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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환 / 강화 이웃사촌 촌장
오형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시월 심도학사에서였다.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심도학사에 살며 길희성 선생님을 돕고 있던 오형을 만나 금방 마음이 통해 친구가 됐고 내가 강화에 와 정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오형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먹을 것을 자급자족하고 녹색의 삶을 실천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진정한 씨알이다. 내가 씨알 사상을 얘기 하니 그게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 말뿐인 나는 머쓱하기도 하고 감동이 되어 평생 동지로서 함께 하기로 하고 실제로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다.
홍; 만난 지 일 년도 안됐는데 이렇게 친해진걸 보니 오형과 나는 깊이 통하는 게 있나봐요. 오형과 매일 만나니(토끼장을 오형 집 옆에 지어 매일 오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오형과 사귀는 거 아니냐고 놀리기도 해요. 오형은 내가 마음으로 꿈꾸고 말로만 하던 씨알 사상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어 마치 밭에 감춰진 보배를 발견한 것 같아 씨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이런 기회를 갖게 됐어요(사실은 매일 대화를 많이 해서 인터뷰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쓰면 되는데 핑계 김에 한잔 하며 이런 시간을 가졌다)
오: 저는 이름도 없이 숨어사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인데 세상에 나를 알린다니 부끄럽습니다. 태평양이 넓어도 오징어는 오징어 끼리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다니지 않아요. 홍형을 척 보고 오징어인 줄 알았어요(웃음)
홍: 강화에 오시기까지의 삶을 간단히 말씀해 주시지요.
오: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데 아버지가 월남하여 육이오 때 절 낳았어요. 살기가 어려워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9년간 신문을 돌렸어요. 그 때만 해도 신문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아 넓은 지역을 돌아 다녀야 했어요. 새벽 세시부터 다섯 시간을 돌렸지요. 하루에 20키로 이상을 뛰어 다닌 것 같아요. 그 때 연습이 되서 인지 산악 마라톤을 해도 지치질 않아요.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아프신 어머니 약값을 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계속했어요. 신문 돌리다 보니 지쳐 공부도 못해 오학년 때까지 구구단도 못 외웠어요(그 어린 시절 오형이 고생한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오형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막걸리 일 배하고 다시 시작)
홍; 닉네임이 ‘라구요’이던데 무슨 뜻이에요.
오; 강산에의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고 싶다 라구요.”라는 노래에서 따온 거예요. 새우젓 장사하던 아버지가 틈만 나면 연안부두에 가셔서 황해도 고향을 바라보며 북에 계신 부모 형제 생각하며 소주를 마셨어요. 결국 술로 돌아가셨지요. 그 아버지 생각이 나서 ‘라구요’ 라고 했지요. 동생들도 넷이 죽었고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남북이 갈라진 피해를 온몸으로 겪었어요. 그래서 평통사에도 가입해 활동하고 강화에서도 통일운동을 하지요.
홍; 새길 교회를 나가시던데 종교에 대한 말씀도 해주시지요.
오; 본래 집안이 기독교를 믿었어요. 그런데 저는 어려서부터 의심이 많아 맹목적인 신앙을 싫어했어요. 한번은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라는 거예요. 그 때 제가 인천지역 택시조합 노조활동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게 말이 되냐고 따졌지요. 그랬더니 다음 설교시간에 더 강하게 저를 비난하는 거예요. 그래서 또 가서 따졌더니 당신 같은 사람은 교회의 적이니 나오지 말라는 거예요. 기가 막혔지요. 그 동안 새벽기도도 다니고 교회에 열심이었는데 한순간에 이건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홍; 새길교회는 어떻게 나가게 되셨는지요.
오; 교회에서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교회라면 지긋지긋 했는데 새길 평신도 열린 공동체를 보게 됐어요. 목사도 싫고 교회도 싫었는데 평신도와 공동체라는 말이 맘에 들었어요. 가서 보니 목사도 없고 헌금의 대부분을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쓰고 맹신을 거부하고 이해를 돕는 여러 교육 프로그램이 좋았어요. 그 때 박재순박사가 새길교회에서 10주 동안 유영모 강의를 해 주셨는데 빠짐없이 참석하여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홍; 강화도로 이사 오게 된 동기나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요.
오; 마흔 살이 넘으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 도시에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갑갑해지기 시작했어요. 삶을 돌아보니 내 인생인데 내 뜻대로 사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저 돈의 노예로 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돈에서 벗어나려면 자급자족하고 소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시골에 가서 살아야지 그래서 강화로 왔지요.
홍;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신 거군요. 귀농한다면 가족들의 반대도 있고 가난하게 살면 불편한 일도 많을 텐데...
오: 부인에게 열배는 잘 해야지요. 여기 와서 밥도 반찬도 빨래도 청소도 다 제가 해요(오형이 우리 집사람하고 함께 만날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해 아내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해 나도 오형 닮아가려 애쓰고 있다).
가난이 불편한 것은 돈 쓸 곳이 많은데 쓸 돈이 없을 때 생기는 일인데 저는 돈 쓸 곳이 적어 괜찮아요. 가능한 소비를 않지요. 집 주위에 먹을 걸 심어 자급자족하니 식품비가 거의 안 들고 자식 둘 다 결혼했으니 교육비도 안 들고 외식도 안하고 나갈 일 있으면 걷거나 자전거 타고 다니고 물건 사는 일 없고 옷은 허름하게 입고 다니고 사람들 만나면 가능한 집에 오라고 해서 싼 막걸리(유해성분인 아스파타민이 들어 있지 않은 막걸리를 본점에 직접 주문함) 마시고 한 달 용돈 5만원이면 살 수 있어요.
홍; 그래도 수입이 있어야 살텐데...
오; 일주일에 한번 강화에 유기농 우유를 돌려요. 거기서 60만 원쯤 나오고 연금 30만원 나오면 사는데 부족함이 없어요. 일주일에 한번만 일하니 나머지 날들은 다 노는 날이에요(사실은 이런 저런 봉사 활동을 많이 해서 마냥 베짱이처럼 노는 건 아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걸 도시에서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나 몰라요.
홍; 나머지 날들은 무얼 하세요.
오; 모임이나 일이 없는 날은 책 읽고 음악 듣고 친구들 만나지요. 매일 10킬로쯤 달리고 텃밭 가꾸고 벌 키우고(벌이 없으면 인류가 망한다는 말을 듣고 벌 여섯 통을 키우는데 나도 한통 분양 받았다) 벌들이 좋아하는 꽃 가꾸고 홍 형이 기르는 토끼나 닭·오리도 가끔 돌보고 미꾸라지 기르는 웅덩이에 물도 대주고(미꾸라지 기르는 게 소원이라는 새길교회 교인 손 형의 소원을 들어주어 비오는 날 나랑 셋이서 도랑에 나가 미꾸라지를 잡아다 기르고 있다. 울산에서 일하는 손 형은 주말이면 비행기 타고와 미꾸라지도 돌보고 텃밭도 가꾸는데 은퇴 후 강화에 와 우리와 함께 살려고 한다)
홍; 신선이 따로 없네요. 강화에서 여러 활동을 하시고 있는데 나도 그 일들에 공감하여 자칭 조교로 활동하는 걸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개 좀 해 주시지요.
오; 강화에 와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도반 소농 공동체에요. 무슨 일을 하던 자기 먹을 건 자기 이마에 땀 흘려 손수 지어 먹자는 취지로 시작했어요. 벌써 십년이나 됐네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와서 벼농사와 밭농사를 함께 하는데 벼농사는 천 평쯤 논을 얻어 화학비료도 농약도 안 쓰고 우렁이 농법으로 하고 생산량을 늘리려 애쓰지 않고 벌레도 잡초도 함께 자라며 남는 것은 우리가 먹겠다는 소위 태평농법으로 하지요. 농민들이 보면 한심하겠지만 사람 살자고 잡초나 벌레까지 죽여 가면서 농사지을 생각은 없어요.
참가비 10만원 내고 벼 심을 때나 수확할 때 와 일도 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하며 밤늦도록 축제를 하지요. 무슨 일이든 재미가 있어야 해요. 올해는 18 가정이 했는데 내년엔 볼음도(강화에서 배타고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작은 섬)에서 할 생각이에요. 가면 배편 때문에 그 날 돌아오기 어려우니 그 날 밤 함께 모여 얘기하고 놀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람이 흙을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과도 가까워지고 사람답게 되는 것 같아요.
밭농사는 어울림 농장이라 하여 강화특산물인 노란 속 고구마를 재배하는데 이것도 밭을 빌려 지어요. 나는 뭐든 소유가 많으면 삶이 무거워지기 쉽다고 생각해요. 가볍게 살려면 소유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해 제 땅은 여기 집 짓고 살고 텃밭 가꾸는 100평뿐이에요. 일 년에 5만원 내고 심을 때 수확할 때 와서 역시 축제를 하지요. 올해는 38가정이 참가했는데 수확할 땐 강화 풍물패도 부르고 탈춤도 추고 한번 멋지게 놀아볼 거예요.
홍; 저도 두 군데 다 조교로 참여하여 벼 심을 땐 논에 들어가 정지작업도 해보고 비오는 날엔 물꼬를 보려도 가고 고구마도 직접 심고 풀도 매고 했는데 힘들 때도 있지만 갑자기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일 년에 몇 번이라도 가족과 함께 와서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 아이들이 폭력적이 되거나 우울증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흙과 가까이 하는 아이들은 절대 망가질 수가 없어요. 내년엔 다른 농사 계획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오; 홍 형이 제안한 것인데 세계 보건기구가 추천한 열 가지 건강식품이 있는데 그걸 함께 재배해 보려고 해요. 토마토·마늘· 시금치·블루베리 등을 영농 개념이 아니라 자기 먹을 걸 자기가 기른다는 생각으로 도반소농공동체에서 한 방식으로 해볼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먹거리를 잘못 먹어 병원과 약국에 갖다 바치는 돈이 많은데 운동하고 유기농으로 재배한 건강식을 하면 병 걸릴 일 없어요. 저는 수년째 채식을 하고 있는데 너무 건강해요.
홍; 강화 사는 사람들 끼리 모여 강화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고 강화꿈사모를 만들어 활동하고 계신데 소개 좀 해 주시지요.
오; 저는 원래 조직을 싫어해서 무슨 조직을 만들거나 회의 하는 걸 싫어하는데 홍 형이 와서 부추겨 할 수 없이 하는 거예요. 강화의 농민이나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십여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각자 살아온 얘길 하고 프리마켓이라 하여 집에서 쓰지 않는 물건들을 가져와 함께 나누고 시작할 때 탈춤도 추고 노래도 배우고 주제를 정해 토론도 하고 술도 마시고 벌써 십여 차례 모였는데 재미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이해관계를 떠나 마음을 주고받을 줄 알아야 해요. 사람이 순정을 잃으면 점점 괴물이 되지요. 요즘 성폭력이나 묻지마 살인 등은 다 우리가 그들을 버리고 냉대해서 그런 거예요. 도대체 이웃 노릇을 하지 않으니 그런 거예요.
홍; 저도 꿈사모가 좋습니다. 여기 와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정말로 한 형제요 동지라는 느낌이 듭니다. 꿈사모의 첫 사업으로 지역화폐운동을 하려고 한다는데 어떤 것인지요.
오; 강화에 사는 이광구씨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인데 이광구씨를 중심으로 하여 홍 형과 나, 꿈사모가 함께 해야지요. 이 운동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바꾸고 사람의 가치나 노동의 가치를 자본시장이 결정해 주는 대로 따르지 않고 지역 사람들 끼리 서로 대면하여 합의하에 가치를 정하는 거예요. 예컨대 의사와 농부가 만날 때 시장 가치로는 한 시간의 노동가치가 의사가 10이고 농부가 1이면 이걸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서로 합의하에 의사가 자기 가치를 5로 낮추고 농부의 가치를 5로 올려 주는 거예요. 이게 너무 과격하면 8;2, 7;3으로 할 수도 있고요.
이건 몽상 같지만 모든 종교와 성인들이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에요. 사람이 제정신이 들어 사람답게 살려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자본주의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의사가 이런 정신을 갖고 사람의 차별을 인정치 않고 사람을 평등한 사람으로, 사람을 하늘로 대한다면 이건 기적이요 혁명이지요. 우리가 꿈꾸는 것은 이런 인간혁명이지요.
구체적인 계획은 20가정이 최소 20만 원 이상 출자하여 그걸 지역화폐로 바꾸어 농산품·잡화점·학원·미용실 등 지역가맹점 최소 10개에서 사용할 수 있으면 바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홍; 저도 지금까지 아이들을 공짜로 가르쳤는데 형편에 맞게 지역화폐를 내도록 해 이 운동에 참여할까 해요.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데 이 일이 성공한다면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어요. 종교인이든 누구든 말로만 신을 사랑하지 사실은 다 돈의 숭배자인데 정신이 물질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다면 그이야말로 오늘날의 성인일 것 같네요. 그리고 오래전부터 녹색 연합에 가입하시고 녹색당에도 가입하여 녹색 삶을 살고 계신데 한 말씀해 주시지요.
오; 저는 구호만 외치고 삶이 없는 것을 싫어해요. 작은 일이라도 뜻을 세웠으면 실천해야지요. 녹색 삶의 근본은 과소비를 줄이는 거예요. 제가 가난하게 살려는 것도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죠. 탈핵을 말하지만 그러려면 나부터 에너지를 줄여야 해요. 큰 차타고 큰 냉장고 쓰면서 어찌 원자력 반대를 하겠어요. 나는 수돗물 아끼려 빗물 받아쓰는 물탱크를 만들어 쓰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햇빛 온풍기나 온수기를 만들려고 해요. 물론 우유 배달할 때 티코 사용하는 걸 제외하곤 차도 안타고요.
제가 벌을 치는 것도 꼭 꿀을 먹으려 해서가 아니라 환경을 위해서 그러는 거고 고구마 기를 때 비닐을 덮지 않는 것이나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것도 다 그런 거지요.
홍; 저도 오 형 권유로 온 가족이 녹색당에 가입했는데 오 형 말 들으니 저 보고 하는 말 같아 부끄럽네요. 강화에 오니 온통 녹색 세상이라 저는 보기만 해도 행복해요. 실제로 건강도 많이 좋아졌고 마음이 시끄럽지 않고 평화로워요. 언제 화를 냈는지 까마득해요. 녹색적인 삶은 생명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자는 것인데 벌레 한 마리도 소중히 여기는데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더 소중히 여기겠어요. 씨알 사상의 핵심이 생명·평화·상생인데 오 형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씨알이네요. 저도 오 형 집에 매일 오지만 집에 사람들이 참 많이 오는데 무슨 비결이 있어요.
오; 사람 사는데 사람이 없으면 자기 삶이 병들었거나 뭔가 잘못된 것이지요. 사람이 담을 치고 문 잠그고 살면서 정신이 결단나기 시작한 거예요. 나는 가난해서 사람들이 오면 대접할 것도 없지만 김치에 막걸리 내 놓고 자고 갈 사람은 자고 가게 하지요. 집 사람 힘들게 않으려고 빨래 청소 등, 제가 뒤처리를 다 해요. 사람이 더불어 사는 법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에요. 콩 한 알이라도 나누면서 살아야지요. 제가 사랑하는 후배 서정훈목사가 콩세알 농장을 하는데 왜 콩 세알이냐 하면 콩 하나는 내가 하나는 이웃이 하나는 짐승이나 벌레가 먹는다는 뜻이에요. 이런 마음이 회복되면 인류의 문제는 거의 다 해결될 거예요.
홍; 가진 게 많은 나 보다 가진 것 없는 오형이 주는 데는 더 부자네요. 이곳 농민들 하고도 친한데 무슨 비결이 있나요?
오; 귀농한 사람들이 원주민들이 텃세가 있어 정착하기 어렵다는 불평을 하는 소릴 종종 듣는데 내가 하기 달렸어요. 이사 오자마자 땅 측량하여 자기 거라고 울타리부터 치니 누가 좋아 하겠어요. 먼저 다가가고 먼저 주고 겸손히 배우려 하면 누가 싫어하겠어요.
홍; 저도 오 형 조언 듣고 그러려고 노력해선지 평생 사귄 친구 보다 더 깊이 더 많은 친구들을 여기 와서 알게 됐어요. 하실 말씀이 많으실 텐데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시지요.
오; 나도 홍 형이 와서 많은 힘이 됩니다. 세상에 사람이 많아도 진실한 마음을 나누고 같은 길을 가는 동지요 형제라고 여길만한 사람은 아주 적어요. 나는 씨알 사상은 잘 모르는데 홍 형의 씨알 사상을 들으며 내가 크게 잘못 산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자기만 위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속에 갇혀 병들어 죽게 되지요. 자기를 놓고 하늘로 날아올라야 자유와 시원함을 맛볼 수 있어요. 사람은 다 얼마 못되어 죽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자기만 챙기다가 시간이든 목숨이든 재물이든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손에 잔뜩 움켜진 체 죽는 것이 안타까워요. 누구든 강화로 오면 잘 모시겠습니다.
홍(독백); 나는 이제부터 유구무언이다. 삶의 밭에서 싹이 날 때 까지 입에 자물쇠라도 채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