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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5)
임종 때 외워야 할 말씀
롬 3:21~30
I. 서론
일평생 신약학자로 살아온 레온 모리스 (Leon Morris) 교수님은 오늘 본문 21~26절까지가 “아마도 지금까지 쓰여진 모든 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단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만약 어떤 분이 저에게, “죽을 때,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으로 묵상하고 싶은 성경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로마서 3장 23~24절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 왜냐하면, 이 두 구절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나의 상태.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 하신 사역.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하신 선언. 저는 이 말씀을 죽을 때 계속 묵상하면서, 비록 나는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대속의 값을 치러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확신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는 다 잊으셔도 좋습니다. 한 가지 부탁만 드립니다. 오늘 설교가 끝날 때까지 23절과 24절을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주 설교 전에는 23절과 24절을 함께 암송하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전체 본론에서 두 번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였고, 두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첫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의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지에 대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4장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5~8장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용어로 “성화”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더 깨닫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헬라어 원문에는 “이제는” 다음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주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3:20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정의했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절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말씀은 20절에서 말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한 의”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신약시대에 와서가 아니라 구약시대 때부터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부터 준비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율법과 선지자들이 구약성경에서 증거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 구체적인 내용은 22절에 나옵니다.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너무나도 명확한 말씀입니다. 제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종과 상관없습니다. 사람의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사람의 학식과 상관없습니다. 사람의 재력과 상관없습니다. 사람의 성별과 상관없습니다. 사람의 신분이나 행위와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차별 없이 얻을 수 있는 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겠습니다. 23~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두 구절은 반드시 외우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0절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 보여 알려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이것을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어야 하는 이유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이 생기게 된 원천을 말합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이 존재하는 수단을 말합니다.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지향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이 영광을 돌릴 최종 목표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 중에서 최고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많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심판에서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속량” (redemption)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자유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우연히 강아지 한 마리를 구조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국에 있는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3살 된 리트리버가 식당 주차장에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리트리버 목에는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목줄이 매여 있었고, 이 강아지의 집은 자동차가 주차하면 차 뒤에서 나오는 매연을 다 마실 수 밖에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리트리버를 불쌍히 여긴 사람이 식당 주인에게 리트리버가 이렇게 하루 종일 매여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말하자, 얼마면 이 리트리버를 팔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국 돈 5만원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식당 손님이 동물을 구조하는 단체에 연락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식당에 와서 5만원을 주고 이 3살 된 강아지를 구조한 것입니다. 이 강아지는 결국 개들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으로 입양되었고, 미국 가정집 뒤뜰에서 다른 강아지들과 신나게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영상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속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값을 지불해서 속박되어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 말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 얻은 자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 편에서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3살된 리트리버가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강아지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식당을 방문한 손님과 구호단체에서 모든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와 성경 이야기가 다른 점은 그들은 5만원을 지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손님이 리트리버를 구조하기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죽였다고 하면, 정신이 나갔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 말미,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시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과는 조금 맞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최종적으로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이 일생을 다 산 다음에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때, 의롭다고 선언을 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속량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은 25절에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합니다.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4절에서는 상업적 용어를 사용했고, 25절에서는 종교적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속량”는 상업 용어로서, 어떤 것을 사서 자유롭게 하는 단어입니다. (예, 노예) “화목”은 종교 용어로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를 덮는 뚜껑인 “속죄소”를 말합니다. (Atonement cover / ‘시은좌’ mercy seat라고도 한다) 이 언약궤 안에 우리의 죄를 정죄하는 율법의 두 돌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이 속죄소 위에 뿌림으로 백성의 죄를 사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피가 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덮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말이 또 나옵니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만약 예수님의 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심판하셔야 했을 겁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자신만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때가 역사적 순간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26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26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곧 이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를 말합니다. 프란시스 쉐퍼 목사님은 (Francis Schaeffer) 이 구절을 “성경 전체의 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로운 통치자로 머물러 계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예수님의 보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 3장 26절은 성경 전체의 중심이 맞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위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랑할 데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27~28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옥한흠 목사님은 이 말씀을 깨달은 사람은 로마서 절반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약간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27절에서 말하는 “법”은 율법이 아닙니다. 어떤 체계나 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을 28절에 조금 더 쉽게 설명을 해 놓았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니까,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놓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를 제공하고, 내 편에서 믿음을 제공해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에 나에게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바울은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8절에 나오는 “이것은” 그 앞 부분 전체를 말합니다.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구원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또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와 구원은 그렇다 치고, 최소한 “믿음”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닙니까? 나에게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두 군데 읽어 보겠습니다.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행 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공통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2장 8절도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생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해 버립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신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방법도 동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9~30절,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제는 그러나”로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 의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의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대속의 은혜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앙 고백으로 할 수도 있고, 기도 할 때 할 수도 있고, 전도하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드릴 때, 가사에 마음을 담아서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신앙을 찬양으로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