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창 1:1에 처음 등장하는 창조로 오역한 단어가 바로 근본 그리스도다.
2) 하나님은 죄에서 나온 우주, 만물, 시간, 공간을 절대 만들지 아니하신다.
3) 하나님이 창조하지도 않은 우주를 거짓말로 꾸며서 진리로 믿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4) 징계로 잘못 번역한 ‘파이데이아’는 아들에게 훈련, 양육하는 개념이다.
나. 본론
“라오디게아 교회(에클레시아)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 되고 찬 된 증인이시오, (그) 하나님의 (그) 창조(크티세오스)의 근본이신 이(헤 아르케)가 가라사대(계 3:14)”
‘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투 데우 : 그 창조의 근본(근원)이신 이’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창조’라고 번역한 ‘크티세오스’는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으로 채워진 나를 진리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것인데 ‘창조’로 오역하였다.
감각적 욕망의 마음 밭을, 정과 욕심으로 가득한 마음을 파헤치고 뒤집어서 옥토 밭이 되도록 가꾸는 일을 말씀한다. 창조(크티세오스)로 번역된 원형 ‘크티시스’는 창 1:1의 ‘창조하다’로 잘못 번역한 ‘바라(개간)’ 동사의 동의어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근본(헤 아르케)’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창 1:1에서는 ‘태초’로 잘못 번역한 ‘베레쉬트’와 같은 말이다. ‘베레쉬트(근본)’를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하고 있다. 이분이 근본이다. 시간 개념이 전혀 없으며 시제 또한 없다.
‘베레쉬트(근본, 근원)’를 드러내기 위해 엘로힘(하나님)이 ‘바라(마음 밭을 갈아엎으심)’ 하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의 일 곧 마음 밭을 해체하여 뒤엎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1) 창 1:1에 처음 등장하는 창조로 오역한 단어가 바로 근본 그리스도다.
근본인 그리스도 예수의 세계가 창세기 1:1부터 등장하는데 구약성경의 맨 처음 등장하는 ‘베레쉬트’가 곧 나의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다. 원래부터 내가 근본인 그리스도 예수다. 이것을 모르고 내가 술 취해 있음을 정의하고 있다. 술 취하게 하는 겉 사람들이 바로 처음 등장하는 그 하늘들과 그 땅이다. 곧 마음의 그 하늘들과 그 마음의 땅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들이 술에 취해서 나의 근본을 빼앗아 간 것이다.
그래서 창 1:1부터 성경 전체가 이 들에 대한 정체와 실상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인생은 이들을 섬김으로써 노예가 된 것도 모른 채 이를 나의 주체로 알고 살아간다. 이것을 경에서는 ‘죄(하마르티아)’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는 이 죄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스도든 하나님이든 다 비유다. 단지 그 근본을 알려 주는 방편일 뿐이다. 근본인 그리스도 예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나’ 자신을 회복하는 길을 정의하고 계신다.
근본이 회복되면 그리스도나 하나님 이런 단어는 모두 사라진다. 단지 인간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저편(하나님) 세계의 근본(근원)은 언어의 세계가 아니다. 지식의 세계, 느낌, 인식, 반응의 세계가 아니다.
2) 하나님은 죄에서 나온 우주, 만물, 시간, 공간을 절대 만들지 아니하신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창 1:1)” 오역이다.
성경 | 개역 성경 | kjv 성경 | 원어 성경 |
창 1:1절 | 태초에 | in the beginning | 베레쉬트 (근본) |
요 1:1절 | 태초에 | in the beginning | 엔 아르케(근본) |
요 1:2절 | 태초에 | in the beginning | 엔 아르케(근본) |
행 11:15절 | 처음 | at the beginning | 엔 아르케(근본) |
빌 4:15절 | 시초에 | in the beginning | 엔 아르케(근본) |
번역된 성경 구절은 원래의 의미에 조금도 접근하지 못한 채 빗나가 버렸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 시간, 공간을 만든 사실이 없다. 엉터리 번역 때문에 180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엉터리 성경을 대상으로 믿으며 지금까지 대속 신앙에 빠져 살아왔다.
3) 하나님이 창조하지도 않은 우주를 거짓말로 꾸며서 진리로 믿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깨달음이 오기 전까지 모든 문제는 고난의 과정 안에서 힘든 종의 여정을 보내게 된다. 정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진리의 말씀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태초에’라고 오역한 ‘베레쉬트’는 나의 ‘근본’을 말씀하고 있다. 곧 ‘그리스도’라고 정의한다. 나의 근본(그리스도)을 어찌 시간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간 개념이 전혀 없다. 나 자신이 처음 그 하늘과 처음 그 땅으로부터 나오는 술(무명)에 취해 현재 미래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등장하는 그 하늘들과 그 땅에 속아 있는 한 근본(시간 개념 없음)을 모르고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 진짜인 양 바알 신에 빠져 술에 취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죄(하나르티아)다. 나의 근본을 잃어버리는 것이 죄(하마르티아)다.
그래서 경의 첫 구절부터 ‘베레쉬트를 드러내기 위해 엘로힘(하나님, 남성)이 그 하늘들(핫 샤마임)과 그 땅(하 아레츠)을 바라(개간)하신다.’ 하였다. 성경은 처음부터 계시록까지 모두 이 말씀으로 이어지는 핵심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것은(고전 15:31) 실제로 죽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깨어나기 위해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순간순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 밭의 정체를 알고 말씀(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해서 일구는 것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카타볼레스(마음 밭을 일구다)’와 같이 ‘메타노에오(마음 안을 들여다보다)’의 개간하는 일을 행함으로 죄가 떠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4) 징계로 잘못 번역한 ‘파이데이아’는 아들에게 훈련, 양육하는 개념이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징계’로 잘못 번역한 ‘파이데이아’는 아들에게만 하는 훈련, 양육이다(창 1:1부터 아들에게만 하는 말씀이다). 아들에게 하는 것은 ‘징계’가 아니다. 이 훈련을 받으면 겉 사람의 감각적 욕망이 떨어져 나가게 되고 내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 곧 그 근본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로 잘못 번역한 ‘바라’는 잘못된 우리 마음 밭을 파헤쳐서 옥토 밭이 되도록 개간하는 일이다.
근본, 근원(베레쉬트, 여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남성)이 그 하늘들(바라는 마음 갈애(渴愛)과 그 땅(이루어진 잘못된 마음)을 바라(마음 밭을 해체해서 갈아엎으신다) 하시느니라(창 1:1)
창 1장부터 3장까지는 문법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모두 히다와 마샬로 이루어졌다(3장 이하도 마찬가지다). ‘베레쉬트’는 그리스도 곧 무아다. 무아는 안팎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창 1장은 창세기가 아닌 ‘베레쉬트(근본)’기다. 창세기란 없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잘못 알고 있어서 창세기로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창 2:4절 ‘톨도트’가 처음 등장한다. ‘엘레 톨도트’다. 우리말 번역은 ‘대략 이러하니라’고 오역하였다.
‘엘레 톨도트(창 2:4)’의 뜻은 ‘자손(후손)들이다’ ‘톨도트’는 자손 또는 후손 계보에 해당하는데 이것이 헬라어로 ‘게네세오스’다. ‘아들’을 낳으심이다. 그러나 우주 창조로 오해하여 창세기(제네시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