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5. 02
농민에겐 현금지원을, 농촌엔 공공부문 투자를
1989년 9월21일자 동아일보 보도 내용이다. 배추 한 트럭 값이 어떤 때는 100만원을 넘다가, 하루 이틀 사이에 10만원대로 곤두박질쳐 시세를 종잡을 수 없다는 농민의 하소연이 구구절절하게 게재됐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3년에는 양파가, 1986년에는 무·배추의 가격이 폭락했다.
2019년 3월4일자 농민신문에는 가격폭락으로 인건비는 고사하고 생산비조차 건질 수 없어 하우스에서 재배한 배추를 갈아엎고 시금치 밭을 갈아엎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인건비 7만원을 들여 2kg들이 상추 33상자를 도매시장에 보내면 2만2000원을 받는다는 한숨 섞인 농민의 이야기는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반복되고 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특성상 일정 수준의 가격 변화는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농업, 특히 쌀을 제외한 대부분 작목에서는 과잉생산에 따른 가격폭락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 소비자는 덕을 볼까?
▲ 절기상 곡우(穀雨)를 앞두고 전남 나주시 노인농협 육묘장에 깔린 모판에서 볏모가 푸릇푸릇하게 자라고 있다. 곡우 무렵에는 못자리를 마련하는 등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된다. / ⓒ 연합뉴스
한국 농업 문제의 핵심은 낮은 생산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8년 소비자물가지수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식음료 부문 물가는 전년 대비 2.8% 상승해 OECD 평균 1.9%보다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미국·호주·네덜란드·캐나다 등은 1% 미만을 기록했다.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일본의 경우도 1.6%에 머무른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식음료 물가상승률은 매우 높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엥겔계수는 2016년 26.8%로 EU(12.2%), 미국(12.6%)보다 2배 이상 높게 나타나고 있다. 생산부문에서는 가격폭락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정작 소비자는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2018 외식업 경영실태 및 외식업체 식재료 구매현황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외식업체의 매출 대비 식재료비 비율은 40% 내외다. 통상적으로 일반 음식점에서 식재료비 비율이 30%를 넘어서면 대부분 손해가 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우리나라 외식업의 경우도 농산물 가격의 폭락에 따른 이득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우리나라 농산물의 높은 가격에 대해 유통마진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과연 그럴까? 우리나라 농산물의 유통비용 비중은 작목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지만 평균적으로 약 44% 수준이다. 소비자가 부담하는 비용의 절반 가까이를 유통부문이 가져가는 것이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미국은 73%, 일본은 55% 수준이다. 안전하고 신선한 유통을 위해 필요한 냉장보관·수송, 적절한 가공·포장 및 저장에 많은 비용이 고정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산지에서는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폭락하더라도 이러한 고정비용으로 인해 소비자 가격의 하락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통상 ‘밭떼기’라고 불리는 포전거래의 경우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농민을 갈취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비용으로 가격 변동의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농산물의 수집과 공급을 책임지고 있다. 만약 이들이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높은 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면 왜 사람들은 밭떼기로 몰려가지 않는 것일까?
농업 문제의 핵심에는 낮은 생산성이 자리한다. 우리나라 평균 경작지 면적은 1.5ha 수준이며, 평균 이하의 경작지를 보유한 농가가 79.3%에 이른다. 규모의 경제를 통한 원가절감 및 생산성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규모 생산지를 일일이 방문해 농산물을 수집해야 하므로 유통에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모되는 반면, 품질 유지는 제대로 되지 않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농업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덴마크의 농가 수는 1990년대 20만 가구에서 2015년 3만 가구로 70% 이상 감소했다. 반면 농가당 경작면적은 1970년 20ha 수준에서 1990년대 40ha, 2000년대에는 60ha로 확대됐다. 국토면적이 우리보다 더 작은 네덜란드의 경우도 농가당 경지면적은 10ha로 우리나라의 7배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네덜란드의 농업경쟁력은 유리온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지면적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소규모 자영농 체제를 이상적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이러한 체제는 생산성 향상과 산업화를 가로막고 있다. 농협과 같은 생산자단체의 경우 우리는 지역과 품목을 합해 93개에 이르고 있는데 덴마크는 22개에 불과해 강력한 조직화를 통해 생산량 조절부터 유통에 이르는 영역에서 큰 힘을 발휘하며 농민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 주고 있다.
전근대적 농업 중심 사고 탈피해야
최근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로 귀농지원 정책을 전개하고 있다. 새로운 농업인구의 유입을 위한 이러한 조치들은 몇몇 성공적인 귀농 사례가 소개되면서 농촌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과연 그럴까? 귀농인들 상당수가 시설농업에 종사하면서 공급과잉으로 인해 해당 작목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표준화, 품질향상 등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에 비해 농업 선진국의 경우 농업인구 감소 추세를 특별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농업부문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있다. 덴마크의 경우 5년 이상 농업교육을 이수해야만 농민자격증을 부여받고, 농장을 소유·운영할 수 있도록 한다. 미국은 인공지능, 위성영상, 자율주행 등 기술적 혁신을 토대로 한 정밀농업과 무인농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농업의 발전과 농민의 수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우리는 과거의 인력 중심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농사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농촌이 어렵고, 농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농업-농민-농촌을 하나의 연결된 존재로 인식해 왔다.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농업을 보호해야 하며 이렇게 해야만 농촌이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농업의 보호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치르면서 높은 관세를 비롯한 수입장벽을 세우고 있으며 이로 인해 도시민들은 높은 농산물 가격을 부담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농업과 농민, 그리고 농촌은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제는 농업-농민-농촌을 분리해 접근할 때가 됐다. 농업은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농민에게는 충분한 복지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농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강박적인 자영·소농 구조에서 탈피해 농업을 하나의 산업으로 접근할 때가 됐다. 농민에게는 직접적인 현금지원을 확대함으로써 실질적인 복지 확대를 도모해야 하며, 농촌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건·의료체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공공부문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농업과 농촌 문제의 핵심에는 전근대적 농업 중심 사회에서 형성된 인식이 자리한다. 이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농업의 발전, 농민의 행복, 그리고 농촌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핵심적 요소인 것이다.
최준영 /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