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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행정위원회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종교연합 운동과의 관계에 관한 공식 성명을 결코 그와 같이(as such) 결의한 적이 없다. 한 권의 책이 그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썼으며(B. B. Beach, Ecumenism—Boon or Bane? [Review and Herald, 1974]) 많은 기사들이 수년 간 재림교회 출판사에서 나타났는데, 어드밴티스트 리뷰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이와 같이 명확한 공식 입장이 없지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관점을 분명하게 드러낸 증거는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종교연합 운동과 그 [운동의] 주요(/핵심) 기관인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출현을 전적으로 정죄하지는 않지만 반면에 다양한 양상과 활동에 대하여 비평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연합이 칭찬할 만한 목표와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가졌다는 점을 부인하려고 하는 이는 거의 없다. WCC의 큰 목표는 가시적인 기독교도들의 연합이다. 어떤 재림교인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친히 기도하신 바 있는 연합에 반대할 수는 없다. 종교연합 운동은 더 많은 대화와 더 적은 비평으로 좀 더 다정한 교회 상호간의 관계를 증진시켜 왔고 근거 없는 선입견을 제거하는 일을 도왔다.
다양한 조직들과 활동을 통하여 종교연합 운동은 교회들에 관한 더 정확한 최신 정보를 제공해 왔고, 종교자유와 인권을 위하여 대변해 왔으며, 인종차별주의의 죄악에 대항하여 싸웠고, 복음의 사회경제적 의미에 주의를 이끌어 왔다. 이 모든 일의 의도는 좋았으며 일부 열매는 수용할만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림에서는 그 맹독이 그 이득을 능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 중의 일부를 살펴볼 것이다.
재림신앙(Adventism)-예언적 운동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재림교인들은 확고히 그렇게 믿는다) 역사의 무대에 첫발을 내딛었다. 재림교인들은, 자부심이나 오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재림운동이 요한계시록 14장과 18장의 예언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기별인 “영원한 복음”의 계획된(organized) 선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도구였다고 믿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그에 대한 지역화(focalized)한 예언 해석의 빛으로 자신을 종말론적 지향점을 가진 요한계시록의 “종교연합”운동이라고 본다. 재림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점진적으로 유기적(organized)인 종교적 반대[세력]을 형성할 “타락한”교회 단체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냄”으로써 시작한다. “불러냄”과 더불어 연합된, 세계적인, 즉 “예수의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무리로써 특징지어진(요한계시록 14:12) 종교연합운동 안으로의 적극적인 “불러들임”이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의 강조점은 무엇보다 먼저 교회들의 공동체로 “들어감”에 있고, 그 다음이 집단적 불일치로부터 희망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나옴”이다. 재림운동에 있어서 강조점은 먼저 바벨론적 불일치와 혼란에서 “나옴”에 있고, 그 다음에 지구를 감싸고 있는 재림 가족 내의 연합, 진리, 사랑의 공동체로의 즉각적인 “들어감”이다.
종교연합과 다른 주류 교회를 향한 재림교회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밀러주의자들에 의해 특징지어진) 초기 재림운동이 종교연합의 양상을 가졌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도움이 된다. 즉 그 운동은 여러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이와 같이 재림교회는 여러 교단들로부터 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들은 재림기별을 거절했다. 재림교인들은 자주 출교 당했다. 때때로 재림교인들은 회중의 운명을 감수했다. 관계는 악화되었다. 거짓 이야기들이 돌았고, 그 이야기 중의 일부는 불행하게도 오늘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개척자들은 굳건한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적들은 또 그 만큼 독선적이었다. 그들은 연합시키기 보다는 분리시키는 쪽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의] 진전이었다. 물론 오늘날 교회간의 분위기는 평화적이고 온화하다. 재림교인들이 종교연합과 더불어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 요약된 답변을 주기 위해 노력하기 전에, 종교연합운동이 그 사상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각 계층을 대표하는 모든 종류의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물론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재 300여개 이상의 교회와 교단을 대표하는 조직인 세계 교회 협의회 내의 주류 사상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다루고자 노력할 것이다.
연합에 대한 종교연합의 이해
신약성경은 거룩함과 기쁨, 충실함과 순종으로 특징지어진 진리 안에서의 제한적인(qualified) 교회의 연합을 제시한다(요한복음 17:6, 13, 17, 19, 23, 26). (신조어를 만든다면) “종교연합 열성당원들”은 궁극적인 유기적 연합과 대다수 교회들의 공동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분열의 수치스런 일(/스캔들)”을 강조하는데 마치 이것이 진실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악인 것처럼 말이다. 이단과 배도는 대체로 무시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성전”안으로 적그리스도가 침투할 것이라는, [교회가 겪을] 위협을 보여준다(데살로니가후서 2:3, 4). 하나님의 [마음에 그리고] 있는바 재림 이전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교회는 전 인류를 함께 모아 놓은 대형교회가 아니라, 기독교계의 “남은 자”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믿음을 가진 교회이다(요한계시록 12:17 참조).
비정통적이며 비 그리스도인적인 생활양식이 분리를 합리화하는 하나의 분명한 점이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는 이 점을 놓치고 있다. 교회의 그러한 순결성과 완전성(integrity) 및 그 기별을 보호하고 견지하기(uphold) 위해서는 세속적이며 오류를 안는 연합 보다는 분리와 분열이 더 바람직하다.
더욱이, 재림교인들은 세계 교회 협의회 지도자들이 개인의 성화와 부흥에 거의 강조점을 두지 않는 듯한 사실에 불편[함을 느낀]하다. 이와 같은 [개인의 성화와 부흥에 대한] 강조를 역동적인 그리스도인 삶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 별난 경건주의 유물로 보는 징후들이 있다. 그들은 부드러운(softpedal) 개인의 경건보다는 사회의 윤리(social morality)를 선호한다. 그러나 재림교인들은 개인의 경건의 삶이 사회 윤리를 만들어 가는 재료(stuff)라고 이해한다 (셰익스피어에게 보내는 변증과 함께). 순수하게 개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모든 공식적인 조직의(/조직적) 연합은 진실로 부자연스런(/겉모양만의) 성질의 연합이며 거의 타당성이 없는 연합이다.
신조에 대한 종교연합의 이해
많은 교회 사회(집단) 안에서 관대함(broad-mindedness)은 종교연합의 가치로써 받아들여진다. 이상적 종교연합주의자는, 제안되기는, 신조에 있어서 교의적이 아니며 교리적 견해에 있어서 다소 유동적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신조를 매우 존경하지만 자신의 신조에 대하여는 굳건하지 않다. 그는 겸손하고 교리적 신조에 대해서는 단호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세계교회 운동의 연합에 관한 교리들에 대해서는 예외적이다. 그는 지식은 편파적이다. 종교적인 교리에 대해 오만함을 보이는 행위는 종교연합 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큰 죄(sinful)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칭찬할 만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겸손과 온유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다. 진실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 대답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라고 권고하면서 이 일은 겸손과 존중, 그리고 선한 양심으로(베드로전서 3:15, 16)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연합의 계열(rank)에서는 거의 타고난 부드러움의 위험과 신조의 상대성화(relativization)가 있다. 이단에 대한 전체적(/총체적) 개념이 의심된다. 최근에 심지어 “이교화”의 개념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모든 교단 차원의 진리의 공식(/서술)은 시대 상황에 따른(time-conditioned ) 것이어서 상대적이고, 그러므로 편파적이고 부적절하다는 생각은 어떤 종교연합(운동)의 전형적인 전제이다. 일부 종교연합주의자들은 심지어 교리적 종합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정도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기독교 신조를 일종의 혼합주(cocktail: 위스키, 브랜디, 진 따위의 독한 양주를 적당히 섞은 후 감미료나 방향료(芳香料), 과즙 따위를 얼음과 함께 혼합한 술-역자 주) 개념으로 결합시킨다. 우리는 각 교회가 균형이 맞지 않으며 균형과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 종교연합 운동의 과업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다양성을 극복한 종교연합 운동 내에서는 프레데릭 대왕의 말처럼 아마도 “구원은 자기 할 나름”일 것이다.
재림교인들은 강한 확신이 없다면 교회는 영적인 힘을 거의 갖지 못한다고 믿는다. 종교연합 운동이 급히 쌓아 올린 부드러운 교리의 모래성은 교회들을 삼키고 교단을 죽음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물론 이것은 정확히 열성적인 종교연합 운동주의자들이 희망하는 바이다. 그러나 재림교인들은 이러한 교리적 우유부단함에 대해서는 강력히 저항하여야한다고 느끼며,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영적인 자기 무장해제가 될 것이며 참으로 탈기독교 시대가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대한 종교연합운동의 이해
재림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이 뜻에 대한 절대 무오류의 계시요, 교리들에 대한 권위 있는 계시자요 구원의 역사 속에 활약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행동들에 대한 신뢰할만한 기록으로 본다(기본교리 제 1항 성경 참조). 재림교인들은 성경의 통일성을 믿는다(원문: 성경을 하나의 통일체로 본다). 많은 세계교회협의회 지도자들에게 성경은 표준(/규범적)이 아니고 그 자체는 권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바는 성경의 다양성이며 때로 복음으로부터 신화적 요소를 구별하는 일(demythologization)이 포함한다. 대다수의 종교연합 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경우에서와 같이, 영감은 성경 본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경험에 있는 것이다. 사전배치(事前配置)적(prepositional) 계시는 나가고, 경험은 들어온다.
묵시적 예언은 실제적으로 마지막 때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파루시아(임재를 뜻하는 희랍어-역자 주)에 대한 형식상의 언급이 있으나 아무런 긴급한 의미를 갖지 않으며 복음사명에 대한 종교연합 운동의 개념에는 측정 가능한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 여기엔 종말론적 시력상실의 위험이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선과 악, 그리스도와 사단, 하나님의 말씀과 사기꾼의 거짓말, 충성스러운 남은 자와 바벨론,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의 “대쟁투”라는 구조 안에서 죄와 구속에 대한 성경적 그림을 본다.
재림교인들은, 무엇보다 말씀의 백성이다. 성경의 무조건적인 권위를 믿는 한편, 재림교인들은 성경이 영감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씌워졌으나 사상과 표현 양식이 하나님의 것은 아니라고 인식한다. “성경은 인간의 양식이다. 하나님은 저자로서 대표되지 않았다. . . .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필사자이지 그분의 펜이 아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 많은 종교연합운동가들은 성경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나 사람들이 거기에 반응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와는 달리 재림교인들은 성경 저자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것이다(상동). 양식비평가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판단을 받지 않으시며, 그의 말씀 또한 판단 받지 않는다. 성경에 비교하여 판단을 받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선교와 전도에 관한 종교연합운동의 이해
선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서는 전도 즉 복음의 구두 선언을 강조한다. 종교연합운동가들은 선교가 평화(shalom) 즉 일종의 사회적 평화나 사회의 일치의 확립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다. 재림교인들은 죄의 억압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최우선적 일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모든 경향에 반대한다. 사실 재림교회를 포함하여 구원의 전통적인 견해는 항상 죄로부터 개인들을 구원하는 것이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종교연합운동에서 전도는 주로 억압적인 정권, 기아의 약탈(ravage), 인종차별의 저주, 불의의 착취로부터 사회를 구원하는 것으로 본다.
재림교인들은 개심(conversion)이란 사람이 영적인 거듭남을 통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세계 교회 연합 [내] 사회(circles)에서 대다수의 강조점은 사회의 불의한 구조를 변화시키는, 즉 개조하는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보는 바대로 전도와 해외 선교사업의 영역에서 종교연합 운동의 열매는(혹은 우리가 열매의 결핍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종종 줄어든 전도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는 바울에서 빌리그래함까지), 갈수록 낮아지는 성장과 갈수록 심각해지는 교인 수 감소, 해외 선교사 파송의 급감, 자금 지원 수입의 비례적인 감소이다. 사실 선교사의 외방선교는 주류 “종교연합운동”교회들로부터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로 이동되었다. 선교 운동에 대한 이 같은 커다란 전도의 잠재력 상실을 목도하는 일은 슬프다. 그것도 점점 더 활동적이고 공격적이 되어가는 이슬람의 외방선교의 시대에, 그리고 동양 및 토착 종교들의 각성의 시대에 말이다.
최근의 성공적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1000일 수확 캠페인은 종교 연합운동의 억제된 “공동 선교”(joint mission) 전략을 거슬러 나아간다. 후자는 종교연합 운동의 연구 논문에서는 좋게 들릴지 모르지만, 영혼구원의 결과는 진실로 그곳에 있지 않다. 옛 속담을 약간 각색해 말한 다음 어구는 어느 정도 관련이 된다. “종교연합의 성공은 그 결과를 보아야만 판가름이 된다.”
사회정치적 책임에 관한 종교연합운동의 이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책임에 대한 모든 질문은 복잡하다(complicated). 세계 교회 연합과 다른 교회 협의회(가령, 미국에 있는 미국 교회 협의회: National Council of Churches)는 대개 정치적인 문제로 보이는 일과 많이 관련되어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이 영역에 있어서 훨씬 더 신중하다 (복음주의 교회에 비교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정치적 책임의 영역에서 많은 종교연합 운동의 생각에는 다음 사항이 포함되거나 관련된다.
1. 구원의 세속화
2. 후(後)천년적 견해. 점진적인 정치적 향상과 인류의 사회적 개선과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의 노력을 통한 하나님의 왕국의 지상 건설.
3. 기독교의 현대세계에로의 적응
4. 진보에 대한 진화론의 유토피아적 믿음
5.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여기서는 어떤 형태의 평등주의와 복지상태를 선호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유물론은 아니다.
추측건대 종교연합 운동의 사회활동파들은 재림교회 신앙(Adventism)을 묵시록적인, 하늘에 널려 있는 유토피아적 이상의 파이, [즉 그림의 떡으]로 여긴다. 많은 사회 문제들에 직면하여 재림교인들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다음을 목도하라. 매년 수 백 만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광범위한 병원-의원-의료기관들, 거의 5천여 개 학교를 가지고 지구를 두르고 있는 커다란 교육 제도, 중대하고(acute) 장기적(chronic)인 도움을 요구하는 지역들로 급속하게 범세계적인 교회의 봉사를 확장하고 있는 국제 개발 구호 기구(ADRA). 몇 가지 다른 봉사 활동들이 [더]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시민으로서의 개별 그리스도인의 사회정치적 활동과 법인교회 수준에서의 참여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도덕적 원칙을 취급하고 성경의 방향을 가리키고 그러면서 정치적 지향(directive)을 옹호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과업이다. 세계 교회 연합은 이따금씩 정치적인 실력 행사에 관련해 왔다. 재림신앙이 사회나 정치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치게 될 씨를 뿌리고 있으나 한편 교회는 정치적 투쟁에 얽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진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요한복음 18:36) 말씀하셨으며 그 주인처럼 교회는 “두루 다니며 선한 일을 행”하기를 원한다(사도행전 10:38). 교회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정부를 운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교자유에 대한 종교연합 운동의 이해
세계 교회 연합 초창기에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총회와 더불어 시작하면서 종교자유는 종교연합 운동의 의제에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자유는 종교연합 운동의 연합을 위한 필수적인 선결요건으로 보였다. 1968년에 종교자유 사무국이 세계 교회 연합 본부에 세워졌다. 그러나 더욱 최근에 와서는 종교자유에 대한 세계 교회 연합의 입장이 다소 모호해져왔다. 1978년에 사무국이 폐쇄되었는데 자금 부족이 주된 이유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서 조직된 종교연합 운동에 있어서의 종교자유 문제에 주어진 우선순위를 말해 준다.
오늘날 종교연합운동의 경향은 종교자유를 모든 다른 인권을 지지하고(/떠받치고) 있는 기본권[이라는 개념] 대신에 단순히 인권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세속인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접근[법]이다. 세속주의자들이나 인본(/인도)주의자들은 종교자유의 신념을 다른 인간 활동과는 (동)떨어진 혹은 저 너머에 있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종교자유로 하여금 모든 참된 자유의 후견인(guardian)이 되게 하는 종교자유 그 특유의 성격을 잃을 위험이 여기에 있다.
역사적으로 종교의 불관용을 중화하고(/상쇄: neutralize), 종교자유를 위하여 일해 온 것은 권력과 분파주의의 균형(/조화)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식적 종교 연합은 오직 무력으로써만 존재해 왔다. 이처럼 사회에는 연합과 종교자유 사이에 고유의 긴장이 있다. 사실 마지막 사건에 대한 종말론적 그림(/상황)은 종교적 핍박의 극적인 장면이며, 이는 강력한 묵시록적 바벨론의 세력들이 남은 교회를 압박하여 통일된 배도의 거푸집(/형틀) 안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종교자유의 전망은 점차적으로 흐려지고 있는데 이는 어떤 종교연합 활동가들이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바를 행사하는) 다른 종교-정치적 성격(religio-political stamp)을 가진 신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종교자유의 제약을 아주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닫는 때이다. 더 나아가 어떤 종교연합운동의 지도자들은 연합과 국가 건설, 그리고 전체로서의 사회의 ‘선’을 증진하기 위한 혁명적 상황에서 종교자유가 간섭(interfere)을 받아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것으로 본다.
예언 해석의 영향
우리가 지금까지 기록한 것은 재림교인들이 조직된 종교연합 운동에 참여하는 일과 관련한 몇 가지 유보사항(/단서: reservations)을 밝힌 것이다. 다른 교회들과 종교연합 운동을 대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는 위에서 언급한 고려사항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예언 해석에 따라서 결정된다. 뒤를 돌아서서, 재림교인들은 교황권에 의한 수세기의 핍박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본다. 그들은 국가나 기성 교회들에 의한 차별과 많은 불관용[의 역사]를 본다. [이제는] 앞으로 되돌아서서, 재림교인들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손잡고 오만하며 잠재적으로는 핍박하는 방법으로 종교-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위험을 본다. 재림교인들은 거대(jumbo) 교회가 아닌 남은 자들을 충실한 하나님의 교회로 본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 남은 자의 핵심(nucleus)으로써 팽창하는 마지막 시대의 배도한 기독교 [세력]과 연결되지 않으려 하는 자들로 본다.
현재를 볼 때, 재림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고,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초청하며, 예수의 믿음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왔음을 선포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로 생각한다. 이 기별의 일부 국면은 인기가 없다. 어떻게 재림교인들은 그 예언적 명령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을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그들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동기(부여)와 자신의 긴박감과 자신의 일하는 방법을 지킴으로 그 신성한 명령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보편적 협력?
재림교인들은 보편적으로 협력해야 하는가? 재림교인들은 권위 있는 복음이 선포되고 긴급한 인간의 필요가 충족되는 한 협력하여야 하는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회원으로 얽히는 것은 전혀 원하지 않으며, 교회의 확실한(distinct) 증언을 희석시킬 수도 있는 모든 타협적인 관계를 거부한다. 그러나 재림교인들은 “양심적인 협력자”가 되기를 원한다. 협력 기구로서의 종교연합 운동은 용납할 만한 국면들을 갖고 있으나 교회의 유기적 연합을 위한 기구로서는 훨씬 더 미심쩍다(suspect).
다른 종교 단체와의 관계
1926년으로 돌아가서, 종교연합 운동이 널리 알려 지기 오래 전에, 대총회 행정위원회는 지금은 대총회 복무지침(0 75)의 한 부분이 된 중요한 한 성명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중요한 종교연합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성명의 관심사는 선교 현장과 다른 “선교 협회들”(missionary societies)과의 관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성명은 지금은 더 확대되어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 조직들”(religious organizations)을 취급한다. 거기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모든 기관을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신성한 계획의 일부로서 인정하며, . . .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참여하는 다른 공동체 안의 그리스도인 남녀들을 매우 존중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재림]교회가 다른 교회들을 취급할 때에는 “그리스도인 예의와 호의, 그리고 공정함”이 [그 태도를] 지배해야 한다. 오해와 알력을 피하기 위한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성명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사람들”(people)이 재림을 “문 앞에까지”가까이 이른 사건으로써 강조할 특별한 “책임”을 맡아 “성경에 계시된 대로 주의 길”을 준비시키고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성한 “사명”은 재림신자들이 그들의 증언을 “어떤 제한된 지역”에 한정할 수 없도록 하며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어느 곳에서나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복음으로 이끌도록 촉구한다.
1980년에 대총회는 교회 상호관계 협의회(Council on Interchurch Relations)를 설립하여 [재림]교회의 다른 종교 단체들과의 관계에 대해 총괄적으로 지도하고 감독하고자 했다. 이 협의회는 이따금 도움이 된다고 느낀 다른 종교 기관들과의 대화를 인가했다.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가교자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의 다리(ecclesiastical bridges)를 날려버리고(/폭파시키고) 무책임한 “그리스도인 코만도”(2차 대전 당시 연합군 특별기습부대-역자 주)로(/처럼) 일하는(serve) 것은 훨씬 더 단순하다. 엘렌 G. 화잇은 “목사들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접촉하는 데에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복음전도, 562). 재림교인들은 담으로 두른 게토(유대인 강제 거주 지구-역자 주)에 살면서 오로지 자신들끼리 말하고, 자신들 만을 위하여 출판하고, 고립주의의 분파정신을 나타내 보이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다. 물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요새 안에서 소통의 도개교(跳開橋: 옛날 성의 해자에 걸쳐 놓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리-역자 주)가 모든 거두어 들여진 채 사는 것은 더 편안하고 안전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람은 때때로 위험을 무릎 쓰고 신속한 복음전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웃들에게로 들어가서는 가능한 한 많은 “죄수들”을 붙잡은 뒤에 그들과 함께 (그) 요새로 사라진다. 엘렌 G. 화잇은 고립주의자의 사고방식을 신용하지 않았다. “우리의 목사들은 다른 교파의 목사들과 가까이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라. 그들에게는 엄숙한 책임이 지워져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이와 같은 양떼의 목자들에게 깊고도 열렬한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교회증언, 6권, 78).
참관인 관계의 유용성
다양한 (국가적, 지역적, 세계적) 교회들의 협의회와 맺을 수 있는 최상의 관계는 참관인-상담역(consultant) 신분으로서의 관계라는 점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계속하여 정보를 얻고, 동향과 발전(사항)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기독교[계] 사상가들과 지도자들을 익히도록 해 준다. 재림교인들은 입회하여 [우리] 교회의 입장을 알릴 기회를 얻는다. 회원이 되는 일은 권할 만할 일이 아니다. 그러한 종교연합 기관들은 대개 “중립”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종 꽤 특별한 목표와 정책을 갖고 있어서 사회정치적으로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advocacy roles). (기껏해야) 반쪽 마음을 가진 회원들이나 (많은 회원 교회들이 그런 것처럼) 형식상의 회원들이나 종종 (불가피하게 그런 경우가 되는데) 반대하는 편에 있는 회원이 것은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
지역 차원에서는, 더 실제적이면서 덜 신학적인 문제를 취급하게 되기 때문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의 몇 가지 유형을 조심스럽게 구상해 볼(envision)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목회자 협의회/친교모임(fraternal), 지역 교회 기구들(organizations), 성경 연구 그룹들, 공동체의 필요를 조사하고 지역 현안 해결에 도움을 줄 특정 그룹이나 연결망과 같은 조직된 관계(organized relationships)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재림교인들은 단순히 지역사회를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어떤 책임으로부터 물러서는 이들로써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근년에 재림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타 교회 대표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이러한 경험은 유익했다. 상호존중감이 싹텄다. 진부한 고정관념(stereotypes)과 부정확하고 사실이 아닌 교리적 인식이 제거되었다. 선입관(/편견)은 허물없이(unceremoniously) 버려졌다. 신학적 도구와 이해(understandings)는 예민하게 되었다(sharpened). 새로운 차원이 인정되었고 선교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펼쳐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재림기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강화되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재림교인들이 열등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인 것과 교회의 신학적, 조직적 기초가 분명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놀라운 특권이다.
새로운 세상(oikoumene)의 전령
재림교인들은 오로지 참되고 항구적인(lasting) 세상의 전령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오는 세상(헬라어, 오이쿠메네)”즉 우주적인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到來)를 언급하고 있다. 결국 그것이 “종교연합 운동”재림교인들이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다른 종교연합 운동은 단명(短命)하는 것이다(ephemeral). 한편,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일에 전력하는”것은 그리스도인 의무이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베드로전서 3: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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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 문서는 교회 내부적 사용을 위하여 기획되었는데 ‘진보를 위한 양식(Pattern)’에서 처음 등장했고, 월터 레이먼드 비치와 버트 비벌리 비치에 의한 ‘교회조직의 역할과 기능’(The Role and Function of Church Organization)은 버트 B. 비치에 의하여 저작되었고 1985년 6월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대총회 회기와 연결하여 발표되었다. 이 문서는 대총회 공보 및 종교자유부에서 이용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