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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성경 숙제3 창26-36절
(창26)-이삭이 리브가를 누이라 -속임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창세기 26:7)
(성경주석) 그는 나의 누이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했던 것처럼(12:11, 12; 20:2, 11), 이삭도 같은 일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보호하신 방식은 사라가 보호받은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기조차 하지 않았다. 이삭의 생애에서 엄격한 정직에서 벗어난 일로 기록된 경우는 이 경험과 다른 하나의 경험(25:28)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이 점에 있어서는 자기의 실패담(失敗談)으로써 이삭에게 경고를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십중팔구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해 주었지만, 만사가 그렇듯이 이삭도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교훈을 배워야만 했을 것이다. 얼마나 자주 부모의 죄들을 그 자녀들이 답습하는가! 그러나 유전적인 약점들도 결코 자녀들을 그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시켜 주지는 않는다(참조 겔 18:20
(예언의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하였던 것처럼 시험을 당한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않으나, 그분은 당신의 말씀의 교훈과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그들을 부르신다.그들은 극기와 고난과 희생의 길인 것처럼만 보이는 길로 들어가기 위하여, 부귀와 공명을 보장하는 직업을 버리며 마음에 맞는 유리한 공동생활을 떠나고 친족과 작별하라는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안일한 생활과 친구들과 친족의 감화는 그 일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인 바로 그 특성을 계발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인간의 감화와 도움에서 벗어나게 해서 당신의 도움의 필요를 느끼며 당신만을 의지하도록 인도하신다.
마음에 품은 계획과 친밀한 교제를 단념하고 섭리의 부르심에 응할 준비가 된 사람은 누구인가?
새로운 의무들을 받아들이며 시도해 본 적도 없는 분야에 뛰어들어 확고부동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손해를 이익으로 간주할 사람은 누구인가?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요, 그와 함께 “현재의 고난은...
족히 비교할 수 없”(롬 8:18)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 4:17)을 나누어 받을 것이다. (부조와 선지자 126.4, PP 126.4)
(관련성경-) 사람을 두려워하면BC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언 29:25)
(창27장)-야곱이 아버지를 속임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세기 27:19)
(성경주석)- 나는…에서로소이다
그의 아버지를 확신시키는 과제는 결코 쉽거나 성공이 확실시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도착했음을 알린 후에 야곱은 여러 가지 난처한 질문에 맞부딪쳤다.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만 뒤에 또 다른 기만이 필요하였다. 그는 자신을 에서라고 말하고 염소새끼의 고기를 사냥한 고기라고 말했으며, 자기가 신속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참람되게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돌렸다
(예언의신)- 에서가 아버지의 말대로 사냥하러 나가자마자 리브가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나섰다.
그 여자는 일어난 일을 야곱에게 말하고 그 축복이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에서에게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기만적 행동을 취해야 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야곱에게 만일 자신의 지시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장자의 명분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시켰다.
야곱은 어머니가 제의한 계획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속인다는 생각이 그를 크게 당혹시켰다.
그는 그와 같은 죄가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망설임도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없어 그는 어머니의 제안을 수행하려고 나섰다.
직접 거짓을 행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일단 그가 아버지 앞에 나온 이상 물러서기에는 너무 깊이 간 것같이 생각되어 그는 탐하던 축복을 기만적인 방법으로 얻었다.
(관련성경)-창25:32
(예언의신) 어느 날 사냥하러 나갔다가 피로에 지쳐 집에 돌아온 에서가 야곱이 준비하고 있던 음식을 청하였을 때, 한 가지 생각으로 늘 골똘해 있던 야곱은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고, 장자의 명분을 넘겨주면 형의 주림을 만족시켜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무모하고 방종한 사냥꾼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5:32)라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넘기고 맹세로써 거래를 확인하였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아버지의 장막에서 음식이 그에게 보장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순간적인 식욕을 만족시키려고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유업을 부주의하게 팔아 버렸다.
그의 온 관심사는 현세에 있었다.
그는 땅의 것을 위하여 하늘의 것을 희생하고 미래의 행복을 순간적인 방종과 교환하였다.
(부조와 선지자 179.1, PP 179.1)
(창28장)-야곱이 꿈에 본 사닥다리-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창세기 28:12)
(성경주석) 꿈에 본즉-야곱이 지치고, 외롭고, 슬픈 채로 그곳에 누워 있을 때, 그의 마음은 기도로 하나님께 향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83). 이것이 그의 꿈의 정신적 배경이다. 이틀간의 기나긴 날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동안 그는 자신의 행동방식을 살펴보고 자신의 속절없음을 인식할 기회를 가졌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지체는 때때로 영혼을 순결하게 하고 자신을 아낌없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내어 맡기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참조 시대의 소망, 200, 380~382). 사닥다리는 하늘의 하나님과 땅 위의 그의 백성들 사이의 실제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교제의 가시적 상징이었다. 천사들은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제시하기 위하여 올라가고, 신적 도움과 보호의 약속을 갖고 내려온다. 사닥다리는 땅 위에 놓여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곳은 야곱이 홀로, 곤고한 중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채로 누워있던 곳이다. 하늘 위에는 여호와가 서있었다. 자신을 야곱에게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선포하며 그는 그에게 그의 조상들에게 한 모든 약속을 확증하였을 뿐 아니라-가나안을 소유하는 것, 허다한 후손들, 만민에게 축복이 됨(참조 12:2, 3; 13:14~17; 15:5, 7, 16; 17:2~6, 16; 17:8; 18:18; 22:17, 18; 26:3, 4, 24)-그의 여행 동안의 보호와 안전한 귀향을 보증하였다. 야곱에게 한 이 약속은 아직 요원한 일이었으므로 하나님은 확언을 덧붙였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예언의신)- 12 발을 굳게 딛고 서 있으라
예수는 하늘로 가는 사다리이시다. …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이 사다리를 오르게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땅의 보물을 우리 몸에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이 사다리를 오를 수가 없다. 하나님의 것보다 우리의 편의나 개인적인 이익을 앞세울 때 우리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 이 땅의 재산이나 환경에는 구원이 없다. 사람이 땅에서 부자라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거나 선을 소유한 것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만약 우리들이 이 사다리를 오르는 참된 경험을 얻으려면 모든 방해거리를 뒤에 내버려야할 것이다.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은 사다리의 매 계단마다 발을 확실히 딛고 있어야 한다(사인즈 1899. 2. 1).
12,13 -그리스도께서 심연에 다리를 놓으심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장자권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실망으로 끝났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곧 하나님과 그의 연합, 그의 집, 게다가 이제는 절망에 찬 도망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그분은 희망 잃은 야곱의 상태를 보셨다. 그의 절망을 보셨다. 그분이 야곱의 이같은 상태를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그 신비한 사다리를 보여 주셨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연합을 온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하늘의 하나님은 그를 보시고 죄가 만들어 놓은 심연 위에다 그리스도께서 사다리를 놓게 하신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지만 내가 어떻게 그곳에 이를 수가 있는가? 길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다리의 계시를 보여 주신 것이다. 인간은 그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 그 사다리의 밑은 땅이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다.
땅의 거민들이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왜 찬양하자는 말인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으로 그 깊은 심연에 다리를 놓으셨기 때문이다. 인간 예수의 긴 팔은 인류를 감싸 안으시고 그의 신성의 한 팔로는 무한하신 분의 보좌를 붙잡으셨다. 죄로 말미암아 하늘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외로운 섬이 되어버린 이 작은 세계는 예수께서 다리를 놓으셨기 때문에 다시 본 위치로 회복되었다(원고 5, 1891).
12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루스벨
죄의 창시자는 하나님 정부에 항거하여 반역을 일으켰던 루스벨이었다. 그가 타락하기 전에는 덮는 그룹이었고 그의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에 다른 천사와는 판이하게 달라 보였다. 하나님은 그를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 당신과 아주 비슷하게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 하셨다(리뷰 1901. 9. 24).
12-15 하나님께서 사단의 무리들을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던 이유(사 14:12-14)
반역의 괴수 사단은 한때 하늘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 다음 가는 영예로운 자리에 있었고, 그는 물론 그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도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지식, 곧 그의 선하심과 지혜와 그 탁월한 영광, 그리고 그분의 자비하심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 지식은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게 하였다.
하늘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직접 보고 즐거워하였던 자들,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을 보았던 자들, 그 모든 영광의 목전에서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을 구속할 희망은 전혀 없었다. 그들이 이미 경험한 것만큼 그들을 깊이 감명시킬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의 새로운 현현은 더 없었다. 만약 그들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영광의 바로 면전에서 반역할 수 있었을진대, 그보다 더 나은 조건하에 놓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투기심에 가득찬 그들의 의심과 반역적인 불평을 압도할만한 능력을 남겨둔 것이 없었고, 그보다 더 높고 더 깊은 영광도 남겨둔 것이 없었다(살아: 그리스도의 시험 18,19).
(관련성경)- 민수기 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수기 12:6)
(창29장)-야곱이 결혼-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창세기 29:16)(예언의신) 야곱은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이나 충실히 봉사하였으나, 그는 봉사한 세월을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수일같이 여겼”(창 29:20)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라반은 그렇게 귀중한 조력자를 더 오래 잡아두고자 하여 레아를 라헬 대신에 바꾸어 주는 무자비한 기만을 행하였다.
레아 자신이 그같이 속이는 일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은 야곱으로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고 느끼게 하였다.그가 분개하여 라반을 비난하자 라반은 또 7년간을 봉사하면 라헬을 주겠다고 제의하였다.그러나 아버지는 레아를 버리지 말도록 강요하였는데, 그럴 경우 집안에 불명예를 초래할 것이었다.이리하여 야곱은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레아를 그대로 두고 라헬과 결혼하기로 결심하였다.라헬은 항상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그러나 그 여자에 대한 그의 편애는 시기와 질투를 자극하였고, 그의 생애는 이 자매 아내들의 맞겨룸으로 인해 쓰라렸다.
관련성경-창31: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창30장)-라혤이 요셉을 낳음
25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창세기 30:25) (창 30:25)
성경주석)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요셉의 출생 시에 야곱은 라반에게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일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25~28절에 의하면 요셉은 라반을 위해 야곱이 봉사한 지 14년 되는 해의 끝에, 곧 결혼한 지 7년이 지났을 때 출생했던 것 같다(29:21~28). 야곱의 열한 아들이 그가 결혼한 때로부터 라반에 대한 14년째의 봉사가 끝나는 때, 곧 7년 동안에 모두 출생하였는지 혹은 그곳에서 보낸 20년 중 남은 6년 동안에 몇 명이 더 태어났는지(31:38) 전적으로 분명치는 않다.
여기에 수록된 야곱의 아들들의 순서는 그들의 출생을 연대기적으로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계(母系)에 근거된 것처럼 보인다. 모세는 레아에게 4명을, 다음에 빌하와 실바에게 각각 2명을, 다시 레아, 그리고 라헬에게 1명을 수록하므로, 도합 5개 그룹으로 기록하였다. 구약에 기록된 야곱의 아들들의 목록은 어느 하나도 그 순서가 서로 일치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참조 창 46:8~25; 49:3~27; 출 1:1~4; 민 1:5~15; 대상 2:1, 2 등) 출생 순서에 대한 일관된 양식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들 11명과 딸 1명이 야곱의 결혼생활 첫 7 년 동안에 태어나고(29:32~30:24) 나머지 6 년간 그가 라반을 섬겼을 때는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레아는 7 년간 일곱자녀를 낳았으며 전혀 자녀를 낳지 않은 어떤 뚜렷한 기간의 간격이 있었다(29:35; 30:9). 만일 이 기간 동안에 빌하와 실바의 네 자녀가 태어났다면, 7년은 분명히 너무 짧다. 레아의 아들 6명이 두 그룹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여기서 모세가 기록한 순서는 엄격하게 모계(母系)에 기초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다섯 그룹은 각 그룹의 첫 아들의 출생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으며 두 연속적인 그룹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중첩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제안이 문맥과 기존의 사실들과 가장 잘 일치하는 것 같다. 따라서 단의 출생은 그의 뒤에 이어서 수록된 모든 아들들보다도 선행할 것이지만, 반드시 유다의 출생에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인 면에서 갓, 잇사갈과 요셉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이렇게 밀접하게 중첩시키면 열한 아들들의 출생이 7년 기간에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중첩의 원칙이 받아들여진다 할지라도, 11명 모두가 7년 기간 안에 태어나야 할 이유가 없으며, 몇 명은 야곱이 라반 집에 체재한 마지막 6년 동안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7년 동안에 중첩될 가능성을 허용한다고 해도 그토록 신속하게 출생이 이어지는 것은 동양적 기준에도 극히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언의신)- 25-27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라반을 위해 봉사하는 데 싫증이 난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할 때에 장인에게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창 30:25, 26)고 하였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에게 유하기를 강권하며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창 30:27)라고 언명하였다. 그는 자기의 재산이 사위의 보호 아래서 증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부조 192).
(창31장)- 라반이 야곱을 쫓아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창세기 31:5)
(예언의 신) 20 년 동안 야곱은 메소포타미아에 체류하면서 라반을 위하여 일하였으나 라반은 친족간의 유대를 돌아보지 않고 그들의 관계에서 오는 모든 이익을 자기 자신만이 취하였다.
그는 자신의 두 딸을 위하여 14년의 노역(勞役)을 요구하였으며, 나머지 기간 동안 야곱의 품삯은 열 번이나 변경되었다.그래도 야곱의 봉사는 부지런하고 신실하였다.
그들의 마지막 회견에서 그가 라반에게 한 말은 가혹한 주인의 이익을 위하여 그가 어떻게 꾸준히 일하였는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 31:38~40).
(부조와 선지자 190.1, PP 190.
(창32장)-압복강에서 야곱의 씨름-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세기 32:24)
(성경주석)-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홀로 기도로써 하나님을 찾기 위해 야곱은 강의 북쪽 제방에 남아있었다. 이 상황에서 평소의 그의 명석함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만이 에서의 분노를 삭이고 야곱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씨름하다가
야곱의 대적이 인간이나 보통의 천사가 아니었다는 점은 야곱이 그를 하나님으로 불렀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30절). 호세아 선지자도 그를 하나님과 천사 둘 다로 언급하였다(호 12:3, 4). 이 천상의 방문자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였다(부조와 선지자, 197). 인간의 형태로 그리스도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하거나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18:1). “야곱의 환난의 때”에 관해서는 렘 30:7 주석을 참조하라.
(예언의신)- 24-32 야곱의 씨름-야곱의 역사는 죄에 빠졌다가도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분께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보증이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얻으려다 얻은 것은 자신을 내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에 의해서였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이 그가 갈망하던 축복을 그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의 종에게 가르치셨다. 말세에 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위험이 저들을 둘러싸고 절망이 영혼을 억압할 때에 저들은 오직 속죄의 공로에 의지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무력하고 무가치한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의 공로를 의지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멸망하는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길고도 검은 범죄의 목록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눈 앞에 있다. 그 기록은 완전하다. 우리의 죄는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다. 그러나 옛날 당신의 종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분께서 약속하셨으니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
야곱은 인내하고 결심하였기 때문에 승리하였다. 그의 경험은 끈질긴 기도의 능력을 증거한다. 우리가 힘있는 기도와 불굴의 신앙의 교훈을 배워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나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가장 큰 승리들은, 재능이나 교육이나 부나 인간의 호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열렬하고 번민하는 믿음이 능력의 강한 팔에 매달릴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기도의 밀실에서 얻어진다.
모든 죄를 버리고 열렬히 하나님의 축복 구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야곱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와 같이 열렬하고 참을성있게 구하는 사람들은 다 야곱이 성공한 것처럼 성공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눅 18:7, 8)(부조 202,203).
관련성경- 호세아 12: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호세아 12:3)
호세아 12: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호세아 12:4)
(창33)-에서와 상봉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세기 33:4(
(성경주석)-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쌍둥이 동생을 보자 에서는 자연스러운 형제애의 감정에 휩싸였다. 에서의 마음속에 여전히 적의가 남아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야곱의 겸비함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야곱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는 마음속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마음껏 나타내었다
(예언의신) 그 절름거리는 고뇌의 사람을 보고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창 33:4) 울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거칠기 이를 데 없던 에서의 군사들까지도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대장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저들은 야곱의 질환을 보았으나 그의 이 연약함이 바로 그의 능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거의 생각지 못했다.(부조와 선지자 198.4, PP 198.4)
(관련성경)- 그가 이르되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발뒤꿈치를 잡는 자” 혹은 “기만자”로서 야곱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25:26 주석을 참조하라.
32:28 그가이르되 네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세기 32:28
(창34장)-야곱의 딸들이 강탈- 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창세기 34:7)
(성경주석)- 사람이 근심하고=문자적으로 “자신들을 격노케 하였다”이다. 두 번째 표현, “심히 노하였으니”는 문자적으로 “그것이 그들에게 크게 타올랐다”이다. 그들의 격렬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참조 삼상 15:11; 삼하 19:43). 현대 아랍인들이 아내의 부정보다도 자매의 유혹에 대해 더 큰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어떻게 느꼈을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아내와 이혼하면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아내가 아니지만, 자매나 딸은 언제나 자매와 딸로 남아있다고 말한다.그러므로 그들이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 그들 자신의 명예는 여동생의 명예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지은 죄에 대해서보다는 그 가족에게 닥친 수치심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사건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것을 취급하는 일에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49:7).
이스라엘에게
여기서 처음으로 야곱의 가족에게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적용되었다. 후에 이것은 민족에 대한 일상적 호칭이 되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먼 훗날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혹은 이스라엘 백성이란 말로 불렸다고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에게”란 구절을 “이스라엘을 대적하여”로 번역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수용할 만한 것이며, 그 사건이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방백”이 된 야곱을 거스르는 범죄였음을 암시한다.
부끄러운 일…“부끄럽게 행하다”는 명예가 걸린 범죄, 특히 육욕적인 죄(신 22:21; 삿 20:10; 삼하 13:2 등), 그리고 다른 범죄(수 7:15)에도 쓰이는 하나의 고정된 문구가 되었다.
(예언의신)- 야곱은 범죄했었으며 많은 괴로움을 당했었다.
큰 죄를 범하고 아버지의 장막에서 도망하여 나온 그날부터 그는 여러 해 동안 수고와 염려와 슬픔을 당했다.어머니와 이별하고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으며 집 없는 도망자로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 동안 수고했으나 어이없이 속임을 당했고 탐심과 욕심 많은 친척을 섬기느라고 20년 동안 수고했었다.재산은 불어나고 슬하에 자녀들이 자라났지만 가족들의 불화와 불목 때문에 기쁨이라곤 거의 찾아보지 못하고 살아왔다.그의 딸의 수치, 그에 대한 오라비들의 복수, 라헬의 죽음, 르우벤의 패륜적인 범죄, 유다의 죄, 그리고 요셉에게 행한 형제들의 잔인한 기만과 악행으로 인하여 당하던 고통이 눈앞에 펼쳐졌다.그것은 얼마나 길고도 어두운 악의 목록이었던가!
그는 최초의 실패의 결과를 여러 번 여러 번 거두었다.그는 자신이 범한 죄를 그의 아들들이 거듭 거듭 범하는 것을 보았다.징벌은 쓰라린 것이었으나 그 목적은 달성되었다.
징계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의의 평강한 열매를”(히 12:2) 맺었다.(부조와 선지자 237.4, PP 237.4)
(관련성경) 창세기 34: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창세기 34:7
창세기 34:8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창세기 34:8
창세기 34:9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창세기 34:9)
(창35장)-이름을 이스라엘-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세기 35:10)
(성경주석)-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앞서 벧엘에서 나타났을 때 하나님은 특별히 선민의 조상과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이삭을 계승해야 하는 야곱의 소명 때문에 그에게 유랑자의 땅에서의 신적 보호와 안전한 귀향을 약속하였다. 이 약속을 하나님은 이루셨으며, 따라서 야곱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서약을 새롭게 하였다. 하나님은 이미 브니엘에서 부여되었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그에게 재확인하였고(32:28), 그것과 더불어 수많은 후손과 가나안 땅의 소유에 대한 약속도 확인하였다. 형식과 본질에서 이 약속은 이전에 벧엘에서 야곱에게 주어졌던 것보다는(28:13, 14)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과 더 흡사하다(17:6, 8). 임종이 가까워질 때 야곱은 벧엘에서 있었던 이 두 번째의 하나님의 현현을 언급하였는데(48:3, 4), 호세아 선지자는 브니엘에서의 그의 체험과 관련하여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호 12:4).
(예언의 신)- 하나님께서 그 땅 거민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일으키셨으므로 그들은 세겜의 살육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지 못했다.여행자들은 무사히 벧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여호와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언약의 약속을 새롭게 하셨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창 35:14)웠다.(부조와 선지자 206.1, )
관련성경)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세기 35:10)
(창36장)-에서가 이사를 함-창36: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성경주석)-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호르족을 제압하고 그들의 영토인 세일 땅을 점령한 뒤에 에서는 그의 가족을 그곳으로 옮기고 자기의 영구적인 거처로 삼았다(참조 신 2:12, 22). 그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 이삭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야곱이 돌아왔을 때 그가 이미 그곳에 정착했거나 적어도 그 지역을 정복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32:3; 33:14~16). 야곱을 하란에서 집으로 데려오는 조치로써 이삭은 에서가 그의 재산을 상속받고, 야곱은 약속의 땅에 대한 권리를 상속받도록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야곱과 에서가 얍복강가에서 그들의 불화 문제를 해결한 후에 이 조치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것임이 입증되었다.
타처로 갔으니-어떤 지역이나 나라로 갔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타처로 갔으니”라고 기록된 것은 좀 이상하게 보이며, 본문에서 “세일”이나 “에돔”(36:16 참조)이 빠졌을 것이다. 어떤 역본들은 “세일 땅으로”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이어지는 구절은 모세가 말하려고 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 같다.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개정표준역」에 있는 것처럼 “그 형제 야곱을 떠나 어떤 땅으로”라고 할 수 있다.
(예언의신)-야곱은 장자의 명분에 속한 영적 축복에 크게 만족하여 에서가 갈망하고 가치 있게 여긴 유일한 상속물인 아버지의 재산을 형에게 양도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질투나 증오로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으나 서로 헤어져 에서는 세일산으로 옮겨갔다.
축복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갈망하던 보다 높은 미덕에 첨가하여 야곱에게 세상 재물도 허락하셨다.두 형제의 재산이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더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창 36:7).
이 분리는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하였다.
두 형제는 신앙에 있어서 아주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그들에게 더 좋았다.
(부조와 선지자 207.2, PP 207.2)
(관련성경)-창13장6절-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관찰-아버지 이삭처럼 반복되는 거짓속에서 야곱과 에서도 질투와 장자권을 획득하는 비열함이 있었다-
통찰-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차차 자신의 쓰라린 경험속에서 희미하나만 하나님과 동행하는모습이 놀랍다
적응-이기심 많은 야곱,비열한 야곱,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위해 대담하게 아버지와 형을 속인 그를 끝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때로는 거짓말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정체를 부인하는 그를 야곱이란 이름에서 이스라엘 승리자가 되도록 인도허신 하나님은 정말로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나의 지나간 삶이 야곱같지만 주님을 개안의 구주로 받아 드릴 때 우리를 하늘 생명책에 기록해 주시고 우리를 하늘에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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