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경험담>
바라보니 아름다웠더라
이명동 집사
나와 퇴계원 교회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 되었더라. 생각해보면 훈훈한 얘기로 마음을 채운 아름다운 시절이었는데… 한국삼육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로 퇴계원 교회를 찾아 집을 나섰다. 토요일에 예배드리는 안식일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산 밑 작은 교회당, 그곳에는 예수님 미소를 닮은 청년 박병수, 우광천(우홍정), 손기판. 그들이 초등학생을 모아놓고 신나게 다윗과 골리앗 얘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냥 바라보니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성경퀴즈 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탔다는 청년 성경호는 자존감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초등학교 동창생들로 참 끈끈한 우정으로 뭉친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하던 시절, 예배 후에 우리는 집에 가지 않았다. 뒷동산에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며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재수라는 막다른 선택, 학원조차 갈 수 없는 형편이라 누우면 발끝이 닿는 골방에서 책과 씨름해야했고, 아이들 과외 공부를 시키며 돈을 벌어야했던 내게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알려준 고마운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남자 청년들이 활기찬 활동으로 끌어가던 분교 활동에는 조용한 음성과 웃음으로 힘을 보태던 김영희 언니가 있었다. 내 고등학교 3년 선배였던 김영희 언니는 남자들 속에서 내가 곁을 줄 수 있는 고마운 이웃이었다.
어느 안식일, 이미 안식일 학교를 시작했음직한 늦은 시간에 교회로 가고 있었다. 우연히 신정현을 만났다. 신정현은 기차 통학을 하며 알고 지내는 동구여상 출신으로 나보다 한두 살 어린 친구였다. 그냥 나도 모르게 말했다.너, 나하고 교회에 갈래?난 그 말을 왜 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그런 말을 한 적이 그 때 이후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어’, 그런데 의외의 대답 알았어. 이거 집에 두고…손에 들고 있던 돌돌 말은 전지를 보여 주며 제 집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신정현은 나보다 훨씬 열심이었다. 안식일 오후면 전지에다 직접 쓴 찬미가 괘도를 말아서 옆구리에 끼고 신하촌 가난한 어린이들을 찾아 분교 활동을 나가곤했다. 나무 가지에 걸린 괘도에는 어린이 찬미가뿐만 아니라 당시 꽤나 많이 불렀던 에델바이스 같은 노래도 있었다. 놀거리도 간식거리도 없던 가난한 아이들이 코를 훌쩍이며 모여 앉아있던 나무 그늘 아래에는 우리들의 청춘도 있었다. 바라보니 정말 아름다웠다.
신정현은 송현정을 데리고 왔다. 송현정은 밝고 생활력이 아주 강한 버스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청년이었다. 신정현이 자기 동생 신지현을 데리고 왔다. 신지현은 자기 친구 박상철을 데리고 왔다. 퇴계원 교회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청년들이 젊어졌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가끔은 심술도 부리고 불평도 하는 날이 많아졌지만, 늘 내말에 웃음으로 달래주시던 박노선 장노님!! 감사합니다.
그 무렵 영월 청년으로 기타 잘 치는 멋쟁이, 유난히 눈웃음이 많은 이경모가 삼육대학 우유처리장에 근무하기 위해 내 자취집 옆방으로 이사를 왔다. 신정현이와 송현정이 기타를 배운다며 이경모씨 방에 드나들더니 어느새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이경모와 신정현이 결혼을 하고 떠났다.
퇴계원 군부대에 근무하던 조광인 하사는 진도 출신의 순박한 청년이었다. 제대하는 날까지 안식일 문제를 해결하느라 무던히도 애썼다. 제대하기 하루 전날 볶음밥을 사주니 돼지고기가 들었다고 안 먹어서 나를 속상 하게 했다. 그렇게 철저하게 지킨 건강으로 지금도 기운이 넘치는 모습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니 좋다.
어린이 성경학교를 끝내자마자 청년으로 급성장한 착한 박옥자는 퇴계원 교회 1등 신부감, 며느리감이었는데,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신랑을 데리고 왔으니 이 얼마나 큰 횡재란 말인가!! 중동으로 돈 벌러 갈 계획을 세운 손기판 청년은 내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며 찾아왔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 청년에게 배우는 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도 정말 열심히 했다. 내가 기분 울적해 하는 날이면 야외전축을 무기한 빌려 주기고 했다. 그에게는 재산 목록 1호였을 텐데 말이다.
송현정은 퇴계원 교회 청년을 마다하고 다른 청년을 만나 결혼을 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가고… 나 또한 대학을 졸업하고 퇴계원을 떠났다. 동성학교로, 다시 안면도 안남중학교로… 내가 어린이 성경학교에 데리고 다녔던 정광재, 정혁재, 그리고 정은명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뻤다. 하지만 그 무렵 들려오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도 있었다. 신○○, 박○○이 박명호파로 넘어갔다는 소식! 정○○, 정○○ 형제도 그리로 넘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박○○은 그 파를 소개하는 녹음테이프를 참 열심히도 내게 보내왔다. 그들은 나를 그리로 데려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 교장 선생님(이성근 장로)이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정도로… 그 후 퇴계원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매 안식일 학생 전도사님을 비롯한 모든 교인들의 고픈 배를 채워 주시던 박노선 장노님, 사모 김정순 집사님의 맛있는 점심이 그리웠다. 순하기만 하던 일규와 똑똑하고 야무진 문규도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었다. 낯설었다. 아직 교적은 퇴계원에 있는데 내 교회가 아닌 것 같았다. 주눅 들고 어색한 발걸음을 교회 안으로 옮기면 거기에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반겨주시는 박노선 장노님 내외분과 하두이 집사님 그리고 권점순 집사님이 계셨다. 교회에서 자라 일가를 이루고 멋진 집사가 되어 활동하는 반가운 얼굴, 박병철, 박옥자 집사가 있었다. 낯선 곳을 헤매며 살다 지친 몰골로 찾은 고향에서 아직도 대문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어머니를 만나는 감격이라고나 할까… 고향을 지키는 큰 오라버니 내외 같은 그 분들이… 만나서 나누는 그 정겨움을 바라보니 진정 아름다웠더라. 이제는 독거노인이 되어 살고 있는 내게 자칫 빈 가슴에 일렁이는 찬바람으로 허전했을 그 마음의 방과 방을 따뜻한 웃음과 얘기,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울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말이다.
아직도 나는 박흥식 산소 밑 작은 교회당을 꿈에서 찾아간다.
바라보니 마냥 아름다웠던 젊은 그들과 나의 풋풋함이 그리워서…
(교적 40번, 사릉중앙교회⦁구리시 사립도서관 영어 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