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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우리 사역표어를 정하는 일이 올해는 조금 부담이 됐습니다. 보통은 11월 말이나 12월 초쯤 되면 윤곽이 다 그려지고 그래서 조금 더 고민하고 이렇게 기도하면서 정해집니다.
근데 원래는 생각보다 되게 어려웠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이렇게 확신이 없었다는 거죠. 과연 이걸 하는 게 맞을까 또 안 하는 게 더 지혜로운 일일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렵고 불편하고 그리고 이미 실패한 것이기도 하고, 근데 당장에 우리가 해야 될 자잘한 기도 제목들은 좀 그거를 표를 정해서 하려고 하니까 또 생각이 잘 나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하고 또 주변에 있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죠.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이렇게 해서 2024년도 표어를 정했습니다.
‘2024년 기도로 돌파하라’
아마 기도 학교 중에 들었던 내용이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많이 들어서 식상한 구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정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이렇게 드린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뭘까?’라는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봐야 보면 꼭 일어나야 할 일이긴 해요. 우리 교회 형편을 살펴도 기도의 돌파가 꼭 일어나야 하고, 여러분의 삶의 형편을 살펴도 꼭 기도의 돌파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는 돌파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로 상황과 문제를 돌파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기도하는 것과 그리고 실제로 기도로 말미암아 돌파가 일어나는 것은 완전히 달라요.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하지만 이 기도가 내 삶의 문제를 돌파해 나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한 기도의 현실에 대한 자각이 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는 기도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그래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도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인 거예요. 기도의 자리에 있는데 기도는 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돌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죠. 무릎을 꿇고 기도는 하지만 내 안에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해소되는 경험은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냥 기도하는 거죠. 30분 동안 기도회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있어도 30분 동안 기도하지는 못합니다. 1시간 동안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있어도 1시간 동안 기도하지 못합니다. 의외로 성도들 중에 기도를 못하는 사람이 되게 많아요. 되게 아이러니하죠. 그러니까 기도의 자리에 있는데 기도는 못해요. 기도를 오래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정작 기도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못하는데 영적인 돌파가 일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도를 못하니까 영적인 돌파가 안 일어나고 우리 앞에는 돌파돼야 될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차곡차곡 계속해서 쌓이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기쁘려고 행복하려고 믿었잖아요. 예수 믿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믿었잖아요.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내 인생의 어려움이 해결될 것 같아서 믿었잖아요. 아니 세상에도 좀 엉망으로 살아도 그래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와 함께하셔서 나를 도우실 것 같은 기대감으로 예수를 믿는 거잖아요.
우리 중에 정말 구원에 감사해서 내 모든 걸 하나님께 드려야지 내 모든 걸 하나님께 올려드려야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믿는 사람이 몇이 될까요? 그럴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믿음이지만 아마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뭔가에 대한 기대감, 소원 마음의 아쉬움들을 가지고 분명히 신앙생활을 할 거예요.
근데 문제는 그런 일들이 잘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 오히려 가정에 문제가 더 많이 쌓여 있어요.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 교회는 오히려 문제가 더 쌓여져 있고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 내 삶에는 어려움들이 오히려 더 많이 자리 잡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기도를 못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기도를 못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하고 살아요. 왜요? 기도 자리에 있으니까 여러분 기도의 자리에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제가 일찍 내려오면 3시 좀 넘으면 내려올 때도 있어요. 교회 주변을 청소하고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어요. 그런데 분명히 기도의 자리는 한 3시간 정도 앉아 있는데 30분을 못할 경우가 허다해요. 물론 집에 있는 것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겠죠. 집에서 잠자는 것보다 그 자리에 앉아서 생각도 하고 고민도 하고 또 성경도 읽고 때로는 독서도 하는 것이 훨씬 낫긴 하겠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가 기도의 자리에 있는 중요한 문제는 기도로 내 삶에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돌파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잘 안 일어나요. 기도는 성과보고자 성도들 중에 기도를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20년 30년 예수를 믿었는데도 기도를 못한 이들이 많아요. 계속 말씀드리지만 기도의 자리에 온다고 기도하는 건 아닐 수 있어요. 마음으로 기도해야지라는 거하고 실제 기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어요. 입술로 잠깐 한두 가지 기도 제목을 외치는 것과 긴 시간 동안 기도의 자리에서 내 간절함과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짖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거예요.
우리는 오늘 말씀 중에 이거 좀 귀에 새겨야 돼요. 기도를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기도해 온 사람처럼 보이지만 나는 어쩌면 기도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오늘 말씀을 들어 그래야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깊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해야 하고 또한 기도는 돌파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교회 앞에 돌파해야 되는 문제들이 가득 쌓이게 되고요. 기도 하지 못하는 성도들 앞에 돌파해야 될 문제들이 가득 쌓이게 됩니다.
교회는 문제가 있는 공동체예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도 이 문제를 다 떨쳐버릴 수 없어서 교회는 분명 문제 있는 공동체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도라는 도구를 주셨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큰 목소리를 읽습니다. 시작.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기도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과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많은 성도들이 항상 기도해야지라는 마음은 먹어요. 그러나 기도를 하지는 못해요.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은 거죠.
마음은 먹고 작정은 하지만 정작 기도하지는 못해요. 문제는 기도하지 못할 때 문제가 쌓이지 문제가 해결되거나 문제가 돌파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가 많은 것은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명하셨지만 기도라는 도구를 주셨지만 기도를 하지 않는 거예요. 기도를 하지 않는 거는 기도를 못하기 때문인 거죠. 기도를 안 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적해 있는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하지 못하는 것이 점점 늘어나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원래 교회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교회예요. 교회 역사를 이렇게 훑어보면 특히 한국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엄청난 일을 했어요. 시대적인 많은 대안들이 교회로부터 나왔어요. 한국의 한국 대한민국은 기독교를 근본으로 출발된 나라인 거예요. 그때 그 시대를 다스렸던 사람들이 다 크리찬들이고 그들이 다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이에요. 그들로부터 이 민족을 구원할 대안이 나왔고, 그들이 대통령이 되고 그들이 장관이 되고 그들이 정치인이 돼서 어렵고 힘든 이 나라를 그때 그 혼돈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거예요. 그 당시 성도들에겐 대안이 있었고 교회도 대안이 있었고 대안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많지만 확실한 것은 옛날보다는 훨씬 더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이 왜 많아졌을까요? 옛날엔 다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옛날에 대안을 마련하고 그 대안으로 민족도 구원할 수 있었는데 대안으로 주일 성서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는데 교회가 왜 지금은 그렇게 못할까요? 바로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어느 순간 한국교회가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산기도하는 분 몇 명 될까요? 별로 없어요. 별로 없어요. 금식 기도도 이젠 못해요. 40일 금식 기도는 더 못해요. 아예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새벽 기도도 못하고요. 밤기도도 못하고요. 철야도 못해요. 기도를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내면을 들어보며 들여다보면 기도를 못할 거예요.
기도를 못하게 되면서부터 기도를 안 하게 된 거죠. 안 하게 되니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요. 성도들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지고 교회가 세상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못하면서 기도를 안 하게 되면서 교회는 점점 문제가 쌓여지게 된 것입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교회에도 문제가 엄청 많았어요. 지금보다 더 많았어요. 근데 그때는 교회가 잘 굴러갔어요. 돌아보니까 이 기도가 기도가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했던 거예요. 기도가 갈등을 가라앉히고 기도가 교회의 문제들을 잠재웠던 거예요.
근데 기도를 못하게 되면서 기도를 안 하게 되면서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따지고 보면 심한 문제도 아닌데 작은 문제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하고 어려워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일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기도하는 교회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기도가 그것을 돌파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도 소리가 점점 줄어듭니다. 기도를 안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느 순간 기도를 못하게 된 거예요. 명확하게 말하면 지금은 기도를 안 하는 것보다 기도를 못한다고 하는 표현이 맞습니다. 기도를 안 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기도를 못하게 된 거예요.
여러분 운동을 안 하면 운동 선수들은 어느 순간 운동을 못하게 돼요. 피아노를 치던 사람이 연습을 안 하면 어느 순간 피아노를 못 치게 돼요. 그냥 편한 곡들 누구나 칠 수 있는 곡은 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곡은 못 쳐요. 왜요? 피아노를 안 치면서 못 치게 된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운동을 안 하면서 운동을 못하게 된 거예요. 레전드들이 요즘은 tv에 많이 등장해서 아마추어들과 이렇게 경기하는 모습이 보여요. 근데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정도 차이밖에 안 날까 레전드인데 저도 정도 차이밖에 안 날까 왜 그럴까요? 운동을 안 한 거죠. 옛날에 운동을 잘하는 사람 MVP를 받은 사람이지만 운동을 안 하면서 어느 순간 못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원래는 그들을 대파해야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점수로 이겨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를 못하면서 교회는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게 되면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떨 때는 교회가 세상보다 더 못해요? 예전에는 세상이 하는 일에 교회가 동참하고 그를 함께하는 일이 되게 많았어요.
지금은 하는 교회가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안 하기보다는 못하는 거예요. 기도가 없어지면서 어느 순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왜 여러분과 우리의 기도들을 비난하는지 아십니까? 왜 그렇게 크게 기도하느냐 왜 울부짖으며 기도하느냐 왜 금식을 하며 기도하느냐 왜 그렇게 그렇게 비이성적으로 기도하느냐고, 왜 세상이 우리를 힐난하는지 아십니까? 기도만 죽으면 기도만 못하게 하면 기독교의 생명력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우리의 기도를 비난하는 거예요. 세상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기도해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세상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절대 포기하면 안 되는 것도 있어요. 그걸 못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생명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 사단의 목표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기도를 폄하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기도의 방법이에요. 그러 통성 기도든 금식 기도든 이 모든 기도는 성경에 다 등장하고 있는 기도예요. 없는 기도를 누군가 만들어내서 하는 기도가 아니에요. 성경에 다 기록됐고 우리 선조들도 다 하던 기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기도를 못하게 된 거예요. 안 하면서부터 기도를 못하게 되자 교회도 성도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가 교회 연말이 되면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게 많아요. 아직까지 원래는 별로 들려오지 않는데 못한다 못한다 못한다. 물론 나이가 들고 체력이 약해져서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기도가 줄어들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분명히 그런 관점에서 나는 과연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잘 살펴야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강력했던 것은 기도할 줄 알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감란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정말 제자들만 남게 되었어요. 그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든 자신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던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이제 그들은 그들 앞에 있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남겨진 제자 공동체는 가롯유다의 자리가 비었어요. 제자조차도 12명이 다 아니라 빈 자리가 있었고요. 그리고 감람산에서 마가 다락방으로 온 사람들도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아요. 한 120명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엄청난 사람이 따랐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니까 이제 120명 정도만 모여서 기도하게 됐어요.
여러분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에요. 절대로 따르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던 예수님이 승천하셨어요. 제자들이 다 있어도 불안할 텐데 한 명은 없어요. 수천 명 수만 명이 따라다녔는데 이젠 다 흩어지고 120명만 남았어요. 얼마나 마음이 불안하고 위축되었을까요?
그런데 다행인 것은 남겨진 제자 공동체가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였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승천 이후 이들이 가장 먼저 아는 것은 모여서 기도한 거예요. 기도할 줄 아는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도 똑같은 모습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시작.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1장 오늘 본문이죠. 1장 14절에서 ‘오로지 힘쓰더라’라는 이 단어와 2장 42절에서 전혀 힘쓰더라라는 단어는 같은 헬라인 거예요. 그러니까 남겨진 제자 공동체는 그러니까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였어요. 이게 남겨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거예요. 기도할 수 있는 공동체였다는 것. 남겨진 제자 공동체는 기도할 수 있었고 특별히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고 온전히 기도만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빈 공백을 메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다 메운 건 아니지만 예수님이 없는 예수님이 안 계신 많은 자리는 이들의 기도가 메울 수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가 아주 강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기도할 줄 아는 공동체, 특별히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거예요.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기도에 몰두하는 이 단어를 다른 면을 살펴보면 집착이라는 의미도 있어요. 기도에 집착하는 그러니까 미친 듯이 집착하는 공동체가 제자 공동체였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라지고 나니까 이 사람들은 5절이 기도에만 매달린 거예요. 집착하듯이 매달려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빈 공간을 그들의 기도로 메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고, 문화 명령도 또 지상 명령도 다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를 못한다는 건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영적인 근육이 마비되었다는 의미예요. 영적인 근육이 교회가 기도를 하지 않게 되자 영적인 근육이 마비되고 영적인 근육이 마비되자 기도를 못하게 된 거예요.
영적 근육이 마비되면 영적인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굳은 근육은 한 번 강력하게 풀어줘야 돼요. 우리가 태권도나 이렇게 운동할 때 요즘은 그런 방법을 안 쓸 거예요. 예전에 예전에는 한 번쯤은 이 딱딱한 근육을 이렇게 끊어주는 그런 훈련을 해요. 그래서 한 번 이렇게 끊고 나면 막 며칠을 이렇게 다리를 절며 다녀야 돼요. 그렇게 해야 이 근육이 완전히 풀려서 다리가 잘 찢어지고 운동을 잘할 수 있다고 어쨌든 그때는 믿었어요. 그래서 근육을 꼭 한 번씩 찢는 그 훈련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이 굳은 근육이 한 번 풀려져야만 우리가 마음껏 운동할 수 있어요.
영적인 근육도 마찬가지예요. 언제 한번 이 영적인 근육이 한 번 풀려져야 돼요. 강력한 힘을 받아서 한번 두둑하고 풀려져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영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게 되고 영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굳은 근육을 강제적으로 한 번은 이완시켜주고 풀어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고 그리고 더 나은 모습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비된 영적인 근육도 강제적으로 풀어줘야 돼요.
‘여러분 기도를 합시다’라고 사람들이 기도를 할까요? 안 해요. 기도하게 만들어야 되는 거죠. ‘기도합시다’라고 권면한다고 해서 기도할까요? 안 해요. 강제적으로 한 번 주면 마비된 성도들의 영적인 근육이 풀려야 돼요. 그래야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나이가 들면 우리의 근육이 자꾸 굳잖아요. 굳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자꾸 못하게 돼요. 마찬가지예요. 영적인 근육도 굳어지면 못한 일이 점점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자꾸 못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근육이 굳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으려면 기도하지 못하는 상황을 기도를 못하게 하는 저항을 한 번쯤은 반드시 돌파해야 됩니다. 돌파하고 나면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항을 이기고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을 한 번은 이겨내야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우린 본성적으로 기도를 실현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어요.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졸았어요.
여러분 우리의 육신, 우리의 본성은 기도를 하기 싫어해요. 그래서 본성에 맡겨서는 육신에 맡겨서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싫어하는 것은 노력도 하기 어려워요. 여러분 싫어하는 수학 공부 되던가요? 잘 안 돼요. 싫어하는 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건 강제로 돌파해야 되는 거예요. 정말 죽으라고 수학 문제를 막 첫 문제를 풀어버려는지 이런 강압적인 돌파가 없으면 정말 수학을 잘하기는 어려운 거예요.
이건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육체는 기도를 싫어해요. 우리의 마음도 기도를 싫어해요. 싫어하는 거 잘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한 번쯤은 강제적으로 그 일을 하는 시간이 있어야 돼요. 힘들지만 강제적으로 이겨내는 시간이 있어야 돼요. 졸음을 참고 직장생활을 힘을 이겨내가면서 하는 기도의 순간이 있어야 이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보면 돌파해야 되는 이겨야 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율적으로 맡겨지는 기도는 불가능해요. 여러분에게 우리가 자율적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했을 때 과연 몇 명이 기도할까요? 그래도 이 명단에 이름을 붙이고 교회 앞에 명단을 붙이고 기도의 시간을 붙이고 계속 광고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전화로 권면을 하면 니가 좀 하는 게 우리의 실상이잖아요. 그만큼 기도는 자율적으로 될 수 없는 영역이에요. 그래서 때로는 강압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 강압 되게 싫어하죠.
여러분 세상에도 강압적으로 사는데 교회 와서 강압적으로 하면 더 싫어요. 근데 기도의 문제만은 달라요. 정말 기도할 수 있게 되려면 한 번쯤은 이 저항을 뚫고 돌파하는 시간이 있어야 돼요. 내 본성의 저항을 뚫고, 내 습관의 저항을 뚫고, 내 삶의 저항을 뚫고, 저 시간의 저항을 뚫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돼 그래야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에 맡긴다. 양심에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없어요. 여러분의 습관에 맡길까요? 기도의 습관은 더 어려워요. 저희 학교 총장이자 교수였던 그리고 신학자였던 박윤선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기도 죽기 살기로 기도하라’ 이런 책을 썼어요. 기도하는 분들은 기도 제목도 무시무시한 걸 막 적더라고요. 기도 죽기 살기로 기도하라. 이분의 추천서에 보면 제자들이 기록한 이 목사님의 마지막 모습이 기록되어 있어요.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이 목사님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주일 동안 이 목사님이 하신 일이 뭘까요? 오직 기도만 했다는 거예요. 한 주간 동안 매일 회개의 기도를 하고 매일 증거의 기도를 하고, 저는 이분이 가까이서 모셔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요. 그렇지만 이분이 마지막 남은 그 시간, 자기 생에 가장 가까운 시간을 기도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분은 최소한 어떤 분일까요? 기도할 수 있는 분이었다는 거죠.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시간을 기도하는 데 맞췄어요. 그중에 많은 기도는 회개의 기도였다고 합니다. 정말 천국 갈 준비가 된 분 아닐까요? 회개의 기도 가장 많이 한 건 회개의 기도래요? 기도는 기독교회 오래된 전통입니다.
우리는 보통 오래된 것을 낡은 것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 오래된 것은 근본이자 그리고 기본이 오래 된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한 것이 기도라는 거예요. 기도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기도가 성도를 성도 되게 하고, 기도가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할수록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성도는 성도다워진다는 겁니다. 기도 자체는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이 없어요.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를 못하거나 기도를 잘못해서 문제인 것이지 기도라는 이 도구는 기독교의 전통이고 기독교의 근본이죠. 기독교의 핵심이에요. 한번 따라하겠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할렐루야.
기도는 언제나 진리예요. 힘들 때도 진리이고 어려울 때도 진리이고 고통스러울 때 진리이고, 삶이 즐거울 때도 진리이고 기도는 항상 진리예요.
진리라는 것은 언제든 추구해야 되는 거라는 거예요.
진리라는 것은 언제든 바라고 소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진리라는 것은 언제든 내가 기뻐해야 되는 거라는 의미예요.
기도가 그런 거라는 겁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들도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목회자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면서 수많은 영적인 진영들을 돌파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를 통해서 예수가 없는 이 암울한 상황을 영적인 암흑기를 돌파해내고 이겨냈어요.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를 저항하고 방해하는 것들을 우리가 이겨내야 된다는 거예요. 돌파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인생이든 교회든 기도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과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이예요. 교회를 열심히 봉사하는 것과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이예요. 봉사하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열심히 교회를 숨겨도 정말 중요해요. 가치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것과 이 땀과 기도가 함께 해야 힘이 되고 역사가 되고 능력이 되는 거죠. 그래서 기도하라. 기도를 돌파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어집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도가 못하게 됐잖아요. 그러면서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자꾸 사라져요. 저희 세대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어요. 강단에 다 말하기 어렵지만 기도하다가 받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들이 있어요. 그 경험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라서 기도의 자리로 저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저를 때로는 자책하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를 혼나게 스스로 저를 채찍질하게 하기도 합니다.
근데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교회가 기도를 하지 않게 되면서 기도를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경험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우리의 자녀들이 목장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경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경험했을까요?
100% 안 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건 옛날보다는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경험이 사라진 세대, 우리가 우리 다음 세대에 해야 일이 뭘까요? 더 좋은 건물을, 더 좋은 시스템을 물려주는 것. 이보다 천 배 만 배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녀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물려주는 거예요. 엄마, 아버지가 기도해야 기성 세대인 우리가 기도해야 기도할 줄을 알아야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경험들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거예요.
그들은 그 경험한 하나님을 평생 떠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이 20대 30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신실한 일꾼들로 남아서 교회를 섬기게 돼요. 지금 그래도 열심히 충성하는 30대, 40대, 50대를 보세요. 유년 시절 하나님을 경험했어요. 학창시절 하나님을 경험했어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고 울며 회개하는 것을 늘 봤던 아이들이에요. 그 아이들이 우리잖아요. 그래서 지금 우리 세대가 교회를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근데 기도하지 못하면 기도를 안 하게 되면 이 경험이 사라지면 교회를 지킬 든든한 다음 세대가 교회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많은 성도들이 충성스러운 종이 됩니다. 기도를 못하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어졌습니다. 기도의 경험이 없어졌습니다. 기도가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했었는지, 기도가 교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기도가 나를 어떤 사람 되게 했는지 이 거룩한 영적인 경험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희망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저도 기도하는 게 힘들어요. 제가 성도들에게 계속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여러분보다는 저를 향한 채찍질이에요. 그래서 새벽에 좀 더 일찍 일어나려고 저를 향한 채찍질이에요.
기도하는 건 힘들어 여러분 치우면 다 했을걸요. 근데 그래도 제가 기도의 자리에 있는 건 기도 안 하면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기도를 뺀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기도를 제외한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 앉고 제가 내년 2024년도를 기도하자고 구호로 잡은 것도 똑같은 이유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해줘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멋진 기억으로 세상을 살고, 하나님에 대한 멋진 기억을 가지고 가장으로 어머니로 남편으로 아내로 살게 해야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멋진 기억으로 집사로 또 권사로, 장로로 목회자로 이 땅에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죠. 기도해야 할 때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않고 기도를 하지 못하면 영적인 기억력이 여러분 이 영적인 기억이 거룩한 멋진 영적인 기억들이 우리에게 자꾸 사라지고 있어요.
교회가 교회다울려면 다시 기도할 수 있게 돼야 하고, 이 거룩한 경험들을 우리가 하게 해야 됩니다. 기도가 그걸 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 굳어진 여러분의 영적인 근육을 2024년도에 한번 푸십시오. 여러분의 이성에 맡기지 마시고 여러분의 습관에 맡기지 마시고 강제로 작정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굳어진 근육이 풀리고 기도할 수 있게 되면서 여러분의 삶도 저의 삶도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는 목장교회 여성분들도 기도, 남성분들이 기도의 자리에 왔으면 좋겠어요. 새벽에 정말 안 빠지고 오시는 남자분들이 한 서너 분 이렇게 계셔요. 솔직히 얼마나 제가 행복한지 몰라요. 한 번 표현해 본 적은 없어요. ‘집사님이 기도해줘서 내가 행복합니다.’라고 표현이 없지만 그냥 하루 딱 그분들이 안 나오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허전한지 몰라요. 이유가 있어요. 몸이 아파서 일이 갑자기 많아서 출장을 가서 이렇게 못 나오는 거 이유도 다 알아요. 대부분은 저한테 알려주거든요. 목사님 이런 일이 있어서 제가 며칠 며칠은 새벽을 못 나가요. 근데도 너무 섭섭해요. 그러니까 못 나오는 게 섭섭한 게 아니라 기도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게 너무 섭섭한 여러분 그냥 자율적으로는 기도 못합니다. 그냥 여러분의 생각에 맡겨놔도 기도 못합니다. 어떻게 해요? 강절해야 돼요 기도 못하는 것을 돌파해야 되는 거예요.
2024년 우리의 기도의 자리가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