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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교령과 80년대 초반 건대문화
-글 | 이형진(80학번)
20여 년 전의 일을 캐자니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다. 사건의 전후 관계는 물론이고 누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알리바이를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황당하기만 한데, 얽힌 실타래를 풀 듯 기억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헤매다 보니 요행스럽게도 망각의 창고에 있던 장면 장면들이 스물스물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며 참으로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사람들… 추억이라기에는 사뭇 치졸하기까지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드러내야 할까. 누군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 기억하고, 망각하고 싶은 것만 골라 망각하리요만 망각 속의 존재가 되살아나는 이 묘한 조화 앞에서는 그런 말조차도 한낱 미사여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해서 되살아난 많은 존재들, 그리고 그 존재들이 한데 어울려 엮어냈던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건 아마도 희망사항일 게다, 다른 누군가들이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한.
뜻하지 않게 80년대 초반의 건국문단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사설이 길어졌다. 더 이상 샛길로 빠져들기 전에 옛날 이야기를 해보자.
시련의 80학번
김연실, 김한주, 서봉수, 성세용, 유인경, 윤성일, 이선기, 이승춘, 이인근, 이형진, 황성순. 일단은 11명이다. 이외에 몇몇이 얼굴을 보였다가 사라졌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어쨌거나 초창기 멤버는 11명. 이들 중 몇몇은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졌고, 셋은 단칼에 제명되었다. 그중 하나는 풍기문란(!) 나머지 둘은 건국문단 회원으로서 창작에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엄청난 죄목이었다. 당시 내 동기들을 자르는 데 악역을 맡은 분은 문영숙 선배. 재판정은 일감호가 내려다보이는 유석창 박사 묘 언저리. 때는 81년 봄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더럽던 기분 그대로 문단을 박차고 나왔더라면 이런 글도 쓰지 않았으련만. 남은 동기 몇몇이 동반탈퇴하자고 단호하게 결의했건만 취중 모의였던지라 술 사주는 선배, 밥 사주는 선배, 잠 재워주는 선배… 그런 선배들의 당근 작전에 걸려들어 작심 하룻저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남은 이들이 사학과 동기이기도 한 서봉수, 이선기, 이형진, 행정학과의 이인근. 물리학과의 윤성일, 가정학과의 김한주, 이렇게 6명이다.
▶ 80년 가을의 시화전 :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서봉수, 윤성일, 황성순, 이성기, 이형진. 나루문학회라는 이름으로 이채롭다.
대운동장 벙커 시절
내가 문단방을 찾은 것은 입학하자마자 서봉수와 함께였다. 정창범 교수님의 문학개론 시간이었던가? 수업 시간 말미에 강창래 선배(정확하지는 않다)가 문단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했었다. 꼭 그래서 간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물어물어 찾아간 문단방이라는 게 대운동장 계단 밑 쪽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 남녀가 소파에 붙어앉아 수작 비슷한 걸 부리고 있었다. 오호! 문학도 하고 연애도 하고… 요즘말로 고삐리를 갓 면했으니, 세상 모든 여자가 내 애인 같은 시절이었다. 그래,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로 건국문단을 찾아왔다고 했더니 남자가 턱으로 왼쪽 끝에 있는 쪽문을 가리켰다. 거기서 처음으로 만난 분이 오만환 선배. 아, 그때의 궁상이라니! 컵이며 의자며 소파며 책상이며 예평회에는 없는 게 없는데, 문단은 그런 게 있어도 놓을 자리가 없는 가난뱅이였다. 나중에 학생회관 308호로 옮기기까지 건국문단은 예평회에서 더부살이를 했고, 나한테 달콤한 환상만 심어준 그 예평회를 나는 이래저래 내내 소 닭 보듯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치러야 했던 고행의 합평회 시간, 깨지고 깨지다 지쳐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따위 문학 때려치우자고 흑심을 먹었던 순간들, 그러면서도 학과 공부보다 문단일에 더 열심이던 시절이었다. 학기 초부터 시작된 문무대 입소 반대 운동, 그해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가투, 서울역 대회전, 그리고 광주… 그 와중에 휴교령이 내렸는지도 모르고 학교를 찾았다가 교문 앞에 버티고 선 무지막지한 탱크를 맞닥뜨렸었다. 5월 17일은 공교롭게도 문단에서 북한산으로 신입생 환영 MT를 가는 날. 전날 문단방에서 기타 가져오는 걸 깜박 잊은 내가 아침 일찍 학교를 들어서다 맞닥뜨린 광경이었다. 서클룸에서 기타만 가져올 테니 들여보내 달라고 했지만 군발이들이 들어먹어야지. 그래, 빈손으로 일행과 합류해서 음주가무에 북한산 나들이를 신나게 했으니… 아무리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해도 두고두고 가슴 한켠이 묵직한 MT로 남아 있다.
휴교령과 후진 해수욕장 MT
휴교령에 이어 자연스레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그 긴긴 시간 동안 우리는 화양리의 세종다방을 문단방으로 삼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빠지지 않고 합평회를 했고, 그 여름 언저리에서 당시 우리에게 문단의 신화로 통했던 류환 선배를 만났다. 휴가를 나와 군복 차림인 류환 선배와의 만남은, 내게 신화와는 다른 의미에서 충격이었다. 합평회 자리에 나온 선배가 내 시를 “거짓말”이라고 씹어댔는데,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두 달이 넘게 원고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해 여름엔 방학 MT로 동해안에 있는 후진을 찾았다. 80 동기 중에선 유일하게 김한주만 빠졌고, 회장인 배문성 선배를 비롯해 많은 선배들이 참석했었다. 그때 우리 동기들이 벌인 수박사건은 내내 웃음거리가 되었다. 대선배들이 손도 안 된 수박을 동기 몇이 작살을 내버렸는데, 배문성 선배가 군기를 잡는답시고 똑같은 크기의 수박을 구해오라고 특명을 내렸다. 뙤양볕에 수박 파는 가게까지 무려 한 시간을 걸어가 비슷한 크기의 수박을 사오긴 했는데, 그걸 깨먹을 때까지 동기 중 하나가 다른 악동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야 했다. 그때 했던 연극 제목이 ‘돈키호테’였는데, 로시란테인 내가 돈키호테 역의 김경자 선배를 황송스럽게 등에 태우고 기어다니기도 했다.
▶ 후진으로 떠나기 전 청량리에서. 배문성, 황성순, 서봉수, 이형진, 이승춘, 윤성일, 김한주, 김기홍, 김경자.
79학번 선배들
80이 79 얘기를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그 어느 학번보다 79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또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야기를 보태는 게 좋을 듯하다. 강창래, 김경자, 김기홍, 김연홍, 김종갑, 배문성, 송세용, 채풍묵….
강창래 선배하고는 건국문단 현판에 진흙을 개어 발라 달던 기억이 있다. 합평회를 할 때마다 선배의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며 곤혹스러워했는데, 의기소침해진 내게 한동안 시작법에 대한 충고를 해주고, 일주일에 열 편인가를 써서 바쳐야 하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아주 나중 일이지만 선배는 정문 쪽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카페를 개업했다. 주머니가 빈약한 선후배들이 아지트로 삼기에 꼭 맞는 장소였는데, 아마도 그런 우리들 때문에 영업에 큰 지장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최승호 시인 등을 초청해 문학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곳도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김경자 선배는 79학번의 홍일점. 80에게는 친누나처럼 정겨웠던 분이다. 80이 문무대에 입소했을 때 면회를 왔던 기억이 새롭다. 밤이 늦도록 술을 마시다 술값이 모자라면 언제고 우리 곁으로 달려오곤 했다. 선배네 집이 자양동이었던 게 업보라면 업보였다.
김종갑 선배는 영문과 김기홍 선배, 김연홍 선배, 채풍묵 선배는 국문과 동기였다. 김연홍 선배하고 김종갑 선배는 늘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분이었고, 김기홍 선배는 차분한 성격으로 후배들을 많이 챙겨줬다. 송세용 선배는 기타를 아주 잘 쳤는데, 잦은 연애의 실패 때문에 상처난 마음을 노래할 때면 내 가슴이 다 울적해지곤 했다. 채풍묵 선배는 2학년 때 문단에 입회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학도호국단 단복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적 감성을 지닌 분이었다. 시하고 시조를 썼는데, 적어도 작품만으로는 그랬다. 선배는 나중 대성리 어딘가로 MT를 갔을 때 그 본성(?)이 드러나 80의 집중 포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80 동기 중 서봉수(당시 방위 복무를 마치고 복학 대기였던가?)에게 취중 손찌검을 했는데… 그 대가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그때 막걸리를 두 바가지나 마시고 토를 했는데 폐허가 된 교회당 처마밑이 때마침 내리는 비와 어울려 허연 내를 이루었었다.
그리고 배문성 선배. 80년대 초반 문단 중흥의 사명을 띄고 회장이 된 분이다. 선배하고는 표상 편집이니, 합평회니, 시화전이니, 문학발표회 같은 문단의 공적인 행사 말고도 추억이 많다. 앞에서 말한 술 사주고, 밥 사주고, 잠 재워주는 선배들 중 이 세 가지 모두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준 선배였다. 선배의 화양리 자취방, 능동 자취방에서 끓여먹던 라면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선배가 심상을 통해 등단했던 작품은 “보길도”. 함께간 여행에서 난 실컷 폼만 잡았는데, 선배는 시라는 걸 써서 등단까지 했으니. 누구는 한심한 놈이었다. 선배는 3학년 때 등단하고 나서 곧바로 영학출판사에 출근했는데, 군에서 제대한 임희근 선배가 학교를 때려치우고 거기서 영업을 담당했다(나도 군에 입대하기 전, 82년 5월까지 수개월 동안 영학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화양리 자취방에선 두 분이 불안한 동거를 하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임희근 선배의 기상천외한 술버릇 때문에 동거는 오래 가지 못했다.
▶ 늘벗분식집에서 문학발표회 뒤풀이. 오른쪽에 양복 입으신 분이 김건일 선배. 임희근, 이기복, 김남곤, 배문성 등의 얼굴이 보인다.
▶ 문학발표회 때 총평을 해주시는 고 정창범 교수님
심재추 선배와 건대문화
81년, 건국문화 편집위원에 문단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는데, 편집장인 심재추 선배 밑에 배문성 선배하고 채풍묵 선배, 그리고 내가 속했다. 아마도 당시가 건대신문사와 문단의 마지막 밀월 시기였던 것 같다. 화양리 장안여관에서 날밤을 새워가며 기획을 하고 기사를 쓰던 일, 동해집 광주집 등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던 막걸리 파티, 그리고 보길도 취재 여행. 완도(해변에 늘어선 해송과 까만 자갈밭의 정도리가 인상적이었다)-보길도(고산 윤선도 유적지 취재가 주목적이었는데, 계곡에서 가재를 잡아 가재라면을 끓여먹던 장면이 압권이다)-목포(목포항에서 그 동안 찍은 사진 필름을 압수당했다. 군사기지인 유달산을 배경으로 배 위에서 사진을 찍어서라나. 암튼 더러운 시절이었다)로 이어졌던 여행에는 박미영 등 건대신문사의 기자들이 동행했었다.
당시 신문사 총무이기도 했던 심재추 선배는 신문사와 문단을 잇는 가교였다. 때문에 신문사 사람들과 문단 사람들이 자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 장소는 말할 것도 없이 동해집 아니면 광주집이었다. 외상술을 퍼마시고 나서 며칠 후 심재추 선배와 함께 그 집을 찾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이때의 기억 한쪽에는 항상 이우학 선배가 있다. 80년 5. 18 당시 공수부대에서 근무했다던 이우학 선배는 그 어눌한(죄송) 말투와 말술로 그때의 아픔을 대신했던 것 같다.
▶ 보길도 취재여행. 배문성, 이형진. 엄청 추웠다.
▶ 보길도 해변에서. 심재추, 배문성, 채풍묵, 이형진, 신문사의 박미영과 친구, 박정근(학도호국단 문화부장)
학생회관 308호
학생회관에서 방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나루문학회라는 유령의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던 일은 이미 전설이 되었고, 그 이야기는 대선배님들께서 해주시리라.
80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회관으로 이사를 했다. 건국문단과 나루문학회, 국어국문학회, 이렇게 세 동아리가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나루문학회는 알다시피 선배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동아리고, 국어국문학회는 유명무실한 동아리인지라 308호는 명실공히 문단만의 공간이 되었다.
81년 박길수, 이민자, 이병찬, 정상헌 등등이 시험과 면접을 통해 문단 회원이 되었다. 정예만을 뽑겠다는 선배들의 타는 속마음이야 어쨌든 간에 시험은 좀 지나친 발상이었던 것 같다. 시대적 소명이랄까, 81년을 기점으로 문단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이야기는 이병찬 후배가 쓰기로 했으니 각설하자.
학생회관 308호에서 나는 많은 선후배들을 만났다. 홍준표 선배. 자작시 “지리산”을 읊던 선배의 모습과 시론을 강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후배들 군기를 잡았던 김수정 선배, 술에 취하면 일감호로 뛰어들려 했던 임희근 선배(물이 자기를 부른다나), 그림 그리기 등 재주가 많았던 이상수 선배, 늘 취한 모습밖에 기억나지 않는 박승렬 선배, 무척이나 말을 아꼈지만 다정다감했던 이기복 선배, 사학과 선배이자 문단 선배이기도 했던 박재환 선배 등등. 그리고 학교 그만두고 취직해서 돈 버는 내게 술 사내라 밥 사내라 귀염을 떨었던 82학번 김남곤, 김형옥, 배문희, 그 외 박기협까지 이어지는 많은 후배들.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손을 빌기로 하자.
▶ 문영숙 선배 졸업 때. 문영숙 선배와 이기복 선배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 체육대회. 문영숙, 홍준표, 김한주 등. 홍준표 선배의 시선을 주목하시라.
80 동기들 이야기
정작 할 얘기는 않고 변죽만 올린 것 같다. 이제 80 동기들 얘기를 해보자. 먼저, 김한주. 여자 동기들이 그만두고 잘리는 바람에 졸지에 80 홍일점이 된 이 친구는 내가 볼 때 선후배들한테 지나치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문단의 돈줄을 쥔 총무로서 술값을 내기는커녕 술자리가 파할 즈음으면 어김없이 사라지는 가시나가 무에 좋다고 그러셨는지들. 그러나 이 친구의 알뜰함이 나는 좋았다. 그래서 연애 걸었고, 결혼했다.
윤성일. 깡마른 체구에 걸맞게 예민한 구석이 많았다. 연애시에 일가견이 있었고, 세상 온갖 고민을 혼자 감당하기 위해(못해서가 아니라) 몇 차례 손목을 긋기도 했다.
서봉수. 전라도 김제 촌놈이 남계(南溪)라는 호까지 지었었다. 고향의 황토를 사랑해서 늘 황토빛 시를 쓰곤 했다. 거북선 담배와 긴 머리칼, 그리고 도끼빚이 연상되는 친구다. 내 치부를 지나치리만큼 잘 알아서 한때는 미워하기도 했었다.
이선기. 듬직한 맏형 타입이지만 의외로 날렵했다. 한번은 화양리에서 패싸움이 났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녀석이 함께 있던 서봉수와 함께 귀신같이 36계를 쳐서 나혼자 정신없이 뭍매를 맞았다. 그 바람에 앞니가 세 개나 부러졌고, 난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무릎 꿇고 벌을 섰다(대학생씩이나 된 놈이!)
이인근. 한마디로 별종이었다. 2학년 때 입회했는데, 그 기발한 입담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뭐든 손끝으로 나와야 할 게 입으로 나와 주위를 안타깝게 했는데, 뒤늦게 손맛을 알았는지 낚시에 몰입해 있다. 마지막으로 나 이형진. 할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