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 운전사』를 보고
김견남
과거는 도망칠 수도 있지만 배울 수도 있다는 라이언킹의 대사처럼 어려움이 닥쳤을 때 피할 수도 있지만 극복하므로 얻어지는 것은 더 큰 보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중동 건설 현장에서 돈을 제법 벌어 한국에 돌아올 때만 해도 이제 사람답게 살게 될 거라는 희망을 가졌어. 그런데 아내가 병에 걸려 치료를 하느라 벌어 온 돈을 다 말아먹고도 못 고쳤어. 그래도 마지막 남은 돈까지 치료비로 쓰려고 했는데 아내가 말렸어 그 돈으로 치료하지 말고 택시를 사서 딸내미를 잘 키워 달라고......
어차피 죽을 병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는 그 돈으로 택시를 샀고 아내는 죽었어.
캄캄한 밤 광주의 어느 허름한 집 마당의 평상에 누워 독백처럼 자기 인생에 대해 말하고 죽은 아내도 못 지켰는데 어린 딸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다짐하던 택시운전사는 그 새벽 서울을 향해 딸을 향해 줄달음질 쳤다.
밀린 방세 십만 원을 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장거리 예약을 가로채 광주를 향했던 택시 운전사는 오늘날 한나라의 역사를 새로 기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1살 어린 딸과 둘이 월세방에 사는 그는 늦은 시간 집에 와 보니 딸 이마에 혹이 나 있는 걸 본다. 또래인 주인집 아들이랑 싸우다 맞았다고 생각하고 오밤중에 주인집으로 따지러 갔는데 쥔 아줌마를 따라 나온 아들은 딸 이마에 난 혹 보다 더 큰 혹을 이마에 달고 나온다. 주인집 아들보다 택시 운전사 딸이 더 싸납고 야무져서 주인집 아들을 더 때리는 거 같다.
따지러 갔다가 밀린 방세 십만 원을 달라고 호통치는 소리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냥 돌아와서 딸에게 나중에 이 집을 사버리고 말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주인집 남자는 택시 운전사의 절친이기도 하다.
기사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다가 택시 운전사가 주인집 남자인 친구에게 밀린 방세를 내게 십만 원만 꿔달라고 말하고, 살다 살다 밀린 방세 낸다고 집주인한테 돈 꿔달라는 사람 첨 본다고 하며 둘은 웃는다. 그때 다른 택시 기사 한 명이 밥 먹으러 들어와서 자기들 일행한테 자랑한다.
빨리 밥 먹고 00극장 앞에 가서 손님 태우고 광주 간다고, 오늘 갔다가 통금시간 안에 다시 서울 오면 십만 원 준다 했다고.......
그 말을 엿들은 택시 운전사는 얼른 택시를 몰고 극장 앞으로 가서 그 손님(기자)을 가로채 태우고 광주로 출발한다.
한 번에 택시비 십만 원 벌을 생각에 기분이 째지게 좋은데 거기다 80년대 최고로 유행했던 조용필의 단발머리 노래까지 신나게 울려 퍼지니 기분은 짱~짱~짱~이다.
그렇게 간 광주에서 1980년 5. 18 광주의 처참한 광경, 험악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광주를 빠져나가는 모든 통로는 차단되고 외국인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들어온 서울 택시 기사인 자신이 빨갱이가 되어 있다는 것과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80년대 광주의 실상을 고발한 영화.
그때면 내가 중 3 때의 일이다. 광주는 군의 총부리 앞에서 피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광주 밖의 사람들은 평화롭기만 했다.
악의가 있는 곳에 반드시 정의가 있다는 것을 가슴 깊숙이 알게 해주는 대목.
수배 차량인 걸 알면서도 택시를 검문한 군인은 택시가 통제구역에서 빠져나가게 해주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택시기사에게 서울 택시가 수배령 내려서 광주를 빠져나가기 힘들다면서 전남 번호를 붙이고 비상 길로 나가는 길도 알려주는 광주 택시 기사.
광주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카메라 필름을 들고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온 외국인 기자 피터는 전 세계로 광주의 상황을 낱낱이 보도한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민주화 보도 기자상을 타고 그때 광주로 데려다준 택시 기사를 애타게 찾다가 끝내 세상을 떠난다.
절대 사실이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국가의 만행. 광주민의 참상 그래서 광주에는 지금의 50대들이 거의 죽고 없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면 관이 없어서 시체를 못 넣었다고 하는가.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자기 이익을 위한 약탈행위가 없었다는 건 정말로 순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학생운동으로 시작해서 친구가 다치고 가족이 죽는 것을 보고는 친구들이 가족들이 거리로 나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우리도 남들이 다치고 죽었을 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 문을 더 꽁꽁 걸어 잠그지만 내 새끼 내 친구가 잘못되면 발 벗고 달려나가게 될 것 같다.
그때부터는 목숨이란 게 아깝지 않고, 자식을 찾아야 하고 자식을 죽인 놈을 죽이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 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 전 시민들을 동참시킨 것 결과가 아닐까.
난 영화 보는 내내 가슴 졸였다 택시 기사가 잡히거나 죽게 될까 봐. 기자가 필름을 뺏기게 될까 봐 무사히 탈출해서 영화까지 나왔다는 걸 알면서도 맘이 안 놓였다.
어디에서나 정의로운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택시 기사도 그렇고 검문소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숨겨진 서울번호판을 보고도 못 본체하며 통과시켜준 군인도 그렇고......
몇 년 전에 광주 시내를 지나게 됐는데 나는 광주는 다른 도시보다 조금 황량할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본 광주도 내 생각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리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나뭇잎도 나뭇가지도 내가 본 광주 거리도 참 쓸쓸해 보였다.
광주 참상을 세계에 알린 그 피터 기자는 죽어서 광주에 뼈를 묻고 싶다고 했고 2016년 그의 아내가 죽은 피터의 손톱이랑 머리카락을 5.18 망월동 묘역에 안치했다고 한다.
-2018년 어느 날-
첫댓글 난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졸였다 .......... 저도 그랬어요
오래전에 쓴 건데 새로 읽으니 여기저기 손을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때 감정이랑 지금 감정이랑 조금 다른 느낌도 있구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