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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꿰둟다
제1부 초기•부파 불교의 수행론
제1장 초기불교의 수행론
12.분별설부와 설일체유부의 이상향 16
분별설부와 설일체유부의 이상은 무엇인가요?
⁕ 일반적으로 생의 목표는 삶의 의미를 결정짓는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생의 목표를 크게 아라한, 보살, 선종에서의 깨달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아라한이 생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일상의 지식이 큰 의미가 없다. 아라한이 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살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일상의 지식이 큰 의미가 있다. 그 지식들은 모두 중생을 도와주고 교화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생의 목표에 따라서 삶의 의미와 내용이 달라진다.
분별설부와 설일체유부의 최고 이상향은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윤회의 족쇄를 모두 끊어 버린 이들이다. 어떠한 족쇄인가? 분별설부에서는 10가지 족쇄를, 설일체유부에서는 98개의 족쇄를 말한, 물론 이 두 부류에는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다만 설일체유부는 법수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0가지 족쇄 중 앞의 세 가지, 곧 유신견(有身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의심(疑心) 등이 족쇄를 끊으면 ‘해탈의 흐름에 든 자’, 즉 수다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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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 가지 족쇄
해체해서 봐야 깨닫고 성자가 되고 유신견이 극복된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실현한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의 성자들을 10가지 족쇄를 얼마나 많이 풀어내었는가와 연결 지어서 설명한다. 먼저 열 가지 족쇄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⓵ 유신견(有身見): 자아가 있다는 견해. 중생을 중생이게끔 기만하고 오도하는 가장 근본적인 삿된 견해로, 고정불변하는 자아 혹은 실체가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경에서는 오온의 각각에 대해서 4가지로 자아 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⓶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형식적 계율과 의례의식을 지킴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
⓷ 의심[疑]: 불. 법. 승, 계율, 연기법 등을 회의하여 의심하는 것
⓸ 감각적 욕망: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⓹ 적의: 반감, 증오, 분개, 적대감 등을 뜻하며 성내는 마음[嗔心]과 동의어이다.
⓺ 색계에 대한 탐욕: 색계 禪(초선부터 제4선까지)으로 실현되는 경지에 대한 집착.
⓻무색계에 대한 탐욕: 무색계 禪(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으로 실현되는 경지에 대한 집착.
⓼ 자만[慢]: 내가 남보다 뛰어나다, 동등하다, 못하다 하는 마음.
⓽ 들뜸[掉擧]: 들뜨고 불안한 마음.
⓾ 무명(無明[: 사성제를 모르는 것
이 가운데서 ⓵유신견 ⓶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⓷ 의심 ⓸ 감각적 욕망 ⓹ 적의, 이 다섯은 아래의 [욕계에서] 생긴 무더기 등을 결박하기 때문에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라 부른다. 그리고 ⓺ 색계에 대한 탐욕 ⓻ 무색계에 대한 탐욕 ⓼ 자만 ⓽ 들뜸 ⓾ 무명, 높은 단계의 족쇄[上分結]라 부른다.
아비담마 문헌의 여러 곳에서는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처음의 셋을 보아서[見견], 버려야 할 법들이라고 정리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닦아서[修수] 버려야 할 법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봄[見]과 닦음[修]은 다시 견도와 수도라는 술어로 주석서들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으며, 견 혹은 見道견도에 의해서 예류자가 되고 수 혹은 修道수도의 성취정도에 따라서 차례대로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2) 족쇄와 성자
예류자는 유신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의심의 세 가지 족쇄가 완전히 풀린 성자이고, 일래자는 이 세 가지가 완전히 다 풀렸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 욕망과 적의의 두 가지 족쇄가 아주 엷어진 성자이다. 불환자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완전히 다 풀려나간 성자이고, 아라한은 열 가지 모든 족쇄를 다 풀어버린 성자이다.
유신견은 오온을 나라고 내 것이라고 국집하는 견해이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존재를 온. 처. 계. 근. 제 연으로 분석하고 해체해서 설하셨다. 이렇게 해체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존재에서 자아니 대아니 참 마음이니 우주니 실상이니 하는 따위의 실체가 있다는 관견[管見]을 척파하시기 위한 것이다. 실체가 있다고 국집하는 견해를 통틀어 유신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신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제 아무리 날고 기어도 깨달음의 초보 단계인 예류자에게도 미치지 못함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초기불교 교학은 존재를 온. 처. 계. 근. 제. 연으로 해체해서 보아 이들에 대해서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 혹은 염오–이욕–소멸–고요–최상의 지혜-깨달음-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해체해서 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37보리분법을 말씀하셨고 그것은 팔정도로 귀결된다.
(3) 다른 부류에 의한 성자들의 경지
“여덟 가지 증득[等至등지, 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8가지 본삼매을 말함]얻은 비구가 통찰지를 중히 여기고 사마타로 명상하면서 어떤 특정한 무색계의 증득을 기초로 하여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도와 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가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에는 ⓵‘법을 따르는 자’라 하고,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에 머물 때는 ⓹‘몸으로 체험한 자’라 하고, 마지막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⓺‘양면으로 해탈한자’라 한다.
여덟 가지 증득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색계 4禪만을 얻은 자가 오직 통찰지를 중히 여기고 위빳사나(유위법들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로 명상하면서 상카라들만을 명상하거나 혹은 네 가지 색계禪 가운데 어떤 하나를 명상하여 도와 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가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에는 ⓵‘법을 따르는자’라 하고,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에 머물 때에는 ⓶‘견해를 얻는 자’라 하고, 마지막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⓷‘통찰지로 해탈한 자’라 한다.
여덟 가지 증득을 얻은 자가 믿음을 중히 여기고 사마타로 명상하면서 어떤 특정한 무색계의 증득을 기초하여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도와 과를 얻은 경우가 있다. 그가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에는 ⓸‘믿음을 따르는 자’라 하고,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에 머물 때에는 ⓹‘몸으로 체험한 자’라 하고, 마지막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⓺‘양면으로 해탈한 자’라 한다.
여덟 가지 증득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색계 4선만을 얻는 자가 오직 믿음을 중히 여기고 위빳사나로 명상하면서 상카라들만을 명상하거나 혹은 네 가지 색계禪 가운데 어떤 하나를 명상하여 도와 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가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에는 ⓸ ‘믿음을 따르는 자’라 하고,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에 머물 때에는 ⓻‘믿음으로 해탈한 자’라 하고, 마지막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⓷‘통찰지로 해탈한 자’라 한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모두 7가지가 된다
⓵ 법을 따르는 자: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
⓶ 견해를 얻은 자: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
⓷ 통찰지로 해탈한 자: 아라한과
⓸ 믿음을 따르는 자: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
⓹ 몸으로 체험한 자: 예류과부터 아라한도까지의 여섯 단계
⓺ 양면으로 해탈한 자: 아라한과
⓻ 믿음으로 해탈한 자: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
한편 『앙굿따라 니까야』 「공양받아 마땅함 경」에는 성자의 경지가 모두 10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열 사람은 공양받아 마땅하고, 선사받아 마땅하고, 보시받아 마땅하고, 합장받아 마땅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福田]이다. 무엇이 열인가?
여래. 아라한. 정등각, 벽지불,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 통찰지로 해탈
[慧解脫]한 자, 몸으로 체험한 자, 견해를 얻은 자, 믿음으로 해탈한자, 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 종성(種姓)이다.”
“‘종성(種姓)’이란 공부지음을 성취하는 강한 위빳사나의 마음을 갖춘 자로 예류도를 성취하는 무간연(無間緣)이 된다.”
아비담에서 종성(種姓)은 성자의 반열에 드는 순간의 마음인데,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예류도를 얻기 바로 전 찰나에 범부의 이름을 버리고, 성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찰나를 종성이라 부른다.
한편 『상윳따 니까야』 「한 번만 싹 트는 자 경」 (S48:24)에는 모두 12가지의 성자의 경지가 나타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기능을 완전하게 하고 완성하기 때문에 ⓵아라한이 된다. 이보다 더 약하면 ⓶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⓷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⓸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⓹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⓺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⓻ 일래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⓼ 한 번만 싹 트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⓽ 성스러운 가문에서 성스러운 가문으로 가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⓾ 최대로 일곱 번만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⑪ 법을 따르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⑫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된다.” (S48:24)
몇 가지 술어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는 수명의 중반을 넘기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인데 이것은 세 가지가 있다. ⓵ 어떤 자는 1000겁의 수명을 가진 무번천에 태어나는 날에 아라한과를 얻거나 첫 날에 얻지 못하면 처음의 100겁 안에 얻는다. 이것이 첫 번째 경우이다. ⓶ 그렇지 못하면 200겁 안에 얻는다. 이것이 두 번째 경우이다. ⓷ 그렇지 못하면 400겁 안에 얻는다. 이것이 세 번째 경우이다.’”(SAiii.143)
“’⓸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란 노력 없이, 피로함이 없이, 쉽게 열반에 드는 자란 말이다.” “노력 없이 아라한과를 얻는 것을 말한다.”(SAiii.143)
“‘⓹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란 노력을 하여, 피로하고, 어렵게 열반에 드는 자란 뜻이다.”(DA.iii.1030)
한편 『앙굿따라 니까야』 「정력적인 노력 경」에서 세존께서는 “몸에 대해서 부정함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을 가지고, 온 세상에 대해 기쁨이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해서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안으로 죽음의 인식이 잘 확립되어 있는” 자를 ⓹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라고 설하고 계시고, 네 가지 禪을 잘 닦은 자를 ⓸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계속하여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 의 설명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⓼ 한 번만 싹 트는 자’란 예류자가 된 뒤에 한 번만 더 자기 존재를 태어나게 한 뒤에 아라한됨을 얻는 자를 말한다.” (SA.iii.238)
“‘⓽ 성스러운 가문에서 성스러운 가문으로 가는 자’란 두 번 혹은 세 번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끝을 만드는 자를 말한다.”
“‘⓾ 최대로 일곱 번만 다시 태어나는 자’란 최대로 일곱 번만 다시 태어나지 여덟 번째 존재란 없는 자를 말한다.”
“⑪ 법을 따르는 자의 도리는 예리하며, 강한 지혜를 수반한다. 그는 자극을 받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오염원들을 자르는데 마치 날카로운 칼로 파초의 중기를 자르는 것과 같다.
⑫ 믿음을 따르는 자의 도는 예리하지 않으며, 강한 지혜를 수반하지 않는다. 그는 자극을 받고 노력하여 오염원들을 자르는데, 마치 무딘 칼로 파초의 줄기를 자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오염원들의 소멸에 있어서 이들의 차이는 없다.”
(SA.iii.235)
----이상은 각묵 스님의 <초기불전의 이해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삼보를 믿고 신뢰 하는 것이 불교 신행의 첫걸음인 이유는?
⁕ 부처님은 법을 깨달으신 분이고, 법은 곧 무아(無我)와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법은 이 세상의 행복과 불행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업은 원인이고 행복과 불행은 결과이다. 현재는 과거의 업에 의해, 미래는 현재 짓는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에 인과에 의해 발생한 모든 현상은 스스로의 특성[自性]이 없고 단지 인연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이를 무아(無我)라 한다.
이와 같은 고귀한 법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 유지. 발전시키는 이들이 바로 승가(僧家)이다. 이처럼 무아와 연기로 이뤄진 세계와 중생을 바로 알고 집착을 끊어 낸 부처님과 법, 그 뒤를 따르는 승가, 이 삼보를 믿고 신뢰하는 것은 불교 신행의 첫걸음이다.
유신견에 대하여 교재를 중심으로 정리해보세요
⁕ 유신견(有身見)은 이것은 오온(五蘊)을 ‘참나’라고 믿는 견해이다. 몸은 명신(名身)과 색신(色身)으로 이루어지는데, 오온은 이 둘을 합한 것이다. 또는 몸 안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견해이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오온이 참나’라고 믿는 견해에 해당한다. 그러나 오온은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오온무아(五蘊無我)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를 견도(見道) 또는 수다원이라 한다.
계금취견에 대하여 정리해 보세요
⁕ 무아와 연기로 이뤄진 세계와 중생을 바로 알고 집착을 끊어 낸 부처님과 법, 그 뒤를 따르는 승가, 이 삼보를 믿고 신뢰하는 것은 불교 신행의 첫걸음이다.
이 시작점에서 잘못된 흐름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계와 금기에 대한 오해[戒禁取見]다. 본래 금계(禁戒)는 자이나교의 수행이다. 재가자는 작은 금계, 출가자는 큰 금계의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한다. 금계의 내용은 각각 다섯 가지인데, “평생 여자에게서 물건을 받지 않는다.” “일생 동안5리 밖을 나가지 않는다”라는 등의 서원이다. 자이나교도들은 이 같은 고행의 서원을 지킴으로서 해탈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불교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정화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만으로 해탈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 해당된다. 하지만 진정한 불자라면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신.구.의 삼업을 팔정도를 통해 정화해야만 한다. 이것만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심에 대하여 정리해 보세요
⁕ 의심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와 인과(因果)에 대한 의심이다.
부처님은 법을 깨달으신 분이고, 법은 곧 무아와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이 세상의 행복과 불행의 원인에 대한 것이다. 업은 원인이고 행복과 불행은 결과이다. 현재는 과거의 업에 의해, 미래는 현재 짓는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기에 인과에 의해 발생한 모든 현상은 스스로의 특성[自性]이 없고 단지 인연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이를 무아라 한다.
견도의 기준에 대하여 교재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세요
⁕ 오온은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이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오온무아(五蘊無我)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를 견도(見道)
또는 수다원이라 한다.
수도의 기준이 되는 일곱가지 족쇄[매듭,결]에 대하여 설명을 붙여보세요
⁕ 일곱가지 족쇄는 감각적 욕망, 악의,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아만, 들뜸, 무명이다. 이 일곱가지 족쇄는 아라한도에 이르러 끊어지고, 이 수행을 수도(修道)라 한다.
무학의 아라한이 되면 견혹과 수혹이 사라지는데 견혹과 수혹에 대하여 설명해 보세요
⁕ 유신견, 계금취, 의심의 세 가지 족쇄는 견혹(見惑) 또는 보아서 버려지는 법들이고, 나머지 일곱 가지 족쇄는 수혹(修惑) 또는 닦아야 버려지는 법들이다. 그러므로 견혹은 견도에 의해, 수혹은 수도에 의해 소멸되고,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아라한은 무학(無學)이라 한다.
사성제의 이해를 견도 사성제의 수행을 수도 사성제의 완성을 무학이라 하는데 [초전법륜경]을 중심으로 설명해보세요
⁕ 사성제(四聖諦)를 이해한 것을 진리의 앎이라 하고, 사성제의 수행을 실천의 앎이라 한다. 나아가 사성제가 성취된 것, 즉 열반이 실현된 것은 실천되어진 앎이라 하는데 견도. 수도. 무학도는 이들의 다른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초전법률경』에서 설하신 사성제의 이해를 견도, 사성제의 수행을 수도, 사성제의 완성을 무학이라고 한다.
개인발표 주제 1
신앙행위의 오해 즉 불교적 계금취견에 대하여 신행가운데 격은 예 한 가지를 들어 이야기 나누어 보세요
개인발표 주제 2
의심은 왜 생기며 의심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 나누어 보세요
<본 논제는 등현 스님의 [불교를 꿰둟다] 를 보고 정리하였습니다>
---2567. 3. 21. 혜연 무구행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