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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바람
- 믿음과 사랑 그리고 나
전창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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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바람 1부 – 예수님 마음
프롤로그
나는 최고경영자가 아니다. 그래서 최고경영자가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최고경영자가 되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할 뿐이다. 물론, 예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면, 언젠가는 나도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최고경영자란 의미가 꼭 기업체의 사장인 것만은 아니다. 나 자신을 경영하여 나 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최고경영자가 아닐까.
01. 언젠가는 나도
예수님을 통해 처음 나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았고 예수님을 통해 처음 나는 섬김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다만, 그 섬김이 실천에 이를 때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 인내를 해야겠지만.
예전에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 속에 두려움 대신 예수님이 있다. 그래서 지금은 두렵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마음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래서 내 글을 공개하는 것도 두렵지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 삶의 최고경영자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기도하며
02. 천국에
때로는 내가 무언가를 할 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할 수 없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한 번 해보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남자와 여자의 몸이 섞이지 않은 동정녀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온전한 사함을 받았다. 예수님은 태어나셨을 때부터 기적을 일으킨 몸이었고, 살아 계셨을 때도 기적을 일으키셨고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야말로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신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도움 없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분이 계셨기에, 나는 아직 살아있고, 또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이 일으킨 기적을 믿기에, 나는 또 내게 일어날 기적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모든 기적을 다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살아서는 인간의 몸이시지만, 하늘에 오르셔서는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 손짓하고 계신다.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아있는 곳이 지옥같이 느껴진다면, 죽음 이후에 갈 수 있는 천국을 소망으로 품을 것이다. 그 천국이 있다고 믿기에 나는 오늘 행복하다. 무언가를 할 때의 두려움은 천국에 대한 소망과 함께 사라진다.
"한번 해 보라”
그리고 못해낼 것 같은 어떤 일을 어느 순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또 기적을 일으키셨구나, 라며 감사의 기도를 한다.
또, 승리했구나
03. 평온한 내가 되기
사람들의 말에,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행동들 때문에, 나의 하루가 온전치 않은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의 영향으로, 나의 삶을 좌지우지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나의 순간적인 기분을 왔다 갔다 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내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지는 않는다. 기분은 금방 회복되며, 내 마음은 평온해진다.
내 마음이 평온해진 것이 언제였던가. 내 마음이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지 않음은 언제부터였던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고,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던 어느 순간부터였다. 언제나 불안에 시달리던 나의 하루가 이제는 만족과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마음엔 아직도 분노가 존재하며,나는 아직도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이란 작은 변화가 내 삶에 일어났기에 언젠가 나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당장은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끊임없이 명상하며,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쉬임없이 기도하다 보면 언젠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을 것이라 믿는다.
04. 모든 이들에게
매일 불평을 늘어놓는 어떤 사람이 있다. 때로 그의 말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그는 교회에 불만이 생겨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겠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감사할 것이다. 그가 나를 불쾌하게 해서 내가 더 단련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결국은 그렇게 불만을 쏟아내던 그 사람도 언젠가는 다시 예수님 품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다. 아픔은 나를 더 성장시킨다.
예수님은 항상 감사해 하셨다.
오늘은 비록 힘들지만, 내일을 향한 꿈이 있기에, 오늘 행복했고, 감사했다. 꿈은 계속해서 꾸어야 하기에, 절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은 꿈을 이룬 다음의 일이다. 목표 자체에 목표를 둔다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목표로 향해 가는 과정, 그 과정의 즐거움에 초점을 맞춘다면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 하루의 소중한 경험을 해준 그들에게 감사하며, 내일 만날, 그리고 앞으로 만날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때로는 어떤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쓸 때가 있다. 절제를 해야 하는데, 라는 마음뿐, 실제로는 절제를 못해 도를 지나칠 때, 그럴 때 예수님을 생각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예수님 스스로의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서 사람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였다.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잘못이든, 잘못하지 않든, 그것은 그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내 삶도 간섭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의 간섭이 진정한 관심인 적은 별로 없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간섭은 그냥 간섭일 뿐이다. 대신,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그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이 반드시 관심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하시는 데에 에너지를 소비하셨다. 예수님을 바라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사랑”을 주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관심 없던 사람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이고, 위대한 탄생이었다.
역사에서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보일지 몰라도, 현실에서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예수님과 닮은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참견이나 간섭이 아닌 인류애를 지닌 사랑을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힘들다. 우선, 나부터 그렇게 되기 어렵다.
나의 에너지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이다. 나를 여태까지 먹여 살리시고, 나를 여태까지 돌봐주신 예수님이 내 에너지의 원천이다.
"아버지(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 18:11)
고난의 잔을 마신 예수님의 힘으로 나는 지금껏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진 못했지만, 나의 고난에 예수님이 함께 했으며 또 앞으로 있을 고난의 잔에 예수님이 함께함으로 내가 평안해짐을 감사할 것이다.
06. 정죄는 하지 않는다
가끔, 마구 글을 쏟아내고 싶을 때가 있다. 태풍이 오고 있으므로,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의 절실함과, 기적의 이루어짐이, 절실히 필요하기에…
간단히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죄가 있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므로. 논리는 간단하다. 예수님이 누군가를 정죄하지 않으셨으므로, 나도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정죄한다는 것, 그것처럼 무섭고 끔찍한 일이 있는가. 때로는, TV에서 나오는 범죄자들이 알고 보면, 어이 없이, 오보인 경우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그런 오보들이 사회의 이슈에 편승되어 밝혀지지 않고 묻히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오보를 진짜로 믿고 그를 정죄하기 시작한다. 과연, 진실이 무엇일까. 정죄하는 사람들을 정죄할 이유도, 범죄자들을 정죄할 이유도 내게는 없다. 예수님의 뜻대로, 언젠가 이루어질 예수님의 천국에 내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차이는 정죄를 하느냐 정죄를 하지 않느냐에 있을지도 모른다. 정죄를 하는 것과 정죄를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은 다르다. 정죄를 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은 혹시 상처받을지도 모를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지키는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죄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다. 내게 피해를 주는, 피해를 줄지도 모를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 그것 자체가 예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 것. 언젠가는 그들도 예수님의 품으로 안기길 기대하는 것. 그들과 거리를 두되, 다만 마음속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들을 이 땅에서가 아닌, 저 아름다운 천국에서 만나길 바란다.
07. 예수님의 표현법
그러고 보면, 요즘 나오는 인문서들은 자기표현에 대한 것이 참 많다. 주로, 자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라는 내용이며, 나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또 남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그런 표현법을 알려주는 책이 많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창시자는 예수님이라는 걸 혹시 아시는지. 예수님은 느끼는 방법을 알고 계셨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셨다. 남들도 똑같이 하도록 도우셨다. 예수님의 말씀(즉, 성경)을 보다보면 그런 표현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나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비록, 아직까진 서툴지만, 예수님에게서 이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마음만은 편안하다.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널리 펼쳐질 날을 기대해 본다.
08. 어리석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 중에 이런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말라고. 왜 나만 이래야 돼. 그러지 말라고. 내가 조금 양보하고 내가 더 노력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거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는 기꺼이 쓰일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 갈 길을 마련해 주시고 축복해주시길 기다리고 있노라고.
어느 날부터 내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은 그 이유였다. 왜 나만 열심히 일해야 돼, 라고 불평하지 않고, 어떤 일에서든지 주어진 그곳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앞길을 예비해 놓으시고 이미 준비된 그 길을 가는 그냥 걷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냥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지금까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증명이 된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거나,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기 전엔 항상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하냐며, 세상에 불평불만을 쏟아내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분명, 많이 발전했다. 그리고 내 앞길엔 예수님이 동행하시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되고, 다시 걸어가면 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내가 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걷다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란 사람이 꼭 필요한 곳이 있겠지. 그곳에 사랑이 있든, 그곳에 안정된 직장이 있든, 그곳에 실현된 꿈이 있든.
하나님은 나의 미래를 예비해놓고 계셨고, 또 앞으로도 예비해 놓으실 것임을 믿는다. 나는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때론, 꽃구경도 하고, 나무그늘에 앉아 쉬기도 하고, 때로는 뜨거운 아스팔트,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도 하면서. 그 길은 조금 땀이 나긴 하겠지만,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길. 그리고 육체는 힘들어도 마음은 편안한 길이다. 신통한 다이어리는 눈물겹지만 편안한 길을 걷는다.
09. 고상한 예수님
*고상하다 : 품위나 몸가짐의 수준이 높고 훌륭하다
나는 그다지 고상한 사람은 아니다. 세속적이며, 욕심도 있고, 때로는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 입히지 않기만 하면 된다는 아주 최소한의 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다지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다. 나 자신을 돌보다가 지쳐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이전에는, 내게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는데,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부활하신 사건은 내게 그런 평화를 선물하시려고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평화스러울 때, 나를 더 단련하고 그리고 더 단단해지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다시 또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극복함 힘을 기르라는 뜻이라고, 그렇게 알고 준비하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읽고 있는 『최고경영자 예수』 한 장 한장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의미들이 다가오고, 그것들을 묵상한다. 내가 고상해지고 싶어서. 성경에 나오는 고상한 요구들이 이 책에 나온다.
- 아브라함의 요구 : 당신을 따르도록 도와 주십시오.
- 모세의 요구 : 당신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 다윗의 요구 : 나로 하여금 우리 백성들을 위협하는 골리앗을 쓰러뜨리도록 도와주십시오.
- 에스더 : 나로 하여금 이 백성들을 구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 솔로몬 : 저에게 이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 이사야 : 당신의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정결한 입술을 주십시오.
- 베드로 : 당신의 양들을 먹일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 예수 : 저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도록 도와 주십시오.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모두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 하지 않았다는 것. 백성을 위하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는 것. 고상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누군가를 위하는 척 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게 고상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도 고상한 삶을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나의 결심을 도와 줄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내게는 조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나의 고백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겠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건 뭔가 할 일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것이 나만을 위한 삶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는 세상에, 나도 동참할 것이다. 고상한 것을 구하신 예수님처럼, 나도 고상한 것을 구해 본다.
당신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10.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내가 갖고 있는 자원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이 자원이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큰 자산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 건강하다. 비실비실 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픈 곳이 거의 없다. 하나도 안 아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건강한 편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그것만큼 큰 자산이 있을까. 그럼으로 인해, 나의 강점들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가 있다. 시간이 내게 주어지면, 책을 읽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쓴다. 예수님에 대해 쓰는 이유. 잘 모르겠다. 그냥 쓰고 싶다. 엔도르핀이 마구 돌아서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쓰고 싶다.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쓰고 싶어지면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쓰고, 쓰고 싶어지면 밤에 좀 더 늦게 자더라도 쓰게 된다. 책을 읽고 싶어지면, 잠을 일찍 깨게 되고, 책을 읽다보면, 벌써 잘 시간이 지난다. 건강이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찬송을 부른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그것 뿐예요.
11. 이상하게 보이지만 때로는 알 수 없는 힘이 하나님께 이끌기도 한다
내가 가는 지금 이 길이 과연 맞는 것일까.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운명이라고 느껴지는가.
나는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는다. 처음부터 그것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아주 "불행"하다고 느꼈던 순간에는 그것이 계획의 일부라고 믿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다. 정말, 당신이 있는 것이냐고. 있으면, 증거를 대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퇴근시간은 2시간 남짓 남은 시간인데, 비가 오다니. 그때 난, 무슨 이유에서인지 만약 이 비를 그치지 않는다면, 당신이 있는 걸 믿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폭탄선언을 했다. 당신을 다시는 절대 믿지 않겠다는, 그야말로 굳은 결심이었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그때, 퇴근하니 비가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아 그때. 만약 비가 내리고 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작 비 가지고 그런 서원을 한다는 것이 우스워 보이기도 하겠지만, 가끔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이 하나님께로 이끌기도 한다. 만약 그때 그 서원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세상은 불행한 것이라며, 왜 나 같은 놈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냐며 여전히 세상에 대한 원망을 뿜어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나를 버려두지 않으셨고,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된 이후에, 지금까지, 아주 조금씩이지만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 나는 운명처럼, 글을 쓰고 있으며, 늦은 공부도 조금씩 하고 있다. 과거에 써 놓았던 글들을 다시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며, 그리고 내가 쓸 글들, 내가 써나갈 미래에 희망을 본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이 길을 가게 하신다. 나는 이 길을 걸어갈 용기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길을 걷게 할 용기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베푼 사랑이 오늘날의 나에게 희망을 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에 빠져 있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그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희망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12. 예수님에게로
2천여 년 전에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님. 사소한 것 하나로 시작된 예수님의 섬세함은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가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사소한 것 하나가 예수님을 찾게 만들며, 사소한 것 하나가, 새로운 인생을 살게도 한다. 사소한 어떤 것에서 비로소 시작이 되며, 사소한 어떤 것으로 비로소 마무리가 된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 사소한 것 하나를 놓치면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흐름을 파악하면서 천천히 읽을 필요가 있다. 속독으로 읽으면 내용이 별로 들어오는 것이 없다. 좀, 더디더라도 천천히 읽는 것이 좋다. 천천히 읽기에, 구약은 조금 부담스럽다. 신약성경의 예수님을 먼저 읽어나가는 것이 좋다. 적어도 나는 그랬으니. 신약성경을 읽다보니, 벌써 이렇게 많이 읽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을 읽은 적이 많다. 성경을 부분적으로 그냥, 그날그날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꼼꼼히 읽으니, 아, 이건 이런 얘기였구나, 하는 부분이 보인다. 사소한 것들을 놓치면 성경을 곡해할 수도 있구나, 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성경을 읽는 재미는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행적,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베드로의 회개,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어 쓰시는지를 볼 수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뜻깊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성경을 온전히 읽으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삶, 내가 아닌 아무것도 아니었던 삶이, 내가 있으므로 이제는 의미 있는 삶이 되어버린 지금, 나는 오늘 또 하루,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13. 나를 채우시는 예수님
사실, 내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별다른 목적은 없다. 다만, 내가 적적할 때 예수님을 얘기함으로서 내가 위로받고,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예수님은 헌신적이었으며, 눈치를 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셨다. 그 삶을 내게 적용시키니, 일하는 게 행복하고, 책 보는 게 행복하고, 공부하는 게 행복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억지로 일을 할 때는, 항상 불행하다고 느끼고, 집에 와서도, 그 불행의 여파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삶 자체를 즐기면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고, 어디에 가서든, 항상, 즐겁게 뭔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다리가 아프기도 하고, 팔이 아플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잠시 잠깐! 일 뿐. 아픔도 오래지 않아 지나가곤 한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는 방식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 우리 모두가 볼 수 있게 오신다고 하셨다. 이미 예수님은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그 사명을 다하셨기 때문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살아서는 못 만날 수도 있다.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은 불행한 종말이 아니라, 행복한 축복의 시간이다.
사람에게 기대어선 채우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사람에게 기대는 순간, 실망하는 부분이 생길 것이고, 그 실망은 나를 힘겹게 한다. 애인이든, 부부이든, 친구든,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채워주신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나는 언제나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우울해질 때, 내가 불행해질 때,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언제나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14. 나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오해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늘 친절할 것이고, 인성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인성이 뛰어나지 않으며,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유가 행복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교회에서 위안을 얻고 싶었다. 내가 친절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내가 못 났다고 탓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좋았다. 예수님을 알아가게 되면 될수록, 예수님은 못나고 어리석은 나를 철저하게 돌보신다. 사람들에게 기대고,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찾았던 때에는, 항상 뭔가가 부족했다. 그 부족함을 채우지 못했고, 결국은 불행한 삶 속으로 나를 내몰았었다.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들은 항상 친절한 사람들도 때론 있다.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이 되기까지는 아마도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친절하다. 그 친절한 예수님은 성경에 있고, 내 마음에도 있다. 때로는 예수님을 얘기하는 많은 책들에도 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알수록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지금 이 글을 보고, 너 한번 당해 봐라, 하고, 어떤 이상한 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이상한 계획에 휘말려서 당할지도 모르고, 만약 그래서 뭔가의 계획에 당한다면, 당한 뒤에는 그들을 욕하고 미워하고 저주할지도 모른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도 사랑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 나쁜 짓을 저지르는 범죄자들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 예수님의 사랑이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예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왜 범죄 하는 사람들을 벌하지 않느냐고 따질 이유는 없다. 예수님께서는 저주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주기 위해 오셨다. 그 사랑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을 믿든 믿지 않든, 내가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은 사랑하신다. 지금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과, 또 보지 않는그들도. 나는 사랑을 잘 모르는 하나의 사람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우하셨다.
15. 망가지기 쉬운 나의 마음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면, 항상 예수님을 찾게 된다. 성경을 읽게 되고, 예수님께 마음으로 질문을 한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 어떤 마음이라도 예수님은 다 받아주시기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마음의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성경을 보거나, 찬양을 듣게 된다. 마음이 평온해질 때까지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덧 내 마음의 풍랑이 잠잠해진다. 나는 망가지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예수님을 찾지 않으면, 나는 쉽게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다. 무너진 마음, 무너진 감정이 두려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암담한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은 언제나 손짓하며 내게 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웃음이 마음속에 떠오르면 나는 비로소 웃음을 다시 찾는다. 성경을 읽거나, 찬양을 듣다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그 구절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 삶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 하루 행복했으면 되었다. 내일 일은 예수님께 맡기자. 그래서 나의 불안도, 행복한 불안이 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시니까. 망가지기 쉬운 나의 마음도, 예수님이 만져주신다.
16. 나의 여린 마음도 단단히 붙잡아주시는 예수님
때로는,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안 해 놓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리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엔,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되겠지.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때. 그건, 나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놓아두는 연습을 한다. 나의 마음을 놓아두고, 나의 결정을 놓아두고, 나의 삶을 놓아두는 연습.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므로, 나머지는 기다리는 일. 하나님의 놀라운 뜻은, 내가 모른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누군가는 좋아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싫어하겠지. 내가 이 글을 계속 써나가는 건, 반드시 어딘가에는 이 글을 보고, 삶의 희망을 다시 찾는 이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역할에 대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일 뿐이고, 그 이후의 결정은 하나님의 몫. 나의 여린 마음도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 누군가의 마음도 단단하게 붙잡아 줄 것이라고,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단단하게 믿는다.
17. 예수님만이 살 길
내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러니까, 조건이 단 하나였다. 처음에 나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아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나는 착하게 사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착하게 산다 해도, 언제 어느 때 사악한 마음이 생겨날지 모른다. 그럴 때, 예수님을 떠올리면, 죄를 짓게 되는 그 순간이 몹시도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 이쯤은 괜찮겠지, 이건 아무도 안 보는 거니까 괜찮아, 하고 알게 모르게 지은 죄는 나에게도 많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그다지 없을 때에는 그것이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작은 죄를 지어도, 곧 후회를 하게 된다. 마음속에서 그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최대한 죄를 짓지 않고 살려 노력하지만, 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때, 예수님은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이끄신다. 후회하고, 곧 잘못했다, 하면, 받아주시곤 한다. 그러면서, 죄 짓는 숫자는 점점 더 줄어만 간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였던 것이다. 내가 지을 수 있는 큰 죄를 미리 막아주시는 예수님. 그렇게 함으로서 천국으로 나를 이끄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아니라면, 나는 아마 이미 수많은 유혹 속에서 흔들렸을 것이다. 쉬운 길, 편한 길만 가도록, 나를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 이 글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고, 아주 큰 불행에서 지금 허덕이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들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살면서, 나는 또 어떤 죄를 짓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순간적인 욕심일 수도 있고, 순간적인 충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예수님을 떠올린다면, 적어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예수님은 나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내가 되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살 길이다.
18. 예수님이 채워주신다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본다. 그리곤 구절들을 음미해 본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에 주목해 본다. 내가 만약에 정말로 유명해지고 정말로 돈을 많이 번다 해도, 나는 결국 죽는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기에, 나는 지금의 삶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간이 즐겁고, 그럼으로써 나의 목마름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유명해지고, 돈이 벌리길 바라기보다는 지금 나의 삶, 지금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만족을 느껴본다. 그리고 죽은 후의 삶에 천국이 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천국의 상급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 상급이 이 세상에 나눠진 부와 빈곤이라는 계급차이를 의미하는 상급은 아닐 것이다. 상급에 따라 계급이 달라지는 천국이라면, 그 세상은 이미 천국이 아닐 테니까. 누구나가 행복한 세상, 고통이 없는 세상, 기쁨과 환희만이 가득한 세상이 천국일까? 천국에도, 때로는 슬픔이 있지는 않을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천국이란 곳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천국의 꿈이 있기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나, 물론, 내 글이 널리널리 알려지길 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 감동을 하고 기쁨을 느끼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어떤 수단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그래서 함께 천국을 갈 수 있는 그런 마음상태가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하시는 사랑이 나의 글에 온전히 전해져,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내가 심란할 때, 힘들 때, 예수님을 찾는 것처럼, 삶에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길 바란다. 사람으로는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오직 예수님만이 채워준다. 예수님께는 마음껏 기대어도 된다. 예수님께 기댄다고 예수님께서는 나를 부담스러워하거나 나를 밀쳐내지 않는다. 예수님께 투덜댄다고 내게 뭐라 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그저 믿으라고만 말씀하실 뿐이다. 주 하나님을 믿으라고. 아무것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어느 저녁, 나는 예수님한테로 또 나의 마음을 탈출시킨다. 예수님은, 이미 나의 맘 알고, 나의 내일을 준비하고 계실 거다. 그걸 믿고, 오늘 나의 소박한 글을 내보낸다. 내 마음의 조그만 조각들이 조립되어, 하나의 삶을 완성시켜 나가려고 준비 중이다.
19. “도와주세요”라는 기도
누군가가 하나님은 사소한 것에는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아무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님은 사소한 일에 "간섭”이 아니라 "관여”를 하신다.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이 길을 갈 수 있게 그때그때 도와주시는 것이다. 내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을 쓰는 것, 책을 보는 것, 모두 내 스스로 알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뭔가의 이끌림에 의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다. 내가 지금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 하나님의 도움이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힘들 때도 슬플 때도 우울할 때도 외로울 때도 있다. 가끔은, 이 길이 맞나, 내가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 하는 내 마음 속의 기도는 오직 하나다. "도와주세요!”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항상 그 마음속의 "은밀한”기도를 들어주시고는 도움의 손길을 뻗치신다.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우연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행”하다고 느꼈을 때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지옥”이었다. 이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이보다 더 불행한 삶은 없다, 하고 느끼는 나날이었다. 그런데, 지금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힘든 일을 할 때조차 행복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무엇을 해도 항상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그것이 미래의 나를 위한 연단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좋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을 가다듬는 데 힘써야 하는데, 사실 글을 쓰다 보면, 자꾸만 보이기 위한 내 모습에 치중하게 됨을 느낀다. 보이기 위한 모습보다는 실제 내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또 어떤 힘든 일이 나를 기다릴지 모른다. 내 글을 보러 오는 대부분의 분들은 좋은 생각을 가지고 보시겠지만, 가끔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보시는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분들을 사랑하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은 그분들도 사랑하시며, 그분들께도 반드시 좋은 길을 열어주실 거라 믿는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하나님께 "도와주세요!”라며 기도를 한다. 나를 위한 기도이지만, 그 기도 속에는 다른 분들을 위한 기도도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을 거라 나는 믿는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마태복음 6장 33~34
예수님 바람 2부
– 절실히 구하는 마음
[절실히 구하는 마음 - (1)]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리라 - 마태복음 2장 23절
여기서의 처녀는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처녀란 말은 성관계를 하지 않고 아들을 낳는다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성관계가 죄일까요? 글쎄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아담에게서 나온 자손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자식이라 죄가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자식이 아니므로 죄가 없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이자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렇게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억울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면서도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 죄를 씻기 위하여 동물을 재물로 삼아 속죄를 하곤 했죠.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못 박히신 다음부터는 이러한 재물을 바치던 시대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씻어지는 거지요.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셨고 또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도 중요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속의 작은 죄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반복적인 죄.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죄를 짓고 나서 후회하곤 하지만, 후회보다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다시는 그 죄를 짓지 말게 하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죄를 회개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누군가를 옥죄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게 진정한 믿음의 삶이 아닐까요. 그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끊임없이 올라오는 이 일상적 욕망과 분노를 해결할 방법이 별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회개하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노력하는 자세라도 가상히 여겨주시길 바라면서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그 말씀은 이제 다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한번 이루었으니,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예수님은 딱 한번 태어나셨고 그걸로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안타까워하면서, 때로는 기뻐하시면서.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를 욕하거나 내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많이 했어도 예수님은 늘 "넌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주시고, 내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상히 여겨 주십니다. 제게 늘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요.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희망을 가질 거란 생각으로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 희망 찬 새해 맞이하십시오.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느껴보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절실히 구하는 마음 - (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오늘 있다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복음 6장 30절~33절
사업을 하다 망했거나, 앞날이 막막한 사람들에게 교회를 나와 먼저 기도를 하라고 하는 이유가 이 구절에 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지만,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먹여주시고 입혀주십니다. 나 역시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당장 눈앞이 캄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중에 가진 돈은 거의 없고, 일자리도 없을 때. 아무리 버텨도 두 달이나 살 수 있을까. 그때 저는, 그렇다면, 이젠 죽음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겠군. 하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때는 교회를 제대로 다닌 적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실컷 원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셨고, 교회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또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나의 앞길이 그리 탄탄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는 꼬박꼬박 나가지만, 다른 여타 활동을 열심히 하는 상황이 아니어서 신앙생활도 이게 맞는 건지 갈등이 큽니다. 저는 지금까지 "지식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책도 보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교회에서도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경과 교회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마음껏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교제하라”라는 말씀에는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성격 탓이기도 한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성경에 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교제”를 하는 데는 서툴지만, 하나님께 의지하고 예수님을 믿다 보면, 다른 의미로 제게 어떤 마음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교회 나오면 담배 피면 안 되잖아? 라고 말하는 분들에게는 담배를 피더라도 교회를 나와 예수님을 믿으면서 담배는 차차 끊어 가면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끊으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끊을 수 있는 게 술입니다.
나는 그래서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선, 중요한 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먹고 살 걱정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입니다. 저도 어떻게 해야 먹고 살아가야 하나 걱정은 합니다. 하지만, 저의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나의 인생을 책임져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불안하다면, 당장 먹고 살 걱정이라면, 우선 기도하기를. 주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보시기를. 주님은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것이 제가 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절실히 구하는 마음-(3)]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마태복음 7장 7절~8절
예수님을 믿지 않던 시절에는 이 구절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절을 몹시도 사모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면 반드시 주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요즘도 구할 것이 많습니다. 그렇게 많이 구했는데도 자꾸만 달라고만 하고 있으니, 참 양심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제게 늘 부족하지 않게 주셨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당장 이루어주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이루어주셨습니다. 물론, 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향이 틀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늘 다른 방식으로라도 내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돈이 부족하면, 어떤 식으로든 돈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내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혼자 살기를 소원했었을 때도, 하나님은 어떻게든 내가 혼자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글을 쓰고 싶다고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작가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합니다. 먼저 구하면 주시리라 하셨으니 그 주실 것을 믿고 나는 하나님을 전하는 데에 힘씁니다. 비록, 나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아 말로 직접 하는 전도는 하지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전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퍼줄 사랑은 있는데, 받아주는 사람이 받아먹지 못해 고민이실 뿐입니다. 저는 그 예수님의 사랑을 고스란히 받아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미 많이 받아먹었고.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절실히 구하는 마음-(4)] 정말 많이 받고 있는 중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마태복음 4장 4절
대전극동방송에 남긴 사연(2020년 5월)을 공유해봅니다.
☞ 홍해를 건널 때 진흙탕이면 못 건넜을 거라는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그 말씀에 더욱더 열심히 기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해봅니다 ☜ (신다가 유튜브 채팅장에 남겼던 글)
목사님 설교 내용 : 모세가 거느린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풍랑을 일게 하여 모세의 백성들에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단순히 풍랑만 일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풍랑을 통해 길도 마른 길이 되게 하여 건널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 길이 진흙탕이었다면 무슨 소용이었겠습니까.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어려움을 한꺼번에 해결해주시려고 기도하게 하시고 때로는 그렇게 어려운 길을 걷게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상하게 나의 미래가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실 것이란 믿음 때문입니다. 이 방송에서 당첨된 뒤로 우연인지 필연인지 선물이 계속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을, 또 내일을 살아가기로 합니다. 실직자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모두 힘내시길!
예수님 바람 3부
– 예수님 바람
예수님 바람 제 1 화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
1.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시는 예수님
아주 오래 전에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이란 분이 저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시고는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다고 자신의 모습이 형편없다고 자신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 들지 마시구요! 그냥, 믿으시면 구원은 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실 예정이시니… 제 글에 귀 좀 빌려주시면 땡큐!
사실, 고백하자면요, 저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제 모습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리고 제가 내세울 게 하나도 없어서, 그래서 저같은 사람을 예수님이 사랑해 주실까 하는 걱정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은요, 저를 사랑하시는데 아무 조건이 없다고 계속해서 제게 말씀하고 계셨었고, 지금도 제게 나를 사랑하는데 아무런 조건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습 그 자체로 사랑하신다고요.
그 사랑의 증거가 무엇이냐고요?
그 증거를 구체적으로 말하라면 말할 수가 없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는 있어요. 저의 마음이 불안해질 때마다 예수님께 뭔가 아뢰면, 예수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계획이 다 있다, 라고요. 어떤 순간에라도 믿고 따르면, 분명 너를 들어쓰시리라, 하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누군가가 저의 이 글을 보고 그래, 예수님을 믿자, 라고 결심하셨다면, 그것이 저를 들어쓰신다는 증거가 될 거 같은데요… 이 글을 보시고, 에잇, 하고 도망치려 하시는 분, 여길 봐 주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Please~~~
2. 복음과 사랑과 믿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적을 혹시 아시나요? 목적이라고 하니, 예수님이 왠지 세속적 욕망을 쫓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는데, 앞의 의미를 잘 새겨보시면, 그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저의 좁은 소견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첫 번째로 복음. 복음은 예수님 믿기를 전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이유가 뭐냐구요? 사람은 누구나 죽잖아요. 살아서 행복하고 죽어서 행복한 것이 가장 좋은데, 살아서 고통스럽다면, 죽어서는 조금 편한 삶을 살고 싶지 않겠어요? 죽은 후의 삶이 편하고 행복하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거예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은 이후의 삶이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죽어가는 과정은 조금 두려울 수도 있어요. 그건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죽어가는 과정도 편안하게 해 달라고 자꾸 예수님께 기도하고 아뢰면 죽어가는 과정도 편안해지는 어느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그러다가 죽어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딨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가 되죠.
두 번째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기 원하세요.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고 교회에서는 설교와 찬양을 통해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게 되죠. 사실은요, 고백하자면요, 저는 이런 사랑 잘 전하지 못해요. 왜냐구요? 제가요, 경제적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아직까지는 뭔가 확실하게 정해진 뭔가가 없거든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 사랑을 전하고 싶은 게 있어요.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죠. 예수님은 저를 무척 사랑하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니까요. 저요? 저는 예수님 같은 사랑은 못하죠. 제가 예수님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죠.
세 번째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산뜻해져요. 마음이 산뜻해져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막 들어요.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뭔가를요. 그리고 겸손해지려고 노력하죠.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의 이 섬기는 마음이 느껴진다면, 예수님처럼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게 되죠. 그런데요!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처럼 겸손해지기는 어려운 거 같아요.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 되지 않을까요? 저도 많이 노력하려고 애써 보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남았어요.
우리의 행복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걸요!
조금은 긴 거 같은데요.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 결국은,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아신다면, 우리의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할 뚜렷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제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죠! 전에는 예수님께서 저를 시험하시는 게 아닐까 해서 원망도 많이 해보고, 투정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요. 결국에는 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저 자신도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걸 바라고 계시니까요. 그럼, 예수님 바람 1화는 이걸로 마칠께요! 다음 시간까지, 좋은 시간 보내세요!
예수님 바람 제 2 화 나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 하나요?
1.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리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섬김을 이미 많이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니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고 그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하게 이 말이 틀렸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기도하기 전에는 관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시련에 빠질 걸 아십니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 우리가 빠지는 고난은 스스로의 선택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빠질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난에 빠진 “나”를 구해내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이전과는 다른 뭔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뭔가가 뭘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섬긴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섬김이란 뭘까요?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 많은 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진심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신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 감동을 받게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섬기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앗! 저 신통한다이어리란 사람은 사람을 진짜 섬기려 하는 걸까? 그렇다면,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사람을 섬기려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심을 느꼈다면, 누군가가 즐겁고 행복한 게 보이면 내 마음도 즐겁고 행복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더더군다나 그 사람이 아주 조금 전까지는 전혀 행복하지 않고 너무 힘들어, 죽고 싶어, 이런 사람이었다가, 이제 너무 행복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할 때, 저는 그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저 때문이라면, 저도 더없이 행복한 마음이 됩니다.
2.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것. 일부러 섬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면, 그런 마음이 저절로 들게 된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이 우리를 섬긴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오게 되는 것 아닐까요.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 고난은 꼭 해결되는 날이 올 거란 믿습니다. 저도 아직까지는 확실하게 정해진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저를 섬기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기에 저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렵니다. 그러다 보면, 저에게도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가 올 것이라 믿습니다. 그때가 오면 예수님의 섬김을 증거 할 날이 되겠지요. 그러나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그날이 오지 않더라도 저는 예수님의 섬김을 충분히 받았으므로 그러므로 저는 예수님의 섬김을 지금 이 순간 전합니다.
이 글을 보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섬긴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면,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그린다면, 그래서 이 글을 보시는 당신이 행복해지신다면, 저는 당신과 함께 행복한 지금을 살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가장 큰 행복이니,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신은 제게 너무 큰 행복을 주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 행복한 기억으로 저의 오늘을 살아가게 도와주시는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당신, 그럼 지금부터, 예수님의 섬김을 받으시겠습니까?
[예수님 바람 최종회]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오늘은 예수님 바람 최종회입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 세상에 태어나 불공평하게 살아감을 경험합니다. 남녀의 차별로 인한 불공평, 형제간의 불공평, 직원들간의 불공평. 또 사람과 사람 사이간의 불공평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몹시도 힘들어 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보다 더 대접을 받는 거 같을 때, 저는 그때 몹시도 그 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대접을 받는 사람도 대접을 하는 사람도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답은 하나입니다. 제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직장을 구할 만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 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습니다. 저도 충분히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분들을 통해서 저를 일으켜 세우시고 계십니다. 예수님만의 방법으로 예수님만의 도우심으로요. 저는 그래서 예수님께 순종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으신데 어떻게 순종을 해야 하냐고요? 순종한다는 것이 대답이 없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을 정독으로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서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부탁이냐고요? 내가 너와 함께 하겠으니,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보지 않으련? 내가 너의 어떤 고민이든지, 어떤 문제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울 터이니, 그래서 내게 기도를 하면, 어떤 어려운 문제든 길을 만들어놓고 기다릴 터이니, 나와 함께 이 길을 걷지 않으련?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함께하자고 부탁을 하십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바람을 마치며, 제 인생에 끊임없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제 인생의 변화는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도 예수님이 늘 동행하시길. 예수님이 마음으로 그분의 섬김을 받으며, 예수님께 순종하며,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하시길. 예수님 바람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고마운 마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날이 오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예수님 바람을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욥의 믿음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믿으셨으며, 그 믿음을 보고 마귀에게 욥을 시험해 보라 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높은 뜻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 믿음이 있었기에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그 믿음 뒤에 더 큰 축복을 미리 가져다두고 미리 가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이 있었기에 사탄에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다는 걸 깨닫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사탄이 욥의 믿음을 보고 뭘 깨달았을까요? 저렇게까지 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탄마귀가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사탄마귀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사탄이고 마귀입니다. 우리가 환난에 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어온 세월에서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는 이 고난을 이겨내야 앞으로의 더 큰 고난을 견뎌낼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이 환난에 빠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십니다. 우리가 환난에 빠지는 경우는 다양합니다. 사탄마귀가 우리를 시험해 볼 때, 우리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을 때,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희망이 없을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쉽게 포기했을 때 등등등 우리가 고난에 빠지는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그 모든 고난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저는 아직도 고난에 처해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많은 고난이 저의 앞길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고난의 끝길에는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주셨듯 앞으로도 저도 지켜줄 것이라 믿고 이 글을 써 나갑니다. 또한 앞으로 더더욱 성경깊이읽기를 더 많이 함으로서 그리고 또한 꼬박꼬박 주일예배를 참석함으로서 가능하면 새벽예배도 온라인으로 드리면서 이 고난을 이겨내려 합니다. 욥의 고난의 끝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큰 축복이 있었던 것처럼 이 고난의 끝에는 더 큰 축복이 있을 것임을 믿고 나아가려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저의 소망은 이렇게 커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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