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위대한 가르침,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
아티샤가 지은 경서(經書)가 많지만, 부처님 법의 근본에 일치하면서, 가장 완전한 것은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이다.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은 현밀(顯密) 두 가지의 요점을 모아 강술(講述)이 온전하고, 마음을 다스리는(調心) 순서를 위주로 집필하여 수행의 적용에 용이(容易)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의 가르침에는 네 가지의 위대함이 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분별하는 위대함, 모든 불경의 가르침을 밝게 드러낸 위대함, 부처님의 사상을 쉽게 얻게 되는 위대함, 그리고 미혹된 큰 허물을 저절로 제거하게 하는 위대함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1) 감로(甘露)의 지위를 얻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알아야 할 것, 2) 그런 것들을 모두 알기 위하여 마땅히 포기(抛棄)하여야 할 것, 3) 그렇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수행자들이 행하여야 할 것, 4) 수행(修行)하여야 할 모든 것을 전도(顚倒)됨이 없이 보여주고자 부처님 세존(世尊)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경전(經典)들은 삼승(三乘)의 길을 열어 보임으로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이루고자 하는 보살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가장 수승(殊勝)한 방편(方便)이다. 모든 중생들을 이익(利益)되게 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모든 길을 알고, 이러한 길들을 완전하게 갖추고, 이러한 모든 길에 이르는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大乘)의 길에는 일반적인 길과 특수한 길이 있다. 대승(大乘)의 인(因)이라고 해서, 소승(小乘)의 중요한 경률론(經律論)들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일반적인 도에 이르는 길은 대부분 소승(小乘)의 경전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하여 소홀히 생각하여 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모든 것은 구경(究竟)에는 결국 대승법(大乘法)으로 수행(修行)이 귀결되어야 한다. 보리심에 관한 광범위한 경장(經藏)에서 삼승(三乘)을 넓게 보여준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등각(正等覺)이란 일부분의 허물이 없어지고, 일부분의 공덕이 이루어짐이 아니고, 모든 허물이 없어지고, 모든 공덕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대승(大乘)을 수행하면 모든 허물을 근절할 수 있고, 모든 공덕이 일어나고 이루어질 수 있다.
증득(證得)하는 갖가지의 모든 공덕(功德)은 결국에는 대승(大乘)의 길로 모두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한 부분의 허물을 시정하거나 한 부분의 공덕만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으니, 정등각(正等覺)은 모든 대승의 인(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특별한 몇 가지의 개차(開遮)를 제외하고, 각종 불경(佛經)들은 매우 일치하므로 삼승(三乘)과 오도(五道)를 더욱 고양하고자 한다면, 승(乘)과 도(道)에 대한 일체의 모든 단계의 모든 공덕(功德)들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바라밀(波羅蜜)의 길에 관해서는 과거 미래 현재를 막론하고, 부처의 모든 길은 바로 이 바라밀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금강승(金剛乘)에서도 많이 가르치고 있으니, 현교(顯敎)와 밀교(密敎) 모두의 공통적(共通的)인 길인 것이다. 그 외에 밀주(密呪)의 특별한 길은 관정(灌頂), 서원(誓願), 율의(律儀) 등이 더해진 부처로 가는 바르고 빠른 길이므로, 일반적인 길을 버리면 큰 잘못이 된다.
이와 같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개개의 법을 하나의 유사(類似)한 의미로 이해하여 나머지를 버리고, 특히 상승(上乘)의 단계에서 유사한 승해(勝解)를 낸다면, 계속하여 하승(下乘) 단계의 법장(法藏)과 여러 바라밀을 저버리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또한 다라니 진언(眞言)의 수행에 있어서도 세 가지의 하위 탄트라 등을 버리게 되면. 쉽게 생길 수 있는 아주 무거운 이숙(異熟)을 만들어 법을 버리게 되는 큰 업장(業障)을 짓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모든 불경은 성불(成佛)을 위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도리에 대하여 견고하고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지금 수행하는 이는 이미 수행하고 있기에, 구체적으로 자기가 취하고 버릴 수 없다는 구실로 버릴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취하고 버리는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여 그 인(因)으로 자량(資糧)을 쌓고, 죄의 장애(罪障)을 없애고자 하는 서원(誓願)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오래지 않아, 마음의 힘(心力)이 적절하게 자라나서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는 힘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사분도(四分道, 信解行證)로 모든 부처님의 말씀(佛語)를 인용할 수 있는 이가 큰 스승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밀(顯密) 양교(兩敎)의 중요한 의미를 모두 수용하여, 한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성불의 길에 집중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들은 모든 불법(佛法)에 잘못됨이 없다는 확실한 이해를 갖추게 한다.
모든 불경(佛經)에서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이익을 이룩하는 방편(方便)이 바로 부처님의 경전이며, 취하고 버리는 것의 모든 요의(要義)를 나타내 보여줌에 한점의 오류가 없이 빠짐없이 전수(傳授)하신 분은 오직 부처님 한분 뿐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자성(自性)의 궁극(窮極)을 이치에 따라 모두 스스로 바르게 아시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여 아시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이신 경장(經藏)과 보배인 속부(屬部)는 인류(人類) 최고의 가르침들이다.
그렇지만 부처님 말씀을 바른 해설법(敎授法)이 없이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게 되면, 후세 사람들이 가르침의 깊은 뜻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으로, 대승사(大乘師)들이 석론(釋論)의 구체적인 논서(論書)와 교수법(敎授法)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교수법(敎授法)이 청정(淸淨)하다면, 경론(經論)들에 확실한 믿음을 부여하여야 하고, 부처님 말씀과 대석론(大釋論)의 내용에 확실한 믿음에 부합되지 않는 길을 제시한다면 모두 버려야만 할 것이다.
많은 경론(經論)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고, 피상적(皮相的)인 입장만을 고집한다면, 불법을 버리는 업장(業障)을 쌓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또한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확신(確信)할 수 없을 때는,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정해(正解)를 얻어 바른 교법(敎法)을 연구하여야 한다.
교법(敎法)을 완전히 깨달았다는 것은 모든 불경(佛經)의 교법(敎法)을 이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불법을 배운 후에 나름대로 다른 수행 규범을 강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오랫동안 많은 법을 배웠다고 하면서도 부처님 정법(正法)의 수행 규범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정법(正法)을 바르게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니, 대단히 큰 잘못이라 할 수 있다.
구사론(俱舍論)에 의하면, 불교의 정법(正法)은 두 가지이니, 가르침(敎)과 깨달음(證)을 본체(本體)로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교(敎)와 증(證)의 두 가르침 외에 다른 거룩한 가르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법(正法)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법을 수행하고 실행하는 규칙을 결정하는 것인 바, 증득(證得)하여 깨닫는다는 것은 바른 결정을 하였으면, 결정한 그대로 여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인과(因果)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말을 몰 때, 먼저 말에게 달릴 곳을 정확하게 가리킨 뒤에 그 곳으로 달리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듣고 생각하여 한 곳을 결택(決擇)하였다면, 수행할 때 어찌 다른 것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만일 불완전한 수행을 하게 된다면, 각종 경론(經論)은 교법으로 드러나지 않게 되고, 피상적(皮相的)인 이해만을 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종지(宗旨)를 쉽게 터득하는 방법은, 불경(佛經)과 경론(經論)이 가장 훌륭한 교법이라고 하였지만, 초학자나 초심자들은 참된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으면 종지(宗旨)를 터득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과 노고를 치러야만 한다. 그러나 큰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한다면 보다 쉽고 빠르게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악행(惡行)을 소멸하는데 있어서, 법화경(法華經)과 제자품(第子品)에서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보고, 어떤 것은 방편(方便)이고, 어떤 것은 장애(障碍)로 간주하고, 선악이나 논리 대 비논리, 대소승(大小乘)을 분별(分別)하면서 보살은 이것은 배워야 하고 저것은 버려야 한다고 간택(簡擇)한다면 불법을 포기(抛棄)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였으니 크게 주의하여야 한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여래의 가르침을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법을 포기함이라고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다고 하여 어떤 법만을 포기하는 것은 불법을 포기한 것으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며, 승가(僧伽)를 비방(誹謗)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은 합리적이고, 다른 어떤 것은 불합리하다고 간주한다면 법을 버림이고, 이것은 오로지 보살만을 위한 것이고, 저것은 오로지 성문(聲聞)만을 위한 강설이라고 한다면, 법을 버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각(緣覺)을 위한 것이고, 저것은 보살들이 배울 바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또한 법을 버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을 버리는 죄(罪)는 무거운 것이니, 가령 누군가가 이 염부주의 탑을 부숴버리거나, 계경(契經)을 포기한다면, 그 죄는 매우 엄중(嚴重)한 것과 같다. 어느 누군가가 아라한(阿羅漢)을 죽이거나 계경(契經)을 버리게 한다면, 그 죄는 더욱 엄중(嚴重)할 것이다. 올바른 견해에 대하여는 제자품(第子品)과 법화경(法華經)을 보아야 하고, 법을 포기하는 문(門)에 대해서는 섭연경(攝硏經)을 보아야 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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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마하반야 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