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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中原의 역사와 충주사람 이야기
1. 중원中原이란 무엇인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명칭도 중원中原이다. 중원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람이 살아온 곳이다. 선사시대인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시대부터 초기철기, 원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시대의 증거들이 확인되고 있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삼한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를 특징짓는 대표적 사건들이 빗겨가지 않았던 곳이다.
충주고구려비가 있고, 백제의 철정이 나오며, 2천여기가 넘는 신라의 고분군과 중앙탑이 존재한다. 대몽항쟁의 승전지이며, 임진왜란을 치렀고, 명장 임경업의 충렬사가 있다. 한말 의병의 활동지이며, 동락전투가 있었다. 한강 뱃길과 영남대로는 우리 민족의 젖줄이었다.
2. 역사 초기의 중원의 역사
한반도에 인류가 살았던 최초의 흔적이 바로 중원지역에서 시작되고 있다. 바로 단양의 금굴유적의 가장 아래 문화층에서 70만년 전 인류의 흔적이 확인된다. 구석기유적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국한하면 단양과 제천지역에는 금굴, 구낭굴, 수양개, 점말동굴 등이 발굴되고 있다. 이 사실과 비교한다면 빈약한 편이나 충주에도 용탄동, 금릉동, 용산동과 신니면, 동량면 등에서 석기가 발굴되어 보고되고 있다.
신석기유적은 현재 조동리 유적의 아래층에서 확인되며 빗살무늬토기가 수습되고 있다. 조동리에서 수습되는 빗살무늬로 보면 암사리와 동삼동의 중간단계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조동리 신석기층에서 나온 볍씨 낟알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유적에서 출토된 볍씨낟알 중 가장 앞선 6,200년 전에 재배된 볍씨가 확인된다. 이 뒤를 이어 옥천 대천리, 고양 가와지, 김포 가현리 등의 볍씨가 뒤를 잇는다. 물론 구석기에 해당하는 오창 소로리 볍씨를 제외하고는 가장 앞선 시대의 자료라 주목된다.
청동기유적으로는 신니면 신청리고인돌, 동량면 조동리고인돌 등이 확인되었고, 집터유적으로는 동량면 조동리, 금가면 장태산 유적, 대소원면 장성리유적 등이 있다.
초기 철기시대를 살펴보면 충주에서의 철기시대 유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충주댐 수몰지역 발굴조사 때인 1980년대의 일이란다. 경북대학교 윤용진 교수팀이 발굴한 동량면 하천리유적에서 철기시대의 집터가 발굴되었다. 화재로 인하여 소실된 흔적과 함께 철기유물이 집터 내에서 다량 출토되어 크게 주목을 받았다. 하천리유적 만큼 완벽한 초기철기시대의 집터 발굴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했던 윤용진교수의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진다.
이러한 충주에서 2014년 봄 초기철기시대 진국의 수장의 무덤이 확인되어 전국을 들썩였다. 호암동에 충주체육관 예정부지에서 자그마한 적석목곽분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무려 19점이나 되는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세형 청동검 7점을 비롯하여 투겁창, 동모, 동과, 동사, 동착, 동부, 동경 등 청동기 19점과 토기 2점, 칠기 1점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23점 이었다. 이는 단일 무덤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청동유물이 발굴된 것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최초의 토광적석목곽묘였다. 통나무관을 사용하여 매장하였고 장례를 치루며 단계적으로 사자를 위해 비는 의식을 적어도 4차례 이상 행하였음도 읽어낼 수 있었다. 초기철기시대인 BC 2C경의 유구로 추정되는 것이었기에 고조선과 진국의 존재가 이야기되는 시대에 충주에 진국의 수장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해졌다.
3. 치열한 격전의 현장 삼국시대
충주일대는 삼국이 쟁패를 겨루던 지역이다. 처음에는 마한의 옛터였다가 백제가 확장하면서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백제의 유적은 세계조정선수권대회가 열리던 중앙탑면의 중앙탑 일대에서 확인되었다. 무려 36기가 넘는 백제의 집터가 확인되었는데, 이 마을유적에서는 600m에 달하는 수로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백제 집터 중 어떤 것은 집터 위층에서 아궁이 유구가 겹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고구려 사람들의 것이었다. 이런 사실에서 탑평리 일대에 백제의 마을이 있었고, 그 후에 고구려에서 내려와 동일 한 곳에 집을 겹쳐짓고 살았다는 해석이 된다. 백제의 유적은 탄금대의 공방에서 철정이 발굴되거나, 철제련로가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은 삼국 초기 충주의 주인은 백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음에 등장하는 나라가 고구려이다. 고구려가 충주에 남긴 것은 충주고구려비와 대소원면 탄방의 고구려무덤 6기뿐이다. 백제가 4세기까지 충주에서 활약하였다면 5세기에는 고구려가 주인이었다. 광개토왕이 신라에 원정군을 파견할 때부터 고구려세력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왕 때에는 신라,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남방기지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원성이라 한 것도 수도인 국내성에 버금가는 지역으로 대우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지명일 것이다. 충주고구려비는 바로 그 시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판단되나 4면비의 한 면만이 규명되고 있어 큰 아쉬움을 남긴다.
진흥왕이 중국과의 통로확보를 위해 한강 하류로 진출하며 충주는 신라의 영역이 된다. 진흥왕 12년(551년) 하림궁으로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케 하며, 18년에는 국원소경이 되며, 19년에는 6부 호민과 귀척자제를 사민시켜 신라의 강력한 고을로 만들고 있다. 이후 문무왕이 통일신라를 만들기 위해 당과 싸움을 하며 이 국원소경성을 개축하는데 무려 2,592보의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충주는 통일신라의 5소경의 하나로 비교적 안정된 삶이 되었다. 삼국의 화합잔치가 중앙탑을 중심으로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4. 철의 정신으로 뭉친 고려의 중원
고려시대 충주는 왕실의 외척세력 역할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29명의 왕비 중 3번째 부인이 신명순성왕후인데, 충주유씨 긍달의 딸이다. 신명왕후는 4왕자와 두 공주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요왕자가 고려의 세 번째 왕인 정종이고 소왕자가 네 번째 왕인 광종이 되었다. 이는 고려의 초기정국에서 충주세력이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광종은 954년 봄에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사찰을 충주에 지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은 숭선사(崇善寺)이다. 광종은 개성에 불일사(佛日寺)를 지어 어머니를 기렸고, 다시 어머니의 고향에 숭선사를 건립한 것이다. 이 숭선사는 1980년대 예성문화연구회원들에 의해 찾아지고 꾸준히 조사하여 지금은 사적지가 되었다. 이 절터에서는 금동불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고, 멋진 지하배수시설이 확인되는 등 고려의 건축, 토목기술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를 쏟아내고 있다.
고려시대 충주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몽고와의 싸움이다. 13세기초 대륙에서 일어난 몽고는 급격히 팽창하여 서쪽으로 서하를 복속시키고, 남쪽으로 원나라를 복속시키며 제국을 형성한다. 여세를 몰아 만주와 동유럽을 정복하며 대제국을 건설한 후 거란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고려와 만나게 된다.
충주에서의 몽고와의 싸움은 기록된 것만 9번이다. 이 가운데 8번은 모두 승리한 기사이고 단 한번만 성을 포기하고 산성으로 입보하여 몽고병에 의해 읍성이 도륙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의도적인 것이라 생각되기에 거의 전승을 거두었다고 생각된다.
여덟 번의 승리기록 중 도시이름이 승격된 예가 두 번이나 나온다. 1253년 김윤후를 중심으로 한 충주인들이 몽고군 야굴(也窟)장군의 본진과의 전투에서 70일 간을 싸웠고, 노비문서까지 불태우며 독전하여 기어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충주는 그 이듬해 충주목에서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다인철소(多人鐵所)민들이 몽고군과 싸워 이겨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하는데 익안현이 이안면이 되고 류등면과 합쳐져 이류면이 되었다가 지금은 대소원면으로 변하였다.
그런데 40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에서 도시이름이 승격된 예가 꼭 4번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4번 가운데 2번이 충주에서의 전투였다. 이는 충주인들이 외세에 굴복하지 않는 철의 정신의 소유자들이라는 천년역사의 귀중한 증거라 할 것이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선조들의 모습에 절로 고개 숙여진다. 더욱이 무명의 철소인들이 이룩한 승리는 오늘에 되살려야 할 최고의 정신적 자산이라 하겠다.
우리 지역의 역사를 살피며 조상들의 강인한 철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을 않거나 게을리 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충주의 고려시대 문화유적으로는 소개한 숭선사지 외에도 미륵대원사지, 정토사지, 의림사지 등의 절터와 충주외성, 대림산성, 보련산성 등의 관방유적이 있다. 또 대원사철불, 단호사철불, 백운암 철불좌상 등과 단월동, 호암동 등에서 발굴한 고려묘, 완오리야철지를 비롯하여 대소원면, 중앙탑면, 앙성면, 노은면 일대의 야철유적과 철광산 등이 다수가 확인된다.
5. 전통과 변화의 격동기 조선의 중원
* 충주사고
조선 초기의 충주는 충주사고가 가장 중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외사고를 그대로 이어받아 간직한 충주는 조선시대 보물창고였다. 우리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던 세종대왕시절 창제된 훈민정음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진보에 충주사고에 보관되었던 각종의 서책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충주사고에는 천문, 지리, 역학, 음양학, 의학 등 제반분야에 서적들이 총 망라되어 있었다고 한다. 세종이 문제에 봉착할 때 마다 서책을 가져오라고 수 없이 많은 관리를 파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충주는 직간접으로 크게 기여하였다고 판단된다.
* 탄금대와 임진왜란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이 가장 큰 사건이었다. 충주에서 벌어진 탄금대 전투는 조선의 명장인 신립장군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의 대결이었다. 물론 준비된 전투력과 신무기를 가진 왜의 우세는 예상되었지만 전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미 벌린 여진과의 싸움에서도 무용담을 떨친 신립이었기에 일말의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로 끝이 났고 조선의 8천 병사가 탄금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충주에서의 탄금대 전투 후유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충주사고의 소실이요, 다른 하나는 충청도 감영을 공주로 빼앗긴다는 것이다.
* 호락논쟁과 충청도 양반
조선의 성리학의 나라이다. 특히 명나라가 청에 의해 패배한 후 조선은 주자학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였다. 중국의 지형상 모든 강들이 동쪽으로 흘러 황해로 들어가듯이, 주자학의 정통도 명이 청에 패망함에 동방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직전 사림내에서 당파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는데, 율곡 이이와 성혼 선생의 계승한 서인과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계승한 동인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정국에서는 동인이 크게 우세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전란 후 동인인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서인에 주도권을 빼앗긴다. 서인의 대표였던 정철이 광해를 지지하다가 선조의 눈 밖에 나며 다시 동인이 주도권을 잡는데 정철의 처리문제로 의견 대립되어 강경파인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과 온건파인 유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으로 나뉘게 된다.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며 다시 서인 정국이 되는데 남인정국이 번복되어 부침을 하게 되는데 서인은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세력으로 나뉜다. 숙종, 경종, 영조로 이어지며 환국, 탕평으로 이어지며 부침하고 있는데 조선의 당파는 어쨌든 북인, 남인, 노론, 소론의 4색 당파가 형성되고 있다.
충주의 경우는 김효원의 손자인 김세렴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인 계열도 있었고,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묵재 허적이 남인(탁남)의 영수였으니 남인도 있었다. 여기에 우암 송시열과 수암 권상하, 남당 한원진, 병계 윤병구로 연결되는 노론의 본영이었고, 경종의 태실이 있는 것으로 지지하던 소론의 흔적도 보여 크게 혼재된 모습이다.
그러나 충주의 실제 주동세력은 기호학파이며 노론계열로 분류되었던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노론계열은 조선 후기사회에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나름 조선사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다. 이 가운데 오랑캐의 나라라고 하여 폄하한 청나라가 실제로 큰 힘을 가지고 강국으로 조선을 간섭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어떠한 논리로 대적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나온 논쟁이 호락논쟁이다. 사람(인성)과 물질(물성)이 같으나 같지 않으냐에 대한 노론계열인 권상하의 문하에서 격렬하게 벌어진다. 인성과 물성이 같지 않다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 호론(湖論)이고 인성과 물성은 같은 것이라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이 낙론(洛論)이다.
그러면 충주지역의 사람들은 호락논쟁 속에 어디를 지지했을까? 호락논쟁이 벌어졌을 때 수암 권상하은 호론을 지지했다. 따라서 수암의 본향인 충주의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남당 한원진, 봉계 윤봉구로 이어지는 호론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반면 낙론은 기호지방 중 서울과 경기지역에 있는 김창흡을 위시한 6창과 이간, 박필주, 어유봉, 이재로 이어지는 학자군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물론 나중에 안동김씨 문중의 일부가 충주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역시 대세는 아니었다.
호론의 주창자들은 물성을 가진 것과의 화합은 불가하며 토벌해야 한다는 엄격주의자들이었다. 반면 낙론 주창자들은 소인들도 교화가능성이 있기에 노력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즉 청나라를 타도, 토벌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 교화할 수 있는 대상이므로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러한 호락논쟁에서의 쟁점은 외세가 들어오는 시점에서는 위정척사와 개화파로 변화를 거듭하며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모습에서 충주인들이 삶이 귀결되는데 임경업 장군처럼 떨어지는 해인 명나라를 추종하여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하거나, 을미사변이후 의병을 일으켜 강한 기개를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충주의 유학자들이 추종하던 호론은 논리가 경직되어 시류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한다면 나름 개인적인 부(富)도 축적할 수 있고, 부국(富國)을 이룩할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충주사람들은 명분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적이 위협을 하여도 불의라고 하면 절대 타협하지 않고 싸워 이기는 강인함과 백절불굴의 정신을 보였다. 금방 손해가 날 것인지 알면서도 의리를 지켰고 불의는 쳐서 없애야 한다는 사고였다. 어찌 보면 시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굴절로 보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시류에 적응하지 못하여 역사적으로는 많은 손해를 보았다. 경부선 철도의 건설이나 경부고속국도가 처음 계획되었을 때 현재의 삶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기에 반대하거나 적극적이지 못했다. 한번 놓친 기회를 만회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밀려드는 근대의 물결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는 우리나라에서 4대 도시의 하나에 들어갔던 충주가 현재 모습에 머물러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현대처럼 급변하는 세상에서 고집있게 전통을 지키고, 의리를 찾고, 불의에 참지 못하는 강인함도 꼭 필요한 덕목이고 자랑이다.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충주사람에게는 이런 덕목을 지키면서도 변화에 대처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더욱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6. 우리 충주사람들
충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어느 지역보다 찬란하던 때도 있었고, 고난을 받아 힘든 시대도 있었다. 전국에서 4대도시의 하나로 평가받아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도시가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번창하던 시대에는 멋진 문화유적을 남겨 현재를 사는 우리들도 그 예술성을 극찬했지만, 전장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무덤조차 남기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향기가 나고 빛이 나고 찬란한 역사와 비참하고 치욕적이고 숨고 싶은 부끄러운 시대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어느 한 도시가 역사속에서 부각되고 있을 때는 능력있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국원소경, 중원경시절에는 우륵과 강수, 김생 등이 활약하였고, 고려, 조선이 생기던 혼란기에는 법경대사, 홍법국사와 보각국사와 대지국사가 있었다. 몽고와의 항쟁시에는 김윤후가 있어 최고의 전과를 올릴 수 있었고, 임진왜란 때는 신립의 패전으로 실망도 했지만 의병장 조웅이 의기(義氣)를 살렸고 병자호란에는 임경업이 있었다.
성리학이 번성할 때 권근이 있었고 탄수 이연경이 있었다. 장암 정호(鄭澔)와 묵재 허적(許積)은 영의정이었고 청백리 손순효와 김세렴이 있다. 명청 교체이후 우암의 제자 수암 권상하, 남당 한원진, 봉계 윤봉구 등 많은 이가 있었다. 한말에는 화서문인들이 충주인근에는 주를 이루었던 것 같고 의당 박세화와 그 제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충주에서 음악인이 많이 배출되면 음악의 도시가 되고, 훌륭한 문학가가 나오면 문학의 도시가 된다. 훌륭한 정치가가 나오면 힘 있는 지역이 되고, 경제계의 거물이 나오면 풍성한 고장이 된다. 충주가 역사 속에 묻혀 거론되지 않을 때는 충주 출신 누구도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하고 위축되어 있을 때이다.
충주에서 생활하다가 보면 가끔 충주사람들이 너무 폐쇄적, 보수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충주에 와서 30`40년을 살아도 충주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고향을 따져 차별한다는 것이다. 충주에서 생활한 근거만 있어도 조금 폭넓게 충주사람으로 인정해 주면 안 될까? 충주에 와서 근무를 했다든지, 충주에 잠시 잠깐이라도 살았다면 조금 부족하지만 충주사람이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충주에서 태어나서 충주에서 죽고 아들, 딸까지 충주에 살고 있는 사람만을 충주 사람이라 한다면 그 수는 실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출세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인물이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충주에서 난 사람이 밖으로 나가 열심히 노력하여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비록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충주사람이다. 그의 자식들이 타지역에서 살아도 충주사람의 피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지금에서는 충주를 떠나 노력하지 않으면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예수님도 고향에선 홀대 당하였듯이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선 밖으로 나가서 부딪히며 성장해야 한다. 지역에 안주하면 어찌 동량(棟梁)이 될 수 있으랴.
각각의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일가를 이루는 충주사람이 있다면 격려해주고 칭찬해 주었으면 한다. 고향에 와서 친구들도 못 챙기는 사람이 무슨? 하고 격하하지 말고 열심히 더 치열하게 노력하도록 힘을 밀어주었으면 좋겠다. 음으로 양으로 충주와 연관된 사람은 전생부터의 인연의 끈이 있는 까닭이니 충주사람이라 생각하고 충주사람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조금 서운하다고 금방 표내지 말고 따뜻한 마음으로 끌어안는다면 충주사람의 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고 역으로 충주의 힘도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된다.
길경태/사단법인 예성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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