의 정경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신구약 성경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서, 온전히 그분을 신뢰하며 온전히 그분께 순종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8
성경의 충분성에 담긴 논리적인 함축은 교회나 개인에게 더 이상 추가적인 계시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필요한 것은 조명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성경과 전통이 하나님의 계시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저항하여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을 주장하였다.9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견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선언에 담긴 고전적인 표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구원과 믿음과 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건전하고 필연적인 귀결로써 성경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 혹은 사람들의 전통으로 더 이상 추가될 것은 없다.10...
이것은 최근 논쟁의 '폭풍의 핵'으로 직접 연결된다. 새로운 계시란, 조셉 스미드(Joseph Smith)의 황금 서판이나 전통의 형태 속에 들어 있을지라도 원칙적으로 성경의 충분성을 깍아내리는 것인데, 적어도 어떤 점에서는 개인의 생활의 기분과 관련하여 정말로 압도하는 요소가 되어 버린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저쪽 사람이 받은 계시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닌가? 성경의 정경에 추가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부인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기준 면에서 실제적인 추가는 만들어질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조명과 그것을 적용하는 지혜로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수준의 예언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는 선언으로 자신의 '예언'을 시작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그루뎀과 다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제안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이다. 결국 아가보는 두 번째 수준의 예언을 한 성경적인 '실례'인 바, 그는 '성령이 말씀하시기를'(행 21:11)이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이것은 예언의 공통적인 용어이다. 그 기원과 권위와 신뢰성의 차원에서 볼 때, 그 예언은 분명하게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영감과 성경의 완전한 권위로 인정한 담론(행 4:25; 참고. 1:16; 28:25)에 속해 있다.
비록 중대성의 면에서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반대의 위험도 있다. 은사 종결론자가 참된 조명을 명백하게 거부할 가능성도 있는데 이는 예언이 계시라는 용어(그들의 견해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다)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심지어 두 번째 수준의 예언이라는 가설마저도 스스로 그런 반작용을 할 가능성이 있다. 조명을 마치 계시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합당한 성경적 통찰력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루뎀은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은 반드시 삭제되어야만 한다고 제안하였고, 페인(Thimothy Pain)에게 동조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주님이 어떤 것을 제안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11 전자의 용어는 정경적인 예언과 '두 번째 수준의 예언'을 혼동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어떠한 예언도 '주님이 이와같이 어떤 것을 제안하고 계시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예언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적인 의미에서도 예언이 아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은사 회복주의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은 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논쟁을 더욱 가열시키는 것은 성경의 충분성이라는 교리적 이슈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분명하고도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체험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과 그것을 해석하는 면에서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도움을 준다. 여기서 오랫동안 인정을 받은 원리, 곧 계시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조명에서의 그의 역사 사이에 유비점이 있다는 원리가 유용하다. 일례를 들면, 은사 종결론자인 17세기의 신학자 존 오웬은 신약 시대의 어떠한 특별 은사들은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는 반면, 어떤 지속적인 은사들은 그것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이 모든 은사들과 그 사용이 어떤 면에서는 중단되었지만(그 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중단되었고, 또 어떤 것들은 그 직접적인 전달 방식 및 탁월성의 정도 면에서 중단되었다) 그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는 그와 유사한(analogous) 은사들이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계속된다.12
예컨데 사도의 사역과 설교자의 사역 사이에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마음의 조명은 신약 성경 계시의 저작 과정에서 일어났으나, 성경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중에도 일어난다. 성경, 성령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 위의 두 가지 상황에 모두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유비가 있다고 해서 용어나 개념들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부분적으로 범주화의 문제이다. 신학자들은 계시와 조명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는가의 문제로 오랫동안 씨름해 왔으며, 종종 전자의 범주(계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여 왔다. 한편, 신정통주의 신학에서는, 계시와 조명을 합쳐 버리거나 심지어 혼동해서, 계시는 조명이 있을 때까지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른 한편, 은사주의자들은 계시와 조명을 혼동하되 사도적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반응의 차이를 사실상 붕괴시켜 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성경을 떠나서 다른 방법으로 계속된다면, 그깃이 결국 정경으로서 기능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복음주의자들이, 이것이야말로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성경 밖의 계시(전통에서)의 연속성 교리의 치명적인 오류임을 자주 지적하였음에도 개신교 안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은 결코 소멸되어서는 안 되고 예언 역시 멸시되어서는 안 된다(살전 5:19-20). 성령이 주시는 모든 조명과 통찰력은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야 하며 환영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을 예언으로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끝난 사역과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혼동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성경의 충분성으로부터 일탈시키는 위험이 있다.
그러면 방언은 무엇인가? 종결론자들의 견해는 과연 오늘날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바와 공존할 수 있을까? 방언을 말하는 현상을 구성하는 것은 과연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근본적인 불일치가 널리 퍼져 있다. 그것이 과연 (천상의 혹은 지상의) 언어인가? 그것은 자유롭게 흥얼대는 것인가? 그것은 사도행전에 있는 경험과 동일한 것인가? 성경에는 두 종류의 방언이 있는가? 이 두 가지 모두 오늘날에도 시행되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오늘날의 주장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이다. 특히 방언이 서로 다르고, 상충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현대인과 고린도 교인의 방언 사이에 유비적인 관계(일종의 기능적인 동일성)가 있는 한 그 둘이 동일한 것인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서, 적어도 이 둘 사이에 관계성에 대해 유추를 해 볼 때, 고든 피(Gordon Fee)와 같이, "아마도 적실성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13
우리가 주장해 온 바와 같이, 만일 성경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오직 한 종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라면, 신학적인 논쟁을 떠나서 '성경적인' 방언이라고 주장되는 많은 경우는 신약 성경의 현상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자유로이 흥얼대는 것인데, 의도적으로 연습한 것이든 즉흥적으로 불러일으켜진 것이다.
방언 행위는 널리 인정되는 바와 같이, 심리적인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자유롭게 말하는 체험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경우 '그리스도 중심의 틀'로 해석된 까닭에, 이것이 행복감을 만들어 낸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이것이 사단적인 것으로 간주될 필요는 없다(비록 어떤 상황에서는 방언 말하는 것이 사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는 영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영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많은 면에서 그보다 못한 것이다.14 그리고 자유로이 흥얼거림마져도 그 의미가 잘못 통역될 경우에는 나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 가운데 계속해서 역사하신다는 것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하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특별히 자신의 약속에 따라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환자의 경우, 의사의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해서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기도받는 것은 여전히 합당하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 5:15)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들은 수단을 통해서, 수단을 초월해서 심지어 그 수단과 반대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고침을 받는다.15 존 오웬이 쓴 것처럼,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오랜 기간 동안 어떤 기적적인 사건으로 자신의 권능을 쏟아부으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16 하지만 여기에서, 그런 사건들이 정상적이라거나 혹은 이런 사건들 속에서 개인들이 오순절의 은사들을(대관식의 결과인) 받은 것처럼 결론 짓는 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체험에 담긴 각각의 요소를 범주화사키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마치 하나님의 섭리에 해당하는 모든 사건과 경험 전부를 조직적으로 분석해서 분류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한 가지 설명?
그러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간증하고 있는 그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코 쉬운 질문은 아니지만 그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것은 연속주의자나 중결론자 양쪽 모두를 상당히 어려운 궁지에 빠지게 한다. 연속주의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20세기와 그 이전의 교회사 시대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한편, 3억5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중의 대부분은 방언을 하고, 많은 사람은 예언을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병을 고친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의 체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른 신학적인 차이점과는 달리(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몸과 성만찬의 관계에 대한 차이점) 이것들은 관찰이 가능하고 측정할 수 있는 현상이다. 사실들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분명히 문제의 핵심이다. 현상은 실제로 경험된 실재이지만, 스스로 해석하는 능력을 지닌 실재는 아니다. 이것은 방언과 예언, 지혜와 지식의 말씀, 그리고 인간의 손에 의한 병 고침과 기적의 역사 등에 동일하게 적용한다. 연속주의자들의 견해에는 널리 간과되는 중요한 해석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위에서 방언을 다루면서 이 점을 주목해 보았다. 예언의 경우에는, 예언의 계시적인 성격(따라서 실존적으로 정경적인 기능)에 비추어 볼 때, 연속주의자들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실제로 전혀 예언이 아니고, 조명, 곧 오류 가능성이 있는 통찰이자 성경적 진리의 현대적 적용임을 인정하는 것이더 일관성 있는 태도이다.
더욱이 신약 성경의 재현이라고 하는 병 고치는 은사는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코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극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은 병 고침을 위해 간구하는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신다(약 5:14-15). 신약 성경에서 개인들에 의해서 사용된 어떤 은사가 교회에서 영구적으로 지속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영광스러운 초자연적 방법들로 더 이상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병 고침은 종결론자들보다는 연속주의자들 가운데 더욱 자주 발생한다고 때때로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설사 그렇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병 고침의 이유는 채택한 해석의 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그리고 간여하심)을 사모하는 믿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
'병 고치는 은사'(고전 12:9, 30)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도움은, 이 은사에 대한 묘사가 오늘날의 병 고침의 주장과 별로 닮은 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신약 당시에 병 고침을 받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었다. 선천적인 결함도 고침을 받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도 즉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부분적이든 전체든 재발했다는 이야기는 없으며, 그 가능성을 상상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나타나는 현상과 다른 면모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병을 고치시는 여호와이다(출 15:26). 그러나 그분은 개인들에게 주신 '병 고침의 은사'를 통해서 입증해야 할 새로운 계시는 없으시다. 우리가 고대하는 유일한 새로운 계시란 그리스도의 마지막 현현(顯現) 때에 올 것이다. 그 때에는 전례가 없는 그리고 최종적인 병 고침이 모든 범위에 걸쳐 거대하게 일어날 것이다.
똑같은 원리가 성령 세례의 '체험'에도 폭넓게 적용되는데, 이 문제는 종종 연속주의와 밀접하게 연속되어 있다. 신적인 (은사) 체험을 부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단지 그 체험의 해석이 필요할 뿐이다. 회심 이후에 오는 성령 세례를 옹호하는 주장이 지닌 오류는 그 체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새롭게 강화되는 것, 확신과 희락의 새로운 충만함, 성령의 새로운 충만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중생, 회심 그리고 성령 세례가 일어나는 첫 번째의 성령 충만 때에 영단번에(ONCE AND FOR ALL) 체험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광범위한 규모로 잘못된 해석이 20세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체험을 좀더 성경적인 범주에 따라 규정하는 재해석 방법이 정립되면 성령론의 분야에서 좀더 폭넓은 신학적인 조화를 창출해 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삶과 특징 가운데 더욱 큰 안전성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체험과 진리를 결합시킬 것이다. 결국 성령의 모든 은사는 섬김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다(참고. 엡 4:7-16).
성령과 설교
신약 성경의 은사 목록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전파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들의 사역이 분명히 입증하듯이, 사도 시대에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다.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은 매우 뚜렷하게 이러한 초점을 예증해 주고 있다. 에베소 사역은 바울 사역의 사도성을 확증시켜 주는 비상한 여러 증표들로 특징지어졌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행 19:11).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치는 일이었으며, 바울은 거기서 약 2년 동안 매일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신의 생애 중 그 기간에 대해 바울이 스스로 설명하는 내용은 매우 교훈적이다. 즉 그는 에베소인들을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선포하였다(행 20:20, 25, 27). 어떤 사본에 의하면, 그는 매일 낮잠 자는 시간에 이 일을 계속하였고, 몇 시간 동안 지속했으며, 아마도 많게는 매일 다섯 시간 동안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후계자로 에베소에서 목회할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특별히 중요하다. 그의 관심의 초점으로서 속 사도 시대 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전파하는 것을 핵심적인 역할로 꼽고 있다. 디모데는 말씀을 읽는 데 집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딤전 4:13)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는 일에 헌신해야만 했다(딤후 2:15). 그는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가'를 분명하게 밝혀 선포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신중한 가르침과 많은 인내를 가지고-바르게 하고, 책망하고, 격려해야만' 하는 것이다(딤후 3:16-4:2, 이 부분을 두 장으로 나누어 놓은 것은 잘못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엡 6:17)으로 보았다. 이 단어를 통해서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성령에 의해서 제련된다는 것(영감)뿐만 아니라, 성령의 도구로 사용되어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참고. 히 4:12-13). 성령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하신 것과 같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죄에 대한 깨달음을 불러일으킨다(요 16:8-11).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던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삼천 명이 회심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성경에서 나온 베드로의 설교였지 방언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러한 효과적인 전파의 핵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지적한 바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수사학이나 지혜나 웅변술이 아니라, 권능 즉 성령의 증표였다(참고. 행 1:8). 고린도인들에 대한 설교에서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농력으로 한다"(고전 2:4)고 말했다. 데살로니가인에 대한 설교에도 같은 특징이 들어 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살전 1:5-6).
그런 설교의 특징으로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바울이 증거하는 초점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고전 1:23; 2:2),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 분명히 모아져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경의 기능(교훈, 책망, 바르게 함, 치유, 의로 교육함, 참고. 딤후 3:16-4:2)에 의거해서 하는 설교이다. 셋째, 설교자의 삶이라는 정황 속에 차지하고 있는 설교의 위치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곧 바울의 능력 있는 설교는 자신의 시련과 고통의 체험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하고, 두려워하며...많은 떨림으로' 고린도에 있었다(고전 2:3).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겪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에서는 더욱 열매가 넘치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살전 2:2).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약했으나 사역을 통해 섬기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이다(고후 13:5).
성령이 역사하는 설교의 증표는 '담대함'(parrhesia=pan+rhesis, 행 4:13, 29, 31; 빌 1:20; 참고. 고후 7:2)이다. 구약 성경에서 그러하듯이, 성령이 하나님의 종을 충만케 할 때, 그분은 그의 인격으로 '옷을 입으며' 성령의 권위가 용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가운데 나타난다. 이런 담대함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곧 자유로운 선포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러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뉴잉글랜드 초기의 설교자 토머스 후커(Thomas Hooker)의 설교는 눈에 보이는 실재로 나타난다. 그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그가 왕을 들어서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을 수도 있는 것처럼 느꼈다! 선포되는 메시지와 성령이 스스로 그 설교자로 옷 입는 방법 사이에 일종의 조화로움이 있다. 고든 피는 그 특징을 확실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강단에서...종종 세련된 웅변조의 설교를 듣는다. 그 설교는 설교 자체가 설교 내용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과연 본문 내용이 전달되고 있는지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바울의 요점을 새롭게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설교의 형식과 내용이 방해물이 되어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을 가로막도록 하는 데 항상 위험이 있는 것이다. 즉 복음은 연약한 인간을 통해서 선포되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동반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삶이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설교학 강의 시간에 가르치기는 어렵지만 이것이야말로 여전히 참된 설교에 꼭 필요한 것이다.17
말씀 선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교회에게 주신 성령의 핵심적인 선물이다. 이로 인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된다(엡 4:7-16). 상당히 먼 훗날에 돌이켜 보았을 때, 방언과 통역과 예언과 기적들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데 매료된 것과 성경 강해의 질과 그에 대한 확신이 붕괴된 것이 우연의 일치였다고 보는 것이 과연 현대 교회 생활의 수수께끼로 입증될 것인가?
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 '제 10장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에서 발췌(256-274p)
- Warfield를 비판하기 위해, Ruthven은 고전 4:1-8; 엡 4:7-13과 그 밖의 많은 관련 구절을 장황하게 들고 있다. Jon Ruthven, pp. 123-187. [본문으로]
- 고대 거울의 불완전한 품질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보라. C. Spicq, Theological Lexicon of the New Testament(Peabody, MA: Hendrickson, 1994), vol. 2, pp 73-76. [본문으로]
- Carson, p. 70. [본문으로]
- R. Gaffin, pp. 109-110. [본문으로]
- Instilutes, 프랑스 왕 Francis I세에게 바치는 헌사. [본문으로]
- E. Earle Ellis,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Church and Today', in Pana gopolous (ed.), p. 53. [본문으로]
- Max M.B. Turnner는 '권위 있는 새로운 계시의 위험한 가능성'의 견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관심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Spiritual Gifts Then and Now', Vax Evangelica, 1985, p. 55). 그러나 이것은 모든 신적 계시가 권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본문으로]
- Grudem,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p. 113. [본문으로]
- 로마 가톨릭 진영의 어떤 신학자들은 J.R. Geiselmann을 따라서, 트렌트 회의의 교부들이 가르쳤던 바, 전통은 성경의 내용을 알기 위한 교회의 조명된 이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 성경에다가 덧붙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 또한 트렌트 종교 회의의 공식적인 선언이 '오직 성경'의 원리와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고. J.R. Geiselmann, 'Scripture, Tradition, and the Church: An Ecumenical Problem', in D.J. Callahan, H.A. Oberman and D.J. O'Hanlong (eds.), Christianity Divided (London: Sheed & Ward, 1962), ㅇpp. 39-72. 그러나 신앙의 교리 위원회의 선임 추기경인 J. Ratzinger의 날카로운 답변을 보라. "가톨릭 신학자로서 (Geiselmann은) 그와 같은 가톨릭의 교리들을 견고하게 고수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것은 없다" [K. Rahner and J. Ratzinger, Revelation and Tradition, tr. W.J. O'Hara (New York: Herder & Herder, and London: Search Press, 1966), p. 33]. [본문으로]
-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I. vi. [본문으로]
- Grudem,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and Today, p. 113. [본문으로]
- John Owen, A Discourse of Spiritual Gifts, in The Works of John Owen, ed. W.H. Goold (Edinburgh: Johnstone & Hunter, 1850-1853), vol. 4, p. 475; 참고.p. 454. [본문으로]
- Gordon D.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Peabody, MA: Hendrickson, and Carlisle: Patermoster, 1994), p. 890. [본문으로]
- J.I. Packer,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Old Tappan, NJ: Revell, and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84), pp. 202-213, 특히 p. 211. [본문으로]
-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V. iii. [본문으로]
- Owen, p. 475 [본문으로]
- Fee, pp. 96-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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