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한국군의 전투신화
첫 파병 이래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에 걸쳐 연인원 32만 명에 달하는 국군 장병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특히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68년의 경우 한국은 5만여 명을 파병, 미군(총 55만여 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도 했다. 참전 기간 중 국군은 총 1170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6000회의 소부대 작전을 전개, 적 사살 4만1000명이라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파병 한국군 연병력 32만여 명 중 전사 및 사망인원 5천여명, 미군을 제외한 자유진영 군인의 사망자 대부분이 한국군이었다.(자유진영 사망자 4255명)이는 한국군이 미군과 동등한 정도의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군의 사망률과 한국군의 사망률을 비교해 보아도, 한국군이 참전기간이 3년이 적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군의 전쟁참여도가 미군과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참전한국군 연병력 : 32만여 명, 한국군 사망자 : 5천여명(사망률 : 1.5%), 참전미군 연병력 : 280만 명, 미군 사망자 : 5만3천 명(사망률 : 1.9%))
한국군은 미군 81만 3800여 명에하는 참전효과를 거두었으며, 한국군의 역할은 미군의 30%에 해당한다고 평가된다. 전쟁의 7분의 2를 한국이 맡은 셈이다.
한국은 동맹군 중 가장 용감하게 싸워 그 명성을 세계에 떨쳤다.
두코전투
1966년 7월 9일, 미 기갑사단의 '파울리비아'작전을 측면지원하기 위하여 맹호기갑연대 3대대는 캄보디아 국경으로 이동, 중대전술기지 방어개념하에 따라 전술진지를 구축하여 가능한 장애물과 조기경보조직 및 야간조명 계획을 수립 세밀한 방어태세를 갖투고 있던 중 동년 8월9일 밤 22시40분경 월맹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아 익일 4시30분까지 6시간 동안에 걸쳐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총검과 수류탄으로 근접전투를 감행, 육박전으로 적을 완전 섬멸 격퇴시킨 전투이다.
동 작전 결과 적사살 188명,포로 6명,61미리 박격포 5문,중경기관총 11정,개인화기 62정,대전차 유탄포 12문,기타 10만여발의 실탄을 노획하는 다대한 전과를 획득했다.
이 전투의 개가로 인하여 주월 한국군의 <중대 전술기지 개념>은 주월전우방군의 경탄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미 보병학교의 교리 연구과제로 채택됐다.
짜빈동 전투
월맹군의 중요한 해상침투로인 동시에 연합군 최대의 보급기지인 다낭비행장과 월남군 1군단지역을 배추에서 위협하고 있던 추라이지구(꽝나이성)로 이동했던 청룡부대는 그 새로운 작전지역에서 가장 많은 작전을 수행했고, 또 가장 많은 전과를 수립했다.
1967년 2월 14일밤부터 15일 아침 사이에 벌어졌던 짜빈동 기습 방어전은 1개 중대(제3대대 11중대)의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을 주축으로 한 1개 연대의 적 기습공격을 장장 4시간여에 걸친 혈투끝에 격퇴시킴으로써 그 당시 자유세계의 매스콤들로 하여금 월남전 최대의 전과라며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 짜빈동 방어전에서 아군은 적 사살 243명과 포로 2명을 비롯하여 화염방사기 2문, 대전차 유탄포 6문, 경기관총 2문, 75밀리무반동총 7문, 수류탄 350발을 노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둔 반면, 아군측 피해는 전사자 15, 부상자 33명을 내었을 따름이었다.
3대대 11중대의 사병 전원이 1계급특진의 영예를 누렸고,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 배장춘 및 김용길 하사관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으며, 김기홍 중위를 비롯한 8명의 장병들에게는 충무 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중대 전술기지
오작교 작전은 1967.3.15 ~4.18(35일)간에 주월한국군이 최초로 맹호, 백마 2개 사단을 투입하여 양개사단의 연결작전을 시도한 작전으로서 수도사단은 '푸엔'성, 송카우', '투이안', '동수안'군 일대에서 계획적인 단계별 작전을 계획적인 민사 심리전을 병행 실시하여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과를 획득한 작전이다.
맹호와 백마의 전투부대는 진격을 거듭하며 작전을 수행한 끝에
1967년 4월 18일 작전개시 42일만에 "오작교"라고 명명되어진 다리에서 서로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 졌다. 이로써 한국군은 401km의 1번 도로를 연결시켰고, 인구 120만의 6,800평방km의 월남정부 통치지역으로 확보해 준 것이다.
오작교 작전에서 올린 전과는 적사살 939명, 포로 425명, 귀순 297명, 소화기 681정, 공용화기 30문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동 작전중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23명이 발생했다.
첫댓글 5중대 김춘용 전우님, 월남전쟁의 한국군의
일대의 전사 기록을 발춰하여, 주월 한국군의
위상과 성과를 잘 설명하였습니다.
전 파월 전우들에게 잘 보여줬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독 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
머언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고 우리 전우님들의 전투를 옮긴 것입니다,ㅎ
용감했던 우리 전우님들의 생생한 전투 모습들을 더 보여주지 못함에 아쉬움만 가득하답니다
월남참전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게 나와있습니다. 후속자료가 있는것 같네요. 안케패스 전투등 감사합니다.
지나간 머~언 이야기 같지만 전공의 혁혁한 전과는 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좀 더 많는 자료를 확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