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대 667년 제나라 강성(姜姓) 열전<1> <출전 : 齊太公世家 및 기타>
중국은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고대의 정치 체계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170여 개의 성읍 국가가 난립했습니다. 중국 최초의 국가였던 하(夏)나라를 동이(東夷)계가 무너트리고 상(商)나라를 세웠습니다. 은(殷)이라고도 합니다. 은하면 갑골문자를 만들어 점을 쳐 나라를 다스렸던 나라입니다.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는 폭군이었습니다. 폭군을 몰아낸 사람이 주나라를 실질적으로 건국한 희발(姬發)이고 시호가 무왕(武王)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권력자를 흔히 왕(王)이라 합니다. 주나라는 왕기(王畿)를 제외한 넓은 땅을 나누어 다스릴 수 있는 제후국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제후국 수장은 왕이라 하지 않고 공(公)으로 시호를 짓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영정(瀛政)이 스스로 황제(皇帝)라 칭한 후, 한나라부터는 왕을 제(帝)로 칭했습니다. 당나라부터는 조종(祖宗)으로 시호를 사용했습니다.
한족은 천하에 있는 주(周)나라를 천자(天子)의 나라라 합니다. 천자의 나라 주나라의 모계(母系)는 강성(姜姓)입니다. 大姜就是太姜。大通太,太姜是周文王的奶奶。也就是说吕,齐,申,許四个国家都是太姜的娘家人,因为外戚的缘故得到封国。古时候姓和氏是不同的,姓是上古时代流传下来的,一个姓里分成好几个氏。《国语·周语中》 대강은 태강입니다. 대는 태로 통합니다. 태강은 주나라 문왕의 할머니입니다. 즉, 여(吕), 제( 齐), 신(申), 허(許) 네 나라는 모두 태강의 친정 가족으로 외척의 연고로 봉국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성과 씨가 달랐는데, 성은 상고 시대에 전해 내려온 것으로 한 성에 여러 씨로 나뉘었습니다.
태공망 여상(吕尚)은 강소성과 절강성 해안지대 동중국 바다에서 온 사람입니다. 원 고향은 하남성 기현 서남 목야(牧野)입니다. 강여상의 선조는 한때 사시(四時)를 관장하고 사방을 순수(巡狩)하는 사악(四岳)의 한 사람이었고, 우(禹)왕의 치수를 보좌하여 큰 공을 세웠습니다. 우(虞), 순(舜)과 하우(夏禹)가 여(吕)에 봉해졌고, 또 신(申), 강(姜)에 봉해졌습니다. 하(夏)・상(商)나라 때, 신(申)과 여(吕)는 본체에서 갈라져 나간 두 갈래의 자손으로, 일부는 평민이 되었고, 여상은 그들의 자손이었습니다. 강여상(姜呂尙)은 원래 성이 강씨였는데, 그의 봉읍을 성으로 하여 여상(吕尙)이라 불렀습니다. - 서주(西周) 시대에는 세 개의 신국(申國)이 있었는데, 그중 강성(姜姓) 남신(南申)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분봉받았는데, 신백국(申伯國)이라 합니다. 남신(南申)은 춘추시대 초기에 초나라 문왕에게 병합되어 초나라 현으로 되었습니다. 당시 강성은 희성(姬姓)과 함께 인구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남신 일부는 여씨(呂氏)로 또 일부는 신씨(申氏)로 봉해졌습니다. <국어・주어중>에 따르면, 주나라 태왕비 문왕의 조모 이름이 대강(大姜)입니다. 강성(姜姓)의 딸입니다. 무왕의 비(妃)이자 성왕의 어머니인 읍강(邑姜) 강원(姜原)입니다. 기원전 576년 허(許)나라는 강씨 성을 가진 허씨 제후국입니다. 주나라 때의 제후국인데, 서주 초년에 주 성왕이 허문숙 허창(許昌)을 봉하여, 허나라를 세웠는데, 국군(國君)은 강씨 성을 가진 허씨였습니다. - 태공망의 성은 강(姜)이고 씨는 여(吕)입니다. 그러므로 성씨와 이름은 강여상(姜吕尙)입니다. 강여상은 한때 매우 가난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바닷가에서 은둔하면서 덕과 재주를 갖춘 선비였다고 합니다. 노년에 낚시하다가 서백(西伯) 희창(姬昌)을 만났습니다. 서백이 사냥 갈 예정이어서 떠나기 전에 점을 쳤는데, “얻는 것은 용도 이무기도 호랑이도 곰도 아니고, 군주가 세상을 제패(制霸)할 수 있도록 보필할 신하를 얻을 것이다.” 란 점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서백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과연 위하(渭河) 북쪽 언덕을 지나다가 낚시하는 강여상을 만났습니다. 서백은 강여상과 이야기를 나눈 후 정말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선조님들께서 ‘서백에 오시는 성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백은 흥성할 것이야.’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이 태공이십니까? 우리 집안의 선조님들은 오랫동안 당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여상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습니다. 서백은 강여상을 높여서 강태공이라 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높여서 태공(太公)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강태공은 묵묵히 대답 없이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서백은 말을 마치자 강여상을 마차에 태우고 서백(西伯) 궁으로 돌아가 군사의 스승으로 모시었습니다. 서백의 사상부(師尙父)가 된 것입니다. ‘사상보’로도 읽을 수 있지만, 문맥상 사상부가 맞습니다. 서백이 주나라를 세우기 전, 상나라 주왕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는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숭후(崇侯) 호(虎)가 상나라 주왕(紂王)에게 서백(西伯)을 참소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서백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덕을 쌓아 제후들이 모두 그를 따르니 폐하께 이롭지 못할 것이옵니다.” 했다. 상나라 주왕(紂王)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감옥을 하남성 안양시 탕음현 북쪽 약 4m에 있는 유리(羑里)에 만들어 서백을 가두었습니다. 서백은 그곳에서 7년간 갇혀있었습니다. 서백 구금되어있는 동안 복희(伏羲) 8괘(卦)를 연구하여 64괘 384효(爻)를 역경(易經)으로 만들었습니다. 64괘에 괘사(卦辭)를 붙였고 그의 아들 희발(姬發)이 384효에 효사(爻辭)를 붙여 이후 희발(姬發)이 주나라를 건국했기에 역경을 주역(周易)이라 합니다. 강여상은 일찍이 상나라 주왕(紂王)을 위해 일했다고 합니다. 주왕은 폭악하고 도(道)가 없기에 강여상은 떠났습니다. 그는 각국에서 제후들에게 유세했지만 그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백의 친구 산의생(散宜生)과 광요(闳夭)는 오랫동안 강여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여상에게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청했습니다. 강여상은 생각했습니다. “서백이 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항상 노인들을 봉양하고 돌봐줬다는데... 그래, 내가 서백을 위한다면 어딘들 못가겠는가?” 세 사람은 서백을 대신해서 세 사람은 이후에 유신씨(有莘氏)의 딸과 여융(驪戎) 문마(文馬) 등 보물을 주왕(紂王)에게 바치고 그때 서백은 비로소 풀려나 돌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