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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시집-간지
혼자 춤추는 異邦人
(1994. 7. 5. 도서출판 문단)
* 해설 / 조의홍 「존재 화합의 수용의 세계」
* 시작 노트 / 「바람따라 흔들린 시어」 「생명의 유한성에 대한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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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다섯 번째 시집을 내면서
영혼이 흔들리는 소리
다섯 번째 시집을 묶는다.
스스로 왠지 자닝스러움을 맛본다. 이럴 땐 나 혼자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지명(知名)을 넘어면서 생명의 존재와 그 유한성에 대한 어렴풋한 상념에 골돌해지기도 한다.
어째서일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시 쓰기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있다면 신비한 생명의 원초적 한 줄기 빛살과 공(空)으로 마무리 될 한 생명의 끝남을 무엇으로 어떻게 시 속에 용해시킬 수 있을까.
지극히 보편적인 사고(思考)다. 아니 우둔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참으로 허망을 풀무질하면서도 덧없는 흐느낌과 눈물이 이 우둔을 잠시나마 붙들어 매고 존재의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또 다시 가슴을 조인다.
그러나 나의 얕은 심연에 영원히 가라앉은 속물의 석은 찌꺼기, 나의 연약한 갈대는 눈물이 아니고서는 퍼 올릴 수 없는 안타까움뿐이다.
그래도 어쩌랴.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흔들려도 시를 향한 소리는 들어야 하고 나 또한 그 소리에 맞춰 한 소절의 내 노래는 불러야 하겠으니....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이제 혼자서 춤추는 이방인이다.
여름 나무는 겨울을 꿈꾸지 않듯이 보편적 존재 이상의 나를 경망되게 꿈꾸지 않는 실재의 춤을 간구하는 나는 이방인이다.
고뇌하는 내가 아름다워 보인다.
그 고뇌와 체념과 혹은 눈물이 어둠 속에서 혼불로 타오를 때 춤추는 나는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아무리 살펴봐도 어눌한 몸짓뿐이다. 어쨌거나 다섯 번째의 보잘 것 없는 나의 분신이다.
아직 철이 덜든 감성으로 부르는 푸념의 노래만 솔직한 연혼의 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내 품안을 떠나보낸다.
조의홍 시형(詩兄)의 해설, 그저 고마울 뿐이다.
1994년 유월
金 松 培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
갈대처럼
천성적 연약함으로 너는
비옥한 저 들판에서
서지 못하리라, 서지 못하리라
어느 숲 속 미풍에도
흔들리는 눈물처럼
온몸을 전율케 하는 생명
돌밭에서 싹틔워진 연약함일지라도
그 귀중한 생명을 끌어안고
잘못 뿌려진 씨앗을 탓하지 않으리라
다시 바람이 부는 늪에서
진흙으로 어둠을 삼킨 채
오늘은 다만 노래 한 소절만 부르리라
눈물로 흔들리는 노래
갈대의 노래.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2
갈대는 누워서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바람이 없는 날도
언제나 내 곁에서 우는 울음
산골 깊은 밤을 흔들고
문득 내 앞에 쓰러진 메아리
갈대는 그렇게
서서도 누워서도 잠들 수 없는 아픔
산그늘이 지고 가끔 응시하는 섬뜩한 달빛
어쩌면 산집승 밤새 울음으로
그리움만 쌓아가는 눈물겨운 사랑
앙, 그것이 무상을 동반자로 안내하는
내 유일한 운명의 가락일지라도
천국에까지 서럽게 울려퍼질 노래
내가 간직하여야 할 사랑의 참회였느니.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3
일찍이 텅 빈 가슴 하나로 살았다
무엇인가 벌써 채워졌어야 할 공간
부징 없는 사랑으로 바람은
또 다른 사랑으로 눈물을 잉태한 채
산골 어스름길을 떠돌았다
문풍지 드렁드렁 울어쌌는 밤이면
호롱불 심지 돋워 더욱 휘황한 데
나는 대청마루를 떠나는 달빛을 닮았다
삼경(三更)이 지나도록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과 지어지선(至於止善)
그리고 초가집 추녀에 매달린 아린 영혼을 익혔다
그러나 어둠 밀물진 빈 가슴
귀뚜리 어눌한 산조(散調)를 담아
무심코 손짓해댄 아하,
미래로 치닫는 별빛 한 줌마저 사그라지는 이 밤
일찍이 텅 빈 구습 속 넘치는 눈물.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4
배추흰나비 날아간 쪽에 흰구름이 너울댄다
동구 밖 어떤 갓쓴 길손이
도포자락 휘두르며 다가와
-=막은거사(莫隱居士) 댁이 어디뇨?
--??
이런 바보, 저거 할배 호(號)도 무르나
어흠, 어흠 헛기침 소리에
핼쓱해진 소년의 다리가 떨린다
석류 한 알 잘 익은 토담너머
명명명 울어대는 한낮의 혼돈
그 이후 배추흰나비는
다시 날지 않았다.
8 나의 조부(祖父) 주(柱)자 국(國)자님의 아호가 막은(莫隱)이었다.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5
나뭇가지마다 돋는 새움은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의 슬픔을 생각하지 않는다
산으로 들로 이어지는 생명의 신비만 햇살에 반짝인다
아니, 생명은 우수수 그냥 떨어지는 늦가을 마른 잎을 싫어한다
당신의 따스한 품안을 노래하는 눈동자
어느날 잡풀로 스러진 불면을 앓는 앞개울에서
휘영청 달빛 사이로 번지는
미물들의 숨소리는 마냥 아름답기만 한데
바람이여, 마지막 남은 나뭇잎은 흔들지 말라
이제 막 설영근 한 톨의 결실을 위해서
온몸으로 피멍던 진통
오, 이 가을 다시 도지는 생명의 아픔을 알겠다
눈물 지우며 뒤돌아보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6
가랑비가 내린다
천진한 감성으로 하루 종일 내린다
햇살 따가와서 홀로 떨어진 풋과일
스스로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몸으로 비에 젖는다
누가 과원(果園)의; 부끄러움을 감춘 채
비야 비야
내 순진한 여린 사랑을 애무해 다오
다시 동발을 세우고
무언가 잊고 살아온 듯
둑새풀을 봅아야 하리
어느 듯 굵은 빗줄기는
골패인 심장 가득히 고이고
분명한 어둠으로 눈물을 닦아낸다
저 어디쯤에서 엄습하는 먹구름 속
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마저 젖고 있다.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7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멀리 비껴가는 햇살 한 웅큼
받아 품지 못하는 마른 풀잎
이젠 슬픔을 숨길꺼나
아직도 봄내음
산 저 너머에서 어색한 손짓만 보내고
연골이 삭아드는 풀잎은 아직도 서러웠다
겨울비가 내렸다
떨리는 육신을 가누며 훈훈한 아랫목의 겨울을 동경한다
누가 갑자기 어깨를 떠밀며
하늘을 보라 한다
쳐다본 하늘이사 따수움이 신비롭지만
또 다시 고개 숙인 채 얼어붙는 고독
이 세상 겨울을 혼자 감싸안을 자
오직 나뿐일 수밖에 없나니.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8
안개 속 청산을 보아하니
도처에 윤기 잃은 눈동자
(흙먼지일까, 굴둑에서 치솟는 맵싸한 연기일까, 아니면 먹구름일까)
먼 그리움 앓듯
고통의 늪 속을 마냥 허우적이누나
큰일이로다, 이른 아침
시야 흐려진 나뭇잎 풀잎 모두
눈 흘기며 저절로 떨군 눈물
어이 할거나 봄비 한 줄기로
내장을 씻어내는 나의 가뿐 숨소리
문득 청산을 보고 하늘을 보어하니
(가녀린 빗줄기마저 멈춰진 자리, 흉흉(洶洶)한 또 다른 물안개만 흐느적인다)
오늘은
하늘도 땅도 사람도 모두 죽어가고 있었나니
오오, 이제 감당키 어려운 나의 시
한 행마저 그냥 죽어가고 있었나니.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9
여보, 창 밖
후두둑 낙엽 위에 쏟아지는
계절의 섬뜩한 운명을 느낍니다
무엇인가 뒤돌아 봐야한다는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시간을 챙기고
어지름증만 늘어난 지명(知名)의 몰골
한 번 더 거울 속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보, 다시 뒹구는 낙엽을 밟으면서
길바닥 질퍽이며 걸어가는 한 시인
그 시인의 맥바진 모습만 반추하고 있습니다
채이고 밟히는 생채기
낙엽의 측은한 종말 앞에서
여보,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그 끝을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한 시인이 비틀거리며 눈물로 걸어간 갈대밭엔
왠일인지 선혈(鮮血)만 어지럽게 뿌려졌습니다.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0
아침 안개 자욱하다
안개 낀 날은
어쩐지 내딛는 발걸음마다 안개처럼
가득히 눈물을 쏟고 있다
이미 폐쇄된 골목길을 더듬어
싸하게 온몸을 엄습하는 알 수 없는 두려움
이렇게 소름이 끼치는 날은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한다는 노랫말로
목청껏 한 가락 구성지게 뽑고 싶다
안개는 더욱 온천지에 내려앉고
문득 한 마리 벌레가 지쳐 쓰러진
목련꽃잎 짓이겨진 어느 봄날
그것이 눈물임을 알았다
부서지는 안개, 그토록 삭이지 못한 아픔임을 알았다
오늘도 안개 자욱한 날, 갈대
너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울고 싶다
너를 생명으로 다시 사랑하고 싶다.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1
언 듯 언 듯 보일 것 같기도 한 불빛을 찾다가
미로에서 다시 어둠 속 서성이다가
한 생명을 내 던진다
여기저기 내 뱉어진 삶의 찌꺼기
전율케 하는 몸뚱아리에 오늘도
에라, 막걸리 한 사발 꿀컥꿀커
빛 잃은 별을 주워 마실꺼나
--제왕에서부터 내 썩어가는 뿌리에 민초에까지
우리 망가진 몸 씻는 근원임을 알아라
오, 그대 흔들림에서 이제사 바라보는
이 세상 머무를 곳, 정(定)함을 얻었나니
사랑아, 안정(安靜)과 안존(安存)의 필연은
바람으로 떠나보내면서, 그리워하는
조심스레 내 마음을 가다듬을 일이다
지금쯤 언 듯 언 듯 다가오는
한 생명의 불빛 같기도 한 어눌한 몸짓
에라, 감은 눈 속에 어른거리는 영혼.....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2
그대0가 설령
바로 본 사물에서 현명한 지식의 보물을 찾았다해도
그것이 내게 허기를 면할만한 푸성귀일 때
그대 의식 한 가운데 충만한 그대
자양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대 다시 성실한 듯 중에서
바른 마음 한 자락 간직했다 하여도
아직 하찮은 내 한 몸 닦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까
바람아, 하뉘바람이라도 일렁이지 마라
천박한 토양에서 그대가 설령
흠뻑 삼킨 자양이 충만하더라도
냐 몸과 내 한 가정에는
언제나 흔들림뿐인 것을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물상(物象)의 본말(本末)과 일의 마침과 시작의 깨침이 업어서
평천하(平天下)의 단어를 아직 사전에서 찾지 못했음.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3
네 청순한 품안에 가득 단긴 사랑
그 사랑은 질이나 양으로 아니면
무게나 부피로 어는 정도냐고 물으면서
바람이 날마다 내 곁에서 보채는데
참으로 사랑은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었네
멀쩡한 허우대의 어리석음보다는
더 깊숙이 소리 없이 흐르는 물줄기였네
산을 올라 가칠한 산흙만 보고
거기 무성한 나무숲은 보지 못한 우둔만
흰 구름으로 떠가고 있었네
그대여, 그대가 눈물로 흔들리는 깊은 밤에도
내사 그 엄청난 진리를 다 알겠나마는
그 신비한 생명의 찬연함을 느낌으로 눈치챘네
비록 연약한 신연에 되비친
저 사랑의 나무숲을 보았다해도
잠시 비쳤다가 꺼져버린 채
어렴풋이 짐작되는 한 생명임을 알겠네
사랑을 감싸고 흐르는 눈물임을 이제사 알겠네.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4
어리석음을 잉태한 자는
바람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우둔하고
흔들림을 온몸으로 느낀 자는
눈물이 멈춰도 덜림의 끝은 없었다
누가 이승의 술잔을 비우고 떠났을까
지금 시리도록 차가운 사랑을 안고
달빛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조심스런 어리석음으로 내 딛는 발걸음
내 가슴을 관통하는 여린 사랑의 누매로
저 황량한 떠림의 끝을 향해
앙, 저승으로 넘나 든 영혼의 빛줄기
어느 지점에서 빈 술잔으로 뒹굴고
처절하게 무너진 달빛만 껴안는다
참으로 어리석음과 떨림을 함께 풀어
그냥 삼키는 이승의 술잔이여.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15
눈물로 흔들리는 갈대
너느 날 당신이 제자리에서만 흔들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내 스스로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모두가 살아가면서 질금거리는 절망
절박한 혼돈 하나씩 껍질 벗기듯
그러나 눈물 뿌려 피운 꽃은 아름답다
명덕(明德)은, 신민(新民)은, 지선(至善)은
박토에선 발아되지 않고
마냥 모진 한 생명을 붙들고
어느 날 갈대처럼 묵언(黙言)으로 서 있었다
다시 눈물로 흔들리는 갈대
혼자 춤추는 이방인
그래도 한 점 고운 바람을 만나기 위해
내거 서 있는 곳은 날이면 날마다
서 있으므로 바람만 찾아올 것이다
갈대여, 너의 눈물을 이제사
아슴푸레 짐작하는 나의 어리석은 우둔이여.
靜中動-靜
그냥 서 있기만 했다
흐느적이는 풀잎 틈새에서
함께 흔들릴 수 없는 자폐증
그 自暴의 중증을 앓고 있는 것일까
어디론지 몸 추슬러 발걸음 옮겨야 하리라는 압박감
그 강한 바람으로 온몸을 흔들고
이제 중심을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나무
그대여,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으면
한번도 내게 다가오지 않던 사랑의 언어로
포근히 감싸일 수 있을까
등골 속으로 엄슴하는 시간들과
허울 좋은 분장을 하고
분장 자국마다 얼룩진 안개를 위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의
작은 새 한 마리는 날려 보내고 싶다
그대여, 눈물마저 환각만 홀로
젖은 내 발부리에 휘휘 감긴다 해도
눈 감은 채 풀벌레 울음소리나 듣겠다
내 몸에 맞는 색깔의 차림새로
그냥 서 있겠다
광활한 하늘이 열려 내 노래 소리만 들려준다면.
靜中動-中
조금씩은 걷고 싶었다
처음부터 헛딛는 발걸음을 예비하면서
그래도 이 세상은 걸어가 볼만한 것일까
어지럽다 문득 그대여
나와 풀꽃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걸음걸이는 어떤 것일까
흔들리는 나무 곁에서
사랑은 걸음마로부터 이어지지는 않겠지
청정한 수맥 몇 모금은
깊지 못한 사랑의 뿌리에서
얼마만큼의 절망이 눈물로 흐르는가
목덜미까지 차오른 허탈
짙게 깔린 안개, 이제사 걷히는가 했더니
또 다시 방황하는 어둠 속 영혼
그대여, 그래도 조금씩은 걷고 싶었다
어차피 기진한 눈매들이 허우적
내게로 집중하는 시선
한 걸음 한 걸음
내 육신 속 피마른 고뇌를 뱉으며
제 눈물의 얼룩을 지우리라
누군가 지금 막 허물려는 나의 성(城)을 위해
나는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걸어가야 한다.
靜中動-靜
무작정 걸었다
서 있음과 걸어감의 중간 지점에서
너무 오랜 사유(思惟)가 필요했을까
더러는 서서 되뇌이는 삶의 의미가 있었다지만
걸어가는 삶의 촉각은 희미하다
아, 황막한 벌판에서
어떻게 걸어갈까, 이미 지워진 지도 한 장
어느 날 좌초된 허수아비의 촉수는 마비된 채
한 점 불빛을 따라 막연하게 걸어보는
나의 움직임은 결국 아픔이었다
저 멀리 짐작될 수 없는 한 생의 끝
시간이여, 지 스스로 빛을 잃어가는 유성처럼
고요가 넘치는 밤으로 걸어가리라
내 별을 위한 마지막 노래를 부르리라
아슬아슬하게 걸음마해보는 그 길이
그대 곁에서 움찔 흔들리는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이 그 시간의 그 험한 길일지라도.
--
심우도(尋牛圖) 감상
1. 무엇을 찾는가
저기 고사목(枯死木) 마지막 흐느낀 숨결 곁에서
울창한 숲 헤치며 무얼 찾고 있는
누란(累卵)의 마음 한 가닥 보이누나
어쩌다가 도르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어쩌다가 풀잎 끝에 간신히 매달린 이슬 방울
그렇구나 아아,
그냥 지난 밤 별빛으로 결로(結露)하고
그냥 오늘 아침 햇살로 기세(棄世)하는
참으로 우둔한 한 생애
넓은 강, 높은 산, 더욱 험한 길 위에
오롯이 반짝일 작은 별빛 하나 찾누나
바람소리 사나운 고사목 가지 사이
탈진한 한 무리 어둠의 그림자들이
그저 허둥허둥 헤매고 있나니.
2. 발자국을 보았는가
어둡다
대명천지(大明天地)가 별안간 어둡게
어둡게 내 심장에 깔린다
“내”가 어쩌면 “우리”로 변환될 수 있는
태양은 허심(虛心) 속 깊이 사라지고
마냥 어둡기만 하다, 어둠 속 더듬는
그대 발자국은 찾을 수 없어
-오욕(五慾), 칠정(七情)...내 맘대로 살까보다
아아, 안돼, 어쩐지 동화할 수 없는 심연에
길게 높게 가로막은 그대의 발자국
개울가 어느 언덕에 선연히 비치나니
지친 육신이여, 저기 땅끝 어디에
무심히 일어서는 “나”의 별빛
하, ‘우리’의 궁극적 지점으로
곧게 뻗어나간 흔적을 보았느니
발.....자....국....
3. 나는 있었는가
빗방울 하나로 어린 싹을 틔울 수 있을까
그는 구름이었다가
그는 빗방울이었다가
어느 날 얼룩진 꽃잎이었다
어느 날 바람에 떨어진 꽃잎이었다
밟혀진 꽃잎 퇴색해가는 시커먼 골목길
비틀거리는 그림자로 나는 있었는가
창백한 얼굴 하나 빗물에 젖고 있었다.
4. 바르게 서 있을 수 있는가
세상 살아가는 일들이
언제나 맹목(盲目)으로 뒤뚱거린다
불혹(不惑)에 이르러서야
나의 시(詩) 한 줄 겨우 쓸 수 있었다
황사 바람의 언덕에 혼자 오르며
직립(直立)의 인간과
직시(直視)의 현실은
모두 갈등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사 혼불 지펴
그윽한 향내 속에서 어리는 시 한 수
그저 ㅇ목이 아닌 직립의 의문 투성이
언제나 비틀거리면서 사라지는 언덕에서.
5. 시로 길들여진 영혼인가
불타는 나무에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는다
나는 보았다
신비한 생명 속에 깃든 연약한 욕망
어느 날 내 육신을 불태우면서
잔잔한 선율을 몰아내는 어지러운 생명
내 영혼 곁으로 날아드는 새떼를 맞았다
시로 길들여진 영혼
한 웅큼의 시심(詩心)을 불태우는 사람
나는 여기까지 와서야 어렴풋이 알겠다
몇 번이나 수렁으로 빨려든 허망
언젠가 일상사의 슬픔을 털아내면서
비범한 감성으로 추스르는 아름다운 혼불
내 솔직한 현주소를 깨우치고 있었다.
6. 나는 나로 돌아올 것인가
빔 껍질만 덕지덕지 붙여놓은 마음 한 쪽
가슴 깊이 묻어둔 희미한 시 한 소절
먼 상징으로 용해되고
어디선가 밤늦도록 들리는 피리소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낭랑한 목소리
온몸을 찌르는고야
하, 빈 껍질뿐인 육신에는
빈 깡통소리만 줍는다
말없이, 티없이 티없이, 말없이?
물같이 바람같이, 바람같이 물같이?
아직도 시 한 줄이 가당찮은 나는.
7. 가시덤불에 누웠는가
아직도 가시덤불에 그대로 누워 있는가
나는 나로 돌아옲 수 있다는 허장성세(虛張聲勢)
거기에는 바뀌지 않는 사고(思考)만 있었다
몇 줄 진실인 양 떠벌린 시 한 줄
허공으로 둥둥 사라지고
앙사아한 육신만 초라하다
덧없어라, 찬란턴 인생 그 행로 우에
허접 쓰레기 다 버리고
저기 넘실대는 죽음의 문턱은 변치 않았다
아직도 가시덤불에 걸쳐진 허탈
그 신음, 소리 소리....
그냥 자닝스럽기만 하다.
8. ‘비어 있음’은 아름다움인가
결국 시도 없고 나도 없었다
온 천지가 모두 비어 있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성철 큰스님의 열반과 함께
한 송이 연꽃으로 해탈(解脫)하였을까
산문(山門) 쪽에서 바람이 분다
펑 뚫린 가슴팍을 흔들고
문득 시 한 수 둥실 구름 사이
무지개로 영롱할 뿐인 걸
결국 공(空)이었다
나도, 그렇게 갈구하던 시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관자재보살이 행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외는 희미한 경문(經文)이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었다.
9. 바르게 볼 수 있는가
산은 그대로 산이라고 했다
사물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상을 깨우쳐라 했다
욱신도 시도 효용(效用)의 가치는 없노매라
내 아직 허약한 육신에 머물러
제대로 시에 진솔하지 못한 채
오늘도 미혹(迷惑)으로 허덕이고 있노니, 그럴수록
룸비니 화원 무수(無憂樹) 그늘에서
싯다르타의 첫 울음소리를 기억하라 했다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오랜 고행 끝
성도한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했다
다시 녹야원에서 설법한 무상도(無上道)를 새기고
열반, 큰 광명으로 떠나신 무시나가라 성
사라쌍수 나무 아래를 기억하라 했다
아아, 산은 언제나 산이듯이 나는 나로 하여금
이 세상 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인지
흐르는 물은 물로
진정 내 빈 마음에 담을 수 있을 것인지.
10.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심연에 여리게 깔린 본심은 무엇이며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들어보라, 시를 찾자 헤매다가 어느 날 시가 지나간 그림자를 좇다가 어렵게 시를 붙잡았네. 그러나 시와 더불어 얄팍한 감성으로 그 속에 나를 파묻은 채 그가 나인 양 피리 불며 다시 그 집을 찾아들었네
--사리자여!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서 물질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곧 물질이며 감각, 지각, 의지, 계속되는 생각, 최후의 안식도 그러하니라.--
그래, 비웃음으로 멀리 더난 내 영혼이 비어 있는 자리에는 나를 얽어매는 속물의 찌꺼기 아, 중생을 교화하고자 길거리에 나선 고승(高僧)의 법문(法文) 하나 보지 못하는 그래서 아아, 지금가지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열반언덕 어서 가자--
시를 잦아 먼길 떠나는 오늘도 저 허공 밖에서 나는.
* 고딕체 : 「한글반야심경」 중에서 따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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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 존재의 슬픈 확인
네가 불가마에서 달구어지듯
나도 신열(身熱)로 감싸인 채
그렇게 아직도 살아있음을 보았네
네가 중생들이 공양과 그 무엇을 위하여
달그락 달각 화음을 울릴 때
어릴 적 나는 사랑의 울음으로
나를 멀리 더나 보냈네
너의 어두운 얼굴들이 살강에 놓여지듯
후미진 곳으로 눈망울을 돌리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아야로시 숨결
몰아쉬는 저 골목에서
사금파리의 슬픈 신음 한 줄기
이제사 눈치챌 수 있었네
잘 다듬어 구워진 사그릇을 만지면서
선 채로 허수아비 된 삭막한 공간으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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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그 몇 가지 실험
2. 자성의 유약(釉藥)
내 가슴 에워싼 그릇은
작은 간장 종지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을 담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
분별력을 잃었을 때
날마다 찌그러지는 나의 그릇
언제나 새 그릇을 만들고
곱게 유약도 바르지만
지난날의 물드무는 만들지 못했다
아아, 이처럼 아린 눈물 한 웅큼도
담지 못하는 내 허전한 심연에
차라리 비워내고 채워야 할 꿈마저
불가마에서 태워버렸다면
그래, 이제라도 그 작은 그릇의 반짝이는
광채를 사랑하리라
나는 그를 사랑하리라.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3. 색깔의 변화
항상 나의 밥그릇은 흰 주발이었고
아들의 것은 윤기 나는 검정색이었다
아니, 담겨진 밥알도
어쩌면 저렇게 희고 검은 색깔일가
우리는 각각 한 술의 밥을 삼키면서
싱겁거나 짜거나 간에 반찬도 씹어야 했다
후루룩 한 숟갈의 국물이 섞여지면
마침내 나의 밥주발은 뿌연 빛을 뿜어내고
아들의 색깔은 거무스레 변한다
이 시대, 머릿속 깊이 맛들여진
나우ㅏ 아들의 숨겨진 대화
아아, 맛깔이 희고 검음으로 밥상에 마주 앉을 때
희석될 수 없는 우리의 색깔을 슬퍼하리라
낡은 그릇잉가 새 그릇인가
바람따라 흔들리는 한 세대의 전설
그것은 검거나 희거나
참으로 슬픈 얼룩으로 번지는 눈물 자욱.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4. 실수의 상징
개숫물을 버리고 행주로 닦아내고
제법 앞치마까지 두른 딸애의 설거지는
어쩐지 떨리는 손만큼 어눌하다
아뿔사, 깨지는 접시에 얼어붙는 천둥소리
조심성이 없었다는 멋쩍음 위로
발그레이 양볼을 물들인다
시집가긴 걸렀다는 한 음절을
깨진 접시 조각으로 줍는 물안개
그래 그래, 사랑하는 딸이여
다만, 우리의 고통을 나누려던
너의 옷소매에 매달린 사랑
아아, 언제부터 길들여진
너와 나의 안일한 먹구름
그냥 모른 척 지나쳐 버릴까
좀처럼 풀리지 않는 두려움이
깨진 접시와 딸의 동공 사이
일직선으로 멈춰 섰다
날개를 접은 채 빙빙 돌기만 하는
창밖 어둠 속 저 새 한 마리.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5. 이기의 소용돌이
아무리 조찰(照察)하려해도
어설픔 몸짓들만 보일 뿐
그릇들이 맞부딛힌 연유를 모른다
모를 일이다, 정말 그들은
밥그릇 대문에 서로 밀며 밀리며
다툰다는 조감신문 안개 기사
아아, 해감내 가득한 그릇 속
이물질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아, 약탕기에 담고 싶은 악취
아, 무슨 쓸모가 있을까
좀처럼 비원지지 못하는 항아리
사랑의 향내, 한 평생 담을 수 없었나니
어디메서 쑥 태우는 냄새만
우리들을 어지럽게 하는가
밥그릇 싸움, 그 소용돌이에서.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6. 잠상(潛像), 그 세대
놋주발 놋대접 놋쟁첩 하나씩
나란히 놓고 정물화를 그렸다
떨리는 손끝에서도
실물만큼은 분명해지는 구도
아들도 그릇 그림을 그렸다
손 끝에 작동하는 키의 흔들림
어쩐지 컴퓨터의 선명한 물체가
오늘은 그냥 죽은 화면이었다
아아, 그들이 애써 그린 정물화
한 폭에 스며든 따스한 향내와
디스켓에 입력된 싸늘한 두뇌와
그래 네가 즐겨 쓰는 언어처럼
우리의 세대가 그 균열을 버티지 못했을 때
나는 다시 전통의 요요(搖搖)한 화필을 다듬고
너는 초월의 기지로 눈 비비누나
성긴 날개짓의 명암
제각기 놓인 그릇은
차라리 멍멍한 원근법에 대치되는 이 잠상.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7. 징징한 인격
그들은 하루에 세 번 정도는 얼굴에
낀 땟자국을 말끔히 씻어야 했다
어찌보면 겉치레의 확인이라고나 할까
잇빨 빠진 양심과 쭈그러진 인격
그러나 그들이 세수하는 일만은
적어도 인격의 확인이었다
금이 가고 깨어져 어느 골목길에서
허연 욱신 망가진 채
나란히 실종자로 남아 있을 때까지
그들은 전혀 능동적인지 못한 절망으로
엎어지거나 혹은 누운 채로 자맥질을 하고
다시 몇 번의 헹굼질로 질식은 면하지만
그들이 겨우 남은 인격을 재확인하려면
아아, 아직도 부드러운 누군가의 웃음이 필요하리라
그래 그래, 깨끗한 마른 행주와 맑은 물 한 동이
어찌보면 잘 닦아진 너의 얼굴에 투영되는
때꼽재기 징징한 우리의 영혼
오늘도 주걱으로 박박 긁어내는 일 뿐이었다.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8. 지천명의 우화
태초에 흙으로 빚아진 육신
이젠 내 밥주발만큼이나 낡았다
먹고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밥그릇 수만 계산해 온 우둔만 쌓인 채
더러는 잇빨 빠진 질그릇이 되고
또다시 찌그러진 놋그릇이 되고
그래서 아아, 이젠 정말 한 웅큼의 시혼도
챙겨 담을 수 없는, 그래서 아아, 이제사
살아온 길 가끔 되돌아보는 맥빠진 시어(詩語)
그러나 지금쯤에서는
다시 사는 방법을 찾을 수 없음이여
내가 간직한 그 그릇들은 모두 비워졌다
그동안 겹겹이 쌓인 눈물
퍼 담아 강물에 띄울거나
이곳에서 되돌아보는 태초의 흙
다시 흙속에 꽁꽁 파묻을거나.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9. 광기(狂氣)의 잔해(殘骸)
허연 뼛조각이 어둠 속에 툭툭 불거진다
광기 하나로 이어진 인생 저쪽
피는 피와, 사랑은 사랑과
서로 몸 부비며 살아온 날들이
그렇게도 허무라는 성숙된 이름으로
이젠 예리한 뼛조각으로 버려졌다
바람 한 점에도 미칠 수 있는
목련꽃잎 하나 밟으며 열병을 앓았어도
그것이 순리려니
그것이 한 삶이려니
광기로 뛰다가 깨어진 나의 분신
이 어둠을 밝히는 듯
하연 거품으로 툭툭 밟혀진다.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0. 빈 접시에 담긴 詩
우리집 식탁은 잔잔한 여름 들판이었다
무리지어진 푸성귀들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빈 접시에 담겨지고
혼을 불러
꽃향기를 피웠다
정갈한 몇 마디의 언어
빈 접시와 나란히
여름 들판에 누워있다
詩처럼
詩처럼.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1. 씻음의 미학
쉰 살에도 넘치는 욕망
마흔 살에 일던 파도로 씻는다
부끄러울 것도 없는 낡은 육신
하나씩 제 모습으로 돌아갈
먼 먼 사색의 뒤안을 가늠하고
우리는 알몸인 채 서로의 가슴을 문지른다
덧없는 시간과 무상이 깔린
미아리 텍사스에서
혹은 청량리 588에서
창이(瘡痍)된 육신의 노래를 더듬어
쉰 살 나이에도 넘치는 여체의 향기 속
저마다 망가진 파도를 달랜다
거기, 나신(裸身)의 신비에 취해 자맥질하는
오, 달관의 바람소리 아름답다
속죄의 맑은 물, 그 내면에 가라앉은
오물을 하루 종일 씻어내고 있었다.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2. 환상의 공간
너의 술잔에는 술이 넘치고
나에게 넘쳐야 할 진실은 비어 있다
가고 노는 윤회
어쩌면 깨진 술잔에 고이는 한 행의 우수
넘쳐 흘러라 넘쳐 흘러서
추억을 마시고 뒹구는 비 술잔
저기, 거기에서 한 생명의 빛이 솟는다
잘게 부수어진 환상의 공간에서
너의 술잔이 빌 때를 기다려도
나의 염원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3. 어머니의 족적(足跡)
뒤안 장독대로 돌아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사뿐사뿐 눈위에 드러난 어머니의 족적을 좋아했다
새벽이면 물 한 사발 떠놓고
정성으로 손을 비볐다
일렁이는 미지의 세월
한 사발 가득 행복을 담고 있었다
감나무 아래 돌제단도 무너지고
얼어 어리운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치마폭 따스하게 받아 합장한 기원들이
무너지고 깨진 채 달빛만 서러웁다
눈 위에 선명한 발자국
정화수 그릇과 함께 사라져버린 지금.
그릇, 그 몇 가지 실험
14. 마지막 절규
여보게, 연약한 몸뚱아리를 함부로 굴리지 마라
소리만 요란한 빈 그릇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눈에 불을 켠다
여보게, 사람과 그릇은 어쩌면
고갈된 목구멍의 풀칠과도 인연이 있을 터
그러나 요란한 빈 몸뚱아리에 담긴 오만
빽과 빽이 빽빽하게 둘러선 나무아래에서
그 알짱한 오만과
그 시퍼런 권력과
그 똥스런 지폐와
그 얄팍한 인격은
모두 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나니
여보게, 골빈 인간들 틈에서 울리는
빈 그릇들의 깨지는 소리를 듣고 있느가
하, 비운 마음 한 구석에서 푸드득
날아가는 비둘기의 포물선
언제쯤 무지개의 선명한 색깔을 볼 수 있을까
여보게, 깨지지 않게 몸뚱아리 조심하게나.
별빛 칸타타
어둠을 가른
은은한 빛 한 줄기
텅빈 내 가슴에 안긴다
소박하지만
사냇물 소리 잔잔한 언덕
꿈 영글게 홀로 기도뿐인 마람아
목놓아 울지도 못하는 이 밤을
내사 그냥 흔들림뿐이었느니
한 웅큼 포근한 체온마저
씻겨지는 시커먼 두려움
어쩌면 서럽도록 뿌려진 유성(流星)의 스산함
나와 함께 더욱 을씨년스러워라
어쩌다가 텅 빈 가슴 속
홀로 어둠 다독이는 밤 풀잎 위
사르르 사르르 감도는 별빛 한 아름 선율.
담쟁이
나는 지금 이쯤에서 망설여야 하리라 붉은 벽돌 틈새로 아직 여물지 못한 희망은 잠시 창문으로 흐르는 불빛으로 말려야 한다
구름처럼 떠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못내 아쉽게 뒤돌아보는 행적이지만 용케도 기어오른 삶의 줄기가 현기증으로 나불댄다
뻗어나간 욕망만큼 무거운 사색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조심스러이 다시 기어올라야 하는 창살에는 불이 꺼졌다
아아, 지금쯤에서 지혜를 예비하는 옷깃을 잠시 손질하고 태초에 씨앗으로 묻혔던 땅바닥을 돌아볼까.
그대 머리 위에 내린,s 한 줌 별빛만 주우며 끝내 돌아보지 말라야 할 어지러운 벼랑 끝 아스라한 바람소리.
강설 후기(降雪後記)
하얀 눈송이를 내가 생명으로 받아들고 길가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신비함 그것은 겨우내 간절했던 소망 하나를 눈물로 짓이긴 뒤 명상으로 파묻은 내 육신, 그러나 그 겨울 어느 밤엔가 꽃으로 사그라진 못난 영혼이 은백색 정감으로 승화하고 있었나니 어느 날 수정처럼 맑은 한 떨기 설빙(雪氷)의 공간에서 움츠린 채 아직도 서 있었다.
물망초
어느 들판에서 밤이면
별이 빛나고 꽃들이 웃고 있다
우리에게 자양처럼
우리 곁에 있어져야 하는 것
이 지상에는 사랑이 무르익고
사랑의 열매에는 詩가 흐른다
모두 돌아간 빈 들판에
아아, 꽃들의 웃음처럼
우리에게도 늘 그리운 사랑이라면
별과 꽃과 시와 함께 그리운 세상
바람이 분다, 말라버린 가슴 속
옹달샘 하나 간직하기 위해
저리도 앓고 있는 사람들
어딘가로 사라져 갈 별빛 한 줄기로
시여, 사랑이여
그러나 잊기에는 먼 그리움 언제나
밤이면 들판에 서서 너를 부른다.
성인장
나는 영원을 꿈꾸지 않는다. 꿈은 꿈으로서의 조용한 몫일 뿐이다. 태양을 닮지 않으려는 사막이거나 어는 한적한 고층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서 일지라도.
경작기(耕作期)
흙 한 줌만큼이라도 꿈의 쟁깃날에 예리하게 갈아야 했습니다.
한 촉 여린 싹으로 곱게 틔워질
내 깊은 속 뜻
표표한 흙먼지에 길게 잠재우고
아 언젠가 갊무리 되어질 여운 육신이여
뜨거운 햇살받이로 증발한 영혼은
마침내 나락(奈落)으로 침몰하는
아아, 또 다른 꿈을 갈아엎고 있었습니다.
근시안(近視眼)
지금 가시(可視) 거리엔 밀려오는 안개뿐이다
바람이 잠시 비워놓은 길은 너무 좁아서
내 눈은 더욱 커지지만
어쩔 수 없는 눈물 한 방욺반으로
하루 아침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군가 어둡다 이 창 밖을 말하고
입추 말복이 언뜻 징검다리를 건너지만
지워지는 옛 정경이
저 멀리 구름 조각으로 떠돈다
범연(泛然)한 몸짓으로 걷어내는 안개 속
네가 가진 욕망의 늪 그 흙탕물에
스스로 몸을 더럽히는 아아
서푼어치의 오직 마른 나뭇잎이었으랴
가늠되지 않는 길 저 너머 얼룩지는
웃자란 잡초 한 무리의 어색한 미소
안경을 벗고 다시 눈을 부비며
비로소 허옇게 짓누르는 꿈을 내뱉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은 오목렌즈의 초점은 어둠뿐이다.
곷샘바람
그저 눈웃음만 보낸다
알몸으로 사린 채
쌓아올린 그 많은 아픔들이
한꺼번에 분노로 솟구치는 날
그저 눈웃음으로 순응한다
겨울밤은로만 훑어내던 속앓이
긴 잠 이젠 깬 개울물 소리에
무뎌진 내 살갗을 적시고
아, 내일의 푸른 소망을 예비하려나
그냥 어설프게 던져지는 그 웃음
어쩌면 내 부끄러운 사랑을
지금사 일깨우나니
살얼은ㅁ 개울 앝은 언덕
버들강아지의 눈망울은 온몸이 차가웁다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텅 빈 가슴
아직도 깊은 눈웃음만 보낸다
흔들리는 사랑의 언어
한 아름 시린 몸으로 감싸 안을 일일뿐.
사랑의 노래 . 바다
그대 넓은 가슴 속
깰 수 없는 파란 꿈이 있었네
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는
우리들 사랑만 담뿍 안고 있었네
그러나 그대 가슴 속엔
아직 삭지 못한 그리움 하나
그대는 밤마다 눈물로 노래하였네
탐조등 불빛 멀리 지우면서
뭍으로 가리라
뭍으로 가리라
한 점 바람따라 무겁게 뭍을 향한
그대의 그리움, 아아
그대의 꿈은 모래톱에서 부서지는데
진한 눈물 한 웅큼 뿌리면서
그대여, 어쩌면 예비된 분노를 마시느냐
바다에도 뭍에도 이 세상 어디에도
잔잔한 남청빛 사랑은 없었나니
그래, 오늘은 이 바다에서
무망의 고통을 밀어내는 그대
사랑의 진통을 주워담는 그대
뭍을 향한 나의 작은 그리움뿐이었네.
사랑의 노래 . 山
어차피 깊이 묻어둔 그대 가슴 속
전생에서 혼자 애태운 사랑은 아니었네
사랑만큼이나 아픈 어둠 깊이 잠들고
내 어차피 묻어둔 물줄기 하나 저절로
계절을 밀어낸 허전함만 가득
바람과 은밀한 약속을 나눈다
야호야호, 그대여
산그늘 따라 퇴색하는 사랑의 메아리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정상에 서서
또다시 야호야호 그대를 부르노니
비록 길지 않은 한 생애를 끝낼 깃발
구름을 조용히 나무 끝에 걸어둔 채
오직 사랑이어라, 노래 소리 멎고
낙엽이며, 물소리며, 지금은 모두 어둠뿐인 산
그 중허리에 누워버린 묘지에는
지상에서 핀 한 떨기 꽃향기
현세이건, 미래이건 그냥 사랑으로 그대
그대 가슴 속에 천년을 안고만 있었네.
수평선
누가 싸늘한 침묵을
멀리서 손짓하는가
어쩔 수 없어서
헤어져 멀리 떠난 사랑
하늘 맞닿은 곳에서 얼어 버렸다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한 아픈 자국들
해풍에 뒤섞인 한 가닥 신음
파도여, 갈매기 울음 같은 환상으로
절규만 길게 휘감겨 흔들리노니
사랑이 파도로 밀려간 빈 바다
모래알에 스민 기억 한 줌뿐
나로 하여 가늠될 수 없는 이병이었다면
어차피 저 수평선 너머
싸늘하게
표류하는 오늘도 너는.
파도조(波濤調)
돌아올 사랑의 약속인가
막막한 바다
해조음도 끊긴 수평선 멀리
무한한 기다림만 밀려 간다
따가운 햇살
8월의 바닷가에 질펀한 추억
지워진 모래밭에 가슴을 묻는다
사랑아,
빈 조개껍질 속울음 삼킨 이 바다
또 다른 청초한 사랑의 언어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하얀 구름 한 조각
모래톱에 부서지면
짙푸른 나의 사랑은 파도로 밀려 오겠지
오랜 기다림으로 지친 여름 바다는
분명 사랑의 아름다운 약속이다.
2월의 언어
바람이 분다
백운대나 인수봉 어디쯤에서
온몸으로 비상을 몸부림치던 잔설(殘雪)
이제 그 가녀린 기지개를
풀풀 날리며 바람이 분다
겨우내 한 올 꿈을 풀어
구름 속에 띄어 보낸 아픔들이
언제나 봄을 예비하지 못한 미물들의
지각없는 기다림처럼
산골짝 개울물은 그래도 여린 햇살에
움츠려든 그 꿈을 묶어 말리고
지금쯤은 버들강아지 함초롬한 미소로
사랑의 어넝를 토해 내고 있는지
다시 바람이 불고
마른 풀잎 서걱이는 텅 빈 자리마다
한 모금 치솟는 입김이여
그래서 2월에 부는 바람따라
우리의 명징한 꿈들은
한 포기씩만 돋아나는 아아,
사랑의 싹인가 보다.
7월에
우리의 목소리는 늘
7월, 저 푸른 나뭇잎에 도르르
도르르 미끄러지는
아침 이슬이다
밤이면 지친 바람 한 점 그리며
초롱한 눈빛, 저 먼 하늘 가으로
전설에 섞이지만
언젠가 우리의 노래는
그 나뭇잎의 흐느낌만 닮았다
우르르 무너지는 별빛 속으로
7월의 모든 추억을 감추면서
창문을 열어라.
사랑이 이제 도르르 구른느
아아, 마음 그냥 열어둔 채
고개 숙인 저 한 무리의 햇살.
사고다발지역
--그 시각 외고병원 응급실과 내고병원 진찰실은 초만원이었다
오즘은 사고나 나면 한꺼번에 몇 다발로 묶어서 나는가 봐요. 모두 조심스럽게 살아여죠
이런 곳에서는 인간이 한낱 빈 들판에서 흔들리는
허수아비의 환상으로 변한다니까요
이제 제대로 켜지기를 거부하는 신호등
충혈된 눈만 껌벅거린다
무중력의 가슴으로 날마다 취하여
지그재그 돌진하는 우리네 삶들
아아, 내 온몸에서도
이따금 한 다발씩 분출하는 퇴적열
글쎄, 조심해서 건너세요
지명(知名)의 건널목.
상황 . 1
나 혼자 일어설 수가 없었다
청명한 하늘엔
그 별빛이 무너진 채
어쩌다가 내 품에 그득 담기려는 이 서글픔
어둠 깔린 먼 발치에서
아직도 서성이는 어리석음으로
하여, 유성처럼 길게 누워 있었다.
상황 . 2
천둥번개가 동반한 소나기가 금방 쏟아질 듯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 빈 들판에서 담배만 노상 빨아대며 무엇인가 찾고 있었습니다
다가올 듯한 그 무엇을 오늘도 기다리며 누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 곁으로 썰렁한 바람만 소름끼치도록 흔들고 이습니다
시간 속에 헛되이 놓쳐버린 바로 나를 찾는 나는 내 영혼이 한참 머물다 간 빈집 울타리 안에서 그것이 삶이란 걸 알았을 때 소나기는 이미 나의 내장을 훑어내고 있었습니다.
대 화
한 점 여린 바람에도
눈물짓는 꽃이거늘
오밤중 저 별들마냥
흔들림에 길들여졌을까
하도 많은 설움 비바람에 섞여
꽃은 떨어지기 위해 꽃잎을 피우고
밤마다 그리던 환희의 눈짓으로
별은 속삭이기 위해 어둠을 흔든다
되돌려 놓기 어려운 우리네 삶이여
늘 취한 채 끊임없이 쏟아내는 허물
낯선 골목에 버리며, 또 버리지만
흐느낌만 가슴 가득 쌓이는데
꽃은 별이 되고 별은 꽃이 된 채
한 범 바람에 눈물 지우고
다시 일어서는 애잔한 꽃잎이거늘
그립다, 빈 들판 홀로 내리는 별빛이거늘.
여름을 꿈꾸며
여름나무는 겨울을 꿈꾸지 않는다
고향 뒷산으로 보송보송 피어오르던
솜털 같은 구름은 여름이 마냔 좋았지만
어디 계절의 순리를 그렇게
내 맘처럼 되는 일 있더냐
겨울나무는 헐벗은 자의 이미지만 한 짐 진 채
막연하게 여름을 꿈꾸고 있다
심연 가득 가난으로 채워진 자의 눈물을 비우며
어쩔 수 없는 상징 몇 개만 구름으로 띄우고
윤사월 설영근 청보리는 싫어싫어
또 다시 꿈꾼다, 허망의 행렬이 어지럽고
담장너머 무성한 장미꽃을 꿈꾼다
그러나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순환의 법리도 저 멀리 빗겨가고
한 알 잘 익은 석류를 예비하면서
여름나무는 그래도 겨울을 꿈꾸지 않는다
고향 뒷산 전설로 남은 구름처럼
어디 순리를 거역할 수 있는 일이더냐
태풍이 오리라는 예감의 여름 기상도 위에
꿈은 그냥 꿈으로서 흐를 뿐이다.
슬픈 황새여
날마다 비가 내렸습니다
산성비에 삭아서 빠진 순백의 깃털
한가로이 노닐 강물을 빼앗긴 나는
영원한 허공의 미아로 떠돌다가
독한 빗물 한 모금 삼킨 채
시커먼 주검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내가 순백의 날개를 접고
확인된 착지지점은 벌써
나락으로 끝없이 파묻히는 검은 물살처럼
중중의 현기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내 온몸 잘게 부수어져
거대한 하수구에 빨려들 날을 예비한 나는
비오는 날 젖은 황새의 슬픔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정쩡한 말꼬리로
애처롭다 애처롭다 그 슬픔에 고개 돌리지만
BOD 몇 천 PPM으로 녹아버린 눈물만
희뿌연 물거품으로 둥둥 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비 개인 날은 비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슬픈 황새여
마지막 타오른 생명의 불꽃을 어이 할거나 황새여
최소한 몇 리터의 산소가 필요한 지금
너의 아픔을 닮은 사란들 한 무리가
아아, 이 미몽의 벌판에서
바쁘게 빗줄기를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둥굽은 물고기처럼
비실비실 어둠을 잘라내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무도 황새 발자국을 본 사란은 없었습니다.
미로 실험(迷路實驗)
내가 가는 길은 오직 지팡이 사랑이다
더듬이를 잃어버린 한낱 미물의 제자리 찾기
두 눈을 부릅뜨고도
어쩔 수가 없었나니
파아란 하늘이 보이지 않는 너
길게 뻗은 신작로 지워진 뒤
아스라하게 시간이 달려가고
감지되는 방향도 어쩔 수가 없었나니
눈물겹도록 우우 바람 소리 들리는
오늘은 교성곡(交聲曲)뿐일러니
어쩐지 오늘은 유년의 풀꽃만 더듬으며
길섶에 뿌리는 눈물 한 사발
어쩔 수가 없었나니
네가 가늠하는 먼 길 행방이
내가 비로소 찾아나서는 한 송이 들꽃일지라도
아아, 지팡이의 예비된 흔들림
또한 어쩔 수가 없나니
두 눈을 감은 채 사랑을 찾아나서는 일은
오직 함께 지탱해야 할
가녀린 지팡이뿐인 것을,
하마 삭아버린 바람인 것을.
백두산 . 1
안개 자욱할 적마다
지고한
당신은
붉은 태양을 안고 싶었다
한반도에 검게 짓눌린
비와 구름과 바람이
물러간
신비를 우리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리, 안개가 태양을 감춘 채
또 다시 새로운 천지(天地)를 창조하려는
용틀임만 천지(天池)에 가득하다
흐린 시야에 얼비친 찌푸린 얼굴
당신의 지고한 신지 속에, 다시
싸늘한 가슴으로 나를 묻었다.
백두산 . 2
누가 이 영봉에 오르는 길을
막았는가, 소망을 막았는가
허리 짤린 몸둥아리의 한스런 날들이
안개비에 젖은 채 삭여지고 있다
누군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다
조심스럽게 응답하는 천지의 물결
그 장관이 지워져 간 역사 위에
불현 듯 다가오는 한반도
내 다시는 이 길로 당신을 찾지 않으리라
우리 땅
우리 길
우리 산을 올라
환하게 영린 창조의 햇살을 맞으리라
신비로움만 내 작은 온몸을 감싸 안고
안개 속을 떠간다
반만년 신화가 내 앞에 꿈틀대는 순간
천지여, 푸른 물 깊이 잠긴 어둔 한 자락 한이여
다시 대한민국 만세를 몰래 부르고
큰절을 올린다, 누군가-침묵뿐이었다
골 깊은 인욕(忍辱) 한 조각 둥둥 떠가는데.
유배지의 아들
--연변(延邊)에서
한(恨)이었다
한이라도 풀 수 있는 매듭마저
먼 세월에 앗긴, 그래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피울음
엉긴 가슴을 쥐어뜯고 땅을 치며 살아왔다
떠나야 헸다
고향 산천 부모형제 남겨두고
침략의 그 고통, 그래서 푸른 하는 쳐다보는 눈물
배인 발걸음 간도땅 어디에서 멈추었다
살아야 했다
황량한 만주 벌판 눈덮힌 돌밭 산비탈
목숨 하나로 일구 연길 도문 용정 훈춘 하얼빈 창춘
어디서나 오직 배고픔과 추움과 싸워야 이겨야 했다
친구여, 잊은 듯 긴 역사의 닫힌 뒤안에서
그대의 맺힌 마음 한 조각 예서 보았노니
우리 말 우리 글, 그로 하여 한풀이 한 마당은
차라리 내 가슴 뭉클 어리는 사랑이었다.
두만강
--도문(圖門)에서
두만강 푸른 물과
노 젖는 뱃사공은 떠나고 없었다
다리발 절반 청색 저쪽
저쪽이 우리 땅 함경북도 남양이라 한다
음산한 굴뚝 연기만
빗속 흐린 시야에 가득 어른거린다
손끝으로 북한을 가리키는 사이
중조(中朝) 국경선 초소 경비병의 눈초리
아아, 그리운 내 님이여
초췌해진 김정구의 옛 노래 따라
중국에서 아스라한 우리 땅
그리운 내 님은 흙탕물에 하염없이 떠가고 있었다.
--
만리장성에서
--맹강녀(孟姜女)와 함께
중국에 와서 만리장성을 오른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 등에 업고
성곽의 장엄함보다
내 발 밑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
맹강녀의 눈물이 먼저 밟힌다
그대여, 오늘도 성곽 저 바깥
어디쯤에서 목쉰 사랑을 찾아 헤매는 메아리
그대 빈 가슴에 어린 피멍울
만리장성을 오르며 오늘은
찬란한 역사의 유물이기를 거부하는
이 을씨년스런 내 발자국엔
그대가 띄워보낸 회한의 한숨소리만 아득하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로 만난 전설 속 그녀
그대와 함께 만리장성을 오른다.
--
알마아따의 새
누가 어둠을 몰아 황량한 시베리아쪽으로 우리의 피울음을 섞었는가. 강압으로 이곳까지 둥지를 옮긴 한 무리의 새들이 모국어로 섧게 울고 있다. 뿌연 달빛 반세기를 그리움 싸안은 채 텐산(天山) 마루에서 어둠 속을 빙빙 돌아나가고 나뭇잎 가녀리게 흔들릴 때마다 까레이스끼는 더욱 목청 돋구어 모국어로 노래를 불렀다. 아직도 따스한 피가 너를 기다리며 꺼이꺼이 눈물로 세월을 훔쳐내는 나를 닮은 저 새야.... 한진, 이진, 허진...비록 주름살로 감추어 역사의 골짜기에 머문 한 점 구름이 가쁜 숨 몰아쉰 채 내 가슴 피멍으로 언긴 밤일지라도 새야 새야 어둠을 살라먹고 어이할거나. 이제 막 생기 도는 나뭇가지 이에서 박 미하일, 강 겐리에따, 김 블라지미르, 예고르의츠, 김기봉......용케도 강줄기 뜨겁게 흘러온 아, 우리의 새들이여, 밤으로만 비상하는 알마아따의 새여, 오늘도 텐산산맥 저 너머로 아우러지는 긴 너의 슬픈 노래 한 음절이여.
*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난 우리 동포들임.
--
레닌 묘(墓)에서
크렘린 궁 앞, 붉은 광장
엷게 비켜가는 구름 한 조각은
궁성 안 어느 첨탑에서 울릴 종소리
은은하게 기다린다
낯선 관광객이 몰리고 낮 열두 시 정각
소련군 병사들의 절도 있는 걸음으로
68년이나 변함없는 보초병 교대식
--아직도 화려한 의식 속에 되비치는 섬뜩함
갑자기 크렘린 궁 저 편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와와 렌니의 동상을 무너뜨린 함성
개혁의 소용돌이가 들린다
레니주의의 피묻은 육신은 갔지만
메아리로 남은 시신으 ㅣ마지막
숨소리를 위해서일까
명물로 남은 저 보초병 교대의식 장면은.
--
성 페테르부르크의 바람
발틱해 한 무리 해풍에 젖으면
지금도 레닌그라드의 붉은 냄새가 풍긴다
쁘리발티아스까야 호텔에서 창문을 열면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붉은 깃발이
금방이라도 나부낄 것 같다
백야(白夜)를 등진 남녀, 짙은 포옹으로
마침내 자유다 자유
해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스빨시바(고맙습니다)! 바람이여
여창(旅窓)을 때리는 바람이여
어설픈 자유의 날개짓
어쩌면 이방인의 가슴을 이리도 짓누르느냐
어디쯤 배화하는 레니그라드의 구겨진 함성
-빠 마기떼 쯔 네(도와 주세요)
빠 마기떼 쯔 네!
러시아의 미녀들의 쓴웃음을 삼키는
성 페테르부르크의 저 검은 바람이여.
--
백야(白夜)
핀란드만 모래펄에서
진로 소주를 마시다가 희뿌연 바닷물까지 마셨다
지금은 밤 열 한 시
술잔에 용해된 어둠이
북극에서 환한 가슴앓이를 시작하고
비워진 소주 대신 향수를 마셨나
네바강 한 켠에 정박중인
소련 해구 순양함에 탑재된 포신(砲身)
백야의 광채에서 빛바랜 채
술 기운으로 체온 조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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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브르크 문 앞에서
베를린 장벽이 힘없이 무너지던 날 한 조간 돌로 튕겨져 끈끈하던 동서독의 희열이 노점 기념품으로 관광객 시선을 모두우고 있었다
시퍼런 총칼도 스스로 나약해진 불꽃러럼 타오오른 자유여, 탈출의 전사들은 지금 십자가를 베고 누운 채 그 침묵 위로 질펀히 깔린 것은 자유의 햇살만이 뿌였다
뜨겁게 더욱 뜨거운 함성과 총성이 바람으로 떠돌았던 이 문으로 하여 우리의 휴전선 철망의 가시는 얼마간 아픔으로 남아 있을지 우울하기만 하다
이데 동도과 서독은 사라지고 오로지 독일의 거대한 혼불로 일렁이는 이 통로 앞에서 무너진 작은 돌 조각 하나로 빨려드는 오늘은 다만 동양의 관광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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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소묘
여보시오
서울과 개성을 넘나들던 길손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초가 주막 지등(紙燈)은 어디 있소
일그러진 널문리 길목
탄흔(彈痕)만 아프게 얼려 있는데
자유의 집 난간에서 넋 잃은 채
굽어보는 저 북쪽 산천
아직도 지워지지 못한 실금(休戰線) 너머
그들은 망원경으로 무엇을 찾고 있나
판문각 뒤로 뚫린 길
아스라이 북으로 달아나는 길목
짤린 미루나무 밑동에는
어느 병사의 영혼이 서성이고 있는데
아아 단절의 그 아픔, 어이 할거나
소름 끼치는 정먹만
널문리 그 주막 그 길손의 흐느낌으로
마냥 긴 겨울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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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장 지대
바람아, 북녘에서 남으로 떠돌다가
지뢰밭 어디쯤에서 혹시
버려진 녹슨 철모를 보았는가
민들레 꽃 한 송이
삭아버린 역사를 뚫고, 저 혼자
핏빛으로 흔들린다
어느 병사가 죽음으로 외친 함성
산중턱 어디메서 옹옹대는 바람아
통일, 평화, 자유.......
그냥 녹이 슨 우리들의 꿈과
잠들 수 없는 영혼은 함께
핏빛 한으로 얼룩진 저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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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尹東株)
바람과 별이 잠깐 머물다 간 해란강가에서 지금은 외딴 논가 우물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그리웁던 그 사나이 얼굴, 그대는 영원한 바람으로 내 곁을 맴도나니 그대여, 한 줄기 별빛으로 사라지urks so 이토록 마냥 하늘 우러러 그대를 닮으려했지만 어둠처럼 쏟아지는 부끄러움, 아아 하늘도 별도 시도 아직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는 그 아픔만 등짐진 채 오늘도 그대 발자국만 더듬는다
누가 시인의 추억을 지워버렸는가
누가 시인의 사랑을 앗아 갔는가
누가 이 땅의 시인, 별 하나로 하여 쓸쓸해하던 영혼을 삼키고 말았는가 어머니, 어머니 밤새도록 별만 헤는 중국땅 외론 용정 동산에서 차거운 밤이슬 우에 그대 이름자(字)만 잡초에 묻혀 지금도 눈물과 위안의 악수를 기다리는 그대, 영원히 부끄럽지 않을 그대 이름 아슬히 내게 다가오는 아득한 밤이면 불타는 그대 시혼 불러일으키며 우리 함께 남의 땅 육첩방이 아닌 환한 들불 켜진 그대 그리운 조국에서 그대 여윈 얼굴 위에 어른거리는 무지개빛 시 한 아름 부둥켜 안아 그대 따스한 체온을 새기노니
아아, 이제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섬뜩한 게다짝 질질 끄는 후쿠오카 형무소의 악몽을 벗어나리
그대여, 이제사 정녕 벗어날 수 있으리.
--
연기자 윤석화(尹石花)
어차피 나는 하나였다. 노래와 춤이 그렇고, 연기가 그렇고, 그리고 여린 목소리와 젖은 눈시울과 내 곧은 몸매마저 내가 날을 수 있는 모든 공간으로 밤에만 둥둥 띄우는 혼자뿐인 그것은 집념이었다. 예술이며 인생이며 모두 매듭으로 엮어서 사색으로 혹은 이상으로 이 세상 하찮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듯 한을 풀어내고 있다.
아아, 오늘도 그것은 한 잔 술에 담긴 집념으로 나풀대는 절규절규, 그것은 차라리 내가 간직할 수 있는 먼 허공까지 뜨거운 혼불로 다가온 그대 가슴 깊은 곳을 열어둔 채 무대 위로 이슬 내리듯 치렁치렁한 하얀 별빛, 아니 그것은 영롱한 무지개의 일곱 색깔을 풀어 마신 영혼의 동반자를 갈구하는 향기 짙은 사랑이다. 정갈한 사랑이다. 거기 나의 길로 홀로 날아야 하는 한 마리 작은 새의 속삭임으로 외로운 풀꽃 흔들면서 그대 가슴 깊은 가슴 속 노래 한 소절 슬프게 뿌려지는 사랑의 영원한 등불, 천사처럼 어차피 날아야 하는 나는 오늘도 하나였나니.
--
무용가 김근희
청순한 곡선으로 하늘을 가른다
하얗게 타버린 영혼
그대 은은한 영혼의 향기 흐르는
은하수를 닮아
길게길게 환상의 끝에 휘감긴다
잔잔하게 풀어 헤치는
무대 위 사뿐사뿐
우리네 일상이 비상하고
곱게곱게 일렁이는 그대의 혼불
아아 한 쪽 팔 비껴 올려 흔드는 율동처럼
우리네 아름다운 마음도 함께 흘러라
청순한 곡선이 다가 간
저 환상의 날개 위로
아직도 타지 못한 한 소절의 노래
그대여,
굽이굽이 흘러내린 춤사위
꿈으로 깊어지는 사랑이어라
갑사 치마폭에 감싸 안은
연혼의 합창
진실로 향기 가득한 사랑이어라
여기 환하게 드리운 신비의 예술
아아, 하늘을 가르며 타오를 뜨거운 사랑이어라.
--
그날의 노래
--서울올림픽 공원에서
동방의 아침 나라
활활 타오른 성화의 불길과
바다 건너 울려 퍼진 승리의 함성과
백두에서 한라까지 펄럭인 평화의 깃발과
너와 내가 하나 된 화합의 혼불과
아, 그날의 노래가
아침 햇살처럼 곱게 물들었다
한 아름 꿈이 밀려왔던 세계의 서울
싱그럽게 뻗어나간 지구촌의 빛
여기에 아름다운 우리 마음밭 일구어
지금도 저 분수처럼 솟구친다
영원하라, 어둠 사뤄 따사로운 이 땅
모두의 가슴에 안겨오는
그날의 노래여
그날 성화의 불꽃이여!
--종(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