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霧山) 교유기
임 보 (시인)
무산 조오현(曺五鉉, 1932~2018) 스님이 입적하자 경향의 각 신문들은 그 소식과 함께 그의 생애를 대문짝만 하게 보도했다. 설악산 신흥사에는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조문객들이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다비식을 향해 가는 수많은 만장과 대중들의 행렬이 숙연하다기보다는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산은 무장무애한 여유로움 속에서 멋스럽고 향기로운 삶을 살고 간 사람이다. 그는 승려이면서 시조 시인으로 술과 시와 사람을 좋아했던 걸승(傑僧)이었다.
내가 무산 스님을 만난 것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이다. 무산을 처음 본 것은 90년대 중반쯤의 어느 여름으로 기억된다. 백담사에서 한 문학단체의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하게 되었다. 세미나가 끝난 후 백담사의 경내를 구경하는데 밝으스레한 얼굴의 한 늙은 승려가 마루에 걸터 앉아 있었다. 그는 플라스틱 물병을 기울여 자주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동행한 문우가 이르기를 그가 시조 시인인 오현 스님이며 그가 마시고 있는 건 물이 아니라 술이라고 넌지시 일러줬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얼굴이 붉으스레한 것은 주기 때문인 것 같았다. 돌아와서 나는 사단시(四短詩, 네 마디 짧은 시) 「준불(樽佛)」을 쓰게 되었다.
백 년 묵은 늙은 중
염주 염불 내던지고
목불(木佛) 한놈 뽑아다가
술통 하나 파고 있네
그리고 이 글의 말미에 이렇게 주(註)를 달았다.
* 설악산에 노승 한 분이 산다. 매실주를 담가 놓고 종일 이를 홀짝이며 지낸다. 염불도 잊은 채 늘 거나해 있다. 말하자면 그의 몸통은 술통인 셈이다. 그래서 술통부처라고 불러본다.
나는 이 글을 사단시집 『운주천불』(2000)에 실었는데, 이 시집을 무산 스님께 보낸 바 있다. 그리고 2005년 4월에 한 문학단체의 세미나에 발표차 만해마을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산 스님이 특별히 나를 찾았다. 아마도 내가 쓴 「준불(樽佛)」이 마음에 남았던지 모르겠다. 무산을 만났더니 자신은 ‘만해장사’를 하고 있다면서, 만해마을 문인집필실을 한 2년쯤 대여해 줄 터이니 마음대로 글을 쓰라고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 마침 그때 나는 안식년을 맞아 강의를 쉬고 있었기 때문에 그해 7월부터 한 20일 동안 백담사에 머물면서 설악산 일대를 돌아볼 수 있었고, 연가집(戀歌集)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미간행) 40수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8월달 만해축전의 축시를 청탁받아 「만해화(萬海華)」를 썼다. 시 한 편에 1백만 원의 고료를 받은 것은 내 생애 처음이었다.
만해마을을 떠나오면서 나는 오현 스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시조 「무산(霧山)」에 담아 남겨놓았다.
비바람 지나간 뒤 청산을 두른 안개
푸나무 천만 가지 어루만져 도는구나
깊은 정 넓은 손길에 눈도 젖어 오노라
내설악 산 경개는 산안개가 으뜸일세
백담의 청기(淸氣)인가 천상의 서운(瑞雲)인가
숨은 뜻 알 길 없어도 가슴 뭉클 하여라
그리고 무산은 2007년 연말에 내가 『장닭설법』으로 <시와 시학상>을 받을 때 시상식장까지 와서 축하를 해 주었다. 2013년 9월에는 무산이 주관하던 《유심》지에 ‘내 삶과 문학’을 특집으로 다루어 주기도 했다.
2014년 9월 추석절에 서울 돈암동 흥천사로 무산 스님이 초대를 했다. 흥천사는 쓰러져 가는 신흥사를 무산 스님이 인수를 해서 새롭게 단장한 절이다. 그걸 보면 무산은 사업적인 수완도 대단했던 것 같다. 흥천사엘 갔더니 절의 맨 위에 무산이 기거하는 별채가 따로 있는데 거기에 《불교평론》과 《유심》그리고 《불교문예》 관계자들을 위시해서 십여 명의 중견문인들이 와 있었다.
그날 무산 스님은 내게 금일봉을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는 내게만 특별히 주는 게 아니라 그가 부른 사람들에게는 늘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봉투를 《우리詩》에 맡기고 오현을 우리시 후원회원으로 등록케 했다.
흥천사에서 무산 스님이 했던 얘기를 「무산어록(霧山語錄)」으로 엮어 스님께 보냈더니 이 글이 다음해 《유심》(2016.6.)에 공개됐다
망령인지 까탈인지 사람들이 보기 싫어
여자도, 이웃도, 도반도 다 싫어
더구나 늙은일 보면 나 같아서 더 싫어
나이가 들다 보면 사람들이 떨어져
제자들도 떨어지고 친구들도 떨어져
저마다 산이 되고자 다 나가 떨어져
강가가 좋을까 산중이 좋을까
찬 나라가 좋을까 더운 나라가 좋을까
마지막 내 누울 자리 어드메가 좋을까
2015년 4월 9일 무산 스님이 인사동 <두레>라는 음식점으로 초대를 했다. 나는 내가 조작으로 그린 시화 「풍경(風磬)」을 들고 나갔는데, 나가 봤더니 구중서 박시교 시인도 함께 부른 자리였다. 그분이 무슨 뜻으로 이 모임을 주선했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으되 아마 짐작컨대 문단과 별로 교유가 없는 나를 위무하는 뜻은 아니었나 모르겠다.
2015년 9월 26일 역시 추석 무렵이었던가 보다. 무산 스님이 흥천사로 점심 초대를 했다. 이근배 오세영 신달자 등의 문인과 성낙인 서울대총장 등 여러 인사들이 동석했다. 무산은 문인들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인사들과도 폭 넓게 교유하고 있었다.
무산의 주위에는 늘 많은 문인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가 《유심》을 비롯해 몇 개의 문예지들에 지원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금이 두둑한 <만해상>을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야망을 지닌 문인들이 많이 모여든 것 같았다.
그날 흥천사를 떠나올 때 무산은 내 목에 걸린 목댕기(끈으로 된)를 붙들면서 “이게 뭐꼬? 이게 뭐꼬?”하며 다그쳐 물었다. 그 정황을 나는 집에 와서 시조의 형식을 빌어 「이 뭐꼬?」를 썼다.
흥천사 떠나올 때
무산 스님께서
목에 걸린 내 목댕기
붙잡고 묻기를
이 뭐꼬? 이게 도대체
뭐꼬? 뭐꼬?
한밤중에 문득 깨어
곰곰이 생각하니
목댕기를 따졌던 게 아니라,
그 참!
똥자루 이 가죽부대가
뭐냐고 다그친 걸!
무얼까? 이 놈이
정말로 무엇일까?
짐승인가? 사람인가?
하인인가? 주인인가?
천하에 시절도 모르는
백수건달일세!
아침엔 채소밭에
물도 주고 풀도 뽑고
저녁엔 매실주에
시도 읊다 똥도 싸고
그밖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 줄도 몰라라
2016년 5월 13일 무산 스님이 흥천사로 오찬 초청을 했다. 신경림 황동규 이근배 정현종 오세영 신달자 최동호 유자효 등 수십 명의 문인들과 유명 인사들이 동참했다. 점심은 조촐한 메밀국수였다. 그날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게‘예술’에 대한 무산의 생각이었다. 나는 이를 「무산 설법」에 담았다.
1
무산 스님이 초파일 전날
문단의 중진들 수십 명 불러놓고
메밀국수 점심 공양을 하면서
설법하기를
예술이란 게 뭐꼬?
이게 다 사기(詐欺)ㄴ기라
하루살이를 성자(聖者)*라 했드니마
세상이 발칵 뒤집힌기라
비평가가 그럴 듯하게 해설을 붙여놓았드마
미국의 저명한 대학에서
내 시집을 출판하겠다는 기야!
하루살이가 성자긴 무신 성잔가!
2
내가 그림도 아닌 그림을
만해 축전에 그렸더니마
한 신문사에서 그걸 지상에 보도를 한 기라
그 신문을 본 뉴욕의 세계적인 화랑이
내게 그림 전시회를 하자고 섭외가 온 게야
한 점에 얼마씩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10만 달러씩에 팔겠다는 게야
(10만 달러면 얼만고? 우리 돈 1억이야, 1억!)
그런 사기가 어딨노?
내가 한 천만 원쯤이면 하겠다고 했더니
그런 싸구려 그림은 자기 화랑에선 못 판다는 게야
그래서 내가 거절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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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 스님은 「아득한 성자」에서 하루살이를 노래한 바 있음.
무산 스님은 겨울과 여름의 안거가 끝나면 1년에 둬 차례 서울의 흥천사에서 지인들을 불러 자리를 함께 하며 얘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근래에 소식이 없어 궁금했는데 와병 중이었음을 뒤늦게야 알았다. 신문을 통해서 그의 부음의 소식을 듣고 많이 아쉬워 했다.
다음은 무산의 얘기를 기록한 4단시 「설악(雪嶽) 어록」이다. 설악은 무산의 아호다.
출세를 할라머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기라
집안에서도 안 그러티나?
어른들의 비위도, 아내의 비위도
아이들의 비위도 맞춰야 잘 되는기라
돌이켜 보니 무산 스님을 만난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지만 그를 생각하며 쓴 시편들이 6편이나 된 걸 보면 임보가 무산을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무산 조오현 스님은 1989년 낙산사에서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밤 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2018년 5월 26일 입적했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임보 합장.
ㅡ 『우리詩』 2018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