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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해석
동적 세계관
인간의 인식체계는 믿을만한 것인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인식이 자연을 복제하는 과정에 구조적인 왜곡이 일어난다. 바르게 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움직이는 동물을 촬영하려면 카메라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자연은 부단히 움직이는 데 인간의 인식은 삼각대에 고정된 카메라와 같아서 자연의 내밀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 인간의 인식하고 사유하는 체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와 같다. 쇠사슬에 묶여 동굴에 갇힌 신세로는 진실의 그림자만 보게 된다. 인간은 자연에서 전달되어 오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연으로 쳐들어가서 내막을 알아봐야 한다.
격발자 - 전달자
사건 - 사물
변화 – 불변
에너지 - 물질
유체 - 강체
디지털 - 아날로그
필연 - 우연
절대성 - 상대성
내부 상수 - 외부 변수
연역 - 귀납
동動 - 정靜
상호작용 - 원자
동動과 정靜이 있다. 모드가 다르다. 자기 눈을 동적 모드로 설정하면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정지화상만 보다가 처음 동영상을 보고 전율하는 것과 같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사건의 눈을 떠야 한다. 사실이지 인간은 존재의 절반만 보고 있다. 변화를 보고, 에너지를 보고, 유체를 보고, 디지털로 보고, 필연으로 보고, 절대성으로 보고, 내부 상수로 보고, 연역으로 보고, 상호작용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보는 게 먼저다. 보려고 해야 보인다. 보일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
격발자 관점
세상은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시작이 있다. 격발자가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의 출발점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태초에 무엇이 있었던가?
태초에 탄생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다. 태초에 사건의 격발이 있었다. 태초에 물질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틀렸다. 물질은 탄생의 결과다. 원인이 결과에 앞선다. 물질은 사건이 한참 진행한 다음에 나오는 전달자 이야기다.
먼저 도구가 주어져 있고 다음 인간이 도구에 기능을 부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다. 자연은 기능이 먼저다. 같은 기능이 반복되면 인간이 도구를 개발하여 편리를 추구한다. 도구는 기능을 복제한다. 그런데 그것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인간에게는 도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구는 유형이고 기능은 무형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물질은 없었고 성질이 있었다. 수요가 공급에 앞선다. 기능이 도구에 앞선다. 필요가 발명에 앞선다. 성질이 물질에 앞선다. 발견이 발명에 앞선다. 언제나 무형의 사건이 유형의 사물에 앞선다. 유형은 무형의 변화가 제자리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하드웨어를 확보한 다음 소프트웨어를 삽입하는 것은 인간의 작업이다. 하드웨어 하나로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를 돌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이다. 먼저 머리 속에 무형의 아이디어가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지고 다음 거기에 물질을 입혀 유형의 하드웨어를 구현한다. 무형이 먼저다. 변화가 먼저다.
유형은 무형의 반복이다. 하나의 하드웨어를 여러 소프트웨어가 번갈아 사용한다. 하나의 자동차로 여러 가지 화물을 반복하여 운반한다. 움직임은 무형이고 제자리걸음은 유형이다.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복제된 것이며 복제는 자궁이 있다. 자궁 속의 탄생은 무형이다. 인간이 보는 형태는 상호작용의 자궁 속에서 만들어진다. 상호작용의 밸런스에 의해 이차적으로 부여된 것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형태다.
배구 코트 안에서 랠리가 반복되는 것은 유형이다. 탄생과 동시에 사라지는 일회성의 변화는 형태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무형이 있을 뿐이다.
근원에는 탄생이 있다. 격발자가 있다. 그것은 원자처럼 제 위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는 것이다. 연결하거나 끊고 만나거나 헤어지며 의사결정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변화이며 사건이다. 변화가 밸런스에 의해 교착되면 우리가 아는 물질이다.
변화 중심적 사고,
기능 중심적 사고,
성질 중심적 사고,
무형 중심적 사고,
상호작용 중심적 사고를 익혀야 한다.
태초에 변화가 있었다. 변화는 성질이다. 성질은 기능이다. 기능은 무형이다. 유형은 그다음에 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물질은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계에 잡혀 패턴을 반복하며 형태를 획득한 것이다.
근원의 모습은 상호작용의 자궁에 갇혀 있으므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아기 곰을 봤다면 보이지 않아도 주변에 엄마 곰이 당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산다.
노자의 이유극강과 같다. 유가 강에 앞선다.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에 앞선다. 성질이 물질에 앞서고, 기능이 도구에 앞서고, 변화가 안정에 앞선다. 격발이 전달에 앞서고, 탄생이 존재에 앞서고, 무형이 유형에 앞서고 상호작용이 형태에 앞선다.
성질과 물질
태초에 성질이 있었다. 성질은 변화를 반영한다.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멈춘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멈춘 세계다. 머무름은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계 내부에 숨은 것이다. 멈춘 듯이 보일 뿐 실제로는 멈추지 않았다.
생명은 몸속에 숨어 있다. 엔진은 자동차 내부에 숨어 있다. 에너지는 물질 속에 숨어 있다. 아기는 자궁 속에 숨어 있다.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 내부에 감추어져 있다. 내부에 감추어진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사건의 눈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변화는 겉모습이 바뀔 뿐 생겨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짝짓기 형태의 변화다. 누구와 짝을 짓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존재의 바탕은 변하지 않는다. 존재의 변화하는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성질 - 무형의 상호작용, 내부에서 움직이는 본래의 모습
물질 - 유형의 존재, 짝을 지으며 성질의 일부가 제한된 모습
우리는 물질 중심의 사유에 익숙해 있다. 물질은 존재 자체의 모습이 아니다. 존재는 짝짓기다. 물질은 엉뚱하게 관측자인 인간과 짝지은 것이다. 이는 순수하지 않으며 관측의 상대성에 의해 오염된 정보이므로 노이즈 캔슬링이 필요하다.
태초에 공간과 시간이 없었으므로 물질도 없었다. 물질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여 공간의 자기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태초에 공간이 없으므로 지켜야 하는 자기 위치가 없다. 물질과 공간과 시간은 성질의 짝짓기가 만드는 이차적 연출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동굴 벽면에 비추어진 그림자다.
일차적 격발 - 사건, 변화, 성질, 기능, 상호작용
이차적 전달 - 사물, 안정, 물질, 도구, 형태
태초에 아기는 없고 자궁이 있었다. 아기의 탄생은 그다음의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아기로부터 출발한다. 자궁 속의 태아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궤뚫어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사건의 눈을 얻어야 한다.
우주의 근원은 변화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동적균형이다. 태초의 변화가 일정한 균형에 도달한 것이 우리에게는 물질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내부에 움직임을 담고 있다. 균형이 깨지고 내부의 움직임에 의해 새로운 균형으로 갈아타는 것이 사건이다. 궁극적으로는 우주에 사건이 있을 뿐이다. 탄생이 있을 뿐이다. 성질이 있을 뿐이다.
사건과 사물
세상에는 변화와 안정이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감추어진 변화와 겉으로 드러난 변화가 있을 뿐이다. 감추어진 변화가 사건이라면 드러난 변화는 사물이다. 역사 이래 인류는 외부에서 관측되는 사물의 변화를 추적해 왔을 뿐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변화를 추적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존재의 그림자만 보고 살아온 것이다.
사건 - 닫힌계 내부에 갇혀 일정한 규칙을 따르므로 알 수 있다.
사물 - 외부에서 작용하는 변수가 다양하므로 사건화해야 한다.
사물의 변화를 알아내려면 세 가지를 추적해야 한다. 첫째 객체의 고유한 성질, 둘째 객체에 가해지는 외부 힘의 작용, 셋째 변화가 진행되는 중에 일어나는 외부의 교란 요인이다. 많은 오류는 이 세 가지 정보를 조립하여 재구성하는 과정에 일어난다.
이들 각각은 모두 사건이다. 궁극적으로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사건이며 사물은 인간의 관측 편의에 따른 왜곡이다. 사물의 변화는 여러 사건의 엉성한 짜깁기다. 우리는 변수들을 모두 분리하여 낱낱이 사건화한 다음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당구공이 어디로 굴러갈지 예측하려면 세 가지를 조사해야 한다. 첫째 당구공 자체의 고유한 성질, 둘째 당구를 치는 사람의 실력과 의도, 셋째 당구대와 주변 환경의 간섭이다. 이 셋은 각각 일어나는 별도의 사건이다.
먼저 당구공의 고유한 성질부터 알아보자. 당구공의 질량은 중력과 연결되며 중력은 지구와의 상호작용이다. 그것은 독립적인 사건이다. 당구공을 치는 사람의 행동도 게임에 이기려고 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렇듯 잘게 쪼개면 모두 사건으로 돌아간다.
심판이 판정을 내리려면 시합을 중단시켜야 한다. 사건은 움직인다.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관측할 수 없다. 사물은 인간이 관측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사건을 멈춰 세운 것이며 그 과정에 정보가 오염되는 것이 관측의 상대성이다.
함정이 있다. 세 가지 원인 중에 첫 번째 고유한 성질이라는 표현은 애매하다. 이는 얼버무리는 말이다. 당구공이 나무로 만든 공인지 상아로 만든 공인지 플라스틱으로 만든 공인지에 따라 다르다. 조사하면 된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보인다. 첫 번째 당구공 내부의 사정은 조사하지 않고 그냥 봐서 알 수 없지만 두 번째 당구를 치는 사람은 보인다. 세 번째 당구대가 훼손된 것도 보인다. 인간은 잘 안 보이는 것에 책임 떠넘기기를 좋아한다.
1. 객체의 고유한 성질.. 내막을 알아봐야 한다.
2. 외부에서의 힘의 작용.. 그냥 봐도 알 수 있다.
3. 주변 환경의 변수.. 그냥 봐도 알 수 있다.
마술사는 컵으로 덮어놓거나 천으로 가려놓는다. 안 보이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뭐든 곤란한 일은 북한 소행이라고 떠넘기면 된다. 북한의 내부 사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속임수다. 사물로 보면 알 수 없지만 사건으로 보면 알 수 있다. 사건은 애초에 내부의 변화를 추적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영화도 있다. 사건은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
인간의 실패
사람이 혼자 있으면 괜찮은데 둘만 모이면 나쁜 짓을 한다. 둘이면 집단이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역할을 나눈다. 이때 나쁜 역할을 시키게 된다. 좋은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일을 시키고 돈을 주지 않으면 그게 나쁜 일이다. 돈을 주지 않으려면 대신 쾌감을 줘야 하는데 이미 나빠져 있다.
인간의 나쁜 행동은 대부분 주변의 암묵적인 부추김 때문에 일어난다. 여기에는 집단의 역할 나누기라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목적이 불분명한 집단이 서열을 정하고 역할을 나누어 결속을 다지려고 할 때 나빠진다. 누가 나서서 주도권을 잡고 의사결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할 때 나빠진다. 복종하게 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돈이 없기 때문이다.
또래집단이나 양아치 패거리와 같은 목적이 애매한 집단이 결속을 다지려고 할 때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나쁜 짓을 하기 마련이다. 이지메 행위다. 학벌과 연고와 인맥으로 모인 기득권 집단도 나쁜 짓을 한다. 집단의 대장도 없고 내규도 없고 책임질 사람도 없고 비용을 조달할 방법도 없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나쁜 짓을 한다. 인간은 집단과 결속되어 있다고 믿을 때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호르몬의 작용이다.
인간은 나의 행동이 집단을 결속하는가, 약화하는가만 판단하고 집단이 결속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백인이 흑인에게 어떤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흑인을 해치겠다는 의도보다 백인을 결속하겠다는 의도가 크다. 자기편의 결속은 선한 행동이므로 반성하지 않는다. 피해자 쪽은 내가 소속되지 않는 남의 일이므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배우지 못한 사람의 본능적인 동물행동이다.
집단의 허술한 구조가 나빠지는 원인이다. 자신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고 동물의 본능을 따르는 것이다. 단독범이라 해도 집단과의 허술한 관계가 원인이다. 대개 집단의 이목을 끌려고 관종 짓을 하다가 나빠진다. 이것이 사건 중심으로 보는 것이다. 집단 속에 나쁜 짓을 복제하는 자궁이 만들어져 있다. 한 번 나쁜 흐름이 만들어지면 계속 나빠진다.
사건 중심의 사고 - 애매한 집단이 결속을 다지려고 할 때 비용 문제 때문에 나빠진다. 의사결정이 가능한 집단을 건설해야 한다.
사물 중심의 사고 - 나쁜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고 나쁜 짓을 한다. 나쁜 놈을 제거하면 된다.
우리는 인간의 의도, 마음, 음모, 야망, 타락 때문에 나빠진다고 믿지만 거짓이다. 파헤쳐보면 대부분 현찰 문제가 걸려 있다. 물리적인 힘이 걸려 있다. 구조 문제가 있다. 호르몬이 작용하고 있다. 심리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하면 거짓이다.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선한 결정을 끌어내게 하는 의사결정 구조가 없다. 동질성이 없고, 회의체가 없고, 보스가 없고, 내규가 없고, 비용이 없다.
인간은 사물 중심으로 본다. 그 경우 왜곡된다. 인간은 먼저 어떤 것이 있고 다음 어떤 것이 외력이 작용에 의해 움직인다고 본다. 뭔가 잘못되면 어떤 것의 고유한 속성에 책임을 떠넘긴다. 그것은 원래 그렇다는 식이다. 그놈이 원래 나쁜 놈이라는 말이다. 틀렸다. 나쁜 사람은 나쁜 상호작용구조 속에 빠져 있다. 주변에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 패거리의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개인의 의도, 목적, 음모, 타락, 야망 탓을 하면 보나마나 거짓말이다. 개인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집단의 구조, 시스템, 흐름, 유행, 기세, 세력 탓을 하면 진실에 가깝다.
당구공이 굴러가는 이유는 누가 그 공을 쳤기 때문이다. 반드시 배후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있다. 개인의 에너지는 집단에서 나온다. 집단과 상호작용하면 나쁜 일이 더 서로 간에 합을 맞추기 쉽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좋은 일은 돈이 든다. 돈 없이 뭔가 일을 꾸미면 보나마나 그 일은 나쁜 일이다.
무의식의 힘
사건으로 볼 것인가, 사물로 볼 것인가다. 사건은 크고 사물은 작다. 언제나 큰 것이 작은 것의 원인이다. 에너지는 집단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집단은 개인보다 크다. 에너지는 큰 데서 작은 데로 흐른다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다.
원인을 사물로 좁혀서 보는 관점이 인간의 오판을 낳는다. 사건은 크고 사물은 작다. 사물은 작고 작은 것은 만만하다. 작고 만만한 것을 때려주는 방법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는 비겁한 자세가 실패의 원인이다. 큰 것에 도전해야 한다.
사건은 집단 속에서 일어난다. 집단이 에너지 공급자다. 사건으로 보면 문명과 역사와 진보와 자연과 인류의 기세와 흐름이 에너지를 공급한다. 이는 진실이다. 사물로 보면 그냥 어떤 개인이 죽일 놈이다. 한 놈만 죽이면 된다. 이는 거짓이다. 나쁜 개인을 제거하면 또 다른 악당이 그 빈 자리를 메우는 악순환의 패턴이 반복된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마 군인황제 시대의 반복되는 혼란, 고려 무신정치 시절의 반복되는 혼란, 베트남 멸망 직전의 반복되는 쿠데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반복되는 혼란은 모두 구조적인 문제로 일어난 것이다. 집단이 일제히 움직이는 데 따른 비용을 들이지 않고 개인의 돌려막기 수법으로 일을 꾸미면 뒤에 청구서를 받게 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빠진다.
나라가 잘되려면 집단 전체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집단이 다 같이 변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집단의 의사결정 비용을 아끼려고 하는 비겁한 마음이 집단을 악순환의 수렁에 빠뜨린다.
에너지의 공급 없이 일어나는 변화는 없다. 에너지는 언제나 집단에서 개인에게로 공급된다. 대개 집단의 의사결정 하는 구조가 잘못된 게 원인이다. 비용을 아끼려고 보험에 들지 않았다가 리스크 관리의 실패로 나빠진다.
히틀러 한 사람의 야욕 때문에 2차대전이 일어난 것인가? 당시 독일에는 백만 명의 히틀러가 있었다. 히틀러를 복제하는 인종주의라는 자궁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 맬서스 트랩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거짓말은 사건의 원인을 좁게 잡는다. 이게 다 성소수자 때문이다, 이게 다 조선족 때문이다, 이게 다 유대인 때문이다 하는 식이다. 만만한 한 놈에게 독박을 씌워서 집단의 의사결정에 드는 비용을 줄이고 쉽게 가겠다는 비겁한 자세다.
사건에는 내막이 있다. 나쁜 구조에 갇힌 것이 나빠지는 원인이다. 인간이 도박하는 이유는 돈을 따려는 개인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집단을 의식하며 호르몬이 변하기 때문이다. 집단의 이목을 끄는 데는 노력에 의한 성과보다 뜻밖의 횡재가 낫다. 인간의 도박심리는 집단을 흔들어 보려는 마음이다. 원시인이 돌아다니다가 좋은 사냥감을 발견하면 졸지에 영웅이 된다. 노력해서 성공하면 개인이 보상받지만, 노력없이 성공하면 집단이 보상받는다. 집단의 칭찬에 중독된다. 인간은 그렇게 진화한 동물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원인은 항상 큰 것에 있다. 원인은 집단에 있고, 물리적으로 있고, 호르몬으로 있고, 무의식으로 있다. 에너지와 기세와 흐름으로 있다. 사건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원리의 이해
고치에서 나오는 나방은 내부요인에 의해 변태한다. 우리는 거기서 어떤 종의 나방이 나올지 미리 알 수 있다. 허물을 벗는 매미도 마찬가지다. 변화는 미리 결정되어 있다. 누에는 반드시 나방이 되고 굼벵이는 반드시 매미가 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고치와 허물이라는 닫힌계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변화는 닫힌계에 의해 보호된다.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끊어지고 끊어지면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물로 보는 태도다. 사물은 내막을 건드리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생선生鮮은 싱싱하게 살아있다는 뜻이다. 죽은 생선도 생선인가? 사물은 이름이 붙고 이름이 붙는 순간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린다. 내막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깨진 유리컵은 컵인가, 유리 조각인가? 먹다 남은 빵은 음식인가, 쓰레기인가? 사물은 인간이 자의로 규정하는 것이다.
추적할 수 있는 변화와 추적할 수 없는 변화가 있다. 보호되는 변화는 추적할 수 있고 보호되지 않는 변화는 추적할 수 없다. 사건은 추적할 수 있고 사물은 추적할 수 없다. 단 사물은 사건으로 바꿀 수 있다. 사건과 사물의 차이는 엄격하게 보는 것과 대충 보는 것의 차이다. 궁극적으로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변화는 추적이 가능하다. 노이즈를 캔슬링하는 절차가 복잡할 뿐이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한다. 사물은 눈에 보이므로 추적할 수 있고 사건을 고치 속에 숨어 있으므로 추적할 수 없다고 여긴다. 틀렸다.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일어난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그곳에 있다. 그러므로 추적할 수 있다. 외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추적할 수 없다. 우리는 감옥에 있는 사람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눈에 잘 띄므로 추적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소한 일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과학을 그런 식으로 대충 할 수는 없다.
추적할 수 없다는 믿음은 원리에 대한 인식의 부재 때문이다. 변화의 원리를 알면 추적할 수 있다. 사건의 내막을 알면 추적할 수 있다. 21세기에 사이비와 종교와 환빠와 각종 음모론과 괴력난신이 판치는 이유는 어차피 추적할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그들은 거짓말이 더 비용이 싸게 먹힌다고 여긴다. 그런데 추적할 수 있다. 사건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진실이 더 비용이 싸게 먹힌다.
중국은 진시황 때문에 망했다. 왕실을 유지하는 데는 비용이 든다. 왕의 숫자를 줄일수록 비용이 절감된다. 그들은 보험에 들지 않았다. 나라를 잘게 쪼개놔야 변경에서 1차 저지선이 만들어지는데 천하가 통일되자 오랑캐는 변방에서 노략질하지 않고 황궁으로 곧장 쳐들어왔다. 황제 하나만 잡으면 돼! 오랑캐의 침략 비용도 절감되었다. 그들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은 것이다. 뒤늦게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사건의 추적
당구공은 추적할 수 있다. 당구공은 어차피 당구대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칸을 치면 된다. 닫힌계의 지정이다. 외부를 닫아걸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은 다음 점차 범위를 좁혀가는 방법을 써야 한다. 그냥 정답을 찍으면 실패한다. 오답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사건은 경로가 있는데 정답을 찍으면 단계를 건너뛰므로 경로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사건을 추적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큰수의 법칙, 둘째 작은수의 법칙, 셋째 장벽의 법칙이다. 계에 속하는 자원의 숫자를 극단적으로 늘리거나 혹은 줄이거나 단계별로 장벽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사물을 사건화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닫힌계를 만들어 에너지의 속성인 유체의 성질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내부를 꽉 채워야 한다. 애매하면 좋지 않다.
1. 큰수의 법칙 - 계를 닫아걸고 내부를 채우면 유체가 된다.
2. 작은수의 법칙 - 하나로 줄이면 하부구조의 부속품이 개입하는데 부속품은 꽉 차 있으므로 유체다.
3. 장벽의 법칙 - 사건을 여러 단계로 잘게 나누면 큰 수나 작은 수가 된다.
만원버스가 되면 승객이 고분고분해진다. 숫자에 치이기 때문이다. 승객이 한 명뿐이라도 말을 잘 듣는다. 제압되기 때문이다. 어중간하면 말을 안 듣는다. 인간의 무리 짓는 본능 때문이다. 이 경우 자기네들끼리 집단을 이루고 서열을 정하고 역할을 나누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상대를 자극해서 반응을 떠봐야 한다. 인간이 죽어보자고 말을 안 듣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인간은 집단과의 관계설정 문제로 망한다. 가족이든 친구든 남사친이든 명확해야 한다. 더치페이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정해야 한다. 눈치를 보며 상대를 테스트하다가 망한다. 사람들은 넘겨짚기와 떠보기와 우격다짐이 먹힌다고 믿는다. 성범죄자는 수법이 먹힐 것으로 믿고 사람을 테스트하다가 망한다. 도박꾼은 필승법을 테스트하다가 망한다. 호르몬에 중독되어 망한다.
카이사르가 원로원 의원의 정원을 늘리거나 중국이 전인대 대표를 3천 명으로 늘려서 정상적인 회의 진행이 불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대중을 무력화해 통제하는 것은 큰수의 법칙이다. 쪽수가 많아지면 자체의 관성력이 작용하여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사람을 조종하기가 쉽다. 바람잡이 몇 명만 투입하면 된다.
숫자를 줄여도 같다. 주사위 눈이 한 개면 언제나 같은 숫자가 나온다. 남은 자원이 하나가 되면 단위가 내려가서 그 하나를 구성하는 여러 부속품이 각각 작동하여 오히려 다수가 된다. 작은 정당일수록 내부 파벌이 복잡한 것이 그러하다. 군대의 계급처럼 중간을 잘게 쪼개서 다수의 장벽을 만들어도 같은 효과를 얻는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화하는 방법으로 오히려 복잡성을 끌어낸다. 뽕짝처럼 단순한 노래에 복잡한 기교가 들어가는 것이 그러하다. 뭐든 발전하면 단순해지고 단순성에는 낮은 단계의 복잡성이 개입한다. 단순한 스마트폰에 온갖 기능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 디자인은 단순할수록 고려해야 하는 환경적 변수가 많다. 복잡한 그림은 화가의 기술만 보면 되지만 단순한 그림은 주변과 어울리는지 봐야 한다. 개념미술이 특히 그러하다. 이 그림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중간에 장벽을 만드는 방법은 조폭이나 군대가 쓰는 방법이다. 조폭은 나이별로 장벽을 만든다. 한 살이라도 나이 차가 있으면 깍듯이 절을 해야 한다. 군대는 계급별로 장벽을 무력화한다. 서로 담합하여 힘을 합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유체의 성질
사물의 사건화는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바꾸는 것이다. 우연이 필연으로,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외부 변수가 내부 상수로, 귀납이 연역으로, 강체가 유체로 바뀐다. 유체는 큰수의 법칙에 지배된다. 물, 열, 압력, 플라즈마와 같은 유체는 언제나 내부에서 주사위를 백만 번씩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큰 수의 법칙 - 닫힌계 안에서 숫자가 많으면 유체의 성질이 나타난다.
작은 수의 법칙 - 숫자를 줄이면 단단한 하나가 남으며 이 경우 내부 에너지 파동은 유체다.
유체는 힘을 몰아준다. 그것은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에너지의 성질이다. 유압장치가 대표적이다. 쇠를 자르는 워터제트는 수압을 한 지점에 몰아준다. 강체도 하나가 되면 유체와 같다. 톱은 전체의 힘이 작은 톱날 하나에 집중된다. 톱이 톱니 하나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주사위를 여러 번 던지는 것과 같다. '빠루'라고 부르는 쇠지레도 같다. 강체지만 내부 에너지 파동은 유체다. 힘점에서 받침점까지의 긴 파동을 받침점에서 작용점까지의 짧은 파동으로 바꾼다. 도르래도 바퀴의 반복적인 움직임이 유체의 성질과 같다. 내부적으로 많은 주사위를 던지고 있다.
아날로그의 디지털화는 겉씨식물이 속씨식물로 진화하는 것과 같다. 겉씨식물인 소나무는 많은 송홧가루를 바람에 날려서 저수지 수면을 노랗게 물들인다. 에너지 낭비가 심하다. 물고기는 암컷이 수초에 알을 낳으면 수컷이 주변에 정액을 뿌린다. 일부 어류는 터무니 없이 많은 정액을 뿌려서 산란기에 바다를 하얗게 만든다. 해초에 알을 붙이는 도루묵이 유명하다. 물고기 수컷의 정소는 의외로 크다. 대구탕에 들어가는 이리가 그러하다. 역시 자원의 낭비가 심하다.
아날로그의 비효율은 디지털의 효율과 대비가 된다. 사물은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지점이 열려 있으므로 비효율이고 사건은 닫힌계에 가둬져 있으므로 효율적이다. 큰 수나 작은 수는 자원들이 계에 가둬지므로 효율적이다.
에너지는 유체와 같다. 에너지라는 말 자체에 그런 뜻이 있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은 죄다 에너지라고 하지만 계에 유체의 성질을 부여한 것이 에너지다. 당구공을 친다면 그 공 안에서 에너지는 무수히 많은 파동을 만들어내고 그 파동은 다수결로 진행 방향을 결정한다. 에너지는 언제나 큰 수의 법칙이 작용하는 세계다.
유체를 계에 가두면 강력해진다. 한신의 배수진은 병사들을 닫힌계에 가두어 유체의 강력한 성질을 끌어낸 것이다. 그 반대도 있다. 중국사의 3대 대전이라 할 팽성대전, 곤양대전, 비수대전은 반대로 닫힌계를 열린계로 만들어 적이 자멸하게 하는 기술이다. 중국이 흥하는 이유와 망하는 이유는 같다. 흥할 때는 쪽수로 흥하고 망할 때는 쪽수로 망한다. 흥할 때는 한신이 배수진에 가두어 흥하고 망할 때는 그 둑이 터져서 망한다.
바카라의 묘미는 단순한데 오히려 복잡한 것이다. 보통은 상대의 실력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지만 바카라는 단순해서 할 짓이 없으므로 징크스에 주목한다. 할 일이 없는 야구 감독이 징크스를 따지는 것과 같다. 단순화되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더 작은 단위의 부품들이 일제히 발언하므로 유체가 되고 유체는 확률에 지배되고 확률은 견고하다.
우리는 양자역학의 불연속성을 설명할 때 확률이라는 표현을 애용하지만, 균형이라는 표현이 진실에 가깝다. 균형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균형상태에서는 작은 힘이 전체를 결정한다. 양자역학이 어김이 없는 이유는 균형을 따르기 때문이며 균형은 작은 힘이 전체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슬은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가장 작은 부분이 전체를 결정한다. 이 경우 조직은 약한 고리를 보호하여 강력해진다. 확률이 견고한 이유다. 팀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를 비교하면 강팀과 약팀이 비슷하지만 가장 약한 선수를 비교하면 수준 차이가 명확해진다. 약자는 묘수를 두려고 하고 강자는 실수를 줄이려고 하는 이치다.
큰불이 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작은 불이라도 답을 알 수 있다. 어중간한 불이 문제다. 잘 모를 경우 작은 불로 줄이거나 반대로 큰불을 지르면 된다. 작은 불은 소화기로 끄고 큰 불은 크게 떠들어서 이웃이 달려오게 만들어야 한다.
일원론의 힘
사건과 사물이 있다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사건이 있을 뿐이다. 변화의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일원론으로 이해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생명이 호흡하는 게 아니라 호흡하는 그것이 생명이다. 악당이 악행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악당이다. 인간은 자신은 악당이 아니므로 자신의 행위는 악행이 아니라고 생각해 버린다. 틀렸다. 악당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악당이다.
우리는 당구공이 있고 사람이 그 당구공을 친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그렇지 않다. 발로 차면 축구요, 손으로 던지면 농구다. 칼로 베면 검도요, 활로 쏘면 궁도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며 움직임이 교착되면 머무름이다.
자연 - 움직임이 있고 그것이 어떤 이유로 교착된다.
인간 - 머무름이 있고 그것이 어떤 이유로 움직인다.
사물의 관점은 존재의 본래 모습이 머무름이라고 여기므로 더 이상 원인을 추궁하지 않게 된다. 나쁜 사람의 몸에는 악의 원소가 머물러 있다고 믿는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핑계가 된다.
가장 유치한 이야기는 공산당은 원래 침략 근성이 있다는 식의 표현이다. 부르주아는 원래 착취 근성이 있다는 식이다. 원래 그런 게 어딨어? 침략하지 않을 수 없게 압박하는 구조가 있다. 착취하지 않을 수 없게 압박하는 구조가 있다. 계에 에너지가 걸려 있다. 사람 탓하지 말고 구조 탓을 해야 한다.
사건은 둘의 상호작용이 에너지를 공급하므로 둘을 동시에 건드려야 한다. 사물은 머무름이 원인이므로 원인이 한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믿어지는 한 놈만 조지면 된다. 만만한 약자를 찾아 독박을 씌우는 마녀사냥의 유혹을 받는다.
사건의 격발자 관점 - 자연은 변화다. 변화는 둘의 짝짓기다. 둘이 공유하는 토대를 건드려야 한다.
사물의 전달자 관점 - 자연은 머무름이다. 나쁜 기운이 머물러 있는 한 놈만 제거하면 된다.
일찍이 석가와 용수가 갈파했듯이 고유한 자성이란 것은 없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원인은 없다. 존재의 모습은 둘의 관계가 연출한다. 계 내부에서 변화의 단계에 따라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우리가 아는 사물은 두 번째 입자다. 대부분의 문제는 입자 둘의 간격을 조절하면 해결된다. 남녀의 간격을 사랑과 데이트로 조절하고 국가의 간격을 외교와 통상으로 조절한다.
우리는 막연히 존재가 단단한 입자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이 경우 의사결정은 외부에서 일어난다. 원자는 쪼갤 수 없기 때문이다. 쪼갤 수 없다는 것은 내부가 없다는 의미다. 내부가 없으므로 조절되지 않는다. 조절되지 않으므로 사람을 죽인다. 간격을 조절할 수 없으므로 사람을 제거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정보의 왜곡
거울은 좌우가 바뀌어 보이지만 사실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렇다고 거울이 뒤통수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앞뒤가 바뀌지만, 그것이 거울을 보고 있는 관측자의 앞뒤는 아니다. 이러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뭔가 하나가 틀어졌는데 그것을 특정하여 지목하기가 어렵다.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다.
거울의 상이 바뀌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다. 1인칭 슈팅 게임과 같다. 자신이 총을 들고 쏘는 느낌을 재현할 수 없다. 정보의 전달 과정에는 반드시 왜곡이 일어난다. 정보의 전달은 대칭을 쓰는데 계는 한 곳 이상 비대칭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관측자가 있다. 나는 한 사람이다. 이미 대칭은 깨졌다. 1은 대칭이 될 수 없다.
팔다리는 둘이지만 배꼽은 하나다. 그 하나는 엄마의 자궁과 대칭된다. 배꼽의 대칭은 있는데 바깥에 있다. 닫힌계 안에는 없다. 사물의 관측은 반드시 하나 이상 왜곡된 정보가 들어간다.
양치기 개가 양 떼를 몰듯이 에너지를 다룰 때는 항상 반대쪽을 먼저 조치해야 한다. 이때 좌우를 왕복하게 된다. 이 방식은 비효율적이다. 양치기 개는 양이 움직인 거리의 세 배를 움직여야 한다. 왼쪽 끝까지 갔다가, 오른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양 떼를 따라 전진해야 한다. 반면 목자는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 양들이 졸졸 따라온다. 앞에서 끄는 목자는 뒤에서 몰이하는 양치기 개와 달리 가장 효율적으로 이동한다.
목자 - 앞에서 이끌면 효율적이다.
양치기 개 - 뒤에서 몰면 비효율적이다.
사건이 목자의 방법이라면 사물은 양치기 개의 방법이다. 양치기 개는 자신이 원하는 데로 양 떼를 이끌 수 없다. 양들이 가면 안 되는 방향을 차단할 수 있을 뿐이다. 앞길로 가라는 말은 못 하고 옆길로 새지마라는 말만 할 수 있다. 반면 목자는 양들이 공유하는 토대를 건드리므로 양 떼를 앞길로 이끌 수 있다. 양 떼는 건초를 원하고 목자가 건초를 주기 때문이다.
룸미러를 보고 후진 운전을 하는 어려움과 같다. 익숙하면 괜찮지만 누구든 처음 한 번은 낭패를 겪는다. 보통은 무게중심의 이동 때문에 구조착오를 일으킨다. 물고기를 잡아도 내가 원하는 방향의 반대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한다. 최단 거리는 될 수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은 객체다. 객체 맞은 편에 주체가 있다. 주체와 객체가 연결하는 과정에 방향의 왜곡이 일어난다. 정보의 전달 과정에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는 데 따른 필연적인 시행착오다.
경로의 확보
사건은 경로가 있으므로 속일 수 없다. 우주의 근원에서부터 내 책상 앞의 볼펜까지 전부 한 줄로 연결된다. 하나를 건드리면 일제히 연동되어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인다. 풍선에 작은 바늘 하나를 찔러도 풍선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들키지 않고 풍선에 든 공기를 빼먹을 수는 없다. 계에 밀도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유체는 압력이 걸려 있다.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압력이 걸려 있다. 집단 내부에는 긴장이 걸려 있다. 정보가 순식간에 전달되므로 이쪽을 건드려도 저쪽에서 탈이 난다.
반면 사물은 경로가 없다. 그러므로 속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넘겨짚어야 한다. 마음껏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원자는 쪼갤 수 없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마음껏 거짓말을 한다.
내 책상 위에 스마트폰이 있다. 이것이 혹시 여우가 둔갑한 것이 아닐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사건의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다. 그런데 만약 진짜로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면? 그 경우는 기원이 다른 여러 우주가 겹쳐 있는 것이다. 우리은하가 속한 빅뱅 우주 말고 다른 우주와 섞인 것이다. 그런 기미는 없다. 즉 우리 우주 안에서는 원리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났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다. 어제까지의 나는 전부 거짓이고 내가 믿고 있는 기억은 컴퓨터 조작으로 입력된 거짓 기억일지 모른다. 토털 리콜이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설정이다. 그렇지 않다고 믿을 수 있나? 거기에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낯섦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낯섦이 있다면 자신의 기억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기억의 존재가 아니라 낯섦의 부재다. 전부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결을 끊는 부자연스러움의 부재로 판단한다. 반면 꿈속에는 뭔가 이상해서 혹시 이게 꿈이 아닌가 하는 꿈 각성이 일어난다. 꿈속에서 꿈이냐 생시냐 하고 꼬집어보고도 계속 꿈을 꾸기도 한다.
사건은 전부 연결되어 있으므로 마이너스 환경이다. 사물은 끊어져 있으므로 플러스 환경이다. 사건은 자원들이 죄다 연결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의 플러스가 불가능하다. 단 마이너스는 가능하다. 연결을 끊을 수는 있다.
손가락을 자를 수 있다. 그러나 붙일 수는 없다. 왜? 이미 붙어 있기 때문에. 붙이려면 먼저 떼야 한다. 아니면 외부에서 남의 손가락을 가져와야 하는데 외부는 닫힌계 외부의 일이므로 논외다.
동전을 잃어버렸다. 사건의 마이너스법과 사물의 플러스 법이 있다. 작은 일은 사물법이 빠르다. 뭔가 잃어버렸다면 큰 가구부터 옮겨본다. 옷장 밑에 있네. 아니면 침대 밑에 있다. 큰 사건은 사건법으로 찾아야 한다. 사물법으로 찾으면 옷장과 침대가 옮겨지면서 경로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현장이 훼손되어 다음 단계의 추적이 불가능해진다.
사건의 마이너스법 - 크게 원을 그리고 밖에서 안으로 좁혀 들어오며 수색한다.
사물의 플러스법 - 눈에 띄는 큰 물체부터 뒤집어 본다.
소거법을 써야 하는 이유는 작업 과정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큰 사물 위주로 수색하는 플러스법을 쓰면 경로가 지워져서 같은 장소를 두 번 수색하게 된다. 그곳에 가구가 옮겨져 있어서 결정적인 곳을 빠뜨린다. 플러스는 불어나고 불어나면 처치 곤란이다.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존재는 사건이며 사건은 경로가 있고 경로는 전부 연결되므로 빠져나갈 빈틈이 없으므로 속일 수 없다. 옆으로 끼어들 수 없고 중간을 잘라먹을 수 없다. 사건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어 건드리면 큰 소리가 나고 전체가 다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연결부위에서 강한 인지충격이 일어난다. 위화감이 들고 어색해지고 민망해진다. 혹은 전율하게 된다.
사물은 끊어진다. 독일인은 원래 그래. 공산당은 원래 그래, 일본 놈은 원래 그래. 게이는 원래 그래. 조선족은 다 그래. 이런 식이다. 이는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이다. 원래 그렇다는 지점에서 연결이 끊어진다. 더 이상 추론이 불가능하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나쁜 이유는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세상에는 진실이라는 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은 없고 구조가 그런 것이다. 구조를 바꾸면 된다. 조절장치를 조작하여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끝까지 추궁하여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 히틀러 한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배후에 히틀러를 복제하는 인종주의 공장이 작동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에는 백만 명의 히틀러가 있었다. 악당을 생산하는 공장을 파괴하지 않으면 악당은 계속 복제된다. 인종주의를 만든 맬서스 트랩이 깨지고서야 전쟁은 끝이 났다.
인간의 한계
공자보다 노자가 인기가 있다. 대중은 애매한 것을 좋아한다. 이는 상대의 행동에 맞대응할 생각 때문이다. 받아치려는 것이다. 자체 에너지가 없는 사람의 대응이다. 능동적으로 의사결정 하지 못하고 상대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이들은 피장파장의 오류를 저지른다.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사람을 공격한다.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를 이겨 먹는 방법으로 상대에게 공을 떠넘기고 그렇게 핑퐁을 이어가며 집단과 상호작용의 끈을 유지하려고 한다.
인간의 정신을 움직이는 것은 자극과 반응이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든 상대의 허점을 찾으려고 한다. 인간은 우주를 자신이 맞서야 하는 상대로 본다. 자신과 함께하는 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는 약할수록 좋다. 그러므로 인간은 허점 있는 우주를 선호한다. 잘못 만들어진 우주를 원한다. 이런 식으로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외계인이다, 비행접시다, 초고대 문명이다, 초능력이다, 지구평면설이다 하는 각종 개소리는 자신의 지적 태만을 물타기 할 수 있는 세상의 허점을 발굴해 보려는 노력이다. 그들은 되도록 인류문명을 허술하게 만들려고 한다. 허술한 문명이 상대하기에는 만만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허술한 존재로 단정하고 삐딱한 태도로 엉겨보려는 것이다.
동기도 없고 목적도 없을 때는 상대방의 허술함에서 무언가 빌미를 찾으려고 한다. 집시도 있고 도둑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뭔가 허술한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식이다. 그래야 미국처럼 총기 소지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내가 나쁘기 위해서는 상대가 더 나빠야 한다. 결국 다 같이 나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우주를 적대한다. 우주를 대상화하고 타자화한다. 누가 다가와서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주기를 바란다.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면 받아치려고 한다. 그들은 약자 코스프레에 분주하다.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자신에게는 세상을 상대로 복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전술은 언제나 팃포탯Tit-for-Tat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고 한다. 자체 엔진이 없고 자기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대응에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단서를 발굴하려는 것이다.
'허점 있는 역사라면 나 정도의 형편없는 지식으로도 마음껏 거짓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환빠 생각이다. '세상은 원래 불평등한 거야.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이는 보수꼴통 생각이다. 인간들이 결함 있는 우주를 선호한다. 비겁한 생각이다. 세상은 의외로 멀쩡하고 인간은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다. 진리의 발판은 견고하므로 계단을 오르듯이 차근차근 밟고 올라갈 수 있다.
자극과 반응
인간의 생각하는 방법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 방법이다. 이는 객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가능하다. 그 연결의 끈을 놓지 못하므로 객체 내부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인간의 사유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다.
도박꾼 심리와 같다. 도박꾼이 원하는 것은 돈을 따서 카지노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표면의 의식과 심층의 무의식은 다르다. 도박꾼은 화투패를 쪼면서 동시에 자기 마음을 쪼아대면서 긴장되고 불안한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희미한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심장이 쫄깃한 상태, 애매한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그럴 때 집단과 강하게 결속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숨바꼭질 놀이와 같다.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의 불안함과 엄마를 찾았을 때의 쾌감 사이에서 아이는 줄타기한다. 이는 동물의 생존본능일 뿐 인간의 진지한 자세가 아니다.
인간은 집단이 전방위로 교착되어 애매한 상태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의사결정 하기 어려운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이기지도 못하지만 지지도 않는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반드시 치고나가는 놈이 반드시 있다. 그 사람이 이긴다. 아무것도 안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다.
세상은 게임이고 게임은 승리와 패배가 있다. 진지하지 않으면 진다. 지면 당한다. 당하면 밟힌다. 게임의 승자가 시스템의 조절장치를 장악하고 패자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승부 정도로 만족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잘 안된다.
좌파진영에 특히 전방위적인 교착을 바라는 비겁한 사람이 많다. 그들은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팽팽하게 유지되어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잘 안 된다. 질서가 만들어지면 그 질서를 깨는 사람은 반드시 등장한다. 저울은 기울어진다.
그들은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되면 도덕가가 이긴다고 믿는다. 다들 고만고만하면 범죄를 덜 저지른 사람이 이긴다. 그들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황이라야 도덕가인 자신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고 믿는다. 그들은 반일, 반북, 반미, 반중, 반러, 반세계화를 주장하여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실패하도록 분위기를 몰아간다. 내가 못 하므로 너도 못해야 한다는 식이다.
잘하는 사람이 없으면 덜 나쁜 사람이 선발된다. 그들은 특별히 하는 게 없으므로 나쁜 짓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지만 뚜렷한 결격사유도 없다. 노자의 무위에 안주하다가 외부에서 쳐들어온 신흥세력에 씹힌다. 인터넷과 인공지능은 외부에서 갑자기 들어온 힘이다. 그 외부의 힘은 조절장치를 가지고 있다. 기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치인다. 김어준은 그때 뭔가를 했는데 당신은 무엇을 했지? 할 말이 없게 된다.
바닥이 좁을수록 전방위적인 교착이 먹힌다. 한국은 바닥이 좁아서 좌파의 교착전술이 먹히지만, 유럽은 넓고 사방으로 열려 있어서 그렇게 안 된다. 유럽은 가둬놓고 조질 수 없다. 세계는 열려 있다. 모두를 묶을 수 없다면 하나도 묶지 말아야 한다.
답은 큰 수 아니면 작은 수다. 한 걸음이라도 전진하려면 왕을 한 명으로 줄여서 전제군주제를 하거나 아니면 모든 국민이 왕이 되는 민주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 실험은 양차 세계대전으로 지속 불가능함이 확인되었고 그렇다면 답은 민주주의다.
사건의 수학
응용과학 위에 순수과학이 있다. 과학 위에 수학 있고 수학 위에 구조론 있다. 이들은 나무의 줄기와 가지처럼 모두 연결되어 있다. 순수과학이 줄기라면 응용과학은 가지다. 순수에서 응용으로 갈수록 내용이 추가된다. 반대로 추가된 내용을 하나씩 빼면 최후에 구조가 남는다. 살을 제거하면 뼈가 남는다. 최후에는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것이 남는다.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것에서 원자론의 쪼갤 수 없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는 피상적인 관찰이고 그것은 쪼개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낳는 자궁이다. 모든 것은 복제된 것이며 그것은 복제의 원본이다.
절대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결 그 자체다. 복제본은 원본 주변에 자리 잡는다. 둘은 연결되어 있다. 아기와 엄마가 물리적으로 떨어져도 사건으로는 연결되어 있다. 엄마가 뿌린 것을 자식이 거둔다.
수학이 연결된 A와 B의 관계를 추적한다면 구조론은 그 둘의 연결을 본다. 수학은 궁수를 보고 과녁의 명중을 알아낸다. 대포를 보고 탄착점을 알아낸다. 궁수가 활을 쏠지 말지는 알 수 없다. 수학은 일단 포병이 대포를 쏜다고 전제한다. 이 부분이 매끄럽지 않다. 자연은 답이 정해져 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수학 - A와 B는 연결되어 있다. A를 보고 B를 안다.
구조 - A와 B를 연결한다. A와 B의 연결을 결정한다.
수학은 일단 대포를 쏜다고 가정하고 포탄의 낙하지점을 알아내지만, 구조론은 그 대포를 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원인을 보고 결과를 계산하는 것은 수학이고 원인을 보고 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는 것은 구조론이다.
A를 넣으면 B가 나오는 상자가 있다. A를 보고 B를 알아내는 것은 수학이다. 상자를 분해해서 상자 내부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보는 것은 구조론이다. 상자 속에는 의사결정 구조가 들어 있다.
바퀴 축이 10미터 전진했을 때 길이가 1미터인 바큇살은 몇 미터 움직이는지 그 비례를 아는 것은 수학이다. 바퀴 축이 움직이면 바큇살도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구조론이다. 바큇살의 움직임은 눈에 보인다. 그런데 자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에너지의 성질에 의해 닫힌계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다룬다.
우리는 인과율을 탐구하지 않는다. 인과율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냥 뭉개고 넘어간다. 사건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원인의 원인이 있고 결과의 결과가 있다. 그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동력조달 > 직접원인 > 의사결정 > 변화과정 > 최종결과가 있다.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집단을 의식하고 벌이는 것이다. 집단과의 관계가 본질적 원인이다. 거기서 동력이 조달된다. 우리는 이 부분을 대충 뭉개고 넘어간다. 집단으로부터 암시받고 심리적인 압박을 받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냥 범인이 나쁜 놈이라서 그렇다고 선언해 버린다. 뭉개고 넘어가는 것이다.
당구라고 하자. 수구를 치는 것이 원인이면 적구에 맞는 것은 결과다. 그 과정은 보인다. 원인을 보고 결과를 안다. 그러나 씨름이라면 어떨까? 내가 기술을 걸면 상대도 맞배지기로 나온다. 서로 교착된다. 자연은 밸런스에 의해 항상 맞배지기 상태다. 당구는 내가 친 게 원인이지만 씨름은 모래가 중요하다. 샅바의 영향도 있다. 공유하는 부분을 살펴야 한다.
세상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사물의 수학은 세상을 육상경기와 같은 자기와의 싸움으로 착각한다. 세상의 진실은 내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가 더 잘하면 진다는 것이다.
수학의 한계
구조론은 사건의 격발자를 측정하고 수학은 사물의 전달자를 측정한다. 사건이 사물에 앞선다. 격발이 전달에 앞선다. 사건은 전체이고 사물은 부분이다.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 사건에서 매개변수 하나를 빼면 사물이다. 보통은 배후의 에너지 공급원을 뺀다. 실행범만 잡고 배후에서 사주한 교사범에 대해서는 모르쇠다. 사실은 뒤에서 누가 돈을 주고 부추긴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집단의 암묵적인 교사와 심리적인 압박이 있다.
사건을 일으키려면 다섯 가지를 대비해야 한다.
1. 에너지 조달은? .. 돈이 되는가?
2. 실행할 위치는? .. 누구를 보내는가?
3. 공간의 방향은? .. 어디를 찌를 것인가?
4. 시간의 순서는? ..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5. 정보의 처리는? .. 뒷수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과정은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나므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 부분을 뭉개고 넘어간다. 그러나 자연은 같은 패턴이 반복되므로 알 수 있다. 닫힌계 내부의 밸런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는 답이 정해져 있다.
인간의 행동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므로 알 수 없지만 큰수의 법칙을 적용하면 명백해진다. 작은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지만 큰 일은 기세의 흐름에 끌려간다. 큰 일은 자연법칙을 따르게 된다. 러시아 짜르 표트르 2세의 자살정치와 같은 황당한 일도 가끔 일어나지만, 보통은 큰 돈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잘 안된다. 자연의 기세와 흐름에 맥없이 끌려간다.
수학은 에너지 부분을 빼고 시작한다. 이는 달리는 자동차를 멈춰 세운 것과 같다. 사건은 연결되어 있고 사물은 독립되어 있다. 그 연결부분을 뺀 것이다. 집단은 강하게 긴장이 걸려야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말을 듣게 된다. 그 긴장이 에너지다.
사건이 동영상이면 사물은 정지화면이다. 동영상은 연결되어 있다. 사물은 끊어져 있다. 사물은 관측자와 연결하면서 객체 내부에서의 자체 상호작용이 끊어진다. 인간은 한꺼번에 두 가지 생각을 못 하므로 관측자인 자신과 객체의 연결을 유지하려고 객체 내부의 차체적인 연결은 보지 않는다.
수학은 중요한 핵심을 빠뜨리고 주변부만 잘 계산한다. 핵심은 객체 자체의 연결이다.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는 상태로 관찰해야 파워트레인을 알아낼 수 한다. 자동차를 차고에 넣어놓고 운전을 배울 수는 없다. 한 번은 작은 접촉 사고를 내봐야 제대로 운전할 수 있게 된다.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해부하는 식이라면 진실의 반을 놓치는 셈이다.
자기 자신과 상호작용하는 힉스 보손이 기본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듯이 구조론은 자기 자신과 상호작용하여 사물에 연결을 부여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일방향적 전개는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체 상호작용이다.
사건이 사물을 연결하는 회로가 있다. 사물은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되지만, 에너지로 보면 모두 연결되어 덩어리로 있다. 돌멩이는 그냥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력에 잡혀 있다. 사물에 에너지의 입력에서 출력까지의 경로를 더하면 그것이 사건이다.
유체는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다. 강체도 내부 에너지 파동은 유체다. 존재는 궁극적으로 유체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그 부분을 빼서 왜곡된 정보다. 유체에 걸린 압력을 논외로 한다. 자동차를 분해하여 부품을 바닥에 늘어놓은 것과 같다. 부품들의 연결순서가 빠져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그 차이만큼 왜곡된다.
사람 둘이 모이면 사랑이 발생한다. 물 분자 둘이 모이면 수압이 발생한다. 상호작용 계에 기능이 발생한다. 그 사건에서 에너지 전달경로를 빼면 남는 것이 사물이다. 그냥 집합이 있다고 선언하는 식은 곤란하다. 사물+경로가 집합이다.
수학은 물리량을 측정한다. 물리량은 1에 대한 비례다. 1은 관측자인 인간이거나 혹은 인간이 제시하는 척도다. 구조론의 1은 주체와 객체의 연결이다. 수학의 1은 내 손에 올려진 사과가 한 알이라는 말이고 구조론의 1은 내 손과 사과가 중력으로 연결되는 라인이 1이라는 말이다.
수학이 객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변화가 나란하기 때문이다. 나란한 것은 밸런스다. 밸런스를 만드는 것은 계다. 계는 두 변화의 상호작용이다. 수학의 선과 면과 입체는 상호작용이 깨지는 형태다. 모든 것의 자궁은 상호작용이다. 그것을 수학이 논하지 않는다. 대부분 인간이 그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건물을 짓거나 관측을 하거나 간에 인간이 가장 중요한 연결을 대신한다. 인간이 과일을 자루에 담거나 물을 컵에 따른다. 자연은 닫힌계가 그 일을 하고 에너지가 그 일을 하고 상호작용이 그 일을 하고 밸런스가 그 일을 한다. 인간이 하는 짓은 어차피 인간이 알아서 조절하므로 그 핵심을 논외로 해도 된다. 농부가 어련히 알아서 사과를 박스에 담겠는가 말이다. 자연은 저절로 그 일이 일어나므로 구조를 살펴야 한다.
모두 연결된 것은 계다. 연결의 중심은 체다. 중심에서 갈라지는 것은 각이다. 길게 이어진 것은 선이다. 끝나는 것은 점이다. 차원은 다섯이다. 수학은 인간이 개입하므로 0차원과 4차원을 놓친다. 인간이 사과를 박스에 담고 인간이 그 사과를 헤아린다. 가장 중요한 에너지 입력과 출력을 인간이 대신하므로 수학은 그 비례인 부피와 너비와 길이만 측정하면 된다. 왜소해졌다.
사물의 수학은 있는데 사건의 수학은 없다. 길이와 너비와 부피는 있는데 그것을 생산하는 상호작용은 없다. 아기는 있는데 엄마는 없다. 새끼 곰이 있다면 보이지 않아도 주변 어딘가에 엄마 곰이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목숨을 부지한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본다.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다. 빨랫줄을 보고 선을 알고, 절단면을 보고 면을 알고, 덩치를 보고 체적을 안다. 그것은 에너지가 전달되는 경로다.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형태다. 그것을 결정하는 자궁 속에서의 탄생과정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능동적으로 자연으로 쳐들어가야 사건의 연결 회로가 보인다. 입체와 면과 선으로 전달되는 에너지의 최초 격발자와 최종 수용자를 봐야 한다. 중간 전달자 3차원에 최초 입력자와 최종 출력자를 더하면 계체각선점 다섯 차원이 된다.
원론의 의미
동양이 서양이 뒤처진 이유는 원론을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드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클리드의 원론뿐 아니라 탈레스의 일원론, 헤라클레이토스의 동적 세계관, 플라톤의 이데아 설이 일정 부분 원론 역할을 했다. 피타고라스의 화음, 르네상스인의 소실점도 기여한 바가 있다. 구조론은 수학의 탄생을 해명하는 원론이다.
우리는 기본에 소홀했다. 최초 출발점을 사유하지 않았다. 왜일까?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쓰는 방법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법이다. 객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상호작용을 추적하지 않고 인간 자신과 상호작용하므로 왜곡되는 것이다. 사유가 망하는 것은 인간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부족민은 뭐든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는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눈다. 쓸모 있는 것은 세밀하게 분류하여 일일이 이름을 부여하지만, 쓸모 없는 것은 그냥 무시한다. 인류학자가 질문하면 '그건 쓸모없는 거야.'하고 웃는다. 인류학자를 바보 취급해서 난감하게 만든다. 이런 식이다. 21세기라고 다를까? 인간은 달라진 게 없다.
선과 악, 진보와 보수, 무슨 주의에 무슨 주의로 편을 가르고 프레임을 걸고 싸움을 붙여서 서로 돌을 던지면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올 수 있다. 이는 우연에 의지하는 귀납의 방법이다. 역사의 승자들은 공통으로 전쟁을 많이 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는 망하고 전쟁하는 나라가 흥했다. 서로를 향해 돌을 던지다가 기술이 발전한 것이다. 이는 인류의 비극이다.
객체와 상호작용하려면 대칭을 세워야 한다. 문제는 각을 세울 상대가 없는 경우다. 인체의 여러 부위가 둘씩 짝지어 대칭을 이루는데 배꼽은 짝이 없다. 최초의 탄생은 대칭을 세울 수 없다. 맨 처음 오는 것은 비교 대상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 탄생의 문제는 사유하지 않는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중간 연결만 세세히 따진다.
산의 정상은 대칭이 없다. 인간은 대칭을 이용하여 사유하므로 정상을 사유하지 않는다. 원론을 사유하지 않는다. 출발점을 사유하지 않는다. 빌드업하지 않는다. 격발자를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은 정상도 대칭이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지구 중심과 대칭이다. 힉스 보손은 자기 자신과 대칭이다. 배꼽은 엄마의 자궁과 대칭이다. 대칭이 있지만 바깥에 있다. 인간은 단위를 뛰어넘어 에너지를 전달하는 부분에 약하다. 수평적 대칭은 잘 찾는데 수직적 대칭은 찾지 못한다. 인간의 사유에 맹점이 있다.
인간의 생각법은 마구잡이로 각을 세우고 대칭을 만드는 방법이다. 환경을 쥐어짜서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내가 돌을 던지면 상대도 돌을 던진다. 날아오는 돌을 피하려고 생각하게 된다. 서로 돌을 던져주는 품앗이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여러 번 사고치고 빚쟁이에게 쫓기면서 백 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했다. 일론 머스크도 도지코인 소동에 이어 트위터 소동을 벌이며 짱돌을 벌고 있다. 자신을 궁지로 몰아붙여 쥐어짜는 기술이다. 이는 천재의 광기다. 그런데 대개 이렇게 한다.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을 갚으려고 미친 듯이 소설을 쓴 도스토옙스키가 유명하다. 파산으로 빚더미에 올라 하루에 50잔의 커피를 마셔가며 매일 15시간씩 글을 썼다는 인간희극의 발자크도 마찬가지다.
마감에 쫓기면서 머리칼을 쥐어뜯는 웹툰 작가들의 쥐어짜기 방법으로 작은 문제를 풀 수 있으나 근본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짝이 있어야 쥐어짜는데 배꼽은 짝이 없기 때문이다. 정상에는 당신을 위해 돌을 던져주는 사람이 없다. 닫힌계 안에서 말단의 문제를 이 방법으로 풀 수 있으나 근본이 되는 동력원 문제는 이 방법으로 풀 수 없다. 동력은 외부에서 오기 때문이다.
자기 집 방문에 쇠창살을 달고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이외수의 쥐어짜기 방법을 버리고 그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더 큰 세계로 전진해야 한다. 누구 하나는 밖으로 나가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와야 한다. 그러려면 고양이를 키우는 집주인과 사귀어야 한다. 대칭을 넘어 비대칭의 더 큰 세계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방향성의 힘
수학을 모르는 사람도 수학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내다볼 수는 있다. 문제풀이는 못 해도 수학의 원리와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다단계가 속임수라는 사실 정도는 미적분 몰라도 안다. 바카라 도박의 필승법이 엉터리라는 사실은 수학 몰라도 안다.
인간이 오판하는 이유는 호르몬 때문이다. 집단의 기세에 눌리고 자연의 에너지의 흐름에 말린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에 휘둘린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약점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은 창의적인 사고를 했는데 중세 암흑시대에 와서는 기독교의 위세에 눌려 일제히 바보가 되었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자유로운 사고가 있었는데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일제히 주저앉았다. 춘추시대에는 식객이 현명한 주군을 찾아 왕을 면접 보고 다녔기 때문에 왕도 배운 바가 있어 똑똑했다. 중국은 식객정치의 소멸과 함께 망했다. 최후의 식객 한비자 이후 사람이 없어졌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벌거숭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중학생이던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박정희는 벌거숭이 독재자가 맞는데 왜 아무도 벌거숭이라고 말하지 않지?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바닥에서 탈출해야겠다. 인터넷은 넓고 지성인은 많을 것이다. 아니었다. 여전히 이 바닥에 말이 통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구가 둥근 것은 그냥 보면 보인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맞장구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썰렁하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냥 눈으로 봐서 지구가 둥글다는 시각적 증거 서른 가지 이상을 사흘 안에 찾았다. 잔뜩 널려 있네. 다 보이잖아. 저게 안 보인다고? 믿기 어렵다.
지구만 둥근 것이 아니다. 하늘을 봐도 둥글고, 별자리를 봐도 둥글고, 구름을 봐도 둥글다. 우리가 보는 푸른 하늘은 대기다. 지구가 평평하면 대기도 평평하다. 이건 딱 보면 보인다. 대기가 평평하면 느낌이 다르다. 별들도 지구의 자전에 따라 고도가 다르므로 지금과는 다르게 보여야 한다. 천원지방설을 채택해서 땅은 평평하고 하늘만 둥글다고 해도 지구의 넓이와 비교한 별들의 각도가 다르다. 낮게 깔린 구름도 마찬가지다. 구름층의 곡률을 느낄 수 있다. 바다를 봐도 오후 4시경 햇볕에 반사되는 수면이 평면이 아니라 구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술 수업 때 공을 그려보지 않아도 이 정도는 안다. 지구가 평평하면 정면의 파도보다 사선의 파도가 더 입자가 작아야 한다. 물빛도 거기에 맞춰 달라져야 한다. 섬들의 하단은 다 직선이고 약간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것을 낱낱이 따져보면 바다 하나로만 스무 가지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왜 망원경 없이도 그냥 보이는 지구가 둥근 증거 서른 가지를 아무도 말하지 않지?
어린 시절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는데 윤회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과거로 무한하다고? 무한이 뭐지? 딱 봐도 아니잖아. 이건 수학과 맞지 않는다.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반드시 시작이 있다. 정적 우주론은 과거로 무한하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과거로 무한 개념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언어도의 단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도 속는다. 이해하기 어렵다. 천재도 1+1=2처럼 단순한 것에 속을 때가 있구나.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도 벌거숭이라고 말하지 못하는구나.
원리가 있다. 원리는 만유의 연결되어 있음이다. 비행접시가 초광속으로 날아가면 충격파로 지구가 깨질 판이다. 연결을 건드리지 않고 몰래 접근할 수는 없다.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리고 하나가 맞으면 전부 맞다는 게 원리다. 모두 연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은 드리블하거나 패스하거나 맘대로지만 열한 명이 모이면 뻥축구를 하거나 티키타카를 한다. 팀 전술이 있다. 에너지는 유체의 성질을 띠고 계를 이룬다. 부분의 변화가 전체에 파급된다. 적당히 물타기 못한다. 압력이 걸리면 서로 간섭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유체의 성질에 의해 언제나 극단으로 흐른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중간이 없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틀린 건 틀린 거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받쳐주는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리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전부 잘못되기 때문이다. 다 알면서.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원리에서 복제된다. 우리는 모두 빅뱅의 자손이다. 하나쯤 예외가 있지 않을까? 없다. 정적 우주론은 초딩이 생각해도 틀렸다. 우주가 커지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는다면 현재가 부정된다. 어린 시절 나는 이 문제로 밤잠을 설치곤 했다. 나만 밤잠을 설쳤다는 말인가? 왜 호응해 주는 사람이 없는가?
바보 생각 - 주사위를 많이 던지면 혹시 하나쯤 큰수의 법칙을 어기지 않을까?
진리 생각 - 주사위를 많이 던질수록 큰 수의 법칙과 일치할 수밖에.
사람들은 막연히 경우의 수가 늘어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길 것으로 믿는다. 이는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다. 분위기가 어수선하면 선생님 몰래 수업을 빼먹고 도망칠 수 있다는 경험이다. 그러나 수압이 늘어나면 잠수함 해치는 단단해진다. 건축물의 아치 구조도 마찬가지다. 돌이 빠질 것 같지만 더 견고하다. 지진으로 다 무너지고 아치만 남은 유적이 많다. 주사위를 많이 던질수록 큰수의 법칙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이것이 방향성의 힘이다. 쪽수가 많을수록 법칙은 완강해진다.
막연히 음모론을 많이 투척하면 우연히 하나가 적중하지 않을까? 천만에. 음모론을 많이 투척할수록 서로 간섭하여 더욱 안 맞게 된다. 절대로 그런가? 절대로 그렇다. 여기서 확신을 가져야 비로소 똥오줌을 가리고 인간으로서 우뚝 설 수 있다. 어른들 사이의 대화는 그다음에 가능하다.
사유의 방법
생각은 대칭을 따른다. 대칭은 짝짓기다. 생각은 퍼즐 맞추기다. 짝짓기를 계속하여 전체 그림을 연결하는 것이다. 왼쪽이면 오른쪽이다. 앞이 아니면 뒤다. 안이면 밖이다. 이런 것은 잘 찾는데 사람들이 에너지 공급원을 못 찾는다. 에너지원과 경로와 조절장치를 못 찾는다. 왼손과 오른손의 대칭은 찾는데 배꼽과 자궁의 대칭은 못 찾는다. 공간적으로 끊어져 있지만 시간적으로 연결되잖아. 엄마가 아기를 낳잖아. 경상도와 전라도의 대칭은 알면서 수도권과 지방의 대칭은 모른대서야 말이 되는가? 남녀의 대칭은 알면서 정부와 국민의 대칭은 모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엄마는 아기의 에너지 공급원이다. 중앙은 지방의 에너지 공급원이다. 국민은 정부의 에너지 공급원이다. 입력에서 출력까지 에너지의 회로를 머릿속에 그리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사건은 언제나 동력원이 있고 코어가 있고 조절장치가 있고 전달경로가 있고 방향성이 있다. 국가라도 의회가 있고 행정수반이 있고 내각이 있고 자치단체가 있고 국민이 있다. 갖출 것을 갖추어야 에너지가 작동한다.
우리는 자발적인 변화를 추적하지 않으므로 원인과 결과만 분석한다. 자발적인 변화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인간은 내 마음대로 당구를 치지만 자연은 밸런스를 움직여 당구를 친다. 당구는 내가 치는 데로 공이 가지만 씨름은 내가 기술을 걸면 상대도 맞대응한다. 나의 의도는 무효가 되고 둘을 합친 전체의 밸런스가 승부를 결정한다. 씨름은 져주고 이기는 경기다. 무게중심을 낮추어 밑에 깔린 사람이 상대를 들어서 이긴다.
에너지는 유체다. 사람들이 강체는 잘 찾는데 유체를 못 찾는다. 풍선효과와 같다.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나온다. 강체의 대칭은 아는데 유체의 대칭을 모른다. 대부분의 정책 실패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풍선효과 때문이다. 어떤 정책을 펴기만 하면 반대 효과가 나타난다. 그걸 모르겠는가?
사람들이 어려운 것은 잘 아는 데 쉬운 것은 모른다. 복잡한 것은 짝이 있으므로 알 수 있다. 자동차 부품이나 컴퓨터 부품이라면 아귀가 맞는 짝이 정해져 있으므로 속일 수 없다. 부품을 하나씩 끼워보고 안 맞으면 빼면 된다. 바다에서 등산장비 팔거나 산에서 선박용품을 팔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 난로 팔고 에스키모에게 냉장고 팔다가 신용을 잃어버린 김우중 꼴 난다.
짝만 잘 맞으면 대충 맞다. 그러나 애초에 짝이 없는 것을 말하면 일제히 바보가 된다. 산의 정상은 짝이 없다. 아니다. 지구 중심이 짝이다. 짝이 있는데 바깥에 있다. 인간은 이런 식의 단계를 뛰어넘는 문제에 약하다.
세월호, 천안함, 한강 의대생 음모론의 공통점은? 물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타블로 사건은 바다 건너에서 일어났다. 마술사는 커튼 뒤나 상자 속에서 관객을 속인다. 컵이든 손바닥이든 반드시 감추는 것이 있다.
사람들이 부분을 속이면 속지 않는데 전체를 속이면 속는다. 부분은 짝이 있는데 전체는 짝이 없기 때문이다. UFO나 초능력이나 초고대 문명설처럼 엉뚱한 것은 짝이 없다. 사람들은 짝이 없으면 아무거나 가져다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별일이 다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짝이 없다고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들이대는 자들과 같다.
한 개라면 그 자체의 속성이 결정한다.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다. 백만 개가 되면 그것을 담는 그릇이 결정한다. 실재론에 유명론, 일원론에 다원론, 합리주의에 실용주의, 물질에 영혼, 유물론에 유심론, 진화론에 창조설, 자본주의에 사회주의 하는 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적 프레임을 걸어서 도매금으로 먹겠다는 원리 싸움, 그릇 싸움이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목숨 거는 이유는 하나만 이기면 나머지는 줄줄이 사탕으로 다 이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너지의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모든 주의 주장이 같은 그릇싸 움을 이름만 바꾸어 재탕한 것이다.
막연히 세상은 복잡하므로 별일이 다 있겠지 하고 착각하지만 복잡할수록 획일화되고 단순해진다. 색을 섞으면 섞을수록 검은색이 된다.
원리를 알면 한 방에 된다. 움직이는 것은 방향이 맞으면 다 맞고 방향이 틀리면 다 틀린다. 원리를 구체적으로 알 필요는 없고 그런 게 있다는 확신이 중요하다. 세상이 복잡한데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복잡해서 무너진다면 진작에 다 무너졌을 것이다. 복잡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면 원리가 뒤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진리가 없다면 언어가 만들어질 수 없다. 어떤 생각이든 언어로 하는 것인데 이미 언어를 신뢰한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한마디 말이 통했다면 진리가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리를 복제하는 좋은 언어가 부족할 뿐 언어의 소통하는 원리는 믿을 수 있다. 언어의 소통하는 원리와 자연의 연결하는 원리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