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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의: 마리아의 성성
1. 도입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도록 마리아는 무한한 성성으로 풍요롭게 되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 (루카 1,28) 라고 인사한다. 이러한 영적인 부는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를 암시한다. 원죄로부터의 보호는 “무염시태”의 가르침을 이룬다. 이 은총은 악 (욕망)에 대한 무질서한 경향이 없음을 포함한다. 우리는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선포된 무염시태의 교의화를 향한 여정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성성이 원죄로부터의 자유 안에서 규명되지는 않는다. 교회의 성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고 은총의 풍요로움도 본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복되신 동정녀의 티 없는 성심 안에서의 성성의 표현도 살펴볼 것이다.
2. 모든 개인적인 죄로부터의 자유
2.1. 구원의 보편성과 새 하와 사이의 관계 – 풀어야 할 긴장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 (예를 들면, 1요한 1,8)을 알고 있다. 그래서 초세기 안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불완전함이나 마리아의 죄에 관한 언급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하와와 마리아 사이의 대립이 소개된다. 마리아에 의한 신앙의 순종적인 응답은 하와의 불순종이 우리에게 놓았던 것을 고치면서 구원의 여정을 연다. 하와-마리아라는 병행으로 주님의 어머니의 특별한 역할이 감지된다.
2.2. 교부적 발전과 에페소 공의회의 중요성
2세기부터 시작하여 “거룩한 동정녀”라는 표현이 퍼진다. 마리아의 동정성이라는 것은 성성의 육체적 표현으로 보였다.
오리게네스는 마리아의 성성에 관한 교부적 발전 과정에서 아직 미성숙한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리게네스는 한편으로는 마리아에게만 “거룩한 동정녀”라는 칭호를 부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보편성을 설명할 수 있도록 마리아 안에서 죄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오리게네스는 시메온의 예언에서의 “칼”을 십자가 앞에서의 불신과 의심으로 설명한다. “칼”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이러한 주석은 바실리오, 이코니오의 안필로키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안에서는 (완화된 방식으로) 전해진다.
보다 격한 언급들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안에서 볼 수 있다: 마리아는 천사의 알림에 의심을 품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의 모성의 기적에 관하여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안티오키아 환경으로부터 나온다. 반면에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대해 더 잘 알았던) 알렉산드리아 환경에서 이 주제들은 보다 부드러운 뉘앙스를 지닌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다소 유혹과 고통에 대해 말하면서 루카 2,35의 “칼”에 대한 오리게네스적 주석을 완화시킨다. 그러나 치릴로도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의 추측되는 의심들에 대해서는 아직 “개연적”이다. 후에 에페소 공의회는 마리아 안에 불완전함이나 죄에 관한 언급들을 후행적인 발전들 안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다. 이미 4세기에 우리는 마리아의 완전한 성성, 그 자체로 죄를 배제하는 성성에 관한 주목할 만한 언급들을 만난다 (그 예로는 시리아의 에프렘).
서방에서 매우 중요한 증언은 뻴라지오와 죄 없는 인간들의 가능성에 관해 토론하는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온다. 뻴라지오는 그것에 관해 (마리아를 포함하는) 리스트를 언급한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추정을 부정한다.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만을 예외로 한다:
«죄에 대해서 말할 때 주님의 영예로 예외가 된 거룩한 동정녀에 대해서 문제가 되는 것을 나는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떠한 죄도 지니지 않았음이 아주 확실한 분을 잉태하고 출산하기에 마땅하면서, 모든 부분으로부터 죄를 극복하도록 그녀에게 얼마나 더 큰 은총의 풍요로움이 수여되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 때문이다».
2.3. 도착점으로서의 트리엔트 공의회
마리아 안에 개인적인 죄의 절대적인 없음에 관한 앎은 중세에서 토마스 안에서도 아주 분명하다. 몇몇 종교 개혁자들 (일반적으로 루터와 칼빈과는 다르게 브렌츠 Brenz와 멜랑톤 Melantone와 같은) 만이 다시 마리아의 불완전함과 죄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1439년에 바실레아 Basilea 공의회는 모든 개인적인 죄로부터의 (그러므로 원죄로부터도) 자유를 포함하면서 마리아의 완전한 성성을 정의했다. 반면에 참되고 고유한 교의적 언급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화에 관한 교령에서 발견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마리아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온 마음으로 그리고 어떠한 죄의 방해도 없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이시고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서 당신 아들의 인격과 활동에 온전히 헌신했다».
«교회가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안에서 이미 그를 흠도 티도 없게 만드는 (참조. 에페 5,27) 저 완전함에 도달한 반면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직 죄를 물리치면서 성성 안에서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선택된 이들의 모든 공동체 앞에 덕행의 모델로서 빛나는 마리아에게 눈을 들어 올린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마리아가 그의 전 생애 동안에 모든 개인적인 죄로부터 순전하게 머물렀다»고 반복한다. 같은 믿음이 그리스 정교회에서도 흔히 고백 되었다.
«동방 전승의 교회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온전히 거룩하신 분 Tutta Santa”
(“Panaghia”) ...라고 부른다».
2.4. 마리아의 무죄성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마리아는 사실로만이 아니라 (impeccantia, 무죄) “원칙적으로” 모든 개인적인 죄로부터 자유로웠다: 마리아의 “무죄성” (죄지을 수 없었다; impeccabilitas, 무죄성).
신인 예수님의 절대적인 무죄성을 인간인 마리아의 무죄성으로부터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그의 존재의 구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육체적인” 무죄성을 인식해야만 하는 데 반해, 마리아 안에서는 “윤리적인” 무죄성만이 허용될 수 있다.
마리아의 무죄성, 은총 안에 견고함은 하느님의 어머니와 새로운 아담의 협력자로서의 인격적 특성에 상응한다. 그러나 무죄성이 외적인 유혹들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 원죄로부터의 자유 (무염시태)
3.1. 교의의 의미
무염시태는 원죄로부터 마리아의 보호를 의미한다. 무염시태는 하느님의 어머니의 완전한 성성의 뿌리이다.
3.2. 성경적 토대
교의의 성경적 토대는 “원복음” (창세 3,15)과 천사의 인사 (루카 1,28) 안에 집중된다.
원복음은 “여인”과 여인의 후손과 “뱀” 사이의 “적대”를 묘사한다. 여인의 “후손”이 메시아적인 것처럼 “여인”은 마리아적인 측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탄에 대한 적대에 있어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결합되어 있다. 모든 죄가 악마에게 공간을 연다는 사실 때문에 사탄에 대한 완전한 대조는 죄의 절대적인 결핍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카이레, 케카리토메네 Chaíre, kecharitoméne: «아베,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루카 1,28) - 천사의 인사는 칭호처럼 마리아 안에 은총의 충만함에 대해 언급한다. 마리아는 은총으로 가득 차게 되고 이러한 이유로 가브리엘의 소식에 관대함으로 응답한다. 은총의 풍부함은 죄의 배제를 암시한다.
3.3. 역사적 발전에 관한 전제
1) 아우구스티노 이전의 라틴 교부들과 동방 교부들은 원죄에 대한 그러한 명백한 앎 (신적 생명의 박탈로서의 죽음, 성령의 천상적 선물의 결핍, 하느님 모상의 초자연적인 요소의 상실 등등)을 아직 정리하지는 못했다. 이로써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자유로웠는지 아닌지에 관한 명백한 질문은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출발해서만 놓여진다.
2) 그러나 무염시태의 정의를 향한 여정은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에 관한 주목과 함께 시작한다: 새 하와로서 새 아담의 도착을 준비하면서 마리아는 첫 번째 죄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치료한다. 하와가 믿음을 거부하는 데 반해, 마리아는 육화의 소식에 자신의 모든 내어맡김과 함께 자신을 연다.
3.4. 동방에서의 발전
3.4.1.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리킴들
마리아의 무염시태에 관한 가르침의 첫 번째 명확한 흔적들은 동방에서 발견된다. 동방의 증언들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원죄에 대한 가르침이 아직 조금밖에 세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노의 공헌으로부터 출발하는 서방에서의 저 조직적인 명료화가 동방에서는 없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구세주의 어머니에서 교의의 첫 번째 증인들로 크레타의 안드레아, 콘스탄티노플의 제르마노 그리고 다마스쿠스의 요한을 넘어서 리비아의 테오테크노 (약 600년)를 소개한다.
3.4.2. 리비아의 테오테크노 Teotecno di Livia에 의한 마리아의 순결한 기원
마리아의 순결한 기원에 관한 분명한 첫 번째 기원은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리비아의
의 설교 안에서 발견된다. 테오테크노는 마리아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을 반복한다. 테오테크노에 따르면,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의 흠 없는 기원이 이미 마리아의 생성을 포함하고 잉태까지도 포함한다.
테오테크노는 “원죄”에 관한 어떠한 명확한 언급도 제공하지 않으나 우리 모두가 그것을 통해 구원될 필요가 있었던 천상적 선물들의 상실이 마리아의 성성과 대체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 안에서 천국이 열려진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그녀 안으로 들어오시어 그녀 안에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3.4.3. 크레타의 안드레아 Andrea di Creta에 따른 천국의 재건축으로서의 마리아의 잉태
테오테크노가 마리아의 창조의 순결함을 묘사한 반면에 크레타의 안드레아는 천국의 재건축으로서 그녀의 어머니의 태중에 마리아의 잉태를 소개한다.
크레타의 안드레아는 «마리아의 탄생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보는 첫 번째 신학자이다». 마리아의 탄생 안에서 인류는 다시 «하느님으로부터 첫 번째 조형의 은사»를 받는다. 마리아는 «우리 조상들의 첫 번째 타락에 대한 첫 번째 복구»다.
구원의 보편적 필요성과 마리아의 본래의 성성이 아직은 조직적으로 마주되지 않는다. 어쨌든 조직적인 문제는 서방에서 몇 세기 후에야 세밀화될 것일지라도 구원의 은총이 그의 어머니의 태중에 마리아의 잉태에 이미 도달한다는 것은 안드레아에게서 분명하고 고유하다.
마리아의 더럽혀지지 않은 기원은 천국에서 본래의 상태의 순결함을 다시 세우는 새로운 시작으로 나타난다. 오히려, 마리아 자체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거주하는 “천국”이다.
3.4.4. 콘스탄티노플의 제르마노 Germano di Costantinopoli에 따른 마리아의 잉태 안에서 하느님 은총의 앞선 행위
마리아는 주님 탄생 예고 이전에 이미 거룩하다. 왜냐하면 천사는 그녀를 «완전히 그리고 모든 점에서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사의 주님 탄생 예고에 관한 설교는 유년기부터 마리아의 완전한 순결함을 반복하지만, 안나의 태중에서의 잉태에 관해서는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은 성전에 마리아의 봉헌에 관한 설교로부터 표현된다. 제르마노에 의하면, 하느님의 은총은 단순히 아기를 못 낳는 것을 극복하는 기적적인 힘만을 가리킬 뿐 아니라 오히려 성화의 힘도 가리킨다.
3.4.5. 다마스쿠스의 요한 Giovanni Damasceno에 따른 더럽혀지지 않은 마리아 «거룩한 동정녀의 동의 후에 성령은 그녀 위에 내려왔고...그녀를 정화했다...».
이 말을 들어 그리스 정교회의 신학자들은 무염시태에 반대하는 주요한 증인으로 다마스쿠스의 요한을 거론한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한 강론에서 “완전히 더럽혀지지 않은 싹”에 대해, 완전히 거룩한 여자 아이 (태아라는 의미에서의)에 대해서 말한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마리아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성령의 성전이고 모든 덕의 거처라는 그의 확신을 드러낸다.
3.4.6. 비잔틴 안에서의 궁극적인 발전들
마리아가 이미 거룩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또한 어머니의 태중에서 세례자 요한의 성화 (루카 1,15)와 탄생 이전에 예레미야 예언자의 성별 (예레 1,5)과의 비교에 의해서 동방의 신학자들에게도 납득이 간다.
8세기 이후에 비잔틴 교회 안에서 성성이 이미 잉태로부터 시작해서 어머니 태중의 마리아에게 이른다는 확신이 일반화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포지오 Fozio († 891)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어머니의 태중에 그녀가 형성될 때부터 충만하게 성화되었다고 언급한다. 또 죠반니 일 제오메트라 Giovanni il Geometra (10세기)는 반복한다: «천사의 인사 이전에 이미, 그녀의 잉태로부터 출발해서, 마리아는 정화되었고 아름답게 되었다». 6세기에 시작된 전례적 축제는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의 예고” (또는 요아킴과 안나의), “안나의 잉태” 또는 “마리아의 잉태”라고 불린다.
12세기에는 12월 9일에 전 비잔틴 제국 안에서 장엄한 명령과 함께 축제가 거행된다.
죄 없는 잉태에 보다 가까운 비잔틴 저자들 사이에는 그레고리오 팔라마스와 니콜라 카바실라스 (14세기)가 있다. 니콜라 카바실라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옛날에 살았거나 지금 사는 인간들 중에서 동정녀는 유일하게 그의 존재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어느 누구도 복되신 동정녀 이전에는 거룩하지 않았다; 죄가 절대적으로 없었던 것은 첫 번째였고 유일했다».
우리는 이렇게 동방에서 처음부터 마리아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에 관한 증언들을 만난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 원죄로부터의 “보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이 범주를 굴리엘모 디 웨어 Guglielmo di Ware와 둔 스코투스 Duns Scoto에게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전혀 원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았다는 언급에 많은 본문들이 가깝다. 그러나 원죄에 관한 생각이 덜 발전되었기 때문에 우선은 완전한 성성의 묘사에 도달한다.
«동방의 신학자들은 원죄의 법의 적용과의 관계 안에서 상황을 세밀화하기보다는 마리아의 성성을 비추는 데에 더 관심이 있었다».
무염시태 교의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는 16세기부터 시작해서야 그리스 정교도들 사이에서 드러나고, 1854년 교의적 정의 후에는 보다 굳어진다.
3.5. 12세기까지 서방에서의 발전 (에아드메로 Eadmero)
서방에서 하와-마리아 병행은 성 암브로시오로 하여금 마리아가 죄의 모든 얼룩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한다.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나는 “모든 점에서” 죄를 능가했던 마리아를 포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때 (429)로부터 시작해서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손상받았는지 아닌지를 토의하기 위한 길이 열려진다.
무염시태의 명확한 첫 번째 부정은 아우구스티노적 범주로 설명하는 아를르의 체사리오 Cesario di Arles에 의해 이루어졌다 (6세기): 구세주의 어머니인 마리아조차도 어머니의 태중에서 우리에게 이르는 그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서방에서 마리아의 잉태 축제의 도입은 저항을 만나곤 했다. 그 예로 리옹의 주교좌 참사위원들이 새로운 축제를 도입했을 때 베르나르도 성인의 저항을 들 수 있다.
안셀모의 제자인 에아드메로 Eadmero OSB († 1141)는 마리아의 더럽혀지지 않은 잉태를 명확하게 가르친 첫 번째 신학자이다. 마리아의 잉태에 있어서, 마리아가 악마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예레미야와 세례자 요한이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서 성화되었다면,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있어서랴.
마리아가 죄 있는 부모로부터 온다는 반론에 맞서기 위해서 (죄 있는 부모로부터 오기 때문에 마리아도 당연히 죄가 있다는 반론에 맞서기 위해서) 에아드메로는 가시 껍질로부터 가시없이 나오는 밤의 비유를 사용했다.
에아드메로는 보다 늦게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된 하나의 원칙을 만들었다: 할 수 있었고, 마땅했고, 그래서 했다 (potuit, decuit, ergo fecit).
하느님은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potuit);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은 마땅했다 (decuit);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것을 했다 (fecit). 이 원칙은 하나의 도움이기는 하지만, 계시와는 무관한 하나의 명제를 선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에아드메로의 스승인 안셀모는 아직 무염시태를 가르치지는 않지만, 거기에 몇몇 전제를 언급한다.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이들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원되었다; 이러한 방식 안에서 마리아는 그의 신앙을 통해서 정화되었다 (보다 늦게 스코투스에 의해 사용된 용어를 받아들이기 위한 거의 하나의 “앞선-구원”이다).
더 나아가서 안셀모는 하나의 원칙을 만든다: «이 동정녀가 하느님 이외에는 어떠한 비슷한 것도 생각될 수 없었던 그러한 순수함으로 빛났다는 것이 적합했다». 그리고 안셀모는 더 이상 원죄의 전달을 출산에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처럼 부부 행위의 욕망에)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 정의의 박탈로서 묘사한다 (absentia debitae iustitiae). 아담으로 인해 이 박탈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될 때 실현된다.
3.6. 굴리엘모 디 웨어 Guglielmo di Ware와 둔 스코투스 Duns Scoto의 공헌
에아드메로의 접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리아 편에서의 구원의 필요와 그녀의 지극한 성성을 어떻게 함께 놓아야 하는지 분명하지가 않았다. 이것에 대해서 스콜라 신학자 대부분은 “잉태 직후”의 원죄의 정화에 대해 말한다 (보나벤뚜라, 토마스 등등).
결정적인 진보는 영국의 프란치스칸인 굴리엘모 디 웨어 (13세기)에 의해 준비되었다: «어머니의 모든 순결은 그의 아들로부터 왔다. 결론적으로 이미 그녀가 지녔던 죄 때문이 아니라, 아들 자신이 믿음을 통하여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가졌을 죄 때문에,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필요했다».
문제의 결정적인 해답은 굴리엘모 디 웨어의 제자인 요한 둔 스코투스 Giovanni Duns Scoto OFM († 1308)와 함께 도달했다. 마리아는 «중재자의 은총으로 예방되지 않았었다면, 일반적인 전달로 인해 원죄를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이미 접한 죄를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그들이 용서받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렇게 마리아는 그녀 편에서 죄를 반대할 필요성이 전혀 없도록 그리고 실제로 죄를 접촉하지 않도록 더 큰 이유로 죄를 앞서 오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보호했다는 생각은 결정적이다. 이렇게 마리아의 완전한 성성은 구원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세워졌다.
3.7. 알렉산드로 7세(1661)에 이르기까지 죄 있음을 주장하는 이들 macolisti과 죄 없음을 주장하는 이들 immacolisti 사이의 싸움
이어서 마콜리스티 (특히 도미니칸들)와 임마콜리스티 (제1선으로는 프란치스칸들) 사이에 긴 논쟁이 이어진다. 대학과 성성의 입장이 중요하게 된다. 파리의 소르본은 처음부터 두 학파 모두를 허용한다. 그러나 스페인인 도미니칸이 (1387년에) 무염시태를 맹렬하게 공격했을 때 (신앙에 반대될 것이라고) 대학은 이 신학자의 논문을 단죄했다. 그리고 이 도미니칸이 이를 거부했을 때 파리의 대주교는 그가 그의 가르침을 감히 공개한다면 파문하겠다고 그를 위협했다. 사실 소르본은 이렇게 임마콜리스티의 입장에 가까웠다. 1497년에 파리 대학은 모든 열망가들에게 대학차원으로 마리아의 무염시태에 대한 가르침을 열심히 전파하기로 맹세할 것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학들이 따랐다.
바실레아 공의회 concilio di Basilea는 1439년에 원죄와 현행죄가 없는 마리아의 완전한 성성을 정의했다. 이 공의회는 적법하지는 않았지만, 무염시태에는 우호적인 결과를 냈다.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성좌는 개입하지 않았다. 후에 성좌의 개입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① 더욱더 무염시태의 축일을 돕는 것, ② 축제의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 ③ 참되고 고유한 정의에 이르기까지 교도권의 결정들을 취하는 것.
1) 프란치스코회 출신인 시스토 4세 (1471-84)는 (14세기부터 로마 교황청에 증언된) 무염시태 축일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거행했다. 축제는 8부를 지냈고 대사를 얻는 풍요로운 가능성이 제공되었다.
2) 축제의 목적이 아직 완전히 명백해지지 않았다. 시스토 4세에 의해 승인된 전례적 임무들은 명백하게 무염시태를 표현한다. 그러나 도미니칸들의 미사 경본은 같은 명료함으로 영혼의 주입 후에 원죄로부터의 자유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시스토 4세에 의해 지지된 축제는 그러나 아직 전체 교회를 위하여 지시되지는 않았다.
3) 신학에 관하여 취해진 측면들은 중요하다. 시스토 4세는 무염시태에 관한 신앙을 이단으로 (그리고 심각한 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했던 언급들을 단죄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문제가 «아직 로마 교회와 사도좌로부터 결정되지 않았다» (DH 1425-26)는 것을 강조했다.
도미니칸인 교황 비오 5세는 1567년에 마리아가 원죄에 속했다는 (DH 1973) 미켈레 바이오 Michele Baio의 잘못을 단죄했고, 로마 성무일도에 무염시태 축일을 도입했다. 더 나아가서 교황은 학문적인 분위기를 벗어나서 무염시태에 관한 주제에 대해 공공연한 토의를 금지시켰다.
대 수도원들의 행동도 중요하다. 예수회원들은 이 교의를 고백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1593). 프란치스칸들은 이미 그것을 지지했었고, 도미니칸들도 더욱더 임마콜리스티적 흐름을 따랐다. 17세기 말에 신학에 관한 대학의 거의 모든 학부들은 소르본으로부터 지시된 모범을 따랐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의 말에서는 확실한 신중함이 유지되었다: “무염시태”가 아니라 “더럽혀지지 않은 동정녀의 잉태”에 대해 말했다. 1767년에서야 (스페인에서 “무염시태” 축일에) 명칭의 전례적 사용이 허용되었다; 1834년에 이러한 지지는 도미니칸들에 의해서도 요청되었다.
교황 알렉산드로 7세는 1661년에 1854년 정의의 가장 중요한 점들을 이미 언급했던 교서를 출판했다:
1) 원죄로부터의 보호;
2) «창조와 육체 안에 [영혼의] 주입의 첫 순간부터»;
3) 일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을 통해서» 일어났다;
4)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처음부터 마리아는 «성령의 선물로 가득 차 있었고 원죄로부터 보호되었다» (DH 2015-17).
3.8. 비오 9세에 의한 무염시태의 정의 (1854년)
1849년 비오 9세 교황은 모든 주교들에게 무염시태의 정의에 대한 그리스도교 백성의 입장과 그들의 입장을 언급하도록 그들을 초대하기 위하여 우비 쁘리뭄 Ubi primum 회칙을 보냈다. 603명의 주교들이 답을 보냈다; 546명이 정의에 찬성했다; 소수의 다른 이들은 반대를 선언했다; 일부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고, 다른 이들은 적합성을 이유로 유보를 제의했다 (특히 일부의 독일 주교들). «반대하는 이들 중에 24명은 적합성을 이유로 그렇게 했고; 단지 네 명이나 다섯 명 만이 정의에 반대했다».
1852년에 교황은 정의 안에서 준수해야 할 기준들과 제시해야 할 가르침을 만들기 위하여 신학위원회를 만들었다. 연속적인 8개의 스케마와 함께 열린 토의가 있었다. 최종적인 편집은 추기경 그룹에 의해 이루어졌고, 장엄한 정의는 1854년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 Ineffabilis Deus 교서와 함께 되었다.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그의 잉태의 첫 순간에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을 통하여 원죄의 모든 흠으로부터 면제되어 보호되었다는 것을 지지하는 가르침은 하느님에 의해 계시 되었고,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확고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믿어야만 한다» (DH 2803).
교의 정의의 특별히 중요한 몇몇 요소들을 지적하자.
1) “그의 잉태의 첫 순간에”라는 표현이 교황 알렉산드로 7세에 의해 채택되었던 것에 대체된다. 알렉산드로 7세는 1661년 교서 관심 Sollicitudo 안에서 «그녀의 창조와 육체 안에 영혼의 주입의 첫 순간에» (DH 2015) 마리아의 영혼의 보호에 대해서 말했었다. 비오 9세는 잉태와 영혼의 주입 사이의 이론적인 분리를 재개하는 것이 아니라, 잉태의 순간에 영혼이 주입되었다는 것을 가정한다. 정의의 주어는 유일하게 마리아의 영혼이 아니라 전례 축제의 용어에 일치시키면서 마리아의 인격이다.
2) “원죄의 모든 흠으로부터 면제되어 보호된”이라는 표현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위 있는 방식으로 이미 세워진 가르침인 개인적인 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욕망의 무질서로부터의 자유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원죄로부터의 보호의 문제이다.
3)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라는 표현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교의 정의는 이 특별한 특전이 유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관하도록 둔다».
4) 다른 중요한 점은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라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구원의 궤도의 저편에 배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의 보다 완전한 적용을 이룬다. «하느님의 어머니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는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미리 입어 원죄에 전혀 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장 최고의 방식으로 구원되었다».
5) 무염시태 교의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 되었고”, 모든 신자들이 믿어야만 한다. 교황은 무류적 가르침의 힘을 의식적으로 행했다. 이렇게 1854년의 정의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동안에 (1870) 장엄하게 선포된 무류성의 교의를 준비했다.
3.9. 교의의 신학적 정황
마리아의 무염시태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와 설명된다. «복되신 동정녀는 ...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순수성 다음에 더 큰 순수성이 생각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순결하고 그렇게 거룩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리아의 전 존재 안에서 마리아를 결정짓는다. 새로운 하와로서 구원의 재건설에 협력하기 위하여 새 아담 옆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구원자 그리스도의 업적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리아는 «원죄에 전혀 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구원되었다». 무염시태는 구원의 가장 효과적인 형태이다.
더 나아가서 마리아의 완전한 성성은 교회의 성성을 이해하게 한다.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운 마리아는 교회의 전형이고 무너질 수 없는 교회의 성성의 보증이다. 교회는 교회이기 때문에 (하느님 “신랑”의 “신부”) 거룩하다. 무염시태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은 어느 누구 안에서도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학적인 정황에서, 순결하신 분은 여정과 싸움 중에 있는 인간을 강건하게 한다. 새로운 존재는 꿈이 아니라 한 인간 안에서, 마리아 안에서 그의 완전한 실현을 만난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순결하신 분을 영적 투쟁으로부터 소외시키지 않는다. 죄를 극복하기 위한 도움은 우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성성으로부터 온다. 무염시태와 함께 고양된 표징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 거의 “이상적인” 인간은 죄 없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의 본성을 이루지 않는다. 세상과 역사 안에서 인간의 여정은 필연적으로 죄를 통해서 가지는 않는다 ...».
죄로부터 면제된 잉태는 은총의 무상성도 강조한다: 성성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이시다.
새 하와의 성성과 함께 무염시태는 거룩한 동정녀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때 주님 탄생 예고로부터 시작하는 구원에 대한 협력으로 방향지어진다. 이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중재로서의 이러한 협력은 구세주에게 결합되어 있는 모든 이들에게 도달한다. 영혼과 육체와 함께 하늘로의 승천은 무염시태와 구원의 협력의 결과이다. 무염시태와 승천의 교의들을 위한 성경적 논증이 같은 주요한 본문들, 즉 원복음과 천사의 인사 위에 기초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3.10. 교회 일치 운동의 토의
1) 무염시태 교의는 교회 일치 운동의 대화를 위해서도, 특히 그리스 정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주제이다. 동방의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완전한 성성을 묘사하고 개인적인 순결함의 기원을 어머니의 태중에서의 잉태에 가깝게 한다.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에 의한 무염시태의 첫 번째 부정은 단지 1577년에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한 작품 안에서 일어난다. 희랍의 총대주교에 의한 “마콜리스티”적 입장의 첫 번째 취함은 1626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메트로파네 크리토포울로스 Metrofane Critopoulos와 함께 일어난다. 저항은 비오 9세에 의한 교의의 정의 후에 강화된다. 그러나 어떠한 입장의 결정적인 취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때때로 그리스 정교회의 신학자들도 무염시태를 찬성하여 말한다 (Kiev 학파). 소위 말하는 “오래된 신자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주류로부터 분리된 그룹) 원죄 없는 마리아의 잉태를 오늘도 아직 옹호한다. 무염시태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장애는 오늘날도 흔히 원죄에 대한 종종 덜 분명한 생각이다. 그러나 파나기아 Panágia (온전히 거룩하신 분)의 칭송이 그리스 정교회에서 특별하게 강하기 때문에 교의의 수락으로 이끄는 가르침의 심화를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2)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는 차이가 훨씬 더 크다. 루터 안에서 우리는 아직 무염시태에 관한 언급들을 만난다: 하느님에 의해 어머니로 선택된 여인 위에 어떠한 죄의 그림자도 있을 수 없다. 반면에 루터의 다른 본문들은 마리아를 “죄인”으로 부르고, 칼빈은 무염시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츠빙글리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기 위한 마리아의 정화에 대해서 말한다. 오직 성서만으로 sola scriptura의 원칙은 무염시태에 호의적일 수 없었다.
1854년 이후에야 나타났던 반론은 마리아의 무염시태가 교회의 무류적 성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마리아 안에서 로마 교회는 그릇되게 자기 자신을 고양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방식 안에서 교회의 무너질 수 없는 성성과 마리아의 성성 사이의 연결이 비판된다.
기본적인 선에서 근대 프로테스탄트는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의 저자들 안에서 마리아 안에서 죄에 대해 은총의 우위를 인식하는 데에 대한 확실한 관심을 만난다.
영국 성공회 comunità anglicana가 고대 교회의 전통과 보다 강한 접촉을 가지기 때문에 공식적인 위원회의 2004년의 결합된 선언 안에 영국 성공회 신학자들과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의 대화의 접근이 가능할 수 있었다.
4.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첫 번째 죄의 결과로서 우리는 본래적인 탓, 죽음 그리고 악에로의 경향을 넘어서 욕망을 만난다. 세례는 원죄 peccato originale와 본죄 peccato personale들을 제거하지만, 욕망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죄로부터 오고 죄로 기우는» 욕망은 (DH 1515) 감각들의 무질서한 경향에 묶인 인간의 연약함이다.
반면에 원초적 상태에 있어서는 영, 관능적 힘, 은총의 선물 사이의 조화가 전제된다. “새로운 하와”로서의 마리아의 묘사는 이 천상적 은총의 확실한 쇄신을 암시한다.
스콜라 신학은 마리아의 성화 santificazione를 감각들의 무질서한 욕구로부터의 자유에 연결시킨다.
스콜라 신학의 승리적인 귀착은 원죄의 욕망으로부터의 보호를 함께 둔다. «비오 9세의 정의는 원죄로부터의 면제만 언급되고 욕망으로부터의 면제는 명확하게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 모든 흠으로부터 마리아의 완전한 보호는 결과적으로 그녀 안에 욕망으로부터도 면제를 지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가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면서 «어떠한 죄의 방해도 없이 온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다고 언급한다.
욕망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그러나 경향 안에서 무질서를 이루기 때문에 그것은 이상적인 윤리에 상응하지 않는다.
욕망의 부재는 무염시태와 신적 모성으로부터 유래한다. 하느님께 완전한 증여를 표현하기에 동정성도 또한 연결된다. 관능적인 힘과 영 사이의 통합자체는 마리아의 티 없는 성심의 공경 안에서 드러난다.
5. 은총의 충만
무염시태, 원죄와 욕망의 부재는 마리아의 성성 santità의 부정적인 면을 이룬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인 “은총이 가득하신” (루카 1,28)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직은 더 중요하다. 그리스어 케카리토메네 kecharitoméne 라는 용어는 아직 “마리아”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은총이 충만함”을 의미한다.
은총의 충만함은 엘리사벳에 의해 “여인들 중에 복되신 분” (루카 1,42)이라고 불린 주님의 어머니에게 적합하다. 특히 루카 복음에 따른 유년기의 역사는 마리아의 믿음 (루카 1,38.45), 그녀의 겸손 (1,38.48.52)과 순종, 하느님의 뜻을 맞아들이는 데 있어서 완전한 기민함 (1,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을 칭송한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1712)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De Maria numquam satis” (마리아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은총의 충만함 안에 모든 성성의 핵심을 이루는 선물들이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성화은총, 세 가지 대신덕 (믿음, 소망, 사랑)과 사추덕 (신중함, 정의, 용기, 절제).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받은 선물들의 즉 은사들의 풍부함을 전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머니이고 성부의 사랑받는 딸이며 성령의 거처인 마리아는 «은총의 이 특별한 선물로... 천상과 지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훨씬» 앞선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그녀의 그렇게 높은 역할에 상응하는 선물들을» 주셨다. 비오 9세는 무염시태를 정의하는 교서인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 Ineffabilis Deus의 시작 부분에서 은총의 충만함을 강조한다.
믿음이라는 대신덕은 마리아를 신약에 대한 첫 번째 믿는 자가 되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수락하면서 마리아는 자신의 자유로운 협력과 함께 하느님의 아들의 어머니가 된다. «그래서 적지 않은 고대 교부들이 그들의 설교에서 기꺼이 이레네오와 함께 “하와의 불순종의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과 함께 해답을 가졌다; 동정녀 하와가 자신의 불신과 함께 묶었던 것을 동정녀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고 언급한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신앙의 여정”을 하고 십자가 아래에 이르기까지 아들과의 믿음의 결합에 충실하게 머문다. 신앙의 여정은 의심의 그늘이 없지만 몰이해에 대해서도 전한다. 믿음의 앎은 기쁘고 고통스러운 체험들을 거치면서 점점 더 깊어지게 되지만, 마리아가 이미 주님 탄생 예고 때에 그의 아들의 신성을 얻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문제일 것이다.
은총의 절대적인 충만함은 «은총과 진리가 가득하신 성부의 독생자 (요한 1,14)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마리아의 은총도 또한 이 원천으로부터 나온다: 동정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으로 죄로부터 보호되었고 은총으로 채워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지상에서 지복직관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성성에 있어서 성장할 수 없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의 삶의 시초에 받은 충만함 안에서 성장해야만 했다. 특히 주님 탄생 예고에서, 십자가 아래서 그리고 성령 강림 날에 은총 안에 성장했다.
천상 영광의 풍요로움은 이 땅에서부터 마리아가 가지고 출발했던 은총의 풍부함에 상응한다. 영광은 은총을 따르기 때문에 마리아의 복됨은 다른 모든 피조물의 복됨을 넘어선다.
6. 마리아의 티 없는 성심 안에서 성성의 표현
성경의 용어에서 마음은 하느님께로 향한 인간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한 핵심적인 상징이다 (신명 6,46 등).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법이 쓰여 있는 (에제 36,26; 예레 31,33) “새로운 마음”을 약속한다.
예수는 선포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5,8). “마음”은 의지와 앎, 영과 감정 사이의 구별이 없는 사람의 중심을 가리킨다.
마리아의 마음도 신약에 언급되었고, 중세부터는 신심의 대상이 된다. 시메온의 예언을 통해서 마리아의 마음의 공경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에, 특히 수난에 결합시킨다.
구원의 신비는 «말하자면, “예”를 말했을 때 나자렛의 동정녀의 마음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그 순간부터 이 동정적이며 동시에 모성적인 마음은 성령의 특별한 행위 아래 항상 그의 아들의 일을 따르고, 그리스도가 받아들였고, 계속적으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 안에서 받아들인 모든 이들을 향해 간다. 그래서 이 마음은 모성적으로도 지칠 줄 몰라야만 한다».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태안에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음 안에 그를 잉태했기 때문에 더 복되다고 반복한다. 성 로렌조의 리카르도 Riccardo di S. Lorenzo (12세기)의 상징적 용어에 따르면,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으로부터 세상의 구원이 시작되는 신앙과 동의가 온다.
본느발의 아르날도 Arnaldo di Bonneval는 골고타에서 같은 희생제물의 봉헌에 결합된 두 제단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의 마음이다. 중세의 묵상은 마리아의 마음을 향해 쓰여진 첫 번째 기도 안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신학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마음에 헌납된 첫 번째 신학 작품을 썼던 성 요한 에우데스 (1601-1690)의 영향은 특별히 중요했다. 마리아의 마음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의 관계 때문에 모든 은총의 원천으로서 소개되었다.
마리아의 마음에의 봉헌은 뤼드박 Rue du Bac에서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Caterina Labouré에 관한 발현들 (파리, 1830) 후에 강하게 호의적이 되었다.
“순결한 마음”이란 표현은 1854년 무염시태에 관한 교의의 선포 후에 습관적이 되고, 특히 파티마에 연결된 발현들로, 그리고 1942년에 비오 12세에 의해 선포된 봉헌의 장엄한 행위를 통해서 교회 용어 안에 놓여진다. 동기는 두 번째 발현 동안에 (1917년 6월) 루치아에게 향해진 말씀들과 함께 강하게 강조되었다: «예수는 나를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도록 너를 이용하기를 원한다. 그는 세상에 나의 순결한 마음에 대한 신심을 세우고 싶어한다. 나는 그것을 실천할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한다: 그의 왕좌를 꾸미기 위하여 나에 의해 놓인 꽃들처럼 이 영혼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다».
1944년의 전례 성성의 교령은 마리아의 마음에 대한 신심의 최고의 묘사를 제공한다: «이 신심과 함께 교회는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순결한 마음에 합당한 영예를 드린다. 왜냐하면 이 마음의 상징 아래 교회는 존경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의 탁월하고 특별한 성성을 그리고 특별히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을 위한 그의 불타는 사랑과 하느님의 피로 구원받은 모든 이를 위한 그의 모성적 연민도 또한 공경하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순결한 마음에 대한 전체적인 신심에 대한 하나의 놀라운 전례적 종합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관한 미사들” (1987) 안에 전용문구의 서언 prefazio에 있다.
마리아의 마음의 중요성은 분명히 예수 성심의 중요성과는 다르다: 마리아의 사랑은 은총의 충만함과 사랑의 대신덕에 의해 지탱될지라도 단지 한 인간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전체 신비의 종합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마음” 안에도 마리아의 전체 신비가 포함된다. 이 두 신비는 모두 구원의 질서를 이룬다. 마리아의 사랑과 고통이 종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고통의 부분이 되었던 것처럼 두 번째 신비는 첫 번째의 부분이고 그에게 종속된다». «마리아의 마음에» 우리를 바치면서 «우리는 우리 구세주의 자비로운 사랑의 상징인 예수 성심에 대한 확실한 길을 발견한다».
마음과 “자비” 사이에는 유사함이 있다: «자비심 깊은 사람이란 연민으로 가득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다. 왜냐하면 타인의 비참함으로 인해 마치 그 자신의 비참함의 문제인 것처럼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그는 다른 이의 비참함을 제거하도록 채택된다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이 자비의 효과이다». 연민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는, 그의 천상의 전구로 비참의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그렇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결합되었다. 마니피캇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자비를 칭송한다 (루카 1,50). 이미 교회의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의 자비를 강조한다. 글로 전승된 가장 오래된 마리아에 관한 기도인 당신의 보호 아래 Sub tuum praesidum (3세기 또는 4세기)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본문에서 간구를 언급한다: «당신의 자비의 날개 아래 우리가 피신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중세에서 클뤼니 수도원의 2대 원장인 오도네 Odone († 942)로부터 자비의 어머니 Mater misericordiae라는 칭호가 특히 살베 레지나 Salve Regina 찬가를 통해서 퍼진다. 마리아는 자비의 “어머니”이고 “여왕”이다.
마리아의 자비는 몇몇 설교적 과장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정의에 반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의 자비로운 중재로부터 유래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마리아를 통해서, 한 여인의 마음 안에서 우리 구원의 질서 안으로 전해진다.
우리의 소개에 있어서 우리는 성성에 관한 장의 끝에 마리아의 마음에 관한 가르침을 배치했다. 왜냐하면 순결한 마음은 복되신 동정녀에 의해서 그의 삶의 시초로부터 받아들여진 은총의 풍요로움을 매우 잘 상징화하기 때문이다. 영혼과 몸으로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언급에서 «그의 순결한 마음은 새로운 창조가 이미 실현된 장소라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성성은 마리아의 모성적 중재 안에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순결한 마음은 마리아 신심의 최상의 형태인 봉헌 안에도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