넝쿨째 굴러온 당신
결과론적 관점의 위험성
테리 강은 의사이다. 그는 미국의 그 유명한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의대를 마치고 한국으로 넘어 와 현재 이름 있는 병원에서 근무 중이다. 최근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고 한창 신혼을 즐기고 있다. 소위 ‘잘 나간다.’ 외모도 빠지지 않고 성격도 다정다감한 데다 겸손하기까지 하니 학창시절에도 여학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고 지금도 동료들과의 유대관계가 나쁘지 않다. 부러울 것이 없다. 저런 남자라면 남편감으로, 사윗감으로 손색이 없다. 아니, 훌륭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집 장모는 사위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한다. 그 정도면 우월감을 가질 만하다고 인정한다. 조금 배가 아프기는 해도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테리 강은 ‘방귀남’이었다. 이름에서도 충분히 유추되듯이 방씨 집안의 귀하디귀한 아들이다. 딸만 줄줄이 있는 집의 장남에, 더우기 외아들이기까지 한 것이다. 어째서 테리 강이 방귀남일까. 사연은 이러하다. 어린 귀남이, 아마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길을 잃었다. 그래서 이 방씨 집안은 귀하디귀한 아들을 잃고야 말았다. 꼭 아들이 아니더라도 자식을 잃은 가정이 얼마나 처절한 고통 속에 살지는 이미 미루어 짐작이 되는 바이고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귀남도 어린 아이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을지는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찾고자 애썼으나 찾지 못했고 충격으로 실어증을 겪던 어린 귀남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입양이 된다. 그리고 테리 강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꿀릴 것 없이 ‘잘 나가는 남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드라마는 느닷없이 생긴 시집 식구들과 좌충우돌하는 며느리 윤희의 ‘시월드’를 보여준다. 제 핏줄이기는 하나 여전히 가족이 낯선 귀남과 더불어 며느리 윤희가 그 시월드 속에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재미나게 풀어낸 가족드라마이다. 그러나 유독 이 집안에서 겉도는 인물이 있다. 귀남의 작은아버지네이다. 알고 보니 작은어머니의 실수로 귀남이 길을 잃었고 그 실수를 덮으며 살아온 작은어머니의 속죄의 이야기도 드라마에 담겨 있다. 실상 작은어머니의 실수란 것도 남편 되는 작은아버지의 지독한 무관심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는 했다. 작은아버지는 가족보다는 성공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그러하니 당연히 회사의 중역으로서 자신의 입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언제나 가족은 뒷전이었고 늘 바빴고 부부는 말 그대로 쇼윈도부부였다. 아내의 실수에 일말의 책임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저 남의 시선이 불편해 비밀을 묻으라 한다. 하지만 모든 드라마가 그러하듯 갈등은 결국 드러나고 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결국 비밀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가차 없이 아내의 아픔을 폭로해버린다. 그럼으로써 가족의 행복을 지키려 비밀을 묻고 있던 다른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만다. 그리고 외친다. 귀남이 입양되어 잘못된 게 무에 있느냐고. 형님이 키웠으면 이만큼 키웠겠느냐고.
이 소리를 내지르고 아마도 형님, 그러니까 귀남의 아버지로부터 뺨 싸대기를 얻어맞았던 것 같다. 분명 잘못된 말이다. 귀남이 현재 잘 되었으니 과거의 실종이 썩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은. 그런데 이상하게 논리가 딱 잘못된 것 같지도 않아서 고개가 갸웃해진다. 테리 강은 정말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이고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기는 했으니까. 미국에서 살았으니 가능했던 것도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니까. 방씨 집안에서 방씨네 장남으로, 귀하디귀한 장손으로 계속 컸다면 지금처럼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남성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에 사실 그 가능성이 미지수이긴 하다고, 내심 그의 말에 동의가 되니까. 그러니 실수로 아이를 잃은 것이 썩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오히려 그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이지 않느냐는 귀남을 향한 작은아버지의 일갈. 어쩐지 말이 되는 것도 같아, 답답하다.
다시 보면서도 작은아버지의 이 발언은 계속 뇌리에 남아 의문을 남긴다. 그런가. 아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결과가 비록 꽤 괜찮은 것이라 해도, 그건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싶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그래서 곰곰 생각했다.
결과로부터 과거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이 오류이다. 작은어머니가 실수였든 뭐였든, 귀남을 버스에 두고 내린 그 시점에서 볼 때, 귀남이 인종이 다른 서양부모가 아니라 한국부모를 만나 입양이 되어 그 양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실어증을 고치고 원만하게, 잘 성장할 수 있었다는 그 일련의 과정은 그 당시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다. 즉, 귀남이 길을 잃은 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귀남이 좋은 양부모를 만났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귀남의 그 모든 삶의 여정이,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인 것이다. 당시에 지금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귀남의 부모도 일생을 그렇게 애 태우며 살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즉 한치 앞도 모른 채 살아간다. 실상 현재만 산다. 그러니 그 당시 귀남이 잘 되리라는 단정은 그 누구라도 하기 어렵다. 부모의 품을 벗어나는 바람에 그나마 예측 가능한 미래는 매몰된 채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를,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귀남을 놓이게 한 것을, 잘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안일한 미지의 가능성을 보고 합리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정재가 했던 유명한 대사가 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독립할 것을 알았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략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말을 듣고도 나는 혼란스러웠다. 아,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러면. 다른 독립투사들은 왜 끝까지 싸우는 쪽을 택했나. 그들은 독립할 것을 알았나. 일본이 종국에 패망하게 될 것을 알았나. 아니다, 그들도 모르기는 매한가지다.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독립하지 못하리라는 짐작이 오히려 더 타당하다. 당시 나라의 미래는 상당히 암울했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미래를 알고 선택을 한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미래는 와 봐야 안다. 모른 채로 선택을 하고 그렇게 했던 선택으로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정재의 ‘몰라서 그랬다’라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듯 미래가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면, 아무렴 안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하겠지. 중요한 것은 모르는 와중에 선택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관, 도덕, 진리, 삶의 철학 따위가 거론되는 것일 테다. 혹은 개인의 성향도.
다시 돌아와서 정말이지, 귀남이 지금의 멋진 남자로 성장한 것은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쁜 양부모를 만나 지독하게 학대받고 그래서 아주 형편없는 인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발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종이 지금의 테리 강이 되는 데 필요조건인 것처럼 미화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한 한국에서 계속 살아서 현재의 테리 강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테리 강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사람이 되든 뭐 어떠한가. 자신의 가치관으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그런대로 가족과 어우러져 살아가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삶인 것을.
미래의 결과의 양상이 현재 하는 선택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 어찌 현재 선택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더구나 인간은 더러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길을 뚜벅뚜벅 가기도 한다. 그럼, 결과가 나쁘니 그 선택은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결과는 그저 하늘에 맡기고 지금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므로 작은아버지의 말은 잘못되었다. 잘못한 일은 결과와 별개로 잘못한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