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왕에 관하여...
- 가는 길: 자가운전시 톨게이트에서 5분정도 소요.
시내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오른쪽에 돌담이 보이는 곳으로 - 우회전하면 바로 오릉 주차장이다.
고속버스터미널 정문 맞은편 도로에서 500~507번 내남, - 봉계 방면 버스를 타면 15분정도 소요. 버스비: 1,050원 30분간격
⊙ 신라오릉보존회 중앙청년회
(BC 69∼ AD 4 건국시조 재위 BC 57∼AD4) 신라 박씨(朴氏)의 시조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라고 지칭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설화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서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혹은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 길렀다. 그리고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존경하였고, 나이 13세가 되어 이들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서기전 53년에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설화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 이전에 분거(分居)하여 살았던
고조선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세력을 압도한 유이민(流移民) 박씨집단을 상정할 수 있으며, 말〔馬〕
및 천신하강(天神下降)의 모티프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 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 데서도 그들의 태양숭배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이미 개국연대 이전부터 경주지역에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개국연대가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前漢 孝宣帝 五鳳 元年 甲子,
서기전 57)라는 설은 문제가 있다. 첫째,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의 관점에서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먼저 잡은 것이 그러하다. 둘째, 갑자년이라는 간지(干支)가
참위설(讖緯說)의 갑자혁명설(甲子革命說)에 입각한 듯하기 때문이다.
박혁거세는 서기전 37년 서울에 성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고, 서기전 32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이 단계의 사로국은 대체로 경주평야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道德)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서기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였으며, 이해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전 19년 마한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다. 서기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韓國史講座―古代篇―(李基白·李基東共著, 一潮閣, 1982)
新羅史硏究(今西龍, 國書刊行會, 1933)
新羅史の諸間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神話と文化史(三品彰英論文集, 平凡社, 1971)
⊙ 始祖大王.大妃 誕降事實(밀성대군 36세손 박형구님 제공)
1. 始祖大王
- 按始祖王 乃聖母所誕也 故 中國人讚 有仙桃聖母娠賢O邦之語
- 蘇氏曰 凡物之異於常物者 其取天地之氣常多故 其生也或異 麒麟之生 異於犬羊 蛟龍之生 異於魚龜 物固有然者矣 況神人之生 異於凡人 何足재哉 斯言 德之矣
소씨는 말하되 "대체로 보통과 다른 물건은 천지기운으로 되는 일이 많음에 까닭이 있고 그 까닭이 다르기에 기린의 출생이 개나 양과는 다르고 교룡의 출생이 어별과는 다른 법인즉 하물며 신인의 탄생이 범인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괴이할 바가 아니라" 했으니 이 말이 둘다 이치에 맞는 것이다. - 楊山蘿井 有始祖王誕降碑閣而重修守護
양산 나정에 이 사실을 기록한 <시조왕 탄강 비각이 있어 이를 중수하여 지금까지 수호하고 있다.
- 牧隱李穡詩 云鷄林天瓠爲朴蔓延扶疎何赫赫
明太朝高皇帝命題新羅詩 云伊昔赫居世開國五鳳年相傅千載久粗保一隅偏
목은 이색의 시에 "계림의 하늘아래 표주박에서 태어난 박씨들이 뻗어나고 퍼져서 어찌나 혁혁한 지고" 라 하였고 명나라 태조고황제가 "신라"라는 명제를 내려 시를 짓되 "옛날에 혁거세가 한나라 오봉원년에 나라를 창건하여 천년을 내려오며 동쪽 한 지방을 지켜오고 있다"라고 하였다.
2.始祖王妃
- 權近始祖王妃之生也 亦有瑞應 初 龍見於閼英亭 右협生女兒 有老 異而育之 名以井名 及長 有令德 爲王妃 能內輔 治國基 國人 謂之二聖
시조왕비의 탄생도 역시 보통과는 달라 용이 알영정 우물가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니 동네의 안노인이 신기하게 여겨 양육하고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지었더니 자라서 훌륭한 덕을 갖추시고 왕비가 되시어 시조왕을 잘 보필하시며 나라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시니 백성들이 이성이라 불렀다.
- 權近曰國家之興 莫不有內助之美 夏有塗山 商有有 周有太 所以正始而基化者 其至矣 閼英 爲始祖之妃 國人 稱美之 必有德 有以服人之心矣.
권 근이 말하되 국가가 흥할 때는 반드시 내조의 미가 있기 마련이어서 하나라에는 도산이 있었고 상나라에는 유신이 있었고 주나라에는 태사가 있어서 나라의 시초를 바로잡고 교화의 기초를 튼튼히 한 연유가 되었다. 알영씨가 시조왕비의 자리에 앉게 되심을 신라사람들이 찬미함은 그 높으신 덕이 국민들을 설복시킨 까닭이라 하겠다.
- 謹按 天降神聖 必配聖妃 理固然也 閼英氏 生於龍歸於王 亦天意之不尋常也 周文王 得太 時人 有好述之詠 始祖王 得閼英 國人 有二聖之稱 夫所謂萬化之基 百福之源 果不在玆歟
삼가 생각건데 하늘이 신성을 내리실 때 반드시 성비를 배필로 내리심은 이치에 당연한 일인지라 閼英씨가 용에서 탄생하여 始祖王과 짝짓게 된 일도 하느님의 뜻이 심상치 않음이니 주나라 문왕이 태사를 얻어서 그때 사람들이 시전의 관저장과 같은 노래를 불러 찬양했고 始祖王께서 閼英씨를 얻음으로 국인이 二聖이라고 칭송하였으니 萬物和育의 기본과 만복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 是故 詩有葛斯 本支百世之美而我始祖後裔 亦莫不繁衍綿連者 此내聖妃之正化於始 貽福於後而固以必休於周矣
그런고로 시전에 칡덩굴처럼 뻗어나고 메뚜기처럼 퍼저나서 본손과 지손이 백대의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하는 말과 같이 우리 시조왕의 자손이 길이길이 번창해가는 것도 역시 시조왕비 할머니의 성덕으로 기초를 바로잡아 복을 후세에 내리심이 주나라의 태사에 필적하다 하겠다
◆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휘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 박씨들은 남남의 박씨가 아닌 다 같이 한 집 박씨라는 뜨거운 정분과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끈끈한 화목을 다져왔습니다. 말하자면 밀성 큰집, 고양 둘째 집, 속함 셋째 집....이런 식으로 말씀이지요 .위계질서(?)도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 중요한 宗事를 의논할 시는 항상 밀양에서, 아니면 주로 경주 崇德殿에서 지금은 남남처럼 되어버린 각 파의 대표들이 有司가 되고 그 중의 한 분이 都有司가 되어 하기도 하고, 책을 편찬할 시는 그 분들이 편집위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 모두가 사라지고 다만 전국적 규모의 신라 오릉 보존회가 春祭, 秋祭를 통해 그 정서를 조금은 이어 온다고 나 할까요...
- 기록을 보면 숭덕전에서 大韓 光武 3年(서기1899)에 간행한 朴氏 史譜는
順天人: 박해문, 박주동
潘南人: 박재응, 박이양, 박종국, 박윤양.
密城人: 박준기, 박봉래, 박재화
高靈人: 박청우
竹山人: 박전필 이런 선조들이 주관을 했던 기록이 있고,
또 그 뒤로는 都廳에
順天人 :박종현
密城人 :박재형, 박용대, 박희용, 박수만, 박시순, 박시하, 박윤상, 박영민, 박영립, 박윤수, 박영래, 박학래, 박근수, 박규희, 박성민, 박준우, 박영수, 박종화, 박경양, 박영곤. 박영규, 박용규.
高靈人 : 박봉빈, 박청우
潘南人 : 박정양, 박인양.
月城人 :박종만
高靈人 :박인식
竹山人 :박종우, 박전필
이상 분들께서 주관하셨고, 회의 임원진처럼 교체 또는 유임하여 일해 내려온 모든 분들을 일일이 소개 못함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이 분들은 모두 각 파를 대표하는 분들로 주로 당시 書院에 출입하는 학식 있고 경륜 있는 훌륭한 先人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분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史料와 族譜같은 것이 제작될 수 있었던 게지요.
- 당시 이분들이 崇德殿에 모여 시조의 유래에 대하여 글귀를 다듬은 것은 이 사이트의 타이틀과 같은 <박혁거세와 탄생신화>가 아닌 <始祖王 誕降事實>,<始祖王妃 誕降事實>로 하여 책을 만들었으며, 원문은 전일 제가 소개해 드린 바와 같습니다.
이 내용은 박씨대동보 또는 각 파보의 첫머리에도 반드시 실려 있습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휘혁거세 자손 박씨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만.... 이것이 저의 옹색하나마 되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기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은 것은 시조의 근원에 대하여는 탄생신화나 설화나 설이 아닌 탄강사실 그대로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귀 사이트의 [족보란? FILE의 **박혁거세 탄생신화...에서]
제8열 : <....입술이 닭의 부리를 닮아 보기가 흉해서> 또는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는둥 하는 불경스러운 기록은 다른 곳에서 퍼온 글이라 하더라도 살펴보시고 과학적 고증사실이 아닌이상 삭제함이 마땅하다 사료되는데 귀하는 그와 생각이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전술한 사연으로 정한 시조왕. 시조왕비 탄강사실 원문 어느 구석에도 그런 내용은 볼 수 없습니다.
이상이 또한 그에 대한 해답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이 사이트의 구석구석마다 밀양박씨, 밀양박씨 하고 있는데, 굳이 틀렸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가급적 밀성으로 표기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본래 왕자이신 휘언침께서는 밀성으로 봉군되셨기 때문에 밀성대군이라 하였고, 따라서 그 후예들의 관향은 자연 밀성이 된 것이며, 밀성은 후에 밀양으로 지명이 변한 것입니다만.... 때문에 관향과 관련한 지명의 변천사는 족보편찬시에 반드시 삽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명이 그렇게 바뀌었으니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고 넘겨버린다면, 만약에 경주박씨와 월성박씨가 엄연히 틀림에도 같은 파로 인식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世係)가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