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천부경 하나부터 열까지" (이현숙 지음)에서 발췌
여덟
‘여’자는 ‘기르다’를 의미하는 글자이며, 한자 ‘몸 기(己)’자의 어원이다. 우리말 여덟은 ‘여름(열매)을 더해서 번영하다’는 뜻이다. 현재의 한자 ‘몸 기(己)’자는 말 그대로 몸이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다스린다는 뜻도 있다. 그러나 초기의 기(己)자는 몸을 웅크려 씨앗을 심어 기르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서 ‘길러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번식하는 것이다. 여덟은 모든 생물이 성숙하면 열매를 맺어서 번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 기(己)’자는 사람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양을 본뜬 것이라 하며, 아래와 같이 변화해 간다.
그런데 기(己)자도 금문(金文)이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엎드려서 기원하거나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가 훨씬 많다. 초기의 ‘기르다’라는 의미에서 기원할 기(祈)자의 뜻으로 변해간다. 어떤 의미에서는 풍년이나 다산(多産)을 기원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또는 거창하게 국가나 인류의 번영을 기원했다고도 볼 수 있다.
‘몸 기(己)’자의 전자체(篆字體)의 형태는 아래와 같다. 갑골문(甲骨文)도 거의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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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덟’자는 나무에 기(旗)를 꽂아 시장이 형성된 것을 형상화한 것이며, ‘저자 시(市)’의 어원이다. 이는 노력의 결과(열매)를 수확하는 것으로 번성 또는 번영을 의미한다. ‘덟’자는 나무에 무언가 달려 있어서 열매를 맺거나 무엇이 자라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얼핏보면 나무 목(木)같기도 하지만 목(木)자와는 거리가 멀다. 녹도문 ‘덟’자는 목(木)자 위에 두 개의 점이 선명한 탓이다. 환웅(桓雄) 시절에는 시장을 열 때 나무 위에 기(旗)를 달아서 시장이 열렸음을 알렸다. 녹도문 ‘덟’은 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초기의 시(市)자는 시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장사하다, 팔다’ 등의 개념이다. 현재는 도시나 시가지를 의미한다. 시(市)는 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변두리에 비해 인구가 늘어나고 발전해서 번영한 곳이다.
시장은 자신이 지은 농산물, 사냥한 동물 또는 제조하여 만든 물건을 팔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곳이다. 즉, 노력의 결과를 수확하여 서로 거래를 하는 장소이다. 자연히 시장이 서는 곳은 사람이 붐비고, 가게가 늘어 나면서 취급하는 품목도 다양해진다. 모든 것이 더해지는 (늘어나는, 증가하는) 것이다.
시(市)자의 전자체(篆字體)를 보면 아래와 같다. 이들 글자는 나무 막대에 기(旗)를 단 모습을 나타낸 형상들이다. 왼쪽 세 번째 시(市)자가 녹도문 ‘덟’자와 가장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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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13537 | L13538 | L13539 | L13540 | L13541 | L13542 | L13543 |
※ 녹도문 ‘덟’자와는 다르지만 조금 비슷해 보이는 것은 ‘벼 화(禾)’자이다. 녹도문 다섯에서 ‘쌀 미(米)’자가 ‘섯’으로 사용되었으므로 ‘벼가 익어서 번성하다’라는 의미에서 ‘벼’가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농경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쌀 농사이며,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벌판이야 말로 풍요의 상징이요, 번영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벼 화(禾)’자는 벼 이삭이 익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양을 본뜬 것이어서 가운데 있는 작대기 끝이 구부러져 있으며, 가로로 그은 선도 목(木)자와 같은 형태라서 점을 찍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래 그림을 참조한다.
‘벼 화(禾)’자의 전자체(篆字體)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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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08588 | L08589 | L08590 | L08591 | L08592 | L08593 | L08586 |
여덟은 한글로 ‘열매(여름)를 더한다’는 의미로 번식하고 번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녹도문 여덟은 ‘길러서 번영하다’를 뜻한다. 하늘의 기운(天一)과 땅의 기운(地一)을 받아 태어난 모든 생물(생명체)은 태어나서, 성숙하여, 번식하는 것이 여덟이며, 이는 땅의 진리(地二)이자 섭리이다.
※ 동물의 왕국을 즐겨보는 사람은 누구나 수긍하는 이야기이지만 곤충들은 존재 목적이 번식하는 것이다. 매미를 예로 들어보면, 매미는 애벌레인 굼벵이의 형태로 5~6년, 심지어는 11~17년을 땅속에서 지내다가 성충이 되며, 이 성충은 불과 1~3주일 살고 죽는다. 성충이 된 매미는 짝을 찾아 짝짓기를 해서 알을 낳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생의 목표이다. 가장 수명이 짧은 하루살이 역시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애벌레로 지내다가 성충이 되면 성충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교미하여 산란하는데 남은 생을 바친다. 이는 곤충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어류, 조류, 파충류, 포유류를 포함하여 모든 동물은 후손을 남기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이자 숙명이다. 동물뿐만 아니라 모든 식물에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식물도 자라서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어 이를 널리 퍼뜨리는 것이 생의 목적이다. 즉, 모든 생물은 자라서, 성숙하여, 번식하는 것이 존재의 일차적인 이유이며, 이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여덟’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홉
‘아’는 ‘뫼 산(山)’과 ‘몸 기(己)’를 아래위로 합쳐놓은 형상으로 수양하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한자에서도 없어진 글자이다.
※ 옛 기록을 보면 “13세 단군인 흘달 재위 20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으셨다. 미혼의 소년들에게 독서와 활 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셨다. 국자랑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전통이 이어져 신라에서는 화랑(花郞)이 되는 것이며, 이 후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 오게 되는 것이다. 천부경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전통은 이미 환국(桓國)시대에서부터 시작되어 대대로 이어져온 것이다.
※ 수양과 관련해서 보면, 천부경에서 선도(仙道)의 뿌리가 싹트게 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성기전 상편에서 ‘환인이 지기를 타고 놀았다(乘遊之氣)’라고 하여 신선도가 처음 등장한다. 이 맥이 이어져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 신라에서는 화랑선인, 백제에서는 문무도 또는 무사도로 나타난다. 가야의 암시선인, 고려의 국선도, 조선의 선도 역시 근본은 천부경의 아홉이 뜻하는 수양(닦는 것)에서 비롯된다.
명산(名山)에 들어가면 천지의 기운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초목이 무성하고 온갖 동물이 번성하니 심신을 수양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녹도문 ‘아’에 산(山)과 기(己)를 합쳐 놓은 것이 그것을 뜻하는 글자라는 것이다.
‘뫼 산(山)’자의 금문(金文)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녹도문 ‘아’의 위 쪽에 있는 것이 산(山)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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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기(己)’자는 ‘기르다’라는 것으로 여덟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한다.
녹도문 ‘아’는 산에서 심신을 기르는(수양하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이는 살아가면서(삶) 알아가기(앎)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홉’은 풀을 베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한자 ‘벨 예(乂)’의 어원이다. 칠(七)자나 비(匕)자도 형태는 유사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예(乂)자는 기본적으로 ‘풀을 벤다’는 뜻이지만 이에서 파생된 의미로 ‘다스리다, 징계를 하다, 어진 사람, 쓸쓸하다’ 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녹도문 ‘홉’은 이 중에서도 ‘다스리다’를 의미한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하늘(ㅎ)의 기운을 받는(ㅂ)것이다.
‘벨 예(乂)’자의 전자체(篆字體)는 다음과 같다. 녹도문 ‘아’자는 현재의 예(乂)와 더 닮아 있다.
녹도문 아홉의 글자를 붙여서 해석하면 ‘심신을 수양하고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확대 해석하면 열기 위해(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늘의 기운(天一), 땅의 기운(地一), 사람의 기운(人一)을 모두 받아서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은 공부하고, 수양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아홉’이며, 이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인간의 진리(人二)이자 섭리이다.
※ 아홉은 다스리는 것, 수양하는 것이며, 한자(漢子) 천부경 해설에서는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온 말을 인용하여 성명정(性命精)을 닦는다고 하였다. 천부경에서는 ‘아홉’이 인간의 섭리로 수양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한 설명은 없다. 우리말 중에 ‘아홉 수가 가장 어렵다’는 것은 이를 뜻한다.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천부경의 또 다른 해설서로 볼 수 있으며, 삼일신고의 진리훈(眞理訓,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 아홉의 방법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지만 삼일신고는 이미 종교화되어 천부경이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내용이 다소 달라져 있다.
※ 한자 천부경에서는 이 ‘아홉’과 연관된 구절이 2개 있다. 하나는 일적십거 무궤화삼(一積十鉅 無櫃化三)으로 “우주의 근본 기운인 한(一)을 쌓고 쌓아 크게 열면 걸릴 것이 없는 밝은 사람(明人)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홉’은 일적십거(一積十鉅), 즉 하늘의 기운을 쌓은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명인중천지일(明人中天地一)로 “밝은 사람(明人)은 천일(天一), 지일(地一)의 기운을 온전하게 다스려 속(中)에 갈무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아홉’은 한(一)에 들어있는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의 기운을 조화롭게 다스려 하늘의 기운인 한(一)을 쌓고 또 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열
‘열’자는 두 손으로 문을 여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열 개(開)’자의 어원이다. 녹도문 ‘열’은 ‘열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드는 모양으로 ‘들 공(廾)’자의 어원이기도 하다. 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 모양에서 ‘풀 초(草)’를 연상시키지만 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글자이다. 녹도문의 ‘하’자는 현재 ‘왼손 좌(屮)’의 의미만 남아 있으며, 이는 손(手)을 가리키기도 한다.
녹도문 ‘열’자는 ‘열 개(開)’를 나타낸 글자이다. 개(開)자는 개(开)로도 쓴다. ‘열 개(開)’는 두 손으로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하며, 문(門)자 밑에 두 손을 의미하는 개(开)자가 들어있는 것이다. 전자체(篆字體)를 찾아보면 개(開)와 개(开)는 같은 글자로 나온다. 아래에 ‘열 개(開)’자의 전자체(篆字體)를 나타내었다. 녹도문 ‘열’과 닮은 글자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즉, 녹도문 ‘열’은 ‘열 개(开)’자이며, 뜻은 ‘열다’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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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자(漢子)인 ‘들 공(廾)’도 ‘열 개(开)’와 거의 동일한 모양을 하고 있다. 녹도문 ‘열’자는 ‘들 공(廾)’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천부경 해석에서 앙명인중천지일(昻明人中天地一)을 해석하면서 앙명인(昻明人)을 끊어서 해석하였다. 그 뜻은 ‘밝은 사람(명인, 明人)을 우러러 보라’는 것이다. 명인(明人)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열린 사람, 깨달은 사람’이며, 이런 사람을 우러러보고 공경하는 것이 앙명인(昻明人)의 뜻이다.
녹도문 ‘열’자가 ‘열 개(开)’와 ‘들 공(廾)’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은 아홉(수양)을 통해 여는 것이 ‘열’이며, 이는 자기완성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렇게 연(깨달은) 밝은 사람(明人)은 공경을 받아 마땅하므로 두 손으로 받들어 모시듯이 우러러보고 공경하라는 뜻이다.
‘들 공(廾)’자는 ‘받들 공(廾)’이라고도 하며, 어떤 물건을 두 손으로 떠받쳐 올리는 모양을 본뜬 것으로 아래 그림과 같이 변천되었다.
‘들 공(廾)’자의 전자체(篆字體)는 다음과 같다.
녹도문 ‘열’은 ‘열다’를 뜻하는 것으로 ‘열 개(开)’의 어원이다. 또한, ‘받들다’를 뜻하는 것으로 ‘받들 공(廾)’의 어원이기도 하다. 공(廾)은 한자 천부경의 ‘우러를 앙(昻)’과 동일한 의미이다.
녹도문 ‘열’은 천부경의 결론이다. 사람은 천지인의 기운을 모두 받아 태어났으니 세상 만물 중에 가장 귀한 존재이다. 이렇게 귀한 존재인 사람은 아홉을 통해 열어서 자기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명인(明人, 밝은 사람)이 되어 홍익인간(弘益人間)에 이바지하라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이러한 명인(明人)을 우러러보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