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깡 / 정성화
나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한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스스로 나를 ‘직진형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의 각이 정해지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 방향으로 나아간다. 새우깡이 그 예다. 중학생 때 처음 먹어보고 반한 나머지 지금까지 먹고 있다. 즐거울 때도 먹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먹고, 하루를 무사히 잘 보냈다고 또 먹는다.
나의 새우깡 취향을 오랫동안 지켜본 남편이 “지겹지도 않느냐?”고 한다. 평생 한 남자만 바라보는 이 마음도 새우깡에서 건너온 거라고 하면 더 말을 않는다.
어느 모임에 가서 나를 소개하면서 ‘새우깡을 좋아하는 여자’라고 했더니 다들 웃었다. 왜 새우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진정 좋아하면 그 이유를 댈 수 없다. ‘좋다’는 느낌은 대체로 둥글어서 어느 한 끝을 잡아채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있지 않고, 국화빵에는 국화가 들어있지 않는데, 새우깡에는 새우가 들어있어서요.”
‘국민과자’라고 불리는 새우깡 맛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이는 건 싱거운 것이다. 그래도 한 마디 보태고 싶다. 과자가 보통 달짝지근하거나 기름지거나 텁텁하기 마련인데 새우깡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하다. 기름에 튀기는 대신, 소금에 열을 가해 그 열기로 튀기는 공법을 쓴다고 한다. 그래서 과자 치고는 꽤 짭짤한 편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두고 ‘맥주를 부르는 맛’이라고 한다.
새우깡의 단단함도 매력적이다. 이(齒)에 와 닿는 강도가 과자치곤 세다. 겁도 없이 맷집을 들이대는 녀석이다. 새우깡은 조용히 으깨어지는 과자가 아니어서 부서질 때 ‘바드득’ 하는 소리를 낸다. 제 몸이 부서지는 순간 분을 이기지 못한 새우깡이 이(齒)를 가는 것 같다. 새우깡의 이런 점도 나는 좋아한다.
새우깡에서 내가 ‘남성’을 느낄 때도 있다. 새우깡의 몸을 자세히 보면 연한 빗금이 보인다. 그 빗금에서 나는 건장한 남자의 몸에 찰지게 붙어있는 근육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1971년생 돼지띠인 새우깡은 올해로 마흔여덟 살이 되었다. 한창 활기차게 일할 나이다.
새우깡 한 봉지를 울면서 먹은 기억도 있다. 어느 해 겨울, 대구 시내의 사립중학교에서 영어교사 한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두고 타지에서 근무하는 나로서는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가장 단정해 보이는 옷을 입고 면접을 보러갔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내 간절함을 담았다. 면접을 보고 교장실 문을 나서려는데 교장선생님이 “잠깐!” 하며 나를 불러 세웠다. 실은 한 사람이 내정되어 있는 상태이고 이런 면접은 절차상 필요한 일이었다며, 선생님의 진실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 사실대로 말한다고 했다.
교정에 들어설 때 조금씩 흩뿌리던 눈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길을 걸어 나오며 이 세상에는 내가 열심히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는 걸 느꼈다. “네 손에, 그리고 네 가방에 들어있는 것 말고는 아예 넘보지 마라.”고 누군가 말하는 듯했다. 기회를 얻을 수 없다는 게 슬펐다. 눈물을 닦으려고 손수건을 찾는데 가방 속에 새우깡이 보였다. 그것이야말로 확실한 내 것이었다.
새우깡 봉지에 그려진 빨간 새우를 보고 있으면 갑각류의 슬픔이 느껴진다. 골격을 밖에 둔 갑각류는 몸이 마디로 이루어져있어 움직일 때마다 제 몸의 마디를 꺾어야 한다. 스스로 꺾지 않으면 꺾이고 만다는 걸 일찍이 깨친 부류다. 겉껍질은 단단하지만 그 속은 연한 살로 채워져 있다. 봉지에 떠 있는 새우 또한 제 속살을 지키기 위해 바짝 웅크리고 있다. 그 모양이 어깨를 움츠린 채 살아가는 소시민과 닮았다. 우리가 새우깡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마트에서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를 달랑 사들고 나서는 중년남자를 종종 본다. 빵빵하게 부풀어있는 봉지를 만지면서 ‘나도 이렇게 자신만만하던 때가 있었지.’하며 회상에 잠길지도 모른다. 수주 한 잔을 털어 넣고 새우깡 두어 개 깨물면서 새우깡만큼 자신이 단단했더라면 삶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새우깡을 반 봉지쯤 비웠을 무렵 그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면서 “그래, 깡으로 버텨보는 거야.”하며 새로운 다짐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의 아름을 ‘새우봉’이나 ‘새우꽝’으로 짓지 않은 게 고맙다.
새우깡에 대해 글을 쓴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또 한 봉지 뜯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