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고대사의 미스터리, 명화동 장고분
1994년 국립 광주박물관은 광산구 평동 저수지 위쪽에 자리 잡은 고분 하나를 발굴한다. 고분의 규모는 33미터 × 24미터, 높이 2.7미터였다. 이 무덤은 광주에서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컷을 뿐만 아니라 모양도 특이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두 개의 삼각형이 서로 하나의 꼭지점에서 맞닿아 있고, 그 위로 원형의 봉분이 둥그렇게 얹혀진 모양이었다. 꼭지점이 맞닿은 부분은 잘록하고 낮았다. 고분의 가장자리는 넓은 도랑이 빙 두르고 있었고, 도랑을 포함한 고분 형태는 방패형이었다. 사다리꼴과 원형의 연결부분 가장자리를 따라 원통형 토기도 배열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특이한 형태의 고분, 이름은 모습이 악기인 장고를 닮았다 해서 지명인 명화동과 함께 명화동 장고분(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22호)이라 붙여진다. 발굴이 이루어지자, 일본에서는 난리가 났다. 일본의 3대 신문인 아사히신문이 발굴 고분과 유물을 1면 머릿기사로 대서 특필(1994년 5월 20일자)했기 때문이다.
명화동 장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인 원통형 토기는 일본에서는 하니와로 부른다. 신문은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은 이번에 발굴된 하니와가 6세기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말해주는 1급 유물이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며, “이 고분은 한반도에 정착하고 있던 왜의 호족이 묻힌 곳일지도 모른다.”고 보도한다. 이어 “광주의 명화동 고분에서 12점의 하니와가 발견됐다는 뉴스는 일본 열도에만 존재한다는 하나와의 정설을 일시에 뒤엎는 것인 만큼 한·일 양국 연구자들에게 엄청난 놀라움을 안겨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왜 일본의 유력 신문 아사히는 명화동 장고분과 출토 유물인 원통형 토기를 1면에 대서특필하며 호들갑을 떨었을까?
일본에는 3세기 중엽에서 6세기 후반에 걸쳐 전방후원분이라 불리는 고분이 2,000개가 넘게 조성된다. 전방후원분은 최고 권력자인 왕과 지역 수장의 무덤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무덤 앞면은 네모지고 뒷면은 무덤 주인공을 매장하는 봉분으로 둥글게 축조된다. 오사카에 있는 닌토쿠(仁德)천황 능은 전체 길이만 400미터가 넘는 거대 봉분으로, 이집트 피라미드·중국 진시왕릉과 함께 세계 3대 무덤으로 불린다. 일본만의 무덤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과 하니와를 꼭 빼닮은 원통형 토기가 명화동에서 출현했으니 아사히신문이 흥분하고 호들갑을 떤 것은 당연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장고분은 명화동과 월계동을 비롯하여 영광, 담양, 함평, 영암, 해남 등 영산강 유역에만 13기가 확인된다, 이들 장고분은 모두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짧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대부분 길이가 40~50미터 내외의 크기다.
명화동에서 장고분이 확인된 이후 영산강 유역에 산재한 장고분 속 피장자의 국적은 한·일 역사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된다. 피장자의 국적이 뜨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제가 4~6세기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 기구를 두고 다스렸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일부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근거로 전방후원분이 조성되던 4세기 말부터 200여 년 동안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학설이었다. 그런데 그 학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영산강 유역에서 왜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한 무덤이 나왔으니 피장자의 국적 문제는 한·일 역사학계의 뜨거운 쟁점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피장자의 국적에 대해서는 크게 세 학설이 있다. 마한 토착세력 설, 왜인 설, 마한 망명객 설 등이 그것이다.
마한 토착세력 설은 독립적인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던 나주 영산강 유역의 수장들이 왜와 빈번히 교류하면서 왜의 무덤 양식을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왜인설은 다시 둘로 나뉜다. 하나는 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철 교역에 종사한 왜계 집단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조성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백제의 한성 함락(475)으로 백제가 자력으로 영산강 유역을 통치할 수 없게 되자, 왜계의 백제 관련 집단을 채용하여 토착세력을 견제했다는 것이다. 마한 망명객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왜와 가야계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이에 반발했던 북 큐슈의 마한 계통 망명객이 다시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와 장고형 고분을 축조했다는 설이다.
한·일 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인 장고형 고분의 피장자가 현 시점에서 현지 수장층인지, 왜인인지, 마한 망명객인지는 결정적인 물증이 나오지 않는 한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피장자가 현지인이든 왜인이든 임나일본부설과는 관련이 멀어 보인다. 현지인일 경우 임나일본부설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고, 왜인이라고 해도 장고분의 분포가 대형 옹관고분의 중심지인 나주가 아닌 광주, 담양, 함평, 해남, 영광 등 그 주변에 드문드문 산재한 것으로 보아 왜가 정치체를 형성하여 영산강 유역을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전방후원분과 유사한 장고분과 원통형토기의 출현은 광주를 포함한 영산강 유역이 어떤 형태로든 큐슈 지역의 왜와 빈번히 교류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명화동 장고분은 여전히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어디인지,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 임나일본부설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 한·일 고대사의 수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1,500년 전의 타임캡슐이다.
월계동 장고분
첨단지구 월계동 주택단지 주변에도 특이한 모양의 고분 2기가 남아 있다. 이 고분 역시 명화동처럼 장고를 닮은 형태이다.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 이곳 마을 이름은 월계리 장구촌이었다. 장구 모양의 고분과 관련된 마을 이름인 장구촌답게, 이곳에는 9기의 고분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방치되고, 생계를 위해 주민들이 봉분을 깎아 논밭으로 만들면서 2기만 남게 된다. 2기의 고분도 이 일대 주민들은 야트막한 야산이나 구릉으로 알고 있었다. 발굴 당시까지도 주민들은 시신이 안치된 돌방을 김치 등을 보관하는 냉장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야트막한 야산, 구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장고분으로 확인된 것은 1993년과 1995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 발굴되면서부터다. 그 결과 앞은 네모지고 시신이 안치된 봉분인 뒷부분은 원형인 장고형 고분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고분 주변은 1~2미터 깊이의 방패형 도랑이 감싸고 있고, 봉분의 아랫부분에서는 일본에서 하니와라 부르는 원통형 토기도 출토된다.
1호분은 전체 길이 45미터, 봉분 지름은 26미터나 되는 광주 최대 크기의 고분이고, 2호분은 1호분에 비해 3/4정도의 크기이나 기본 구조는 같다. 명화동 장고분과는 달리 굴식돌방이 확인되었는데, 벽은 깬 돌을 이용하여 벽돌처럼 쌓고 있다. 일제 시기 도굴되었지만 금귀고리, 쇠 화살촉, 토기 조각 등이 남아 있었다.
일본에서는 원통 모양의 토기를 비롯하여 인물이나 동물 모양의 토기를 봉분이나 도랑에 배치하는데 이것을 하니와라 부른다. 하니와는 묘의 영역을 구분하고 악령을 막으며 피장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종교적 역할과 관련이 깊다. 월계동 장고분 출토 원통형토기도 제사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된다.
명화동에서처럼 월계동 장고분과 원통형 토기도 5~6세기 한·일 고대사와 관련하여 큰 관심을 받고 있다.
- 남도역사연구원장 노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