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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기와집 뒤켠에 구두 한 짝 버려져 있다
그 속에 새끼 민들레 가녀린 줄기 꽂고
잔뜩 휘어져 있었다
이제는 노란 꽃술 다지고
햇무리 속에 일가들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바람 부니 미련없이 길 떠나는 꽃씨들
방향은 모두 제각각이다
이제는 서로가 만나지 말아라
가더라도 구두 속 같은 더러운 세상에는 살지 말아라
나비가 그립거든
등대처럼 노란 꽃술을 쳐들고 흔들어라
어둔 구두 속 같은 세상을 환히 불 밝히거라
우중산사
꽃잎들이 대웅전 문짝에 달라붙는다
축축한 비바람이 몰고 온 봄날
성질 더러운 땡중은 간 곳 없고
소나기 두들겨 맞은 강아지만 낑낑거린다
산골짝에 몽글거리는 안개만 쳐다보다가
꽃잎에 눈이 시려 눈물 흘린다
밤이 되자 대웅전 처마위로
보름달 노란 꽃잎 되어 가볍게 떠다닌다
목련꽃 사연
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목련꽃은 시들었습니다
분명히 누군가에게 전해준 사연인데
아무도 그것을 읽지 못해 꽃잎만 나풀거립니다
펴들면 백지
마음 고운 사람만 읽을 수 있어 목련꽃은 더 눈부십니다
이러다가 세월이 다 흘러가겠습니다
목련나무 밑동을 껴안고 훌쩍거리던 여자가
왜 목련나무를 떠나갔는지 아직도 모릅니다
그 여자 떠난 후에 목련나무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습니다
하룻밤 자고 나니
나무 아래 흩어진 꽃잎이 수천 장
바닥에 뒹굴다 온몸 누렇게 바래면
나 그렇게 이승 떠나고 싶습니다
지상에 꽃 무덤을 만드는 목련처럼
묵은 꽃잎 한 장이라도 내 몸 감싸준다면
고마움의 눈시울 붉히며 떠나고 싶습니다
벚나무 아래 세례성사
벚나무 아래서 신부님이 세례성사를 베풉니다
눈이 해쓱한 환자
의자에 기대 링거를 맞는데
벚나무 제 심장 찢듯 꽃잎을 갈기갈기 찢습니다
세상을 헤매다 길을 찾지 못해 주님 앞에 섰습니다
이 가련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십시오
벚꽃이 기절하듯 꽃잎을 펑펑 흩날립니다
꽃잎이 환자의 이마에 하나씩 달라붙습니다
벚나무가 환자의 이마에 세레성사를 베풉니다
주변이 축하객의 웃음소리로 환합니다
산 아래 밀밭 끝 성당에서 찬송가 소리 들립니다
단풍
폭발하지 않을 거라고
가슴 여미며 살았는데
세상인심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분노가 쇳물처럼 뜨거워
사람들 속까지 녹여버렸다
거미
그녀를 기다린 지 수십 해가 지났다
지독한 사랑에 목마른 여자라 해도
거미 같은 나를 어느 누가 좋아하리
말없이 엉덩이에서 무료함만 빼내는
내가 싫어 오래전에 도망갔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엔 고물고물 그녀 생각뿐이다
칡넝쿨 비비 꼬이면 그녀가 떠오르고
칡꽃 흐드러지면 그녀 상상에 잠 못 드는 저녁
그녀를 허공에 가마니처럼 말아 놓고
천년만년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내 눈두덩이 눈물로 퉁퉁 부어도 아쉽지 않으리
칡꽃 빛 노을이 뜨고 질 때까지
그녀 생각에 몸서리치며 살아도 원이 없으리
칡꽃
쓰러진 고목들을 칡넝쿨이 안고 있다
땅에 처박히면 큰 일 난다는 듯
애기처럼 다정한 손길로 끌어안는다
저것들 냉혈한으로 알았지만
온몸에도 따스한 피가 흐르고 있다
애초에 칡의 심성 알았지만
저들에게 가졌던 편견이 잘못이다
더 이상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인간의 고집 앞에
칡넝쿨의 생애는 점점 꼬여만 간다
칡이 고목을 평생 동안 끌어안고 있을 때까지
편견이란 말 입 밖에 내지를 말자
칡꽃 3
칡꽃 서럽도록 아름다워도
벌들만은 시끄럽게 운다
외딴집 내려가는 고샅길
칡넝쿨 늘어진 자리마다
고라니 똥 한 무더기 쌓여 있다
부끄러워 숨죽인 낮달이
세월 갈수록 해쓱해져도
벌들은 그 자리 떠나지 않는다
칡꽃 서럽도록 황홀해도
벌들 소방차처럼 붕붕 대는데
인적 없는 두메산골
보는 사람 없는데도
칡꽃은 붉은 마음으로 핀다
콩나물
콩나물은 자라면서도
세상이 궁금했다
자꾸만 대가리가 물음표로 꺾여졌다
어둠 가득한 시루 속에서
낯선 세상만을 열망했다
바깥에 하늘이 있다는 건
살짝 보자기 벗겨
흠씬 물세례 받을 때뿐
하루에 한 번씩
세상을 보여주는 어머니의 손길에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듯했다
혁명
갑자기 동백꽃이 툭하고 떨어졌다
방금 무사가 동백 숲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른 듯
동백 숲이 무겁게 흔들린다
일순간 먹구름이 마른하늘을 휩쓸고 낙뢰가 몰아친다
동백 숲을 휘돌다가는 음산한 바람 속에
무사의 시퍼런 칼날이 번쩍 불을 뿜었다
모가지 째 나뒹구는 꽃송이들이
흥건히 고샅길 적실 때
혁명은 이미 동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호박꽃
그녀는 다산의 여인
하루가 멀다 하고 아기를 순산한다
매일 박색이라고 놀림 받지만
수풀더미에 쑥쑥 낳아놓은 아기들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그러나 낳기만 하고 내방쳐놓아
그녀의 품속엔 아직도 팔려가지 못한 놈들이 수두룩
뒹굴거리는 자식들 보면 한숨 푹푹 나오지만
출산이 취미라도 되는 듯
허구한 날 아기만 쑥쑥 퍼질러 놓는다
이제부턴 벌들과 밀월 즐기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도 작심삼일
품속에서 커가는 자식들보면
그녀 입이 호박꽃처럼 벌어지기도 한다
황간역
100년이 넘는 세월을 앞에 두고
녹슨 열차 게으름뱅이처럼 뒹굴고 있다
민들레 같은 흰 깃발 흔들던
늙은 역장은 보이지 않고
코스모스 무리 다 져서
까만 씨앗만 흩날리던 철로변 따라
노란 수술처럼 불꽃 튀기며 달려오던 쇠바퀴는
세월에 꽁꽁 묶여 꼼작하지 않는다
붉은 쇳물처럼 끓어오르는 월유봉 노을 따라
급행만 미친 듯 터덜터덜 달려가는 간이역
이팝나무 아래
아무리 굶어도 저것이 밥으로 보일라나
흰 꽃술 가득 채운 고봉밥에게
날아오는 놈들이 어디 벌들뿐이랴
벌의 날갯소리 기운찬 것은
봄날의 허기를 꽃향기로 때웠기 때문이다
이팝나무 아래 엎어져
잠만 자는 넝마주이 앞에
세들어 사는 봄날이 안타깝다
독거
독거의 외로움은 사랑방에서 시작된다
봄밤에 앓고 있는 노파의 신음소리
외로움보다 더 지독하다
설한풍 창문을 때리는 한겨울에도
보일러 돌아가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방문 확 열어보면
움푹 꺼져가는 눈동자
봄이 왔다고 툭툭 털고 일어나라 해도
노파의 눈길은 하늘로 향한지 오래
밥풀 덕지덕지 붙은 노파의 빈 밥그릇 속엔
파리 몇 마리 찬바람처럼 날아디니고 있다
펭목항
세월호가 침몰한 후
바다는 아이들의 무덤이 되었다
봉분도 비석도 없이
수백 명의 아픈 이름들을 물속에 아로 새겼다
하늘에는 홍싯빛 노을이
만장을 펼쳐 휘날렸다
바다가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시커먼 속을 보여주지 않을 때
팽목항에는 노란 리본이
나비 떼처럼 팔랑거렸다
파문
빗방울에 맞아 번져가는 물결이
멀리 사랑을 실어나른다
반대편 산자락 닿은 후 돌아오는 물결이
사랑에다 그리움까지 실어보낸다
아들아, 아비를 사랑하거든
금강에 나가 돌 하나를 집어던져라
산자락을 밀고 돌아오는 물결 속에는
주름살 깊은 아비의 웃음이 있다
봄비
이슬비가
나뭇가지를 살살 쓰다듬는다
부르튼 살결에 애무를 한다
고생했다
한겨울 참느라고
나무가 울컥하여
애기처럼 앙증맞은 잎
쏙쏙 내민다
풍경소리
은방울꽃 피는 봄날은 적요하다
바람이 때리는 절의 풍경소리로 꽃은 피어나고
꽃향기는 종소리처럼 멀리 번져 간다
느티나무 휘돌아 가는 길목 따라
매미는 쓰라리게 울고
껑충한 익모초는 보랏빛 꽃물을 뒤집어썼다
바람 불면 휘어지는 은방울 꽃대에는
은빛 종들이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종 한 번 치려는
은방울꽃의 하루가 적요함 속으로 스며든다
중매 서로 가는 길
호박넝쿨 우글대는 둑길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간다
내 허리를 꽉 잡은 여자는
오토바이가 덜컹거릴 때마다 비명을 질러대고
풀뱀은 놀라 둑길을 넘어간다
두엄 속에서 길을 낸
메꽃이 넝쿨을 비비꼬며 기어가고 있다
벌들의 수다스런 날갯짓에 지쳐
메꽃 봉오리가 반쯤 벌어져 있다
금광에 들어가 곡괭이질하던 광부처럼
벌들은 뱃심 좋게 꽃가루를 퍼낸다
저 꽃가루 다리에 묻혀 중매 서로 가는 길
오토바이 뒤에 처녀를 태우고
달리는 둑길엔
벌써 산그늘이 내려앉았다
어머니의 은 숟가락
흘러간 세월이 아득한데도
아내는 숟가락을 찾고 있었다
어머니가 유산으로 물려준 은 숟가락이었다
어머니가 심심하면 잿물로
녹 곱게 닦아 내던 그날처럼
마당가 감나무에는 단감들이 탱탱하게 열렸다
돌담 밑 묵은 항아리도 들춰 봤고
뒷간 속 잿간도 뒤져봤지만
숟가락의 행방은 묘연했다
감을 먹다가 감씨를 깨물지 않았다면
숟가락의 행방은 미궁에 빠질 뻔했다.
쪼개진 감씨 속에 박혀있는 은숟가락이
흘러간 세월만큼 닳아 있었다
어머니는 건망증 심한 아내를 믿지 못해
은숟가락을 감씨 속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난들 어쩌란 말이야
꽃이 핀다고 울고
꽃이 진다고 울고
난들 어쩌란 말이냐
네 눈을 보니 온통 외로움만 고여 있다
저수지 건너편에도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다
외로움이 외로움과 만날 때
물결은 희디희게 일어나
네 마음을 쓸고 갈 거다
적적함과 적적함이 만날 때
수양버들도 유연하게 허리춤 추며
네 마음을 쓸고 갈 거다
말뚝에 묶인 느릿한 울음을
물잠자리가 날아와 싣고 간다
수양버들 지겹도록 물속에 머리를 풀고
술렁술렁 외로움을 씻고 있다
그래도 네 눈 속엔 외로움만 가득해
꽃이 핀다고 울고
꽃이 진다고 우니
난들 어쩌란 말이야
폐가
엉겅퀴가 껑충한 꽃대를 세워
빈집을 둘러싸고 있다
마당길은 안개로 지워져 있고
시계풀이 정오의 적막을 재고 있다
유령이 머리 풀고 가부좌 틀고 있는 집
뻐꾸기만 뒷산에서 까무러치며 운다
백발성성한 민들레는
이미 외지로 새끼들 떠나보내고
풀벌레들은 서러워 찌르륵거린다
풀죽은 봄이 정오를 향해 달려가는데
주인 그리워 집을 지키는 건 엉겅퀴밖에 없다
팽목항에서
열일곱 꽃 같은 너를 먼저 보내고
에미는 오늘도 팽목항에 나와 섰다
마당가 수선화는 노란 리본처럼 술렁이는데
어른들의 세상은 말짱 거짓말이다
꽃 한 송이 보는 것도 사치스러워
눈물로 밥을 대신하고 팽목항으로 나왔다
차디찬 물속에서 몸 웅크리고 떨고 있을 꽃들아
비에 젖은 노란 리본에 얼굴을 묻으며
절대로 에미를 용서하지 말거라
너를 꺼내줄 동앗줄 하나 내려주지 못했구나
바다 속에서 부활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에미는 꾸역꾸역 미련만을 삼키고 있다
길 잃은 갈매기 부음을 전해 주며 울어도
팽목항 노란 리본은 희망처럼 펄럭인다
그대가 오는 날
내 몸이 노랗게 물들거든 난 그대가 온 줄을 알겠네
도로변이건 숲속이건
그대가 오는 날이면 난 목을 길게 빼고 먼 산을 바라보네
단풍빛이면 세상이 더 따듯해져 좋겠지만
잔가지마저 칸칸이 뒤덮은 노란 장막도 그에 못지 않으리
등불 같은 마음으로 서 있으면
황홀하게 눈길 주는 사람들이 좋아
내 몸은 스스로 익어가네
익다보면 바람이 자는데도 잎들이 가볍게 흩날리네
무거운 짐 훌훌 벗어던지고 가는 길에
내 무엇인들 두려울 게 있으랴
바람 부는 소릴 들으면 올 겨울은 눈물 나게 모질겠네
폭설이 몰아친다는 소식 들려와도
나뭇잎들을 모두 떨어내며
따스한 손으로 그대를 덥석 잡아 부둥켜않겠네
겨울편지
추운 겨울밤 찬바람이 고드름을 때리며 지나간다
남녘을 그리며 눈물짓던 새도 날아올까
숲들마다 마음이 변해 단풍 든 자리
나무의 언 속 아직 푸른 혈기로 들끓지만
산맥을 타고 넘어온 눈발이 군무를 추고 있다
계곡에 희끗희끗한 잔설들이
내 마음 속에서 환하게 빛난다
겨울이 물러가기 전에
편지 속에 내 사랑 꾹꾹 눌러 담아 띄어 보내야지
눈발이 백마의 갈기처럼 휘몰아치는 산녘을 보며
말없이 떠난 그녀의 얼굴을 그려볼 때
올 겨울 차디찬 내 방도 조금은 따스해지리
민들레 연가
꽃피는 봄날
외딴집 들창 밑에 늘씬한 여인네 하나 서있다
빗살처럼 퍼지는 햇살 따가워
노란 양산 빙빙 돌리면서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수줍음에 얼굴 달아올라 도망을 가더니
그 때 밟고 갔던 산모롱이 고샅길 따라 와 들창문 아래 서있다
빨리 여인을 만나야지 하면서도
선뜻 돌아서지 않는 마음 무슨 말을 할까
다시 말을 붙이지 않으면 그때처럼 도망가지 않을까
어여쁜 얼굴에 백발이 덮인다면
옛날의 그 환상도 모두 깨지리
더는 말고 덜도 말고 딱 한마디 하자
이제는 떠나지 말고 내 곁에서 함께 늙어 가자고
백발 흩어져 민대머리로 남는데도 어떠냐고
신발의 향기
주인 잘못 만나 먼 길 걸어야 하는 신세를
세월이 더 잘 알고 있다
새벽부터 안개 길을 걸어야 하는 심정은
걸어보지 않는 이는 모른다
그는 주인 잘못 만나
가시밭길을 고생하며 걷는다
이렇게라도 해야 목에 풀칠하는 것은 알지만
뒷굽이 꺾여지고
발뒤꿈치 벗겨져 멍이 들어도
황소처럼 걸어야 하는 고달픈 생애
귀가하여 뜰에 놓인 몰골을 보면
옛날 개고생하며 살았던 아버지의 후줄근한 얼굴이 보인다
안쓰러움에 헤져 부르튼 그의 이마를 쓰다듬곤 한다
그에게 묻어 날리는 퀴퀴한 냄새를
봄밤에 흘러 퍼지는 꽃향기로 상상만 해도
그가 살아온 생애 문득 꽃길처럼 환해질 때도 있다
함성
겨울인지 알았더니
벌써 봄이 사립문에 앉아 짝짝 손뼉을 치더군
나팔꽃 휘두른 사립문 금세 환해지고
멀리서 날아온 벌 떼들 목이 다 쉬었더군
봄이 왔다고
몇 번 함성을 지른 탓 일세
그것도 모르는 나팔꽃
줄기 뻗어 사립문 어지럽게 타고 오르더니
햇빛 한 사발로 촬촬 목욕을 하더군
산그늘
철로의 버팀목은 열기로 끓어올랐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폭염도 문제지만
엿가위 치듯 지나가는 쇠바퀴의 무게에 열이 받쳤다
쇳소리로 내지르는 고함은
철로변 잡목들을 긴장시켰다
어렵사리 피어난 꽃들은
고함 소리에 놀라 일찍 유산이 되었다
날 갈수록 철로변은 더없이 슬픈 기운이 감돌았다
오두막의 적적한 풍경 때문이 아니라
짐승처럼 철로변으로 내려오는 산그늘 때문이었다.
산자락 무너질 듯한 기차의 고함에
철로는 평생 만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안고
풀뱀처럼 산모롱이 휘돌아가고 있었다
된장
풀들이 쭉쭉 키를 늘여 장독 속을 엿본다
텅 빈 장독 속이 몸살 나게 궁금했나보다
바람 잘 날 없는 세월에 들볶인 듯
점잖게 튀어나온 배에 가늘게 실금이 가있다
실바람만 불어도 풀썩 장독이 깨질 것 같다
까치발을 뜨고 살금살금 지나가는 바람이
부드럽게 풀들의 등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오랫동안 장독 속을 엿보면
그 속에 고인 그리움도 모두 달아날지 몰라
오래 전 퍼먹다 남은 묵은 된장 맛처럼
아지랑이가 장독 속에서 확 풍겨 나온다
어느 봄날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어머니 품이 그리웠다
쪼그라진 젖무덤
메마른 오디처럼
단물 몽땅 빠져나간 젖꼭지
오물거리며 빨고 싶었다
햇살 묻힌 벌들도
꽃샘 속에 입 디밀고
꽁무니 까닥거렸다
꽃향기 흥건한 뒤뜰에서
그 광경 술 취한 듯 바라보다가
어머니와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시원한 밭고랑으로
마늘 한무리 고개를 쳐들었다
고랑고랑 가득 찬 햇살,
꽃샘 바람 헐레벌떡 떠난 자리에
마늘은 뾰죡한 혀들을 파릇파릇 빼올렸다
고단한 세상 향해 한 말씀 하고 싶은 듯
봄볕에 의지해 침묵하고 있는 마늘들,
자식처럼 정주고 보듬어봤자
나중에 원망만 듣는다는 아버지,
다 큰놈 머리채 다발로 묶어
찬바람 몰아치는 장터에 보내봤자
손해만 본다던 아버지,
그래도 햇살이 던져주는 위로를
이불처럼 끌어 덮고
마늘은 철모르는 아가처럼 곤하게 낮잠을 잔다
키울 땐 서글프던 저것들,
키우고 나니 열자식 부럽지 않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마늘이 저마다 초록의 혀들을 닫고
왜 아버지 앞에 침묵으로 견뎠는지를 이제야 알겠다
도시의 밤거리
처녀가 홀로 걷기에는 무서운 길이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곪을 대로 곪아
누군가 등 뒤에 서 있어도 서늘해지는 길이다
앞을 보고 걷지만
가자미처럼 옆 눈을 굴리며 다녀야 하는 길이다
가로등 없는 길로
쫒아오던 달이 집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마음 놓지 못하는 길이다
짐승의 눈빛이 번득이는 거리를 처녀는 자주 걷는다
길이 무섭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걷는다
우렁이
제 살 몽땅 파 먹히고
먼 길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직감적으로 황새를 의심했지만
살 한 점 남아 있지 않는 몸뚱이를 보고
말썽꾸러기 자식인줄 알았다
머리가 굵어도 밥벌이 하지 못하고
제 엄마 치마폭에 붙어
아작아작 등골만 빼먹던 자식
무논에 둥둥 떠서
저승길로 가는 엄마를 보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황새 날아와
슬픈 현장 황망히 보고 있는
저녁 무렵이다
계급장
부모님은 칠순 넘어 싸움이 더 심해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늘 열세다
어머니가 퍼붓는 잔소리에
대항도 못하고 옥신각신하다 한방에 간다
그것에도 이유가 있겠거니 고민해오다
내 마흔 살 무렵에야 알았다
두 분의 이마에 난 주름살이 계급장이란 것을 알았다
노름으로 젊음 탕진한 아버지 탓에
주름투성이 얼굴이 된 어머니
갈매기 어지러운 계급장 달고 나타나면
잔뜩 기죽는 아버지
계급장에 서로 눈을 맞추며 옥신각신해도
늘 싸움은 아버지의 패배로 끝난다
아내의 화장
아내가 화장을 하면 얼굴에서 꽃바람이 분다
봄날도 아닌데 메마른 들판에서 꽃이 핀다
저승꽃 뒤덮은 들판을
붓으로 바지런히 갈아엎는 아내
푸석한 흙을 탈탈 털고
가을빛으로 물꼬를 터주면
얼굴엔 단풍 빛 생기가 돈다
늘 답답한 집안에서만
틀어 박혀 있던 여자
들판의 꽃들이 눈웃음을 쳐도
한 번도 꽃구경을 가지 못 한 여자
오랜만에 얼굴에 꽃을 피우고 집을 나선다
펄럭이는 치맛바람 따라
엉큼한 사내들 눈빛이 따라 붙는다
낙엽
미련 많아 뜨지 못한 혼령처럼
낙엽하나 가지에 붙어 파르르 떤다
가지가 바람을 붙잡는다
이렇게 사시나무 떨다 갈 곳은
지상에 쌓인 낙엽 무덤
한때는 그들이 나무의 푸른 주역이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때는 살기가 등등했었지
잎들이 나무를 덮고 산 하나를 일으켜 세웠지
저렇게 앙상한 몰골로
세상 끝을 붙잡고 있는 잎을 보면
비틀거리며 떨어져
땅속에 누워 계신 아버지가 보인다
단풍 강
그 강은 사시사철 흐르지 않는다
초록의 산자락에서 시작해
가을의 입구에서 강줄기는 시작된다
구불거리고 아픈 허리로 흐르는 게 아니다
여자가 사내의 가슴에 불꽃 사랑을 덮치듯
강물은 일순간 산위에서 아랫녘을 덮쳐 내려온다
그렇다고 집을 삼키거나 들판을
짓뭉개며 흐르지는 않는다
가을이 지나갈 때까지
사람들 마음속에 붉은 그리움을 쥐어짜다 간다
12월
담쟁이가 도착할 12월이 너무 멀다
세월의 험한 계단을 밟고 오르듯
담장을 타고 오르면
거기 12월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그 끝에 다가갈수록
담쟁이는 물관을 닫아걸고 식음을 전폐한다
독거노인처럼 빼빼 말라가는 줄기를
좁은 담 벽에 펼쳐놓고
생계에 비틀거리던 날들을 지문으로 남겨놓는다
찬바람 매섭게 지나가는 담장에
어지러운 지문을 남기는 12월이 아득하게 멀다
단풍 강
만산의 홍엽들이 불꽃처럼 너울거린다
초록잎들은 애초 불꽃을
제 마음속에 쟁여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햇살에 데어 발진처럼 번져가는 잎들이
왕창 내린 서리에 물들어 찬란하다
그 찬란한 길로 꽃가마가 노을을 끌며 간다
단풍 강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엿소리가
늦가을 속으로 뻐져든다
능소화
여인이 담장위에 섬섬옥수를 얹는다
금빛 분화장한 얼굴
달빛에 취하니 명기가 따로 없다
양반 앞에 앉아 가야금을 타러 가는 길
늙은 감나무 밑동을 감고 오르며
쉴 새 없이 가슴을 두근거린다
능소야, 능소야 애달프게 부르는 소리 들리면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담장에 꽃버선 같은 달빛 올올이 풀어놓는다
달팽이
비 그친 날 집을 나와
술 취한 듯 길을 헤매는 저 사내
마누라와 싸웠는지
쭈뼛거리는 더듬이
집 한 채를 통채로 지고 가는
저 길이 어지럽다
설날 아침
띵에 쌓이는 싸락눈이
고운 손길로 내 마음 덮어주고 있었다
싸락눈에 손바닥을 대보면
어지럽게 찍히는 지문
내 어수선한 세월 보여주고 있었다
저 세월 속에 엄마도 서 계셨다
설날 시골 방앗간에 들러
버릇처럼 떡쌀 빻아 오시던 엄마의
흰 고무신이 싸락눈처럼 눈부셨다
하늘로 떠난 엄마가
하늘 방앗간에서 떡살을 곱게 쌓아
바가지째 뿌리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다국적 은행
먼 훗날 은행잎이 돈이 되는 세상이 올까
내 주머니는 비워진지 오래
개뿔도 없는 주제에 있는 척 하고 살았지만
꼴은 누추했다
가을이 오면 눈물이 많아지고
버릇처럼 은행나무 밑동을 발로 차는 날이 많아졌다
개 패듯이 밑동을 발로 찰 때마다
은행잎이 꽃너울처럼 떨어졌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와 은행잎을 쓸고 간다
돈이 사라질 먼 훗날을 위해
은행잎을 쌓아두는 다국적 은행으로 간다
수국
수국이 뭉게구름을 닮았지만
어느 누구도 수국의 음모를 알아채지 못한다
꽃만 보면 환장하던 벌들도
꽃의 내부까지 도 줄줄이 꿰차고 있는 나비들도
술 취한 듯 수국에 앉아 꿀을 빤다
수국의 음모에 속았어도 후회하지 않는다
잎을 꽃으로 착각하고
찾아간 것은 순전히 벌나비의 잘못
수국은 더욱 희게 뭉게구름처럼 흘러가고
수국 향은 짙게 마당을 적시는데
그들은 떠나질 못한다
붕붕거리는 벌들이 수국에 묻혀
죽을 자리를 찾는다
노랑부리저어새
안개 강 너머 홀로 걷는 그녀의 등짝이 외로워 보였다
강변은 아지랑이로 빛났지만 강물은 지독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끼어 강의 절반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노랑 주걱으로 강을 휘저으며 찬거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물속을 유영하던 물고기들이 주걱에 딸려 나왔다
새벽의 활기로 발버둥치는 강줄기가
갯내를 풍기며 그녀의 긴 다리처럼 굽이쳐 흘러갔다
단풍
산천이 온통 긴 만장을 걸쳤다
어느 귀한 분이 죽었는지 만장의 대열 끝이없다
산정에서 아랫마을까지 내려오는데 사흘이 걸렸다
구경꾼들은 장엄한 광경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봉수대
봄날만 되면 우린 격렬히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만 되면 산 능선에서
산 벚꽃들이 연기처럼 아물아물 피워 올랐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을 하다 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 무리의 적들이 살금살금 다가와
우리의 사랑을 덮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뿐이었다
산 벚꽃 지고 나도
우리에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서도 적들이 우리의 내밀한 사랑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산 벚꽃 지는 날에도
가슴은 늘 방앗간처럼 두근거렸다
장작
사내가 뒤란에서 장작을 팬다
묵은 낮달만 내려다보는 한낮
귀뚜라미만 적적히 울어
땀 범벅 얼굴 한 채 장작을 팬다
세상은 왜 이리 질긴 것이냐
일어서려 해도 자꾸만 꼬꾸라지는 세월
누구하나 손 잡아주는 사람 없어
뒤란은 무섭도록 적적하다
한 세월 건너오며 열나게 살았지만
쌓아놓은 건 겨우 장작 한 무더기뿐
장작들이 한 놈씩 일어나 맞짱을 뜰 때
사내는 거칠게 도끼를 내리친다
단번에 장작은 두 동강 나 뒹굴고
도끼 끝엔 허무의 햇살이 앉아 반짝거린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장작의 생도 찬란하게 물들 것이다
누군가 집어놓은 아궁이 속에 들어 앉아
지난날 찬란했던 단풍처럼
불꽃 송이송이 피워 올릴 것이다
고향길
할아범이 할멈 앞서 고갯길 오른다
이 고개 넘으면 고향인데
산길 너무 비탈져서
한발 디뎌도 거친 숨소리 턱에 차는 길
가는 길은 천릿길이고
앞서가던 할아범 긴 수염 매만지며 흐음흐음
어이와 어이
함께 손잡고 가구려
우리 신혼 때는 늘 붙어 다녔잖어
둘이 붙어야 산길도 낮아지는 법이라우
회개
도깨비풀은 밤낮으로
개과천선할 기회를 달라고 빌었을지 모른다
꽃 핀 철은 찬란했을지 모르나
열매의 한철은 가혹하다
생긴 몰골처럼 추악한 이름
한밤중 상엿집 앞에서 인광을 켜며
얼굴에 수북이 가시바늘을 세운다
외로움 속에 웅크리고 앉아
겨우 한다는 짓이 남에게 집착하는 것이냐
이제 개과천선할 일만 남았다
밤길 걷는 이들에게 달라붙어 사랑 빼앗지 말고
꽃들과 뒤섞여 꽃답게 사는 일만 남았다
새벽 정화수에 물 떠 놓고
도깨비라는 이름 바꿔달라고 비는 일만 남았다
모르긴 몰라도 한생이 다가면
도깨비풀은 고운 이름으로 거듭날지 모르겠다
수양버들의 노래
일흔 살 늙은 여자가 머리를 빚는다
드럼통 몸매로 강변 언덕에 퍼질러 앉아
안개 바람으로 빗질을 한다
술렁거리는 머리칼에서 연둣빛 냄새가 난다
산언덕을 바라보는 늙은 여자의 젖통이
뭉게구름처럼 출렁거렸다
개나리꽃
아버지가 자전거에
개나리꽃 한 다발 싣고 왔다
남도에서 올라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길가에 나온 구경꾼들에게
개나리꽃 한 다발씩
목에 걸어주었다
초승달
마을에 실성한 여자가 돌아다녔다
흰옷을 입고 산발한 채 울다가
가슴을 치며 하늘을 쥐어뜯었다
그때 뜯겨진 손톱이
칼날처럼 하늘 모서리에 박혀 있었다
거미
그녀를 잡기 위해
보낸 세월이 두 해째다
웬만하면 포기했을 진절머리 나는 사랑
세월이 지나 사랑도 집착으로 바뀌었다
사랑은 그녀가 안개 그물에 걸리고 난 후였다
안개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는 것을
황홀한 춤의 자태로 알았을까
숨막히는 죽음을 춤으로 착각한
거미의 집착에
산은 오늘도 공포로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