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The dubious state of the foreign balance. 의심스런 외환보유 상태
This is a familiar story.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During the First World War, the United States became a creditor on international account.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국제 채권국이 됐다.
In the decade following, the surplous of exports over imports which once had paid the interest and principal on loans from Europe continued.
한때 유럽으로부터의 빌린 대출에 대한 원금과 이자를 지불했던 수입을 이제 넘어서는 수출의 초과가 10년 동안 계속됐다.
The high tariffs, which restricted imports and helped to create this surplus of exports remained.
미국은 높은 관세는 수입을 제한했고 수출의 과잉이 이어지게끔 유도했다.
However, history and traditional trading habits also accounted for the persistence of the favorable balance, so called.
그러나 역사와 전통적인 거래 관행도 역시 국제수지 흑자 유지의 요인이었다.
Before, payments on interest and principal had in effect been deducted from the trade balance.
예전에는 이자 및 원금에 대한 상환액이 사실상 무역수지에서 공제되었다.
Now that the United States was a creditor, they were added to this balance.
그러나 이제는 미국이 채권국이 되었으므로 상환금이 이 무역수지에 추가되었다.
The latter, it should be said, was not huge.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엄청나게 컸던 것은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In only one year(1928) did the excess of exports over imports come to as much as a billion dollars; in 1923 and 1926 it was only about $375,000,000.
오직 한 해(1928년)에만 10억 달러에 달했을 뿐 1923년과 1926년 무역수지 흑자는 약 3억 7,500만 달러에 불과했다.
However, large or small, this difference had to be covered.
그러나 이 차액은 많건 적건 간에 메꿔야 했다.
Other countries which were buying more than they sold, and had debt payments to make in addition, had somehow to find the means for making up the deficit in their transactions with the United States.
판 것보다 더 많이 산데다 빚을 갚아야 하는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든 미국과의 거래에서 무역수지 적자를 메울 수단을 찾아야 했다.
During most of the twenties the difference was covered by cash―i.e., gold payments to the United States―and by new private loans by the United States to other countries.
1920년대 통틀어 이 차액은 대개 현금, 즉 미국에 금을 지급하거나 미국이 다른 국가에 대해 새로운 민간 대출을 해 줌으로써 충당되었다.
Most of the loans were to governments―national, state, or municipal bodies―and a large proportion were to Germany and Central and South America.
대출의 대부분은 여러 나라의 중앙정부, 주,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 상당 부분이 독일과 중남미에 집중되었다.
The underwriters' margins in handling these loans were generous; the public took them up with enthusiasm; competition for the business was keen.
이러한 대출을 취급하는 보험업자의 이익은 컸다. 대중들은 이에 열광하며 가담했다. 사업 경쟁은 격심했다.
If unfortunately corruption and bribery were required as competitive instruments, these were used.
유감스럽게도 부패와 뇌물이 경쟁 수단으로 필요할 경우 이를 사용하기도 했다.
In late 1927 Juan Leguia, the son of the President of Peru, was paid $450,000 by J. and w. Seligman and Company and the National City Company (the security affiliate of the National City Bank) for his services in connection with a $50,000,000 loan which these houses marketed for Peru.
1927년 말 페루 대통령의 아들인 주앙 레기아는 제이 앤드 더블유 셀리그먼 회사와 내셔널시티 회사(내셔널시티뱅크의 증권 자회사)가 페루에 판매한 5,000만 달러의 대출과 관련해 그가 제공한 서비스 대가로 이 회사들로부터 45만 달러를 받았다.
Juan's services, according to later testimony, were of a rather negative sort.
나중의 증언에 따르면 주앙의 서비스는 오히려 소극적인 것이었다.
He was paid for not blocking the deal.
그는 거래를 방해하지 않은 대가로 돈을 받았다.
The Chase extended President Machado of Cuba, a dictator with a marked predisposition toward murder, a generous personal line of credit which at one time reached $200,000.
체이스 은행은 살인 성향이 뚜렷한 독재자인 쿠바의 마차도 대통령에게도 한때 20만 달러에 달했던 후한 개인 신용 대출을 연장해 주었다.
* Gerardo Machado헤라르도 마차도(위키피디아) 참조
: Machado has also been credited for unleashing a wave of violence against his critics.(마차도는 또한 그의 비평가들에 대한 폭력의 물결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There were numerous murders and assassinations committed by the police and army under Machado's administration.(마차도의 행정부 하에서 경찰과 군대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살인과 암살이 있었습니다.)
Machado's son-in-law was employed by the Chase.
체이스 은행은 마차도의 양자를 채용하기도 했다.
The bank did a large business in Cuban bonds.
그 은행은 쿠바의 채권으로 크게 남는 장사를 했다.
In contemplating these loans, these was a tendency to pass quickly over anything that might appear to the disadvantage of the creditor.
이런 대출을 고려할 때 채권자에게 불리할 것 같은 부분은 못 본 체 넘겨버리곤 했다.
Mr. Victor Schoepperle, a vice-president of the National City Company with the responsibility for Latin American loans, made the following appraisal of Peru as a credit prospect:
라틴 아메리카(남미) 대출을 담당하는 내셔널시티 컴퍼니의 빅터 쉐펄레 부사장은 페루에 대한 신용 전망으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Peru : Bad debt record, adverse moral and political risk, bad internal debt situation, trade situation about as satisfactory as that of Chile in the past three years. Natural resources more varied. On economic showing Peru should go ahead rapidly in the next 10 years.
페루 : 채무기록 불량, 불리한 도덕적 및 정치적 위험, 국내 채무상황 열악, 과거 3년간 칠레의 경우처럼 무역상황은 만족스러움. 천연 자원은 비교적 다양. 경제적으로 보기에 페루는 앞으로 10년 내에 빠르게 발전해야 함.
On such showing the National City Company floated a $15,000,000 loan for Peru, followed a few months later by a $50,000,000 loan, and some ten months thereafter by a $25,000,000 issue.
이러한 평가에 입각해 내셔널시티 컴퍼니는 페루를 위해 처음에 1,500만 달러, 그 후 몇 달 동안 5,000만 달러의 대출을 해 주었다. 그 후 약 10개월 동안에는 2,500만 달러의 대출을 더 발행했다.
(Peru did prove a highly adverse political risk. President Leguia, who negotiated the loans, was thrown violently out of office, and the loans were into default.)
(페루는 극히 불안정한 정세를 보이고 있었다. 외채 교섭을 벌였던 페루의 레귀아 대통령은 폭력적으로 지위에서 해임되었고 대출금은 지급불능 상태가 되었다.)
In all respects these operations were as much a part of the New Era as Shenandoah and Blue Ridge.
모든 측면에서 이러한 공채발행 작업은 쉐넌도어 및 블루 리지만큼 새로운 시대의 한 부분이었다.
* 셰넌도어 국립공원(위키피디아) 참조
They were also just as fragile, and once the illusions of the New Era were dissipated they came as abruptly to an end.
부패, 뇌물과 함께 대출 발행으로 수익을 남기는 이 작업들은 역시 취약했고, 새로운 시대의 환상이 사라지자 한순간에 끝나고 말았다.
This, in turn, forced a fundamental revision in the foreign economic position of the United States.
이 때문에 미국은 대외 경제적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Countries could not cover their adverse trade balance with the United States with increased payments of gold, at least not for long.
적어도 얼마동안은 다른 나라들은 미국에 대한 금 지급을 늘린다 해도 무역수지 적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This meant that they had either to increase their exports to the United States or reduce their imports or default on their past loans.
이는 다른 나라들이 미국으로 수출을 늘리거나, 미국에서의 수입을 줄이거나, 아니면 과거 대출에 대한 채무불이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President Hoover and the Congress moved promptly to eliminate the first possibility―that the accounts would be balanced by larger imports―by sharply increasing the tariff.
후버 대통령과 의회는 관세를 급격히 올려 다른 나라들이 대미 수출 증대로 무역수지 균형을 달성할 수 있는 첫번째 가능성을 아예 봉쇄하는 조치를 즉각 취했다.
Accordingly, debts, including war debts, went into default and there was a precipitate fall in American exports.
이에 따라 전쟁 채무를 비롯한 각종 부채가 지급불능 상태에 빠졌고 미국의 수출이 급격히 감소했다.
The reduction was not vast in relation to total output of the American economy, but it contributed to the general distress and was especially hard on farmers.
그 감소폭은 미국 경제의 총생산량과 관련하여 크지는 않았지만, 사회 전반의 궁핍을 초래했다. 특히 농민들이 가혹한 시련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