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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년 전원발이 쓴 법주사자정국존비(후)
法住寺慈淨國尊碑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에 있는 자정국존 미수(慈淨國尊 彌授 : 고종 27, 1240~충숙왕 14, 1327)의 석비로 서체는 해서(楷書)인데 제액(題額)은 전서(篆書)로 높이 212.1cm, 너비 103cm, 글자크기 2.1cm 이며 비신 둘레로 당초문을 둘러 장식하였다. 이숙기(李叔琪)가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써서 1342년(충혜왕 복위3)에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자정국존이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유식을 수학하여 국녕사·웅신사·장의사·법주사·중흥사·유가사·동화사 등에 주석하며 1324년(충숙왕 11)에 국존에 책봉되고 법주사에서 입적하여 다비하고 탑을 세운 생애를 기술하였다. 비문에는 국존이 92권의 경론 주해를 찬술하였으며 1325년(충숙왕 2)에 참회부를 설립하여 승정을 담당하고 오교(五敎)와 이종(二宗)을 관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제액)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앞면)
고려국(高麗國)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자정국존(慈淨國尊) 비명(碑銘)【병서(幷序)】
정순태부 밀직사 좌부대언 판선공시사 진현관제학 지제교(正順太夫 密直司 左副代言 判繕工寺事 進賢館提學 知製敎) 신(臣) 이숙기(李叔琪)가 왕명을 받들어 짓다.
봉상태부 전교부령 직보문각(奉常太夫 典校副令 直寶文閣) 신(臣) 전원발(全元發)이 교서(敎書)를 받들어 비문과 전액을 쓰다.
신(臣, 이숙기)이 삼가 불경[釋氏典]을 살펴보니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나와서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교(敎)라고 하고, 마음에 화합한 것을 선(禪)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禪)은 마음으로 전할 수 있으나, 교(敎)는 입으로 풀어서 말하기가 더욱 어렵다. 능히 입으로 강설하면서 자세히 뜻을 풀어 설명하고 후학들을 깨우쳐 내삼학(內三學)의 도단주(都壇主)가 된 분은 오직 자은국일대사(慈恩國一大師) 이 분 뿐이다. 대사의 이름은 자안(子安)이며 뒤에 꿈에서 감통한 것으로 인하여 미수(彌授)로 고쳤다.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고 세계(世系)가 일선군(一善郡)에서 나왔다. 아버지 김한제(金漢磾)는 봉순태부 전객령(奉順太夫 典客令)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어머니 문씨(文氏)는 문공진(文公進)의 딸로 화주군부인(和義郡夫人)에 추봉되었다. 태어난 지 며칠이 안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누이[姊氏]에 의해 ▨ 자라났다. 겨우 9세에 처음으로 스승에게 나아가 시(詩)와 서(書)를 배웠는데 한 번 들으면 곧 외웠으며 총명하고 민첩함이 매우 뛰어났다.
13세에 원흥사(元興寺) 종연(宗然)의 당하(堂下)에서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경론(經論)을 배웠다. 19세에 승과[選佛場]에 응시하여 상품과(上品科)에 합격하고 국녕사(國寧寺)에 주석하였다. 29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임명되었으며 주로 유식론▨종(唯識論▨宗)을 강설하였다.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승려가 모두 경전을 가지고 좌하(座下)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다 같이 희대(稀代)의 뛰어난 학자라고 감탄하였다. 젊은 나이에 박학(博學)하여 종승(宗乘)을 어깨에 짊어지고 당대의 표준이 되었다. 삼중대사[三重]로서 주법(主法)하는 것이 예전부터 일찍이 없었는데 대사가 그것을 이루었다.
두 번째로 웅신사(熊神寺)에 주석할 때에는 특별히 비(批)를 내려 수좌(首座)로 삼았다. 세 번째로 장의사(莊義寺)에 주석할 때에는 또 승통(僧統)을 더하였다. 네 번째로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에 주석할 때에는 임금[殿下, 충렬왕]을 뵙자 〈임금이 대사에게〉 하산(下山)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 때에〉 대장군(大將軍) 김자정(金子廷)이 임금의 뜻을 전달하기를, “말법(末法)의 세상에 대종장(大宗匠)은 억겁(億劫)의 세월이 지나도 만나기 어려우니 청컨대 경론장소(經論章疏)를 찬술하여 세상에 유통시켜 후진을 깨우쳐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사가〉 왕명을 받든 이래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강론(講論)에 겨를이 없이 〈부처의〉 일대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이리하여〉 경론(經論)의 해석을 찬술한 것이 무릇 92권이었다. 다섯 번째로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할 때에는 충선왕[太尉大王]께서 즉위하신 무술년(1298) 5월에 이르러 〈왕께서〉 비(批)를 내려 석교도승통 중흥사주지 행지원명대사(釋敎都僧統 重興寺住持 行智圓明大師)로 삼았다.
여섯 번째로 유가사(瑜伽寺)에 주석할 때에 충렬왕[上]께서 〈원나라〉 연도(燕都)에 계셨다. 〈왕께서〉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을 믿고 의지하여 숙위(宿衛)하는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밤마다 낭송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전하(殿下) 일행이 모두 『대반야경』을 읊게 되었다. 일찍이 어느 날 원나라[上國]의 강주(講主)가 난신해품(難信解品)을 해석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여러 강사(講師)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해석할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충렬왕[上]께서 대사에게 사신을 보내어 해석해 줄 것을 요청하고, 또한 『심지관경(心地觀經)』에 대해서도 서술하여 기록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사가〉 모두 즉시 소기(䟽記)를 지어 사신에 부쳐 봉헌(封獻)하였다. 여러 강사(講師)들이 〈이를〉 보고서는 쟁론(爭論)을 그치고 서로 칭송하면서 그 흔치 않음에 탄복하니 충렬왕[上]께서도 마음으로 더욱 숭배하고 믿게 되었다.
일곱 번째로 다시 장의사(莊義寺)에 주석하였다. 무신년(1308) 4월 〈왕께서〉 비(批)를 내려 대자은종사 개내삼학도단주 대장의사주지 오교도승통 광지묘변불각보명대사(大慈恩宗師 開內三學都壇主 大莊義寺住持 五敎都僧統 廣智妙辯佛覺普明大師)로 삼았다. 개내삼학도단주(開內三學都壇主) 일곱 자는 보록▨수(寶錄▨受). 기유년(1309)에는 숭교원 교학(崇敎院 敎學)이 되었고 계축년(1313)에는 〈왕께서〉 비(批)를 내려 대자은종사 삼중대광 양가도승통 보리살타마가나가국일대사 우세군(大慈恩宗師 三重大匡 兩街都僧統 菩提薩埵摩訶那伽國一大師 祐世君)으로 삼고, 특별히 1품의 봉록(俸祿)을 하사하였다.
갑인년(1314) 정월[首春] 연경궁(延慶宮)에서 백팔만재승(百八萬齋僧)을 하던 날에 충선왕[上]께서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의 새로운 인장(印章)을 주조하여 손수 주셨다. 을묘년(1315)에는 〈대사를〉 봉하여 내전참회사 삼학법주 덕혜원증장통현변국▨▨사(內殿懺悔師 三學法主 德慧圓證藏通玄辯國▨▨師)로 삼고, 명하여 참회부(懺悔府)를 세우고 특별히 은(銀)으로 인장을 주조하여 승정(僧政)을 전담 관리하게 하니 비로소 어긋나 있었던 오교(五敎)와 이종(二宗)이 함께 사사(寺舍)를 의논하게 되었다.
정사년(1317)에는 〈대사에게〉 불해징원홍자광지대도사(佛海澄圓弘慈廣智大導師)를 더하여 봉하였다. 무오년(1318)에는 법가(法駕)를 준비하여 〈대사를〉 대민천사(大旻天寺)의 강원(講院)으로 맞아들여 삼가(三家)의 장소(章疏)를 강설하게 하였다. 신유년(1321)에는 ▨▨사(▨▨寺)를 하산소(下山所)로 삼았다가 다시 동화사(桐華寺)로 이주하였다. 갑자년(1324)에는 봉하여 오공진각묘원무애국존(悟空眞覺妙圓無礙國尊)으로 높이고, 을축년(1325)에는 다시 법주사로 갔다.
정묘년(1327) 12월 1일[吉旦] 제자[入室]에게 명하여 주상(主上, 충숙왕)께 바치는 서신을 작성하여 봉인(封印)하고, 상주목사(尙州牧使)인 김영후(金永煦)에게 부쳐서 거듭 봉하였다. 날이 저물 즈음에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셨다. 8일에 이르러 절의 서북▨(西北▨)에 화장[茶毗]하였다. 산호전(珊瑚殿) 동쪽 모퉁이에 탑을 ▨. 향년 88세이며, 법랍(法臘)은 75세였다.
대사는 사람됨이 간결하고 꾸밈이 없으며 본성에 따라 순리를 따르니 ▨도(▨道)를 행하였다. 평소에 아침에는 죽을 먹고 점심에는 밥을 먹으며 해가 중천을 지나면 먹지 않았다. 중흥사(重興寺)에 주석한 것이 무릇 18년인데 한 번도 권▨▨문(權▨▨門)을 밟지 않았다. 날마다 해장내서경론(海藏內書經論)을 보아서 하나라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여사(餘事)에 외▨(外▨)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섭렵하여 기억하였으니 배움에 만족하지 않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았다. 항상 후배들을 인도하여 도우려는 마음을 지녔는데, 비록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어떤 경서(經書)를 강론해 달라 요청해도 기뻐하며 요청을 받아들여 즉시 강론하고 ▨▨ 무더위와 거처의 편하고 불편함을 따지지 않으니, 사방에서 배우는 자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몰려들어 〈대사의〉 남은 혜택을 입기를 원하였다. 온 나라의 공경(公卿)과 사대부(士大夫)의 자제들로 배움에 뜻을 둔 자들이 〈대사의〉 당하(堂下)에서 많이 나왔으니 평생의 사업이 대략 이와 같았다.
임금께서[上] 부고(訃告)를 듣고 애도하며 관원을 보내어 장례를 돕게 하고, 시호를 추증하여 자정국존(慈淨國尊)이라 하고 탑호를 보명(普明)으로 하였다. 지금의 임금(今上, 충혜왕)께서 선위를 이어받은 원년(1330) 8월에 문인(門人) 자은교관 원흥사주지 도승통 대사(慈恩敎觀 元興寺住持 都僧統 大師) 거현(居玄)∙기▨사주지 원지대사(祇▨寺住持 圓智大師) 행영(行英)∙천신사주지 통현대사(天神寺住持 通玄大師) 충서(冲瑞)∙현화사주지 자진원묘▨▨▨▨(玄化寺住持 慈眞圓妙▨▨▨▨) 등 314인이 〈대사의〉 행장(行狀)을 가져와서 옥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이에 소신(小臣)에게 명하여 글을 짓도록 하였다. 신(臣) 이숙기(李叔琪)는 왕명을 받고 당황하고 놀라 〈글을〉 지을 바를 몰라 지극히 떨리고 두려운 마음[屛營隕越之至]에 삼가 손을 씻고 절을 올리며 〈대사를〉 위하여 명(銘)하여 이른다.
부처[法王]께서 세상에 나시니 우담화(優曇花)와 같구나
등불로 바깥세상 비추며 지혜의 거울로 내면을 연마하네
삼학(三學)을 주장하여 왕가(王家)를 복되고 이롭게 하고
75세의 법랍(法臘)으로 자은종(慈恩宗)에 큰 자취를 남겼네
염부계(閻浮界)를 버리고 도사타(覩史陁)로 돌아가시네
옥으로 백탑(白塔)을 세우니 청산(靑山)의 언덕이로다
유골은 묻혀서 드러나지 않으나 명성은 유가(瑜伽)에 진동하네
신(臣)에게 명하여 돌에 글자를 새기나 글이 졸렬하고 화려함이 없다
붓을 적셔 글을 지어보지만 두려움만 더욱 많아지네
지정(至正) 2년 임오년(1342) 9월 일 문인(門人) 대자은종사 전자은교관 오교도승통 중흥사주지 겸 천신사주지 ▨▨▨▨▨▨▨▨명국일대사 삼중대사 우세군(大慈恩宗師 傳慈恩敎觀 五敎都僧統 重興寺住持 兼 天神寺住持 ▨▨▨▨▨▨▨▨明國一大師 三重大匡 祐世君) 도탁(道卓)∙주지(住持)인 자명진각광교대사(慈明眞覺廣敎大師) 탄기(坦起) 등이 〈비석을〉 세우다.
(제액) 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
(앞면) 高麗國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銘幷序.
正順太夫密直司左副代言判繕工寺事進賢館提學知製敎臣李叔琪奉敎, 撰.
奉常太夫典校副令直寶文閣臣全元發奉敎書, 幷篆.
臣謹按釋氏典, 佛出世一大事因緣, 騰之於口曰敎, 融之於心曰禪. 禪或可以心傳, 敎尤難於口演. 能口講而演義, 開發後蒙, 爲內三學都壇主, 惟慈恩國一大師是已. 師諱子安, 後因夢感, 改彌授. 俗姓金氏, 系出一善郡. 考皇漢磾, 追封奉順太夫典客令. 妣皇文氏, 公進之女, 追封和義郡夫人. 離胎未數日母遷, 隨姊氏以▨成年. 甫九歲, 始就師, 學詩書, 一聞輙頌, 聦敏絶倫.
十三, 投元興寺宗然堂下, 剃度受具, 習經論. 十九, 登選佛場, 上品科得, 住國寧寺. 二十九, 拜三重大師, 主講唯識論▨宗. 耆師碩德, 咸執經座下, 共歎稀代之彥. 弱齡博學, 荷擔宗乘, 爲一時標準. 以三重主法, 前古未曾有, 而師爲之.
二住熊神寺, 別批爲首座. 三住莊義寺, 又加僧統. 四住俗離山法住寺, 詣殿下, 申聞下山. 大將軍金子廷, 出傳王旨, “末法大宗匠, 曠劫難遇, 請撰經論章疏, 流通於世, 開蒙後進.” 自承命已來, 手不釋巻, 講論無閒暇, 弘揚一代敎爲已任. 撰述經論之解, 凡九十二巻. 五住重興寺, 至太尉大王卽祚之年戊戌五月, 下批爲釋敎都僧統重興寺住持行智圓明大師.
六住瑜伽寺, 上之在燕都也. 尤信嚮 『大般若經』, 令宿衛臣僚, 常夜頌之. 由是, 殿下一行, 皆頌 『大般若經』. 甞一日於上國講主, 請釋難信解品. 諸講師云, “此無釋解者.” 上遣使於師, 請撰解, 又請述 『心地觀經』記. 皆卽䟽記, 附使封獻. 諸講覯止爭, 相讃美, 服其稀有, 上心益加崇信.
七復住莊義寺. 戊申四月, 下批爲大慈恩宗師開內三學都壇主大莊義寺住持五敎都僧統廣智妙辯佛覺普明大師. 開內三學都壇主七字, 寶錄▨受. 己酉, 爲崇敎院敎學, 癸丑, 下批爲大慈恩宗師三重大匡兩街都僧統菩提薩埵摩訶那伽國一大師祐世君, 別頒一品俸祿.
甲寅首春, 延慶宮百八萬齋僧日, 上手獻兩街都僧統新鑄印. 乙卯, 封爲內殿懺悔師三學法主德慧圓證藏通玄辯國▨▨師, 命立懺悔府, 別鑄銀印, 專管僧政, 始差五敎二宗, 共議寺舍.
丁巳, 加封佛海澄圓弘慈廣智大導師. 戊午, 備法駕, 邀入大旻天寺講院, 講三家章疏. 辛酉, 以▨▨寺爲下山所, 又移住桐華寺. 甲子, 封崇爲悟空眞覺妙圓無礙國尊. 乙丑, 復住法住寺.
至丁卯十二月吉旦, 命入室修書上主上封印, 付尙州牧使金永煦重封. 日將晡, 蕭然坐逝. 至八日, 茶毗于寺之西北▨. ▨塔于珊瑚殿東隅. 享年八十八, 受臘七十五.
師爲人, 略無緣飾, 因性循理, ▨道而行. 居常以寅粥午飯, 度日過中不食. 凡住重興寺十八年, 不因邀請, 一不踐權▨▨門. 日繙海藏內書經論, 無一不貫穿. 乃至餘事外▨, 亦皆涉獵强記, 學不猒, 敎不倦. 恒存誘掖後進之心, 雖末學童蒙, 請講某經, 論某書, 懽然受請卽講, 不問▨▨酷暑居處便否, 因以四方學者, 雲從霧集, 冀蒙餘潤. 一國公卿士太夫子弟之志于學者, 多出堂下, 平生事業, 率如此.
上聞訃悼惜, 差官庀後事, 贈諡慈淨國尊, 塔号普明. 今上膺內禪之元年秋八月, 門人慈恩敎觀元興寺住持都僧統大師居玄∙祇▨寺住持圓智大師行英∙天神寺住持通玄大師冲瑞∙玄化寺住持慈眞圓妙▨▨▨▨等三百一十四人, 賷師行狀, 申乞戴珉. 乃命小臣文之. 臣叔琪聞命恓惶, 不知所裁, 屛營隕越之至, 謹盥手拜稽, 爲之銘曰,
法王出世 如優曇花 以燈外燭 智鑑內磨
主張三學 福利王家 七十五臘 霈慈恩波
棄閻浮界 歸覩史陁 玉立白塔 靑山之阿
骨藏不露 名震瑜伽 命臣勒石 文拙無華
濡毫當撰 周慞孔多
至正二年壬午九月日, 門人大慈恩宗師傳慈恩敎觀五敎都僧統重興寺兼天神寺住▨▨▨▨▨▨▨▨
明國一大師三重大匡祐世君道卓∙住持慈明眞覺廣敎大師坦起等上
전원발(全元發 ?~?)
고려 후기에,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 축산부원군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 전법총랑(典法摠郎) 전충경(全忠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총랑(判圖摠郎) 전대년(全大年)이며, 아버지는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전진(全珒)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가 있다. 아들에 사복판사(司僕判事) 전한(全僩)이 있으며, 손자 전강(全强)·전근(全謹)·전경(全敬)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 학식과 문벌이 높은 인물에게 주는 벼슬)으로서 현달(顯達: 높은 지위에 오름.)하였다.
(참고;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