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24
동네 마트에 갔더니 잡곡과 부럼, 말린 나물 등이 진열되어 있다. 정월대보름 음식 재료다. 잡곡밥과 견과류와 나물 반찬은 평소에도 늘 먹는 음식이라 무심코 지나쳤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구입한다. 시절이 변해도 관습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정월대보름날 아침에 밤, 호두, 잣, 은행 등 껍질이 단단한 과일을 깨물면서 1년 동안 무사태평하고 부스럼이 나지 말기를 기원했다. 이렇게 기원하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한 정월대보름에는 집안 사람들이 전부 모여 오곡밥을 먹은 후 부모님의 장수(長壽)를 축원했다.
대보름 행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저녁에는 달구경과 다리밟기를 하고 달점을 쳤다. 다리밟기는 주교(走橋) 또는 답교놀이라고 한다. 대보름 밤에 다리(橋)를 밟으면 다리병(脚病)을 앓지 않는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재미있는 발상이다. 한양에서는 24개의 다리를 모두 밟고 다니느라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해 시끌벅적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청계천의 광통교와 수표교는 주교놀이의 ‘핫플레이스’였다. 달점은 대보름날 떠오르는 달의 빛깔이나 모양 등을 보고 그해의 길흉을 알아보는 점이다. 점괘에 의하면 달빛이 붉으면 가뭄으로 흉년이 들 것이고, 달빛이 맑고 하얀색이면 비가 넉넉히 내려 풍년이 든다고 했다. 정월대보름 풍속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한 해 동안 무사하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기원 중에서도 장수는 모든 사람들이 누리고 싶었던 최고 항목이었다.
왕이 사는 궁궐이라고 해서 사는 것이 일반 백성들과 별반 다른 것은 아니다. 절기에 맞춰 명절을 쇠고 제사를 지내고 복을 빌고 무사태평하기를 기원한다. 차이가 있다면 백성들은 설날이나 정월대보름 같은 특정한 날에만 복을 빌지만 궁궐에서는 일 년 내내 연중무휴로 복 빌기 시스템을 작동했다는 것이다. ‘십장생도병풍(十長生圖屛風)’이 대표적 증거다. 그림은 전체가 8폭으로 된 병풍이다. 청록색으로 된 암벽 사이로 구름이 걸쳐 있고 하늘에는 붉은 해가 떠 있다. 크고 작은 사슴들은 폭포가 흐르는 우측에서 좌측을 향해 걸어간다. 복숭아가 열린 우측에서 거북이 헤엄치는 좌측으로 향하는 병풍의 방향을 따른 배치다. 바위틈에서는 발에 차일 듯 많은 영지버섯이 자란다. 노송 위에는 학들이 앉아 있다. 학의 종류도 홍학, 백학, 청학 등 다양하다. 청학과 홍학은 소나무 위에 앉아 있고 백학과 홍학은 푸른 창공을 날아다닌다. 모두 장식성과 화려함을 겸비한 작품이다.
그림에 등장한 동물과 식물들은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신비스러움의 대명사다. 궁궐에서는 이런 그림을 펼쳐놓고 장수를 빌었다. 지난 칼럼의 주제인 ‘무신년진찬도병’에서 통명전 대왕대비의 빈 의자 뒤에 배치된 병풍도 ‘십장생도병풍’이다. 왕비의 처소에도 십장생도병풍을 둘렀다. 왕비는 십장생도병풍을 보면서 장차 보위에 오를 왕자를 생산하기를 염원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삼았다. ‘무신년진찬도병’에서 헌종의 사례가 말해주듯 궁중에서는 의외로 자손이 귀했다. ‘십장생도병풍’에는 자손을 많이 낳아 무병장수하여 왕조가 번창하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런 염원은 비단 왕실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왕은 정초가 되면 고위 관료들에게 세화(歲畫)를 하사했다. 세화는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로 왕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던 그림이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성현(成俔)은 1502년에 왕이 하사한 세화 ‘십장생도’를 받고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 작자미상. ‘십장생도병풍(十長生圖屛風)’. 19세기. 비단에 채색. 380.4×210.0㎝. / 국립고궁박물관
‘해와 달은 항상 임하여 비추고, 산과 내는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는 눈이 와도 끄떡없고, 거북과 학은 백세를 누리네. 흰 사슴은 모습이 실로 깨끗하고, 붉은 영지는 잎사귀 또한 기이하네. 장생에 깊은 뜻 있으니, 신(臣)이 또 사사로이 은혜를 입었네.’
성현이 묘사한 글을 보면 그가 1502년에 받은 세화가 19세기에 그려진 ‘십장생도병풍’과 거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성현의 시에서처럼 ‘십장생도병풍’에도 해, 산, 내, 대나무, 소나무, 거북, 학, 사슴, 붉은 영지 등이 등장한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복숭아에 대한 묘사가 없는 것이 조금 의아하다. 삼천갑자 동방삭이 서왕모의 정원에서 훔쳐 먹은 복숭아가 아닌가. 사슴은 ‘십장생도병풍’에 나온 것처럼 그림에 따라 꽃사슴만 그린 경우도 있고 흰 사슴이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바라만 봐도 수명이 쑥쑥 늘어날 것만 같은 물건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십장생도가 왜 복을 비는 그림이라는 뜻일까.
얼마나 長壽하기를 원했으면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죽지 않을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부귀영화도 좋고 무한권력도 좋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서경’ 홍범 편에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는데 그 첫 번째로 수(壽)를 들었다. 수는 장수를 뜻한다. 장수에 대한 염원이 압축된 그림이 ‘십장생도병풍’이다.
‘십장생도병풍’에는 하늘과 땅과 물에 사는 신령스러운 동식물을 그려 넣었다. ‘십장생’은 장수를 상징하는 열 가지 사물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열 개는 ‘많다’ ‘충만하다’ ‘완전하다’는 뜻이지 꼭 10개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십장생도에는 열 개가 아니라 열세 개의 사물이 들어간 경우도 많다. 이런 사물을 길상물(吉祥物)이라고 한다. 경사스럽고 상서로운 물건이라는 뜻이다. 열 개의 길상물에는 고구려 때부터 형성된 우리 민족의 세계관과 우주관, 신선관이 투영되어 있다. 상당히 도교적인 사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주자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이런 장생물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장생물이 담긴 문양을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기, 자수, 목공예품 등의 일상생활용품에 사용했다. 궁궐에서뿐 아니라 사대부가에서도 십장생도병풍, 모란도, 수복강녕의 문자도, 남극노인도, 신선도 등을 의외로 많이 소장했다. 무병장수, 불로, 수복(壽福) 등은 도교에서 추구하는 사상이다. 유교와는 대척점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주자성리학을 제외하고 불교나 도교 등은 도외시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무병장수와 불로장생은 종교나 이념의 틀 안에 가둬둘 수 없는 보편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 욕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수복문자도10폭병풍’만 봐도 알 수 있다. 10폭병풍에 오로지 ‘壽(수)’ 자와 ‘福(복)’ 자만으로 가득 채웠다. 글자마다 색상도 다르고 글자체도 다르지만 각 폭마다 ‘壽’ 자와 ‘福’ 자만 번갈아서 써 넣은 것이 특징이다. 도대체 얼마나 갈망했으면 저렇게 했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저 글자를 보면서, 살 만큼 살았는데도 더 살고 싶어 안달인 늙은이의 추한 노욕을 지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실록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자식을 앞에 둔 어미의 피눈물 나는 사연도 숨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저 병풍을 일반 백성이나 사대부가 아닌 궁궐에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 백자청화수복자무늬합’. / 국립고궁박물관
밥그릇·국그릇에 새긴 ‘福’
예전에 어떤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었다. 그 집에는 거실 한쪽 벽면에 청화백자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 밥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밥그릇과 국그릇이었다. 실제 사용한 듯 그릇 모서리에는 빛바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릇 안과 겉면에 전부 ‘福’ 자가 새겨져 있었다. 집주인이 골동품상에서 몇 년에 걸쳐서 수집한 그릇이라고 했다. 복 받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증거였다. 저 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먹었던 사람들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복을 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에는 수북이 올라간 밥그릇을 앞에 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백자청화수복자무늬합’도 그런 사례를 보여준다. 그릇 안쪽에는 ‘壽’가, 뚜껑에는 ‘壽’와 ‘福’이 엇갈려서 새겨져 있다. 밥을 먹는 사람은 ‘수복’을 기원한 뚜껑을 열고 수저를 들었을 것이고, 그릇 바닥에 장수를 기원하는 축원을 본 후에야 수저를 놓았을 것이다. 식사시간 전후를 온통 ‘수복’의 축원 속에서 밥상을 받았으니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밥 한 그릇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다.
‘십장생도병풍’이 ‘수복’에 대한 염원을 동식물로 형상화해 그려 넣었다면, 문자도와 그릇에는 그 염원을 기호화했다. 그림이든 문자든 ‘수복’에 대한 기원과 바람은 똑같았을 것이다. 지금은 정월대보름이 되어도 다리밟기를 하거나 달점을 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신이라고 생각하거나 비과학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더 환해지고 명료해졌을까.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었을까. 인간의 삶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살아가는 동안 잠깐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 외에 평생을 고생만 하다 결국에는 병에 걸려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그 짧은 인생길에서 바이러스의 기습공격을 당해야 할 때도 많다. 이것이 바로 유명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점집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월대보름 음식을 준비하면서 500년, 600년 전부터 부럼을 먹으며 장수를 빌었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떠나야 할 사람들이지만 갈 때 가더라도 사는 동안은 잘 살아야겠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