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연기(緣起)와 공성(空性)
연기(緣起)가 성립(成立)하면 고(苦) 또한 성립(成立)한다. 인연(因緣)에 의하여 고(苦)도 성립되기에 연기(緣起)가 없다면 고(苦)도 성립할 수 없다. 만일 고제(苦諦)가 있다면, 여기에서 집제(集諦)가 있고, 고(苦)를 멸(滅)하는 멸제(威諦)와 멸에 갈 수 있는 도제(道諦)가 있음이 합리적(合理的)이므로 사제(四諦)가 성립하게 된다.
사제(四諦)가 있다면, 이들에 대한 이해(理解) 단멸(斷滅) 현증(現證)과 도(道)를 닦는 것이 모두 성립되고, 삼보(三寶) 등의 모든 것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공성(空性)을 승인(承認)한다면 연기(緣起)도 승인하는 것이며, 누가 연기(緣起)를 승인한다면 사성제(四聖諦)는 이치에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연기(緣起) 자체(自體)가 고(苦)가 되며, 무연기(無緣起)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자성(無自性)이기에 공(空)이 된다. 고제(苦諦)가 있다는 고집(苦集)과 고(苦)를 멸하는 도제(道諦)가 성립(成立)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苦)를 완전히 아는 것과, 집착(執着)을 끊는 것과, 멸(滅)하는 행위(行爲)와, 수도(修道)도 성립하게 된다. 고제(苦諦) 등의 사성제(四聖諦)를 완전히 알게 되면 제과(諸果)가 있게 된다. 모든 과(果)가 있다면 과(果)가 머무는 것도 성립된다.
과(果)가 머무는 것이 있다면 모든 향(向)이 있게 된다. 과(果)가 머무는 것과 향(向)이 있다면 비로소 승가(僧伽)가 성립된다. 사성제(四聖諦)가 있다면 정법(正法)도 성립된다. 정법(正法)과 승가(僧伽)가 있다면 부처도 성립된다. 그러므로 삼보(三寶)가 성립(成立)되어 안립(安立)하게 된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일체(一體) 제법(諸法)의 차별(差別)을 모두 증득(證得)하는 것도 성립된다. 제법(諸法)과 제비법(諸非法)과 그 과보(果報)와 세간(世間)의 일체(一體) 명언(名言)들도 성립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공성(空性)을 인정(認定)한다면 거기에 일체(一體)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만일 공성(空性)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연기(緣起)가 없기에 일체(一體)를 인정(認定)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제법(諸法)이 연기(緣起)한다는 것은 공성(空性)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인가. 인연(因緣)에 의지(依支)하기 때문이다.
만일 제법(諸法)에 자성(自性)이 있다면, 인연(因緣)이 없어도 법(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자성(自性)이 없고, 그래서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자성(自性)이 애초부터 없었다면 법(法)도 애초부터 없게 된다.
그렇다면 자성공(自性空)의 공(空)에 대하여 인과(因果)를 안립(安立)한 곳이 전혀 없기에 단변(端邊)에 빠지게 된다. 법(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자성(自性)이 있음을 승인(承認)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법(一體法)에 자성(自性)이 본래(本來) 없음을 깨달아야 유변(有邊)에 빠지지 않게 된다.
항상 있다고 함은 상견(常見)이고, 항상 없다고 함은 단견(斷見)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있고(有) 없음(無)의 양변(兩邊)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유무(有無)를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법(諸法)에 자성(自性)이 있다고 하는 이들에게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양변(兩邊)에 빠지게 된다는 위험성(危險性)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유사(有事) 무사(無事)가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으로 귀결(歸結) 되는가. 만일 자성(自性)이 있는 것이라면 비무(非無)이기에 상(常)이어야 하고, 먼저는 있었고 지금은 없다면 단견(斷見)으로 귀결(歸結)되어야 한다. 만일 법(法)이 자성(自性)으로 있다고 말한다면, 자성(自性)은 멸(滅)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무(無)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성(自性)이 있다고 승인(承認)한다면 상견(常見)으로 귀결(歸結)되어야 한다. 먼저 머무를 때 제법(諸法)의 자성(自性)을 승인(承認)하고, 지금은 그것이 이미 파괴되어 없다고 승인해도 단견(斷見)으로 귀결(歸結)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성(自性)이 있음을 승인(承認)하는 상견(常見)과 자성(自性)이 후에 파괴 됨을 인정하는 무견(無見)을 말하는 것이니, 유무(有無)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