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박병성
나이테가 없다고 연륜이 없는 게 아니다
비바람 세월의 아픔은 뼈 마디마디에 남기고
하얗게 속을 비운 것이다
속을 채우려 하지 않으니
비바람 세월에도 부러지지 않느니
인고의 어둠 세계
그 뿌리가 가진 깊이와 넓이만큼
몸을 곧추세웠나니
글쎄, 고깟 나이가 무슨 대순가
가을비
박병성
비닐 우산에 듣는 빗소리 들으며
어깨 다 젖은 채 마냥 걷고 싶은 날이 있다
탕진해 버린 시간의 찌꺼기 다 내려놓고
비에 젖어 울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
내 뜻대로 태어나지 않았듯이
병 들어 홀로 가는 것도 내 소관 아니듯
세상의 외로움을 데리고 강물은
억새의 울음으로 산기슭을 떠나고
그러나 내 의지로 저무는 강가에 다가 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초저녁 별을 뒤로 한 채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로 낙엽과 더불어
떠나야 하는 것들과
소리 없이 떠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 목숨처럼 사랑하였으므로
사랑의 흔적 남긴 것이야 내 소관이었듯
내 뜻대로 저무는 강가에 다 와가
머물고 싶었던 순간들은
망각의 늪에 흑백 사진처럼 글로 남기고
말없이 떠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시간의 바람이 잠들기 전,
빛바랜 가을의 옷자락 빗물에 젖어
등짐 하나 없이 떠나는 나의 떳떳한 뒷모습으로
닭둘기
박병성
공화국 광장 후미진 골목
소주에 퉁퉁 불은 라면가닥 불에 탄 삼겹살
사람들이 게워낸 토사물 찍어 먹고
온갖 성인병에 시달려
눈은 초점을 잃은 영락없는 도시인이다
뒤뚱 뒤뚱거리며 걷다
쏜살같이 달려온 자동차에 치었는지
두 발 오므린 채 깃털은
영혼처럼 빠져나가 바람에 흩날리고
어디서 쏜살같이 날아온
저승사자 차림 까마귀가 주변 살펴가며
터진 창자부터 쪼아 먹는 광장의 오후
한때는 새털구름 타고 남북을 유유하던
대가리 속 나침판은 기능을 상실한 채
제 몸 하나 건사 못하는 비둘기일지라도
반짝이는 회청색 앙가슴에 근본이야 잊었겠는가
주억주억 쩐 내 나는 생선대가리 쪼아대며
시멘트 바닥 따다닥따다닥
모스부호로 부고를 날린다
은밀하게 잠입하는 쾌속 드론보다 빠르게
북쪽 광장 비둘기 조의문자 날아온다
'그래도 그쪽 귀신 때깔은 좋갔구만'
닭대가리도 아니고 새대가리도 아닌
공화국 비둘기들이
뒤뚱뒤뚱 뚤레뚤레
자신들을 길들인 사람들을 흉내내며
은밀이 소통한다
약력
박병성
*약력: 2015년 농민문학 신인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통일 분과위원회 부위원장
시집 <사라져간 붉은 꽃잎들>
*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 135 리센츠 259동 601호
* 전번 : 010-5255-8310
카페 게시글
추천 문인, 원고
박병성 시인, 시 3제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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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7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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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작가회 통일분과에서 왕성한 활동하시는 박병성 동인의 탁월한 시 3편 , 큰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