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 달성군(達城郡) 가창면(嘉昌面) 우록동(友鹿洞) 마을
대구시내 수성못 입구, 상동(上洞)을 거쳐 달성군과의 경계 지점 마을인 용계동(龍溪洞)을 지나고 계속 직진하여 팔조령(八鳥嶺) 지나 청도군 이서(伊西)로 가는 길 중간 대로변에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嘉昌面) 우록리(友鹿里)가 있다. 마을 초입에서 서쪽 남지장사(南地藏寺)로 가는 길에 만나는 우록리, 대구 수성구에서 청도군으로 가는 도로의 오른쪽에 위치한 산골 마을인데, 수십 호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 속칭 우록김씨(友鹿金氏)들의 집성 마을이다. ‘사슴과 벗하는 마을’(友鹿里)이란 의미다. 이곳에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다. 그 옆으로 녹동사(鹿洞祠)·충절관·관리동 등의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 중 현대식 건축물이 눈에 띈다. 입구에 ‘달성 한일우호관(韓日友好館)’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사성 김해김씨는 전에 우록김씨(友鹿金氏)라고 불렀다. 우록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의 지명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80여 가구의 우록김씨가 4백여 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천혜의 요새인 팔조령이 병풍처럼 둘러싼 이곳에 우록김씨가 터를 잡기는 조선 선조 31년(1598년)이다. 시조 김충선(金忠善)이 임진왜란 후 조선팔도를 돌다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시조 김충선은 여기서 살다가 이곳 삼정산(三頂山)에 묻혔다. 그 산자락에 후손들이 세운 녹동사원과 유적비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후손들은 해마다 녹동사원에서 춘추향사를 받들며 조상 섬기는 일을 빼놓지 않는다. 충효의 가풍을 이어받아 벼슬을 멀리하고 농사를 근본으로 한 탓인지 지금도 부자는 별로 없다. 귀화한지 4백여 년이나 된 사성김씨는 그들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준 시조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시조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은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씨이며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그가 임진왜란 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또오 기요마사)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3,000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했다.
조선의 문물과 인정, 풍속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내가 못난 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 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다.
귀순 후 조선의 장수로 울산과 경주,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의 성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과 전공을 세우자 권율(權慄) 장군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선조가 그를 친히 불러 이름을 김충선으로 하사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국경 방어를 자청하여 10년간 국경을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다시 출정해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 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27년(인조 5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다.
그는 서른 살이 되던 해 진주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로 세상을 마쳐 가창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고, 정헌대부(政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병조참판(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삼정산에 부인의 무덤과 나란히 있다.
김충선은 슬하에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김경원(金敬元)이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둘째 김경신(金敬信)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각각 추증되었고, 셋째 김우상(金右祥)은 상호군(上護軍)을, 넷째 김계인(金繼仁)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으며, 막내 김경인(金敬仁)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어 가문을 크게 일으켰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경원의 둘째 아들 김진영(金振英)이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했고, 김여삼(金汝三)은 노모가 죽자 삼성산(三聖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이나 시묘(侍墓)를 극진히 하여 "효행록(孝行錄)"에 실렸으며, 김용하(金龍河)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벼슬을 사직하여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을 지켰다.
현대의 인물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김치열) 대학교수 김윤희, 전 AOS부회장 김형국, 대구시 중구청장을 지낸 김주환(金周煥) 등이 있다.
녹동서원은 임진왜란(1592~1598년)에 공을 세운 위 모하당 김충선을 기리고자 세워진 서원으로,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특히 일본 관공객들이 많이 방문해 한일간 친선우호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녹동서원은 유물전시관 신축을 비롯해 대대적인 보수와 증축 공사를 마쳤다. 더욱 한일우호관이 최근 완공돼 관광객을 맞고 있다. 4,198㎡ 땅에 지상 2층 규모로 50억 원을 들였다. 정부에서 25억 원을, 나머지는 대구시와 달성군이 절반씩 부담했다. 1층에는 조선시대 김충선(1571∼1642) 장군의 밀랍 인형과 그의 삶을 보여 주는 전시실이 있다. 또 일본과 한국의 교류사 등 한일 관계를 조명하는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건물 뒤 정원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일본의 문화를 보여 주는 각종 생활용품이 전시되고 있다. 사성 김해김씨의 2000년 현재 인구는 199,544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