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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상황화, 어떻게 할 것인가?
[출처] 설교의 상황화, 어떻게 할 것인가?|작성자 행복 도우미
이현모/침례신학대학교 교수
들어가는 말
죤 스타트는 교회 쇠퇴의 징후는 바로 설교의 쇠퇴라고 언급하였다. 서구교회들이 쇠퇴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설교의 쇠퇴라는 지적이다. 예수회의 신학자인 칼 라너(Karl Rahner)도 『설교의 갱신』이라는 글에서 현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를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강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들이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설교는 그들 자신의 생활과 아무런 관련도 없으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기만 하기 때문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지적들은 서구교회들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같다. 한국교회들도 점차 성장이 정체되어지는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들은 교회의 설교가 청중들에게 의미있는 관련된 멧세지와 방법으로 전달이 되어지고 있는 가를 신중하게 평가하여야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상황화라는 개념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상황화라는 용어는 선교학 분야와 제3세계 신학의 분야, 그리고 최근의 문화인류학등에서는 이미 익숙해진 개념이지만 '설교의 상황화'라는 용어는 어느 정도 낯설은 것이 사실이다. 청중 중심의 설교 혹은 설교가 독특한 대상의 필요와 문화에 맞아야 한다는 개념은 오래된 익숙한 개념이다. 실제로 설교는 듣는 청중의 상황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실패한 설교이므로 굳이 청중 중심의 설교라는 것은 그 당위성을 길게 논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금번에 '설교의 상황화' 혹은 '설교의 성육신'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잡게 되었을 때 이것이 단순히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의 문화에 맞추라는 고전적 의미인지 혹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야 할지를 먼저 논하지 않을 수없다. 본고는 그래서 먼저 상황화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시도해보고, 이어서 설교의 상황화라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할 수있는가를 연구해보며 마지막으로 실제 설교의 상황화를 어떻게 시도할 수있을 것인가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상황화의 이해
상황화(contextualization)라는 용어는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이후 제국주의적 식민통치시대가 종식되고 2/3세계 교회들이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서구신학에 대해 공개적인 의문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1) 즉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답습하던 서구의 기독교와 신학들이 실제로는 서구라는 독특한 상황(context)에서 형성되어진 것임을 지적하며 오늘날 다른 상황에서는 교회와 신학이 자신들의 상황에 맞추어서 새로운 형성 작업을 거쳐야 함을 주장하는 의미로 이 용어가 사용되어졌다. 1972년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대만 신학자인 쇼키 코(Shoki Coe)였는데 그는 세계교회협의회의 기관인 신학교육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의 책임자였다. 그러므로 처음 상황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에큐메니칼 신학운동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그룹에서도 곧 이어서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1974년 스위스 로쟌에서 열린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에서 아프리카의 비양 카토(Byang Kato)가 "복음과 문화적 상황화, 종교 혼합주의"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복음주의 측에서는 초기에 모든 사람들이 쉽게 상황화 개념을 동의, 수용하지는 못하였다. 사실 고전적인 신앙개념에서는 신앙의 범주에 문화라는 요소를 포함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신학 및 신앙의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이 간주되어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78년 버뮤다에서 열린 윌로우뱅크 회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대표적 학자들이 논의를 한 후 상황화가 성서적으로 합당한 개념임을 발표하였다. 오히려 이들은 성경 자체가 이미 상황화되어진 것임을 지적하였다.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여러 회의들을 거치면서 복음주의 그룹내에서도 점진적으로 상황화라는 개념을 수용하게 되었다. 한국에도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상황화라는 개념이 소개되어지기 시작하였지만 초기에는 경계의 대상처럼 인식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몇몇 학자들이 상황화 주제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1990년대에 상황화라는 주제의 논문들을 통해서 박사학위를 얻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면서부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상황화의 정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다양한 견해들이 있고 각각의 견해는 약간씩의 미묘한 차이와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실제 상황화라는 개념은 넓게 볼 때 문화인류학적인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신학에 차용하게 된 것이므로 이를 신학적 상황화(theological contextualization)이라고 구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필자는 신학적 상황화의 정의를 "주어진 사회문화적 상황내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기독교 복음의 개념을 표현하는 지속적인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 정의에는 단순한 사전적 정의이외에 몇가지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상황화의 기본 자료는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설교의 상황화에도 관련이 되어지는데 기존의 신학이나 기존의 어떤 개념이 아니라 상황화의 대상은 복음 자체라는 것이다. 둘째는 상황화는 지속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상황화는 완료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자체가 변화되어지는 것이므로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이곳에서 언급하는 상황은 단순한 좁은 의미의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곳의 상황은 '기독교가 소개되어지는 사회내에 존재하는 모든 양상'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문화 뿐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윤리, 관습등 모든 것이 상황에 해당되어진다. 또한 상황화의 관심이 되는 문화나 상황은 전통적인 문화가 아니라 현재의 문화임을 항상 강조한다. 이전 기독교의 토착화 작업은 주 관심사가 전통문화이지만 상황화의 관심사는 현 문화이다. 즉 지금의 한국 문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전의상, 탈춤, 궁중요리, 고전적 결혼제도, 전통적 가치 및 윤리관이 아니라 연령에 따라서 힙업바지와 물들인 머리, 피자, 독신생활의 선호, H.O.T., 전자오락, TV 중독증, 록음악등인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부인하고 상황화를 시도하려면 가렵지 않은 곳을 긁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
또한 상황화는 이전 토착화와 구분이 되어진다. 토착화는 내용은 거의 손을 대지 않고 형식적인 면만을 주로 대상으로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외적인 면, 혹은 적용의 면만을 대상 문화에 맞추는 방법을 주로 의미하였다. 상황화는 학자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단순한 외적 요소나 적용의 면 이상의 내용적인 부분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 상황화 작업은 복음주의 그룹에서는 아주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상황에 따라서 변화가능한 성경의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다른 말로 하면 성경에서 절대 변화될 수 없는 초문화적, 초시대적인 영역이 어디까지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조심스러운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교의 상황화
이러한 상황화 정의에 비추어서 설교의 상황화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사실 지금까지 이 용어를 사용한 적이 별로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정의는 이제 설교자들간에 형성하여 가야할 과제로 보인다. 신학적 상황화의 개념이 위에서 언급되어진 것처럼 자리를 잡아간다면 상황화의 개념을 설교에 차용하였을 때 설교의 상황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범주를 어떻게 잡아주어야 할 것인가가 중심 문제이다. 첫째로는 설교의 상황화는 단순한 설교의 적절한 적용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적용은 그 자체가 상황에 맞춘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지금까지 설교의 적용은 대부분 고전적인 설교의 틀을 벗어나서는 안되고 단지 끝에 가서 교훈을 청중에게 맞추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물론 이것이 무시되어서는 안되며 설교의 중요한 요소임을 인정한다. 적용은 설교의 상황화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여야 하지만 적용만을 의미할 경우 굳이 위에 정의된 상황화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설교의 상황화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오늘날 미주를 중심으로 단순한 설교의 적용이 아니라 설교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과감한 시험적인 시도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본다. 설교의 상황화는 설교라는 핵심적인 신앙 행위 자체에 대한 현 상황적 접근 자체까지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상황이라는 개념을 고려할 때 설교의 상황화는 지금까지 복음주의 그룹에서 별로 다루지 않았던 사회의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범주를 넓히는 작업도 의미하여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한다. 물론 성서적 설교의 목적까지 변화가 되어진다면 그것은 상황화가 아니라 실패한 상황화로 일칭 혼합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설교가 주로 전도 및 성화의 개념, 혹은 교리 해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현대의 청중들이 매일 피할 수없이 대하고 있는 많은 영역들이 설교의 범위에 빠져있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혼이나 직장의 갈등, 가정 폭력, 부부간의 갈등, 술, 담배의 문제 등이 당연히 설교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러한 면에 까지 설교의 영역을 넓히는 것도 설교의 상황화에 포함되어져야 할 것이다.
셋째로 설교학은 전통적으로 성서 해석학, 수사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등 세 분야를 핵심으로 다루고 있다. 이 세 분야에 대한 상황화 개념의 적용도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해석 혹은 석의의 과정에서 신학적 상황화의 개념은 잘 맞아들어가며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가 된다. 최근에는 이러한 해석의 분야에 신학적 상황화 개념을 도입한 제삼세계 상황신학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제삼세계 상황신학들이 에큐메니칼적인 신학기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며 아직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성공적인 상황신학의 연구는 초보수준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상황화 작업의 대상은 기존의 신학이 아니다. 신학은 이미 상황화 작업을 거쳐서 어떤 상황 가운데 제시된 결과를 지칭하는 것이다. 상황화의 대상은 복음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설교학의 해석 혹은 석의 과정에서 신학적 상황화 작업은 이제 분명한 자기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이에 반해서 수사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상황화의 대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자체가 현실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이 이론들은 발전하고 변화되어져 간다. 문제는 보수적인 설교자들이 항상 한시대 이상 뒤진 수사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답습하고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수사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세속적인 이론을 기독교가 차용하여 사용하는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 것으로 이론중 상당부분은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 문제는 그런 이론들이 담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세속적, 혹은 비윤리적이 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급변하는 수사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대해서 설교자들이 지나친 경계를 하는 것은 설교의 전달을 비효율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비현실적인 게임속에 사는 세대들에게, 그리고 빠른 템포와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텔레비젼 문화에 사는 세대들에게 구식의 수사 방법과 커뮤니케이션이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하기를 꺼려하며 이것이 마치 신앙을 고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상황화라는 범주내에서 현 상황에서 적용되는 변화된 수사학과 커뮤니케이션등에 대해서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는 설교학의 세 분야가 모두 상황화의 범주내에 속할 수있다고 결론을 지을 수있다.
결론적으로 설교의 상황화를 정의한다면 "설교학의 기본 분야와 설교라는 전달형식 그리고 설교 적용의 영역에서 주어진 현재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적절한 방법과 형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지속적인 작업"이라고 하겠다. 즉 이 정의는 설교의 상황화는 작은 범위로는 설교의 적용을 현재 상황에 맞추어서 제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서 조금더 넓게는 설교라는 교회의 신앙행위 자체를 현재 상황에 적절하게 맞추어 보는 것, 설교의 관심 영역을 주어진 사회문화적 상황이라는 상당히 폭넓은 개념으로 제시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설교학의 제 요소인 해석학, 수사학,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도 현재의 상황에 적절하게 상황화의 개념을 적용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의 이 개인적 정의는 아직 완성된 정의라기 보다는 이런 주제를 다루어가기 위한 제안적 발제라고 하겠다. 더 많은 설교자들이 이 정의에 가감하면서 적절한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서 실제 설교의 상황화가 어떻게 시도되어질 수있을까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설교의 상황화 이렇게 시도해본다.
설교의 상황화를 시도해 보기 위해서는 현재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분석이 먼저 있어야 하고 이 상황에 대한 대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몇가지 특징적인 현대 한국사회의 상황을 지적하며 상황화적 대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상 현실속의 청중 - 금세기 말에 들어가면서 급속하게 등장하는 것이 싸이버 공간 혹은 가상 현실이다. 기성세대의 상당수에게는 상관없는 용어이고 관심도 별로 없지만 교회의 다음세대들은 이미 이 상황에서 살고 있다. 가상현실의 가장 큰 두 매체는 TV와 컴퓨터이다. TV나 비디오의 영향이 얼마나 현대인들에게 지대한지는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불필요할 정도이다. '나홀로 집에'라는 영화의 꼬마 주인공은 망설이지 않고 "TV가 바로 내 인생이다"(TV is my life)라고 말한다. TV매체의 특징은 화려한 색깔, 아주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사건의 연속, 감각적, 감성적 자극의 효과, 알갱이가 없어도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자극적 내용 등이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에 알게 모르게 중독이 되어있다. 또한 TV와 같은 영상매체는 점차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나태하게 만들고 지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만든다. 깊은 사색을 하지 않게 하며 논리적이고 심각한 이야기에 쉽게 싫증을 내게 만든다. 심각한 폭력과 성적 행동에 대한 자극적 영상은 점차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둔감하게 만든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싸이버 공간은 점차 사람들에게 현실과 비현실, 시공의 개념을 허물어 버리고 있다.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는 이전 청중들에게는 심각한 미래의 사건으로 신앙적 결단을 하게 하는 동인(動因)이었지만 현대의 세대에게는 또 하나의 싸이버 공간에 불과하게 받아들여진다. 컴퓨터 통신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살펴보라. 정상적인 언어문법과 표현을 깨뜨릴 정도로 짧고 현실적인 표현만을 사용한다. 또한 이들은 심각한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면 쉽게 모니터 속의 가상세계로 도피해 버리는 습관이 생기게 된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신앙조차도 싸이버 공간에서 접촉하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청중은 이런 상황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청중에게 농담하나 없이 논리성과 진리성 만을 강조하며 혼자 긴 시간 이야기를 하는 설교의 방법이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젊은 세대로 갈수록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커뮤니케이션은 고전적 방법론을 거의 탈피해서 웅변가의 웅변에 가치를 두지 않고 수용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다. 전달자가 아무리 잘 해도 수용자에게 그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수용되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TV의 광고들을 자세히 보면 20초안에 엄청나게 많은 영상과 메시지를 퍼부어 주고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광고목적이 살아나도록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효과적인 전달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매주 똑같은 틀의 설교를 벗어나서 빠른 템포의 논리전개와 간결하고 짧은 문장의 사용이 기본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3 points message(설교 대지에 세 가지 요점을 표현하는 것)를 벗어나서 한가지 요점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시하는 것도 현대적 전달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설교의 구조적 변화의 한계를 넘어서서 상황화의 수준에서는 좀더 과감한 설교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미국의 몇 교회에서 시험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3D 예배 (drama, dance, dialogue) 같은 것의 한국화는 어떤가를 생각해 본다. 불신자들에게는 전통적인 강론식 설교보다는 드라마나 연극을 통한 메시지 전달이 휠씬 현세대의 청중에게는 적절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드라마나 연극은 교회 중고등부 수준의 유치하고 어색한 성탄절용 스킽이어서는 안 된다. 전문적인 연기자들이 현대의 불신 청중들 앞에 또 하나의 영상 혹은 가상현실을 만들어 주면서 이들에게 전도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화려한 색깔, 연기자들의 적절한 감정적, 감각적 표현, 현실을 그래도 가상현실에서 재현해 주는 기술, 일반 사회에서 사용되어지는 용어, 현실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것 등이 이러한 호소력을 살려주는 핵심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 같은 곳이나 몇몇 다른 교회에서 사용하는 기법을 그대로 베끼려는 것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우리의 청중은 미국 문화 속에 있는 미국인이 아니다. 단순히 연극의 내용을 한국화하라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나 드라마와 같은 가상현실을 이용하되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방법을 재창조하는 것이 설교의 상황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화식 설교의 가능성 - 정상적인 학습과정에 보면 학습은 크게 4가지 방법이 있다. 듣기, 토론, 관찰, 발견이다. 이중에서 설교는 전통적으로 청취(듣기)의 방법만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소극적인 학습방법이다. 현재 대학의 학습과정을 보면 추상적인 내용을 교육하는 방법중 최상의 것은 토론을 포함하는 대화이다. 교수가 강의를 해 나갈 때 학생들은 이를 듣고 즉각적으로 질문을 하고 응답을 듣는다. 자신이 들은 내용을 질의 응답을 통해서 만족스러운 자신의 것으로 취득하는 것이다. 상당수의 설교는 설교자에 의해서 청중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물론 죤 스타트가 『현대교회와 설교』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기술적인 설교는 설교자 혼자 이야기 하면서도 대화식 설교가 가능하다. 즉 한가지 이야기를 하고 청중의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을 설교자가 바로 예상하여 제시하고 이에 대답을 하고 다시 청중의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을 미리 파악해서 제시하고 대답하고 하는 형식이다. 능숙하게 이것이 행해질 때 상당히 효과적인 설교가 된다. 그러나 대상 청중이 워낙 다양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법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오히려 대학 강의실과 같은 대화식 혹은 토론식의 설교는 교회에서 불가능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해본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설교자의 독백이었다. 이는 설교가 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방적인 선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졌기 때문이다. 이전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시기에 설교는 청중들이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강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강연, 세미나, 학교 교육 등 강론 형식의 교육의 기회가 넘치는 시기가 되었고 오히려 대부분의 교육은 청취단계의 학습과정을 넘어서서 대화, 관찰, 참여 등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방적 청취 형식의 설교는 이 시대에 비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되어지고 있다. 설교는 반드시 설교자의 일방적 강론이라는 틀을 깰 수는 없는가? 적절한 예는 아닌 것 같지만 미국 흑인교회들의 예배는 어느 정도 이런 일방통행 식의 틀을 벗어나 있다. 백인들의 문화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들의 예배는 목사의 선포와 설명, 회중의 반응이 서로 챈팅형식으로 오가는 방법을 쓴다. 이 반응은 때로는 아멘 소리일수도 있고 나름대로의 짤막한 내용의 외침이기도 하고, 때로는 춤이나 몸을 움직이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자유롭고 나름대로는 자신의 반응이 반영된다고 느끼고 있는 듯하다.
물론 미국 흑인교회의 문화가 한국에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우리의 감성에 만족을 주는 한국적 대화식 설교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할 수있다. 예를 들면 예배중 설교가 끝나고 작은 그룹으로 설교의 내용을 중심으로 서로의 반응을 말하고 질문을 하기도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이렇게 해야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0명 이하의 작은 규모의 교회로서 청중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경우에 가능할 것이다. 큰 교회들도 자신들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커다란 목회성공을 보였던 후안 카르로스의 경우 그는 매주 새로운 설교를 하지 않았었다. 한 주제의 설교를 하고 교인들에게서 그 주제에 따른 삶의 변화가 나타날 때까지 그는 청중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서로 토론하고 씨름하고 잘 되어지지 않는 이유를 서로 성경을 보며 찾아보고 서로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을 찾고 하는 시간을 예배시간중 가지도록 하였다. 한국에서도 한 교회는 교회 예배당에 가운데는 장의자를 놓았지만 옆면에는 원탁을 놓고 의자를 둘러 놓는 형식으로 배치를 하였다. 이런 교회구조는 대화식 설교를 하기 좋은 환경이다. 또 모교회는 저녁설교시간에 새로운 설교를 하지 않고 교회에서 구역별로 모여 오전에 들은 설교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고 질문을 하고 스스로 적용을 찾아보는 것으로 설교를 대체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아직 낯설고 그래서 기대만한 효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지만 현재의 설교형식이 현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대한 상황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실패하면 다음 세대에는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영혼도 못 얻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나가는 말
이러한 주제를 다루면서 필자자신도 이미 기성세대요 전통적인 설교의 유형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한계를 실제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창조력은 이미 많은 경우 자신의 이전 상황에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 제시한 제안들은 초보적 시도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기성 교인들에게는 대단한 문화충격일 수 있지만 새로운 세대에게는 또 하나의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보일 수 있다. 상황화의 적용 원리 중에 하나는 관점의 변화와 이에 따른 상황화 작업의 주체세력의 변화라고 하겠다. 관점에는 항상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하나는 외부자적 관점(etic-perspective)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자적 관점(emic-perspective)이다. 문화 변화의 동인(動因)은 물론 외부자적 관점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어지곤 한다. 설교의 상황화도 우리와 다른 외국의 많은 경우들을 본 사람들이 전통적인 틀을 가진 설교에 도전을 함으로 시작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상황화의 관점은 내부자적 관점을 가진 사람이 그 작업의 주체 세력이 되어야 가치가 있다. 고정된 전통적 틀이 편리한 기성세대는 상황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며 또 이러한 작업에 반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틀에서 의미를 얻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상황화의 필요를 느끼게 되는데 이들이 여러 외부자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제안을 들으면서 자기 자신들의 상황화를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때 이러한 작업이 성경적인 원리를 벗어난다면 간섭하고 제재하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경계의 눈빛을 거두어 주어야 한다. 물론 성경적 원리의 한계가 어디까지냐 라는 것은 항상 상황화 작업의 핵심 논쟁거리이지만 실제 우리 신앙생활에서 초문화적, 초시대적인 변화 불가능한 원리는 신앙의 행습(行習)이라는 영역에서는 생각보다 많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때로는 교회 안에 두가지 다른 형태의 설교가 공존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상황화 작업은 항상 과(過)해지면 복음의 본질을 벗어나는 혼합주의가 되므로 경계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를 두려워해서 상황화를 거부한다면 자신들이 세대에는 이미 익숙해져서 문제가 되지않지만 다음 세대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결국 스스로의 보수적 고집으로 교회를 서서히 쇠퇴시키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적절한 상황화 작업은 담장위를 걷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일이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좀더 다양한 설교의 상황화 작업이 활발히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설교의 상황화, 어떻게 할 것인가?|작성자 행복 도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