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숫양은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정결함의 상징으로서 뿔은 권세로서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을 비유한 것이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아들이라 하였으나 누구의 아들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3) 몽학 선생 아래 있다가 장성하여서는 반드시 그 몽학 선생을 떠나야 한다.
나. 본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
히다로 되어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문자로 읽으면 뜻이 왜곡된다. 아브라함은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의 품에 지녔던 칼을 내려놓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모리아 산에서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어서(자기 생각) 그 숫양을 그가 가지고 있는 칼로 대신 잡아 번제로 드렸다 하였다.
1) 숫양은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정결함의 상징으로서 뿔은 권세로서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을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은 더이상 칼(도그마)로 살생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여기 나오는 숫양은 세상 짐승이 아니다. 그래서 히다는 참으로 어렵다. 집짐승 숫양이 아브라함과 이삭 둘만이 있는 높은 산 위까지 왜 홀로 올라갔겠는가? 들짐승도 있을 텐데, 숫양은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정결함을 상징한다. 뿔은 힘 있는 자의 권세를 말한다. 바로 아브라함 안에서 나온 하나님의 아들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곳까지(과정) 가야 속사람이 등장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짐승은 모두 사람의 속성을 비유하고 있다. 욥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축들은 욥의 속성을 나타낸 히다다. 세상에서 키우는 살아 있는 가축들이 아니다. 욥이 깨닫고 나서 원래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것의 두 배를 소유하게 되었다. 노아도 방주를 만들고 그 안으로 여호와께서 정결한 짐승 일곱 쌍과 부정한 짐승 두 쌍을 이끌어 오신다. 모두 히다로 된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이삭의 부모도 스승도 아니다. 그 예표로 숫양(아브라함과 이삭)이 죽어야 한다. 이삭을 이끌어 가는 것은 예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져야 하는 십자가 사건이 똑같이 그것을 드러낸다. 이천 년 전에 오신 몸 밖의 예수가 우리를 이끌어 가는 아비가 아니다. 표상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에 대해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며, 이삭 또한 그 죽음을 초월해야만 한다. 그래야 믿음의 조상(근원)이 되는 것이다. 믿음은 겉 사람의 죽음을 초월해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신다(창 22:2)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직접 낳으신다. 이삭을 드림이 아브라함 자신을 드림이다. 이처럼 온전한 속사람이 나타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아들이라 하였으나 누구의 아들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그 이삭을 내어놓아야 한다. 이삭을 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간음이다. 그러려면 아브라함(마음)이 죽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하늘의 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드려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나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삭은 누구의 아들도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 하나님의 그 아들이다. 하나님이 직접 낳으셨다. 직접 낳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명의 빛으로 낳았기 때문에 그 누구의 아들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모에드(생명의 빛)가 경수가 끊어진 사라의 태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님이 직접 낳으신 것이다. 모에드는 하나님 자신이며 그 생명의 그 빛이다. 이삭도 자신을 이끌어 가는 참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자신 안에 계신 생명의 빛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삭을 드림이다.
겉 사람이 기능하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없다. 겉 사람의 잣대인 그 칼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하늘의 제사장이 되어야 아브라함과 하나 된 이삭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릴 수 있다. 그리고 왕으로서 이삭을 받는다. 그래야 이삭과 아브라함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 십일조와 헌물의 핵심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늘로부터 나옴이 하나님께 드림이며 하나님께 돌아감이다.
3) 몽학 선생 아래 있다가 장성하여서는 반드시 그 몽학 선생을 떠나야 한다
몽학 선생 아래 있다가 장성하면 반드시 그 몽학 선생을 떠나야 한다. 아쉽지만 그 스승을 반드시 떠나보내야 한다. 장성하면 몸 밖의 스승을 떠나 보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내 양, 네 양을 구분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 자기 안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그리스도에게 시집도 보내지 않고 과부로 죽게 만들어 귀신들과 마른 뼈들이 가득한 무덤에 생매장하고 못 나오게 매일 매일 봉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살인함이며 간음함이다.
자기 믿음인 그 돌(리도스)을 알뜰히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그 돌을 들고 항상 던질 곳을 찾는다. 참 과부가 예수께 비오스를 드리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비오스를 드린 과부는 더 이상 과부가 아닌 정결한 신부가 되어 예수와 혼인을 하게 된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