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도 유생인 생원 권심기(權心夔), 유학 김홍락(金洪洛)ㆍ김홍의(金洪宜)ㆍ김재천(金在天)ㆍ김재운(金在雲)ㆍ김재옥(金在玉)ㆍ김재형(金在衡)ㆍ김재기(金在璣)ㆍ김재영(金在英)ㆍ김재수(金在秀)ㆍ김유수(金有秀)ㆍ김유기(金有基)ㆍ김유인(金有仁)ㆍ김유신(金有信)ㆍ이만수(李萬修)ㆍ이만영(李萬英)ㆍ이수영(李秀英)ㆍ이수응(李秀應)ㆍ이수팔(李秀八)ㆍ이수인(李秀仁)ㆍ이인일(李仁一)ㆍ이인만(李仁萬)ㆍ이인율(李仁律)ㆍ이인득(李仁得)ㆍ이인현(李仁賢)ㆍ이기신(李基信)ㆍ이기인(李基仁)ㆍ이기덕(李基德)ㆍ김성유(金聲有)ㆍ김성대(金聲大)ㆍ김성원(金聲遠)ㆍ김성달(金聲達)ㆍ김상옥(金相玉), 진사 김병규(金炳奎), 생원 김규형(金奎炯), 진사 박우상(朴遇尙), 생원 김희연(金禧淵), 유학 김상목(金相穆)ㆍ김상현(金相賢)ㆍ김상인(金相仁)ㆍ김상직(金相稷)ㆍ김상우(金相禹)ㆍ김상의(金相義)ㆍ김상연(金相然)ㆍ김상칠(金相七)ㆍ박수영(朴秀英)ㆍ박수인(朴秀仁)ㆍ박수삼(朴秀三)ㆍ박수달(朴秀達)ㆍ박재인(朴在仁)ㆍ박재규(朴在奎)ㆍ박성천(朴聖天)ㆍ박성인(朴聖仁)ㆍ박성구(朴聖九)ㆍ박성칠(朴聖七)ㆍ박성규(朴聖奎)ㆍ박성달(朴聖達)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하대, 현인을 받들고 도를 중시하여 숭덕보공(崇德報功)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으므로 오래되었다고 해서 어렵게 여기지 않으며, 현인을 위한 청이 있어 이를 진달하게 되면 이는 곧 사림들의 공의(公議)이므로 멀다고 하여 혐의를 두지 않습니다. 무릇 굽혀져서 뜻을 펴지 못하거나 폐해져서 일으키지 못한 것이 있게 된다면 성스러운 조정의 흠전(欠典)이 되며 후학들이 억울함을 품게 되는 것이니, 어찌 외람되고 분수에 넘친 데 대한 처벌도 두려워하지 않고서 지쳐서 넘어지더라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같은 목소리로 인자하신 하늘이 덮어 주고 보살펴 주시는 아래에서 우러러 호소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 앞에서 호소하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시골에 묻혀 사는 천한 성품들로서 가문과 지위는 한미하고 평범하며 타고난 성품은 어리석어 비록 훌륭한 조정의 아름다운 제도와 사림들의 커다란 의론에 참여할 수는 없겠으나, 오직 임금을 사랑하고 도를 구하는 마음과 현인을 사모하여 숭배하여 받드는 정성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신들이 근래에 삼가 선정신(先正臣)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의 후손 허인두(許寅斗)의 상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서원의 복원에 관한 여부는 본손(本孫)들이 상소하여 진술할 일이 아니다.’ 하셨습니다. 신들은 두 손으로 받들어 엎드려 읽고 세 번 반복하여 공경히 읊조리고는 우러러 성상의 생각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이에 감히 한 마디 말을 이어서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한 번 살펴주소서.
문경공 신 허조는 새로 나라를 세울 때의 이름난 재상이며 학문에 있어 존경할 만한 스승입니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였고 학식과 도량이 깊고 총명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어 날마다 - 원문 빠짐 - 암송하고, 이어 《대학》과 《중용》을 읽어 문리(文理)가 일찍 통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문충공(文忠公) 신 권근(權近)을 스승으로 섬겨 성현의 학문을 독실하게 닦아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문충공이 자주 칭찬하여 말하기를, ‘후일 우리나라의 예를 주관하게 될 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하였습니다. 태조조(太祖朝) 정축년(1397)에 이르러 성균부(成均簿)를 관장하여 석전(釋奠)의 의식을 바로잡았고, 또 이를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펼쳤습니다. 태종조(太宗朝)에는 서장관으로 경사(京師)에 조회를 가서 무릇 제도에 관계된 일이면 모두 채집하고 모두 베꼈으며, 돌아오는 길에 궐리(闕里)를 지나면서 선성묘(宣聖廟)를 배알하였는데 강도상(江都相) 동중서(董仲舒)와 노재 허씨(魯齋許氏 허형(許衡))가 종사(從祀)되고 양웅(揚雄)이 파출된 것을 보고는 조정에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후에 예조 참의가 되었는데 고려 시대의 《오례의(五禮儀)》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을 개탄스럽게 생각하고는, 이에 당 나라와 송 나라의 전고(典故)를 사례로 인용하고 홍무(洪武)의 옛 제도나 우리나라의 의례, 조정과 묘정의 예악, 사서인의 상제(喪制)를 채집해서, 참작하여 더하고 덜어내어 모두 찬정(撰定)하였으며, 이로부터 항상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제조의 임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또 학당(學堂)을 건립하고 사부학(四部學)을 둘 것을 상소하여 청하였는데, 모두 따라 주었습니다. 그가 봉상시(奉常寺)의 제조로 있을 때에는 봉상(奉常)하는 일들을 온 마음으로 조처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폐한 것은 일으켜 세워서 크고 작은 것들이 모두 펼쳐져서 십의식(十儀式)이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오직 임금을 보필하고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고, 제도를 정하고 예악을 일으키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내리 네 조정을 섬기면서 국가의 일을 걱정하기를 마치 집안의 일을 걱정하듯이 하였고 일을 생각함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아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을 하면 극진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는데, 학교를 일으키고 인재를 육성하며 풍속을 잘 교화하는 방도에 대해 더욱 마음을 썼습니다. 상이 돌아보며 세자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정한 재상이며 주석(柱石)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직의 중책을 맡은 신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세자에게 관료 중에 누가 현명한가를 물으니, 세자가 문학(文學)을 들어서 대답하였는데, 당시에 문경공이 문학으로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의식과 백관들의 상제(喪制)에 대해 모두들 말하기를, ‘이미 장사를 치르고 나면 최복(衰服)을 벗고 담복(淡服)으로 원묘(原廟)에 배제(陪祭)합니다.’ 하였는데, 문경공이 논박하여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는 일체입니다. 지금 성상의 효성이 지극하고 독실하여 최질(衰絰)을 3년 간 입는데, 유독 신하만 장례를 마치자 즉시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는다면 옳겠습니까. 청컨대 일을 처리할 때는 담복을 입고 제사에 참석할 때는 최복을 입어서 상제를 마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의견을 따랐습니다. 세종조에 명을 받들고 《속육전(續六典)》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국가의 명맥을 배양하는 데에 근본이 되는 책이므로 너무 가혹하고 각박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한때의 엄정한 법을 아울러 개정하였습니다. 당시의 풍속이 부모를 위하여 단지 백일 간 상례를 행하는 일이 있었는데, 문경공이 예를 가지고 백성들을 깨우쳐서 삼년상을 행하도록 권하였습니다. 또 상을 치를 때에 불교의 의식을 숭상하였는데, 문경공이 부모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의거하자 이로부터 사서인들이 이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의정에 제배되고 좌의정에 오르게 되자, 영상(領相)인 익성공(翼成公) 신 황희(黃喜)와 더불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보필하여 한 세상을 삼대(三代)의 태평한 시대로 만들었습니다. 유선록(儒先錄)에 이르기를, ‘세종 대왕은 진실로 우리 동방의 순 임금이나 탕 임금과 같은 분이다. 30여 년 간 태평한 정치를 폄에 어진 재상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조(許稠)와 같이 공명 정대하고 황희와 같이 대체(大體)를 알았던 자들이 나와서 재상이 되었던 것으로, 당시 인재가 번창하였음을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조가 죽자 그 자리를 비워 둔 것이 2년이나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렸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숭배하여 받든 바와 사림들이 존경하여 사모한 바가 이처럼 중대하였던 것이며, 4백 년 간을 제사하여 받들었던 것입니다.
얼마 전 여러 서원들을 훼철할 때에 한층 더 충성스럽고 어진이는 드러내어 그대로 보존케 하였습니다마는, 문경공의 서원은 비로 쓴 듯이 한꺼번에 섞여 들어가서 마치 다른 향현(鄕賢)의 사당과 다를 바가 없이 헐리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영령(英靈)이 오르내리던 곳이 이제는 변하여 담도 헐리고 터도 무너져 버렸고, 옛날에 관을 쓴 유생들이 위의를 갖추고 추창(趨蹌)하던 땅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으니, 비단 많은 선비들이 억울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시 조정의 흠결이 되고 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미(李瀰)는 《문경유사(文敬遺事)》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국조 재상의 업적에 관해 말할 때는 문득 황희와 허조를 으뜸으로 꼽고 있는데, 황 익성공은 도량과 재간을 가지고, 허 문경공은 예를 행하는 것으로써 함께 의정(議政)이 되어 융성한 정치를 도와 이루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본다면 문경공과 익성공은 공로가 한가지로 똑같은 것인데, 익성공의 원우(院宇)는 여전히 옛날처럼 봉향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에서 충직한 이를 권면하고 어진이를 끌어올리려는 뜻이 있는 것으로서, 특별히 예로써 보답하고 특별한 은혜로써 대우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문경공의 경우는 유독 특별히 대우하시는 은혜를 입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조정에서 한가지 예로 대우하는 뜻에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동방의 인사들이 옛날 성현들이 경전에 남긴 뜻을 가지고 마음을 단속하고 힘써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문경공이 이것을 수창한 것으로서, 우리 사문에 공을 끼치고 나라에 끼친 공훈을 어찌 뚜렷하게 상고할 수 없겠습니까. 아, 고려 말에 예학이 모두 무너져 버려, 태조가 즉위하던 초기에는 모든 사업이 시작되는 시기였는데, 유독 문경공이 홀로 서서 침착하게 만마(萬馬)가 치닫는 가운데 다리를 딛고 서고, 폭주해 쏟아지고 있는 수많은 시냇물의 물결을 되돌려서, 우리 삼천리 청구(靑丘)를 예의의 풍속으로 이끌고 우리 오현(五賢) 선정(先正)의 계통을 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이를 숭봉하는 의절에 있어서는 빼거나 넣는 과정에서 드러내어 표창함이 있지 않았고 사모하여 숭상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경건히 받드는 지경에 붙이지 못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본손들이 잔약한 때문이었습니다. 사림들이 마음을 기울여 사모함에 있어서, 오직 선현의 도덕과 학문을 계승하고 새로 이어 주는 것만을 생각하였지 자손들이 융성해지고 쇠미해지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현재 국가의 운세가 크게 번창하고 문화가 지극히 밝게 나타난 시대에 있어서야 어찌 감히 예전처럼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외람되게 번거롭게 한다는 혐의를 피하여, 성상께 한 번 아뢰어서 잠시 침체되고 있는 선현의 제사를 드러내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외롭게 영락한 본손들을 굽어 불쌍히 여기시고 많은 선비들의 성의(誠意)를 생각해 주시어서 특별히 문경공 신 허조의 서원을 다시 설치하라는 명을 내려 주신다면, 비단 사문(斯文)에게 커다란 다행일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성스러운 조정에 성대한 의식이 될 것이며, 비단 전하께서 덕행으로 펴시는 교화에 있어 영예일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역시 조종(祖宗)이 남겨 준 뜻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신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면서 이를 데 없이 바라고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세우고 허무는 일에 일정함이 없는 것은 과연 그 일을 중시하는 뜻이 아니다.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