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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국보문학]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
매화가 지천으로 피었다가 지고 벚꽃이 만개(滿開)하는 4월이다. 개나리, 진달래가 앞산을 뒤덮고 목련이 하얀 얼굴을 내밀어 꽃향기를 내뿜고 있다. 그러나 T.S. 엘리엇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라는 어조(語調)로 사월의 이미지는 ‘가장 잔인한 달’로 노래하고 있다.
우리의 4월도 역사적인 체험으로 상고(詳考)하면 이와 비슷한 ‘잔인함?’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슬픈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회상하는 비극의 일단이지만 4월은 녹음방초(綠陰芳草)가 현란하게 자연을 장식하는 계절의 향훈이 삶의 활력소를 제공하는 계절이다.
우리의 고전 「농가월령가」에서도 ‘사월이라 맹하(孟夏)되니 입하(立夏) 소만(小滿) 절기로다 / 비온 끝에 볕이 나니 일기도 청화하다 / 딱갈잎 펴질 때 뻐꾹새 자로 울고 / 보리 이삭 패어나니 꾀꼬리 소리난다 / 농사도 한창이요 잠농(蠶農)도 방장이라 /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어 /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라는 자연 찬미(讚美)의 가사가 안온한 분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우리 문단 행사로는 박목월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려서 관심을 모았다. 목월 시인의 기일(忌日)인 3월 24일, 서울문학의 집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는 약력소개(신규호), 개식사(이건청), 추모사(김남조, 김종길, 문정희), 헌정 시집 증정(허영자), 유족대표 인사(박동규), 목월선생 회고(김종해, 유안진)와 목월시 낭송(오세영, 신달자, 나태주, 임지현, 조정권, 윤석산, 김성춘, 박인식), 목월 작시가곡 공연(김 옥, 오현승, 김상희) 등으로 진행되었다.
이 100주년 기념행사는 기념백일장, 추모전시회, 학술심포지엄, 박목월 음악회, 목월동요 경연대회, 생가개관 기념 시낭송, 목월시를 주제로 한 작품 전시회 등이 한양대 박물관과 경주예술의 전당 등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거나 앞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러한 3월의 행사를 뒤로하고 『국보문학』 3월호에 수록된 작품들을 탐독(耽讀)해보면 ‘나’를 성찰하는 반성의 이미지들을 많이 대할 수 있었다. 시적 화자 ‘나’에 대한 직접 등장은 의인회하는 시법(詩法)에서는 약간 해석을 달리하는 평자도 있긴 하지만, 어쩌면 ‘나’를 확실하게 인식(자인)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한번쯤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경우로 독자들에게 많이 읽혀지기도 한다.
나는 시인입니다
나는 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시인입니다
봄날
봄바람에 휘날리는
꽃비이고 싶고
여름날
지루한 장마 끝 뙤약볕에
시원하게 불어주는 바람이고 싶습니다.
가을날
붉게 물든 단풍이고 싶고
겨울날
하얀 눈처럼 하얀 영혼을 지닌
시인이고 싶습니다.
--진유정의 「나는 구구입니까?」중에서
이 작품에서 진유정은 ‘나’를 인식(cognition)하기 위해서 의문형으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나는 구구입니까?’라고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가 여망하던 소회(所懷)를 기원의식으로 발현하고 있다. 그는 ‘어둠을 밝히는 / 타오르는 촛불이고 싶고 / 자신을 던져 종을 친 / 까치의 마음이고 싶습니다. // 나는 시인입니다 / 아직은 서투르고 어설프지만 / 여린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듯이 / 나도 시를 정말 사랑하는 / 시인으로 남고 싶습니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그가 소망하는 필생의 각오 같은 집념을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아(自我)의 인식이나 자의식을 통해서 시간성(과거, 현재, 미래)과 결합할 때 생성하는 이미지는 다양하게 전환할 수 있는 시적기반을 위해서 자신의 진솔한 내면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진유정은 ‘3월의 시인’ 특집으로 세 편의 작품을 수록하였는데 ‘그래서 / 당신을 생각하면 / 내 가슴이 뛰고 / 내 뛰는 가슴을 / 숨길 수가 없습니다’라거나 ‘당신의 한결같은 마음 때문입니다 /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그 애틋한 마음.(이상「당신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중에서)’이라는 어조로 보아서 2인칭 화자인 ‘당신’과 영원한 동반자라는 인식의 근원을 명징(明澄)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자애(自愛-self love)라는 인간적인 심리의 현현으로 애절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라는 화자를 의인화가 아닌 시인 그 자신의 스토리가 되거나 자신의 애환이 될 때 독백이나 넋두리가 될 우려가 항상 상존(常存)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멈춰 서서 하늘 보니
에워 쌓인 별들만이
허공 위에 가득하다
지천명
툴툴 털다가
발을 보니 맨발이다.
--조영희의 「내 속에 나」전문
여기 조영희도 ‘3월의 시조시인’ 으로 세 편의 시조를 수록하였는데 우선 ‘내 속에 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나’에 관한 집념이 현재의 상황(인생적이든, 시적이든 관계없이)에서 발현된 시법이다. 그는 ‘지천명’이라는 시간성에서 문득 상기해보는 인간적인 측면의 성찰이지만 ‘허공’과 ‘별들’이 대칭을 이루면서 ‘맨발’이라는 결론을 적시하고 있다. 그는 제목만 ‘나’라는 화자를 써서 진정한 휴머니즘의 원류를 추적하려는 시법으로 독백의 관념적 어조는 없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다시 ‘짧은 하루 익혀가며 / 혀에 대고 맛을 보니 // 설익은 떫떨한 맛 / 날밤 새며 뒤집고는 // 언제쯤 / 익혀지려나 / 아궁이에 불 지핀다(「설익은 나」전문)’는 작품에서도 ‘나’에 대한 존재(혹은 생존에서 획득한 생명의 문제)를 심도(深度)있게 성찰하고 있다.
나를 내려놓고 그대를 담는다
잎이 다르고 꽃이 다르고 열매가 다른 나무
모두가 지구라는 한 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나무
너와 나, 모두 생각과 인격 다르고 말이 다른 나무
모두 내 그릇에 담아야 할 나무다.
--임승현의 「나를 내려놓고 그대를 담는다」중에서
임승현도 ‘나’에 대한 집념이 강렬하게 분사(噴射)하는 어조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는 ‘그대’라는 대칭적 화자를 내세워 융합의 화해를 외치고 있다. 이러한 어조는 바로 ‘모두가 지구라는 한 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나무’라는 또 다fms 인칭의 화자를 통한 의인법으로 작품을 향상시키고 있다.
누군가가 내 방문에 못질을 한다
내 핏줄들이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고/ 이웃들이 한 송이 국화꽃을 던져주면 / 나는 천년 깊은 잠에 빠진다.
--정성수의 「지금은 밤 9시」중에서
정성수가 구사(驅使)하는 ‘나’는 존재의식과 상응(相應)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그것은 그가 시적으로 지향하면서 해법을 탐색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념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무엇인가 성찰의 진정한 의미에서 인생관에 대한 인식의 반추(反芻)와 시간성의 이미지 전환을 탐색하고 있다. 그가 ‘한 편의 시를 쓴다 / 꿈과 희망과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 아이들의 턱이 거뭇거뭇해지자 허무한 날이 많았다’는 현실적인 사유(思惟)와 내면에 흐르고 있는 시적 진실의 교감이 잘 현현되어 있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설정하거나 내용을 전개한 작품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 지나친 과욕으로 / 이어달리기하는 생명의 젖줄을 끊어버린 / 나에게 보내는 눈짓이다. (문연자의 「버려지는 것에 대하여」중에서)
- 흩날리는 꽃잎 / 함박눈처럼 하늘하늘 내리면 / 나는 소복이 쌓인 꽃잎 위에 / 살포시 앉 아 / 꽃속으로 들어간다(조성희의 「벚꽃 속으로」중에서)
- 나와 나 /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을까(이현수의 「인연의 벽」중에서)
- 하늘로부터 빌려 쓰고 있던 목숨을 // 다른 방법으로 갚을 수 없어 // 죽음으로만 갚아야 한다면 // 마지막 나이를 먹기 전에 // 난 뭘 해야 하나(이일현의 「마지막 나이를 먹기 전에」전문)
- 마을에 벚꽃보다 더 환한 세상을 / 내겐 벚꽃보다 더 활짝 피는 해방을 / 아, 숨이 차도 록 아름다운 꽃세상(허호석의 「산벚꽃」중에서)
- 송장처럼 잠들어선 사는 게 아니라고 / 취생몽사는 우리의 이상이 아니라고 / 울부짖으며 가슴을 쥐어뜯어며 달려와 / 번갯불로 하늘을 찢는 천둥으로 땅을 흔들어 / 나를 깨웠느 냐, 이 꼭두새벽에?(백남구의 「소나기」중에서)
- 편지 쓰는 엄마를 바라보며 / 나는 /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흐뭇해진다(김민희의 「엄마의 편지」중에서)
그렇다. 이러한 ‘나’를 시적 이미지로 이해하려면 독일의 대철학가 하이데거의 실존철학(實存哲學)의 한 단면을 알아보면 시 창작이나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존재의 의미를 더욱 심화(深化)하거나 해석하는데 그의 지식을 투영시키고 있다.하이데거는 실존을 ‘본시 있던 나에게로 돌아간 나’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들이 본래적인 ‘나’로 복귀(復歸)했을 때 그는 우리들이 실존으로 살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사람들은 ‘본시에 있던 나’로서 살기 이전에 우선 한 가족의 한 사람이나 어떤 집단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막연한 ‘세상 사람들’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자기를 깨닫지 못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너도 나도 그도 모두 비슷한 평균적인 일상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일상인을 하이데거는 ‘세상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세상 사람들’로서 ‘나’는 그저 세상 돌아가는 풍설(風說)에나 귀를 기울이고 호기심이나 가진 애매성(曖昧性)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평균적인 일상속에 은폐(隱蔽)되어 있다’ 혹은 ‘퇴폐(頹廢)되어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잡다한 일상들이 ‘나’를 덮어서 진정한 ‘나’는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그는 여기에서 엄청난 결단을 통해서 은폐를 박차버리고 그 속에 파묻힌 자기를 되찾을 때 사람은 실존이 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본시의 나’, 바꾸어 말하면 ‘실존으로서의 인간’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모두 죽음을 향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죽음으로써의 존재’, ‘종말로써의 존재’임을 스스로 알 때 그 앞에는 항상 무(無)의 심연(深淵)이 입을 벌리고 있다. 이 때문에 인간들은 그지없이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진지(眞摯)하게 된다. 죽기 전에 누구나 마음이 선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이처럼 거대한 철학적인 견지(堅持)에서 사유해 보는 것이 우리 시의 본질이나 시정신에도 부합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시적인 주제가 바로 ‘나’를 통해서 발현되거나 ‘나’의 체험에서 창출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작품에서 ‘나’라는 화자의 의미는 크게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독백이나 넋두리가 되지 않도록 화자의 활용에 많은 연구와 탐색이 필요하게 된다. 문제는 ‘나’가 시를 창작하는 시인 자신과 더불어 청자(聽者)인 독자나 제3의 사람도 공감(共感)을 할 수 있을 때 화자 ‘나’는 진정한 작품의 구성요소로써 진실을 분사하게 되는 것이다.(『국보문학』 2015. 4.)
사친(思親)과 체험적 시학
현대시의 발상이나 거기에 투영된 주제는 대체로 그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온 체험에서 생성되는 것이 통례로 해석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모두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형성된 희노애락(喜怒哀樂) 애오욕(愛惡慾)의 칠정(七情)에 의한 삶의 궤적(軌跡)에서 회상된 과거의 재생에서 얻어진 중요한 경험을 시상(詩想)으로 설정하게 된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실생활(real life)에서 직접 오감(五感-시(視)청(聽)후(嗅)미(味)촉(觸))과 상통하거나 상충(相衝)할 때 전광(電光)처럼 불현듯 현현하면서 거기에서 획득하는 새로운 느낌이나 감정이 하나의 이미지로 생성되는 과정이 바로 시적 발상이 되고 주제로 승화하는 것이다.
시의 모든 이미지는 그 시인의 체험적인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상상력(imagination)과 이미지(image)는 그 어원(語源)도 같다. 상상은 일종의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있어서 우리 시인들은 주목하고 있다. 첫째로 재생적 상상(reproductive imagnation)으로 지난날 겪었었던 이미지가 변화없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며 두 번째 생산적 상상(productive imagnation)인데 지난날에 겪었던 이미지들에서 선택된 여러 가지 요소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통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상에는 이미 시인의 정서와 사상이 반영되어 있어서 시인의 어떤 사물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해석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상상이나 상상력은 시 쓰기에 얼마나 중요한가? 다음과 같이 그 기능도 다양하고 나타나는 양상도 복잡해 진다.
영국의 비평가 I. A 리처즈의 말에 의하면 여러 가지의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체를 구성하는 능력, 그러니까 ‘생산적 상상’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에는 연상(聯想)작용(연합적 상상-associative imagnation)과 창조활동(창조적 상상-creative imagnation)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풀어보면 이미지란 사물로 그린 언어의 회화이기 때문에 언어 이전의 사물로 그러지는 대상 사물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지는 체험의 산물이며 체험을 성립시키는 대상 존재나 대상 사물에 의해 떠올리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대체로 직접 외계의 자극에 의하지 않고 기억과 연상에 의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像)이다. 시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을 거슬러 올라가서 구체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직접적으로 상상된 어떤 형상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사친(思親)에 대한 정감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주로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과거 교감에서 재생된 체험의 일단이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직접 체험은 누구에게나 회자(膾炙)하는 시적 발상이며 주제로 연결되는 경향을 많이 접할 수 있게 한다.
떨어진 단추 달고
아내가 내놓은
오래된 침선상자에서 꺼낸
반짇고리 만지작거리다가
눈길 머문
엄니 쓰신 골무 하나
때 묻어
되레 진해진
세월 삭힌 저 향기
그리움이
돋아나고
엄니 냄새가 묻어난다
--손수여의 「골무」전문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골무’는 어머니들의 전유물이다. 손수여는 어느 날 ‘반짇고리’에서 ‘엄니 쓰신 골무 하나’를 발견하고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의 향기를 느낀다. 이러한 체험에는 ‘세월 삭힌 저 향기’를 느끼게 되고 거기에서 생성된 ‘엄니 냄새’를 만끽(滿喫)하게 되는데 우리 시인들이 자주 등장시키는 과거 체험에서 어머니는 그 이미지가 바로 생명성의 탄생에서부터 생존(또는 존재)에 까지 상관하게 된다.
오월이 내 어머님 곁으로 왔습니다
영산홍꽃이 하도 고와서
‘나 죽으면 영산홍 꽃이 될란다’ 하시던 말씀
햇볕이 유난히도 곱던 그해
우리 집 화단에
영산홍 심어놓고 넘넘 좋아하시더니
올봄도 그리운 어머님 닮은
붉은 입술 자주 꽃잎 알록달록 피었습니다
꽃피는 시절이면 어머님 가슴 같은
봄은 세세(歲歲)연연(年年) 해마다 찾아오지만
한번 가신 어머님은 돌아올 줄 모르시니
살아생전 소원대로 우리 집 화단에
그리도 곱살하게 연산홍 꽃으로 오셨나요
--이학주의 「영산홍」전문
이학주는 ‘영산홍’과 ‘어머님’을 대칭적으로 상황을 설정하고 ‘살아생전 소원’을 적시하면서 사모곡(思母曲)을 부르고 있다. 그는 ‘나 죽으면 영산홍 꽃이 될란다’라고 하시던 ‘어머님’과 ‘햇볕이 유난히도 곱던 그해 / 우리 집 화단에’ 심어둔 영산홍과의 추억은 그의 체험에서의 어머니와 실재(實在)의 영산홍의 상관성은 바로 그가 취택하는 시적 이미지의 투영이다. 이처럼 사친에 대한 모든 체험은 과거를 후회하거나 과거의 불효 등을 반성하면서 그리움에 젖는 이미지로 분화(分化)하는 양상인데 고차원의 시적으로 형상화하는데는 다양한 체험의 순화(純化)가 진실로 현현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친의 적시는 정영숙의 「강」전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강은 시냇물의 어머니 / 삶의 여정 /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 물 같은 것이라고 / 침묵으로 말하는 / 어머니 우리 어머니 / 달을 해산하는 밤하늘 같은 / 별을 키워내는 / 넓디넓은 가슴을 가진 / 지상의 나뭇가지에 환생한 / 봄 노래에 / 바다가 열리는 / 소리치며 흘러가는 / 어머니의 환희 같은 퍼런 소리.’ 이처럼 정영숙도 ‘어머니’에 대한 절실한 정감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인들은 이 ‘어머니’에 관한 작품을 창작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처럼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하는 하나의 인연의 끈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 산소에 갔다
월간지 국보문학 2015년 1월호 한 권과
악기를 들고
움막같은 아버지의 집을 찾아 갔다
244쪽 시 “풀꽃 향기”를 펴들자
아버지가 옛날처럼
피리보다 청아한 목소리로
내 시를 읽는다
소나무들이 귀를 기울이고
산새들이 춤을 추고
애기똥풀이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무더기로 꽃을 피운다
내가 하모니카를 연주하자
아버지가 허허 웃고
저 아래 옥동마을 어귀에 핀 매화가
붉그레 웃으며
아버지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김정이의 「아버지」전문
김정이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다. 아버지 사후에 일어나는 한 단면을 정감의 언어로 적시하고 있다. ‘아버지 산소에’ 가서 “풀꽃 향기”라는 그의 시와 ‘소나무들’과 ‘산새들’ 그리고 ‘애기똥풀’과 ‘옥동마을 어귀에 핀 매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사부곡(思父曲)에 젖어 있다. 그는 함께 발표한 작품 「그리움」에서도 ‘아버지’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그 끼를 나도 받았는지 나는 예능면이 좋은 것이다 / 나는 책을 아버지 무덤 앞에 펼쳐보이며 사진을 찍었다’는 그리움의 정감을 적나라(赤裸裸)하게 적시하고 있다.
필자도 제10시집 『물의 언어학』에 수록한 작품 「물 詩∙25-아버지의 물」에서 ‘일제시대 현해탄을 건넜던 육신은 /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전에 / 할아버지의 물과 합류했다 / 만신창이(滿身瘡痍)를 휑구어 / 논펄에 버려진 역사를 / 떨리는 몸짓으로 바느질하면서 / 잘못 만난 시간을 둘러메고 / 속쓰림만 키웠던가 / 백약(百藥)이 효험(效驗)을 잃었을 즈음 / 그에게는 한 모금 물이 필요했다 / 경북 영천 어느 산골 유황천(硫黃泉) / 황수(黃水) 한 사발 마시고 / 할아버지 곁을 떠났다 / 애비보다 먼저 떠난 불효보다 / 남겨진 주름살 / 떠도는 한숨은 / 모두 어머니의 물이 되었다.’는 아버지에 대한 체험의 시학을 시도해본 일이 있다.
송형기도 작품 「내가 할 일」에서 ‘아버지를 감동시켜라 / 그러면 너는 하늘을 공감하는 것이다 // 어머니를 만족시켜라 / 그러면 너는 땅을 화합하는 것이다’라고 잠언처럼 전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일찍이 송강 정철이 읊은 대로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 하늘같은 가없는 은덕을 어디 대어 갚사오리’라거나 김수장도 ‘부혜(父兮) 날 낳으시니 은혜 밖의 은혜로다 / 모혜(母兮) 날 기르시니 덕(德) 밖의 덕이로다 / 아마도 하늘 같은 은덕을 어디 대어 갚사올고’라는 시를 통해서 부모의 은덕을 칭송한 바가 있었다.
끝으로 부모에 대한 졸시 「물 詩∙31-가족의 물」한 편을 감상하면서 지난 2월호 『국보문학』의 작품을 다시 읽어본다.
어머니는 밤 늦도록
사립문을 닫지 않았다
이 세상 떠난 아버지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을 열어두고 대청마루 끝에 앉아
밤하늘 별을 세고 있었다
나도 형도 잠이 들지 못했다
사랑방에서 멈춰버린
장죽 터는 소리
아, 어머니의 기다림은
사립문 밖에서 어른거리고
밤 이슥할수록
우리는 별빛만큼 초롱한 눈으로
핏줄의 아픔을 참고 있었다
서울의 밤에도 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아들 딸
그 기다림은 어머니의 물로 흘러
홀연히 문 밖에서 서성이던
별빛의 행방을 걱정하고 있었다.*(『국보문학』 2015. 3.)
삶의 궤적에서 투영된 ‘詩의 미학’
현대시의 발상이 살아온 체험에서 인식되거나 성찰된 삶의 궤적(軌跡)에서 취택한다는 것은 넓게 통용하는 시법(詩法)의 일부이다. 우리 시의 발상과 이미지의 추출은 대체로 삶의 과정에서 여과(濾過)한 진실의 탐색인데 우리 인간들이 소유한 오욕(五慾)칠정(七情)에서 다양하게 유로(流路)된 사유(思惟)의 지향에서 창출하는 예를 흔하게 접할 수 있게 된다. 이 살아온 체험의 일단이 어떤 외적(外的)인 사물이나 내적(內的)인 관념과 상충(相衝)하거나 대입(代入)할 때 발생하는 정서의 소용돌이가 바로 시적인 상황으로 도입되거나 상황전개로 발전해서 한 편의 시를 창작하는 이미지 혹은 주제의 형상화로 발현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는 많은 발표 작품 중에서 이러한 삶에 관한 사유의 깊이나 이를 통한 시적 구성 그리고 주제의 창출을 시도하는 시법을 읽을 수가 있는데 이는 우리 시인들에게 내재된 정서의 정점(頂點)이 삶과 상관하는 정(情-七情)에서 취택한 진실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삶은 시간성과도 상호 연관을 갖게 되는데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융합하거나 조화를 이루면서 생존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고 이를 통한 시적인 접근으로 착목(着目)한 원점에서 선별해낸 이미지가 작품으로 승화하는 예를 많이 대하게 된다.
일찍이 톨스토인가 삶의 의문에 대한 탐구는 미치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경험하는 것과 똑 같은 경험이다라는 말에서 공감할 수 있듯이 우리의 삶은 다변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서 한 시인이 체험한 인생의 행로는 다시 어떤 향방(向方)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시법을 요구하고 있다.
살아온 동안
발자국 걸어놓고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어봅니다
바쁘게 살았다기보다
힘들게 살아왔다기보다
얼마나 보람 있게 살았는가를
누구를 위해 웃었고
누구를 위해 눈물 흘렸던가
바쁘게 힘들 때와 웃고 울 때
지워버려야 할 것과
그냥 두어도 될 만한 것들이
키 재기하는 삶의 발자국.
우선 전홍구의 「발자국」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떻게 살았느냐’와 ‘얼마나 보람 있게 살았는가를’ 그는 ‘살아온 동안 / 발자국 걸어놓고’ 정중하게 자문(自問)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의문은 ‘바쁘게 살았다’ 혹은 ‘힘들게 살아왔다’는 현실적인 삶에서 ‘...기보다는’이라는 비교적 품사를 달아서 그 보다는 우리 인간들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여실하게 현현되고 잇다. 이러한 시법은 보편적으로 발흥(發興)하는 정서의 일단이지만 자기 성찰이 가미된 인생문제에 관한 자문이라는 가치관을 다시 상기시키는 전홍구 시인의 ‘키 재기하는 삶의 발자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단 하나의 진리다
명확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인이 이상과 사상 마음의 표현이다
현실보다는 이상에 대한
마음의 방향에 따라
진리와 진실이 보다 고차원으로
현현된다는 자존의식에서
감수성이 빚어낸 글의 미학은
삶의 밭에서 씨앗을 고르고 골라서
아주 작은 미물, 영혼의 울림까지도
소통의 구사력을 나열하는 것이다
여기 정희성의 「詩의 미학」전문에서는 ‘삶의 밭에서 씨앗을 고르고’ 있어서 그의 내면에 잠재한 삶과 시에 대한 불가분의 상관이 잘 현현되고 있다. 일찍이 영국의 비평가 I.A. 리처즈가 말했듯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정서생활과 시의 소재 사이에는 차이가 없고 이러한 생활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기교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언지는 바로 그가 단정적으로 절규하는 ‘현실보다는 이상에 대한 / 마음의 방향에 따라 / 진리와 진실이 보다 고차원으로 / 현현된다는 자존의식에서 / 감수성이 빚어낸 글의 미학’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정희성의 시미학이다. 어조(語調)가 자못 강연같은 흐름으로 우리를 공감으로 유로하고 있지만, 그의 단호한 언어로 ‘아주 작은 미물, 영혼의 울림까지도 / 소통의 구사력을 나열하는 것’이라는 그의 진실이 잘 현현되어 있다.
순간의 혜일로
눈부신 뜬소리 타고
바싹 말라진 숨소리
여울져 야무진 삶들이
올가 매어 놓은 기타줄
팽팽하게 파고들고
손끝을 울리던 가슴
운동화 끈 조여 맨
짧은 지혜로 헤쳐보지만
마디 굵은 손짓에
말 없는 노을이 저물고 있구나.
권희경의 「공(空)」전문에서도 그가 인생관으로 심저(心底)에 간직했던 시적 진실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발상도 ‘여울져 야무진 삶들이’ 적절한 시간성과 화해함으로써 획득한 소중한 체험의 소산이다. 여기에서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는 ‘말 없는 노을이 저물고 있’는 형상에서 세월의 무상(無常)과 ‘공(空)’이라는 철학적인 개념의 인생론이 피력되고 있어서 삶과 무관하지 않은 시적인 화해를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어느날 슈바이쳐도 ‘나의 삶에는 두 가지의 체험이 그늘을 드리고 있었다. 하나는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는 신비와 고뇌가 넘쳐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며 다른 하나는 인류의 정신적 퇴폐기에 내가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라는 그의 사유를 유추해보면 신비와 고뇌는 결론적으로 우리 인간들이 공유(共有)한 정신적인 작용이라서 ‘공(空)’으로 지향하는 심리적이 변환(變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일락과 하얀 진달래 향기
이른 아침 가벼운 발걸음
짙은 꽃향기에 심심한 기쁨을 느낀다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네 삶
그 고독한 삶 속에서 다가오는 아늑한 그리움
바람에 흔들리듯 다가오는
아늑한 그림자의 향기
그 향기에 취해보는 하루
내 삶 속에 오늘이 있었기에
항상 즐거웠고 생동감이 있었다
꿈을 그리며 어디서 왔는지
아름다운 향기 나의 정신을 깨우고
고독하고 내 심오한 가슴 속에
항상 꽃피는 그리운 그대의 향기
그것은 보고픈 그리움의 향기였어.
한편 임방원의「삶의 향기」전문에서는 그가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네 삶’에서도 ‘그 고독한 삶 속에서 다가오는 아늑한 그리움’이 있고 ‘아늑한 그림자의 향기 / 그 향기에 취해보는 하루’에서 그는 ‘항상 즐거웠고 생동감’ 넘치는 삶의 향기를 맛보고 있다. 그는 ‘삶의 향기=그리움’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면서 ‘고독하고 내 심오한 가슴 속에 / 항상 꽃피는 그리운 그대의 향기’이며 ‘보고픈 그리움의 향기’라는 어조로 삶에서 인식하는 존재감과 실재(實在)의 정감(情感)으로 순정적인 아름더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갈 나이에 넘어서까지
운명의 멍에를 질질 끌며
지루한 삶에 투정을 부린다
적적한 밤
외로움이 낭자한 어둠을 깔고 누워
달아나는 잠을 쫓다가
벌떡 일어나
머릿속에 걸어둔 가슴앓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업보를 푼다
먼저 저승으로 이사한 인척들
뒤따라 거처를 옮긴 벗들에게 손 흔들어주고
질식할 것 같은 통한을 삼킨 뒤
상복 같은 세월을 억지로 뒤집어 쓴
나날의 싫증 틈에 자라는 환청
어서 오라는
소리, 소리.
이길옥의 「환청(幻聽)」전문에서는 어쩐지 인생무상이라는 어눌(語訥)한 정감이 엄습하고 있다. 이것이 그에게서는 ‘환청’이지만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 보면 우선작품의 도입부분에서 ‘갈 나이에 넘어서까지 / 운명의 멍에를 질질 끌며 / 지루한 삶에 투정을 부린다’는 어조가 심상찮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앙드레 지드는 ‘삶의 가장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죽음보다 강하며 죽음음 모든 것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도록 하기 위하여 다른 삶을 허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언지로 삶과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린 바 있지만, 이길옥의 시적 결론은 ‘어서 오라는 / 소리, 소리.’라는 환청만 들리고 있다. 그는 다시 ‘먼저 저승으로 이사한 인척들 / 뒤따라 거처를 옮긴 벗들’에 대한 겸손한 예의를 통해서 들려주는 그의 진실은 바로 ‘나날의 싫증 틈에 자라는 환청’이라는 불면증에 가까운 삶의 현장이다.
이 밖에도 도지현의 「후조(候鳥)」중에서 ‘푸른 눈동자 / 아스라이 먼 하늘 보며 / 고독을 삼키고 / 그렇게 쓸쓸히 사위어 가겠지 // 마른 가슴은 / 엉켜 버린 실타래 같이 / 허무를 삼키며 / 그렇게 살아가겠지’라거나 작품 「못다 핀 꽃 한 송이 피우리라」중에서 ‘피안의 세계로 가고 싶은 마음 / 싶은 마음일 뿐이지 / 갈 수 없는 현실 / 오욕덩어리인 세상 // 그러하더라도 / 아름답고 / 소담스런 꽃 한 송이 피우고 싶다 // 살아온 바탕 위에 / 피운 꽃 / 아직도 미완이기에 / 못다 핀 꽃 한 송이 피우고 싶다’는 삶의 여운을 진솔하게 현현하고 있다.
우리는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 지나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라는 삶에 대한 교시적(敎示的)인 메시지를 상기하게 되는 것은 어쩐 일인가.*
가을 이미지들과 서정적 시편들
시월이다. 이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사비유(死比喩)에 해당하는 천고마비(天高馬肥)니 등화가친(燈火可親)이니 하는 종래의 가을 예찬은 그 의미가 퇴색해가는 현실의 삶이다. 그러나 우리 시인들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거룩한 정신세계를 살아가면서 가을의 이미지를 되새기거나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경향은 지금도 유효하다. 대체로 가을에 대한 이미지는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풍요로움이다. 결실한 오곡백과가 지천으로 무르익어 일용할 양식과 먹거리가 널려 있어서 풍족한 이미지가 창출된다. 두 번째는 이와 같은 추수(秋收)가 끝나고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의 이미지는 고독함이다.
이처럼 시인들은 가을의 풍요로움보다는 무엇인가 외롭고 그리운 이미지로 작품을 형상화는 시법을 많이 대할 수 있다. ‘이슬 치는 가을밤 홀로 거닐면 / 시름에 쌓이는 나그네의 마음 / 멀리 배에서는 등불이 새어 오고 / 초생달을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露下天高秋氣淸 空山獨夜旅魂驚 疎燈自照孤帆宿 新月猶懸雙杵鳴)’라고 두보(杜甫)는 시「밤」에서 읊었다. 또한 월탄 박종화 선생도 어느 글에서 ‘가을 바람 소슬하여 낙엽 구르는 소리만이 들리는 밤, 기러기는 울부짖고 싸늘한 서릿발은 기왓장을 뚫어 차가운 기운이 살 속으로 스며들 때 이부자리는 차가왔고 베개는 외로웠다.’고 해서 어떤 아련한 그리움과 고독함을 사유(思惟)하고 있다.
지난 9월호에서는 이렇게 가을을 음미하면서 창출해낸 이미지들이 다양하게 현현되고 있어서 계절의 변화와 거기에 수반(隨伴)하는 시인들의 정감이 시흥(詩興)을 높이고 있어서 우리들을 공감으로 유로하고 있다.
그토록 화려했던 햇살
대지를 뜨겁게 달구더니
오는 계절에 비켜서고
더위에 지친 마음
선들바람에 날려보내고
말갛게 다가오는
가을의 향기
풀벌레 울음소리에
애달픈 향수
밀려오는 진한 그리움에
돌아서서 가던 길 멈추고
저미는 쪽빛 하늘 아래 서있는
코스모스 닮은 여린 미소
무성했던 들녘도
황금빛으로
풍성한 꿈으로 영그는
가을의 길목
뜨락에 나가 가슴 열어
구월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그리움은 숲처럼 깊어라.
--조선윤의 「구월이 오는 소리」전문
이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먼저 ‘무성했던 들녘도 / 황금빛으로 / 풍성한 꿈으로 영그는 / 가을의 길목’에서 응시하는 풍요로움이었으나 ‘말갛게 다가오는 / 가을의 향기’가 바로 ‘풀벌레 울음소리에 / 애달픈 향수’이며 ‘밀려오는 진한 그리움’이다. 조선윤은 가을의 초입(初入-구월)에서부터 여름을 보내면서 시간성에서 감응(感應)하는 아쉬움과 함께 가을의 결실보다는 간절한 그리움에 젖어 있다.
빈곤이 채색되는 풍요로운 매일
깨끗한 바람따라 나서면
마주보며 웃다가
붉은 탄성으로
빈 가슴 채워지고
기억그물에는 언제나
고운 국향의 연정
누구나 흡족한 계절.
--조경화의 「가을은」전문
조경화의 가을은 ‘빈곤이 채색되는 풍요로운 매일’이며 ‘누구나 흡족한 계절.’이다. 이는 표지화와 함께 게재된 작품으로서 시화(詩畵)용으로 창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는 ‘빈 가슴 채워지고’라는 어조는 풍요의 이미지를 더욱 가시화(可視化)하고 있어서 가을의 음미(吟味)에 보편적인 감응으로 현현되고 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얼룩진 무심한 거울을
말끔히 닦아 두어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계집애 찰진 냄새가
가녀린 꽃잎에 바닥을 꺼낼 수 없어
달빛을 안고 있다
가풀막 언덕길
어머니 상여를 빗방울에 묻고
동전 몇 잎 뒹굴다 소리 없이
국밥을 마시며 잠든 척,
가혹한 형벌 돌아갈 고향이 없다
가슴에 파고드는 가시
아무도 묻지 않는 의미를 준비하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보이지 않는 열정의 자유
귀하게 들여다보는 그득한 하늘
길을 잃어도 좋다
시처럼 살다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이동희의 「가을이 오면」전문
이동희는 ‘지역문단순례-경북문협 편’에 게재하여 가을을 음미하고 있다. 그는 시적 상황도입에서 ‘가을이 오기 전에 / 얼룩진 무심한 거울을 / 말끔히 닦아 두어야 한다’는 상황을 설정하고 결론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길을 잃어도 좋다 / 시처럼 살다 너를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어조에서 ‘너’라는 화자를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이 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가풀막 언덕길 / 어머니 상여를 빗방울에 묻’었다거나 ‘가혹한 형벌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절망의 언어에서는 이 가을과 동시에 엄습(掩襲)하는 그리움의 이미지가 투영되고 있다.
내리쬐는 뙤약볕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처럼
누렇게 살쪄가는 벼 이삭처럼
들판 모퉁이에 서 봅니다
암녹색 가을 하늘에
풍요와 행복이 가득
몸도 마음도 유토피아를 꿈꾸며
혼자 가만
예쁜 미소를 짓는다.
-조복현의 「가을」전문
조복현의 가을은 지금까지 보와 온 우수(憂愁)의 이미지와는 달리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나 ‘누렇게 살쪄가는 벼 이삭’을 바라보는 형상에서 ‘풍요와 행복이 가득 / 몸도 마음도 유토피아를 꿈꾸’는 행복의 풍요를 음미하고 있다. 이렇게 가을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살펴보았지만, 이 가을에서 발상한 작품들도 다수 읽을 수 있었다. 조광식이 작품「월성의 비밀」중에서 ‘가을 햇살 왼쪽에는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라거나 ‘가을 창가에 앉아 / 어제도 오늘도 못잊을 / 천년 향기를 따라 / 춘몽(春夢)을 꾸며 하이얀 날개를 펼칩니다’는 가을은 이 가을과 접맥된 다른 정경이나 사물(혹은 시적 대상)에 대한 한 부분에서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시법을 응용하고 있다.
김명석도 작품「서럽도록 아름다운 땅에서」중에서 ‘부서진 낙엽 밟고 은하수 끝에 박힌 / 별 하나를 뽑으려 길 아닌 길을 그대 가고 있는가’ 또는 ‘갈잎 속에 이슬처럼 살아도 한 백 년인 걸’ 그리고 ‘남겨질 흔적이나 가다듬으며 /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나그네처럼 떠나는 거지 / 속박에서 벗어난 정토(淨土) 불보살의 뜻도 그러하였으리’라는 결론처럼 그가 구현하려는 ‘정토’에 관한 시상이 바로 가을 ‘부서진 낙엽’을 밟으면서 발현되었다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단풍 서리 곱게 내린 가을
표현 못한 언어들이 홀로 앓다가
흔적들이 모여 앉아
밤새워 쓴 편지
그대에게 부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연
하얀 편지지에 가득 담아 놓았는데
책갈피에 넣어두고 몇 날 며칠
시간만 홀려 보냈습니다
따스한 봄날
고운 꽃잎 흩날리는 소리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추억을 흔드는
꽃바람에 띄우겠습니다.
-정희정의 「편지」전문
이 ‘편지’에서도 ‘그대’에게 부치지 못한 ‘밤새워 쓴 편지’를 ‘단풍 서리 곱게 내린 가을 / 표현 못한 언어들이 홀로 앓다가’ 완성했으나 아직까지 부치지 못하고 ‘따스한 봄날 / 고운 꽃잎 흩날리는 소리’ 들리는 날 ‘추억을 흔드는 / 꽃바람에 띄우겠습니다.’라는 여망으로 자신의 심중(心中)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가을의 이미지는 추풍낙엽(秋風落葉-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이나 황국단풍(黃菊丹楓-가을을 상징하는 노란 국화와 붉은 단풍) 혹은 추성(秋聲-가을의 바람 소리)에서 이미지를 찾거나 발상하는 경향은 옛날 우리 선비들이 즐겨 취택(取擇)하는 가을의 시담(詩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필자의 오랜된 작품 「가을길을 걸으며」전문에서도 ‘멀리서 손짓하는 바람을 따라 / 텅빈 가을 길을 걸어간다 / 오래도록 삭지 못한 / 낡은 염원 하나씩은 / 코스모스 꽃잎 위에 던지면서 / 가을을 가고 있다 / 허허로운 발걸음 / 낙엽 바삭이는 소리에 / 아득히 지워지는 그리움 / 저문 계절에 서서 응어리 진 채 / 아픈 사랑으로 / 풀벌레는 잠들지 못하고 / 길섶에서 흔들리는 꽃대궁들은 / 들판의 그 넉넉함도 / 그 길에 붓그린 밀어도 / 누군가 잊어버린 노래여라 / 가을 길에 들리는 빗소리 / 오, 나의 사랑이여.’라는 어조로 그리움을 진지하게, 간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정비석 소설가도 그의 작품 「들국화」중에서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가는 풀밭에서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랗게 갠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라는 어조에서 우리는 가을의 이미지를 순정적인 서정을 흡입시키는 매체가 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가을은 풍요와 쓸쓸한 고독이 동반하는 계절이다. 겨울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한 해의 생동감을 정리하는 결실이 우리 모두에게 도래(到來)하기를 기대한다. 등화가친-독서량도 증대시키면서 좋은 작품 한 편 창작하기를 기원한다.(『국보문학』 2014. 10.)
여름 시편들과 대자연의 향연
이젠 입추, 말복 지나고 처서까지 지나간 9월, 가을 절기이다.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워서 열대야 등 여름 고통이 심했다. 이태백도 ‘백우선을 부치기도 귀찮다 / 숲속에 들어가 벌거숭이가 되자 / 건(巾)을 벗아 석벽에 걸고 / 머리에 솔바람이나 쇠자(懶搖白羽扇 裸體靑林中 脫巾掛石壁 露頂灑松風)’고 했다. 그러나 소동파는 ‘사람들은 모두 더위에 괴로워하는데 / 나는 여름해가 긴 것을 좋아 하노라(人皆苦炎熱 我愛夏日長)’라고 해서 이태백과 소동파의 여름나기는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일찍이 김남조 시인은 그의 글 「생명의 시원에서」중에서 ‘마치도 여름은 모든 사람이 연사인양 떠드는 기분이고 가을은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이들의 품격있는 방청석과 같다’고 했다. 이처럼 여름과 가을의 표정이나 의미는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옛말에 신량입교허 등화초가친(新凉入郊墟 燈火稍可親)이란 말이 있다. 이는 조용히 벌레 소리를 들어가며 독서삼매에 밤 깊은 줄을 잊어도 좋은 가을을 예찬한 말이다. 등화가친의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독서의 법열을 아는 사람은 다행이겠으나 이 독서의 비애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 좋은 계절을 그냥 보내기는 너무나 아깝다는 계절 9월에 누구나 시 한 편쯤은 음미하는 여유를 가져야 할 텐데 글쎄, 세상의 인정이 자꾸 위험해지려는 현실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지난 8월호에서는 마지막 물러나는 여름의 아쉬움이 포괄된 작품들을 많이 대할 수 있어서 이 여름에 대한 이미지와 시적 전개를 살펴보기로 한다.
하늘 정갈한 날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향해
오르고 오르다 보면
맑고 오묘한 물소리를 듣는다
넉넉한 자리 비워놓고
그리움으로 기다리는
삶의 안식처 거기서
누구나 착한 신의 자식들로
가끔 생(生)의 진실을 만나기도 한다
진솔한 땀으로 버거운 삶을 비우는
여름 계곡은
아마도 도솔천을 닮았을 것이다.
먼저 칼라로 미술 작업실과 계곡의 그림 한 점 곁들인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조경화의 「여름계곡에서」전문이다. 주제의 투영은 바로 ‘넉넉한 자리 비워놓고 / 그리움으로 기다리는 / 삶의 안식처’에서 해법을 찾아가는 삶의 지향점이다. 그리고 이 계곡에서는 ‘가끔 생(生)의 진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시적 진실로 천착하는 것은 마지막 결론으로 적시한 ‘진솔한 땀으로 버거운 삶을 비우는 / 여름 계곡은 / 아마도 도솔천을 닮았을 것이다.’라는 어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삶을 비우는’ 삶과의 대칭적인 이미지가 돋보인다.
이 비움의 미학은 우리 인간들이 내적으로 지향해야 할 형이상적인 정신세계의 정점이지만 종교적인 관점이거나 지성적인 개념에서도 신성한 가치관의 탐색으로써 우리들은 공(空)이나 허(虛)의 사유(思惟)를 시적으로 접근하는 예를 다양하게 대할 수가 있어서 시의 위의(威儀)를 더욱 높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늘 가린/ 잎 틈으로/ 별을 헤아리다가/ 이른 새벽/ 뿌옇게 안개로 치장하고/ 아침이면 부드러운 햇살로/포근히 몸을 감싼다/맑은 물 계곡에 담고/시원한 바람 불러 /새들의 노래 소리와 함께/정령들이 노니는/숲속의 쉼터/지친 영혼에/푸른 피를 수혈하는/너그럽고 여유로운
여름 숲이고 싶다.
이 허태기의 「여름 숲」전문은 어떠한가. 이 청정한 숲에서 그가 감응(感應)하는 시각적 이미지는 ‘잎 틈으로 / 별을 헤아리’는 일과 ‘아침이면 부드러운 햇살로 / 포근히 몸을 감’싸는 현상으로 현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잡다한 형상들이 결국은 ‘지친 영혼에 / 푸른 피를 수혈하는 / 너그럽고 여유로운 / 여름 숲이고 싶다.’는 ‘지친 영혼’과의 교감을 통해서 ‘너그럽고 여유로운’ 정신적인 안온을 투영하는 주제를 살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시적 상황의 설정이나 전개는 우리 고유의 시적 원류에서 생성하는 서정성을 배제하지 못하고 진솔한 사유와 정서의 융합의 결정체가 된다는 시법을 이해할 수 있다.
대자연속 풀벌레 합창 /매콤 알싸한 모깃불 향내/귀와 코를 간질인다/멍석 위에 둘러앉은 티 없는 이들 / 오고 가는 눈빛 선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정으로 영근다/옥수수 단호박 모락모락 김 서리고/엄마의 줄부채질/온 가족이 시원하다/북두칠성 빛나는 /화사한 달빛 아래/하하 호호 술래잡기 끝나도/이들이 사라질까 /눈뜨기 두렵다.
이계순의 여름은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작품「그 여름밤에」전문에서 보면 그의 상상력은 과거의 체험으로 거슬러가고 있다. 여름밤에 일어나는 한 가족의 단면이 시적 발상으로 설정하고 상황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멍석 위에 둘러앉은 티 없는 이들’이 펼치는 현장은 ‘주고받는 이야기 정으로 영’그는 정겨운 정황(situation)은 다시 ‘옥수수 단호박 모락모락 김 서리고 / 엄마의 줄부채질 / 온 가족이 시원하다’는 어조에서 정감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심이 여름 달빛 아래에서 ‘하하 호호 술래잡기 끝나도 / 이들이 사라질까 / 눈뜨기 두렵다.’는 결론으로 그의 시적 진실로 승화하는 것은 그 그리움이 매체(媒體)가 되어 지금 작품으로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름위에 뜬 호수
대지에 널브러진 쓰레기
다 쓸어갔으면 싶다
가면 쓴 초록
배 밖으로 튀어나온 간
가지 부러뜨려 놓고
뿌리채 뽑아 갔으면 싶다
쫙쫙 훑은 터전
총총 철죽 깊게 심어
붉게 타는 봄동산
배턴 넘겨주고 싶다
동산 꽃필 수 있다면
폭우는 대 비
오물을 다 쓸어 담아
소각장으로 보냈으면 싶다.
조환국의 「폭우는 빗자루」전문에서는 여름 이미지 특히 폭우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에서 추출한 이미지가 특이하다. ‘폭우=빗자루’라는 은유적 처리는 약간 생소한 감이 있지만, 이는 ‘대지에 널브러진 쓰레기 / 다 쓸어갔으면 싶다’는 어조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그가 염원하는 것은 그 폭우의 빗물이 대지를 청소해주는 역할의 기대가 넘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시법으로 ‘오물을 다 쓸어 담아 / 소각장으로 보냈으면 싶다.’는 결론과 같이 그 ‘빗자루’의 역할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광범위하게 확대시키고 있으며 그는 매 연마다 ‘싶다’는 어미(語尾)를 장식해서 그의 소망이나 갈구(渴求)의 성취를 암시하고 있다.
나날이 열기가 더해지는 날이지만
칠월의 언덕은
그 푸름이 짙어져
희망으로 물들어가니 좋습니다
장마 끝에 찾아온 작열하는 태양
그 뜨거움만큼
용솟음치는 정열이 있고
살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비가 오시는 날이면 그리움에 젖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기다려지는 당신입니다.
도지현의 「칠월에 보내는 편지」중에서는 시간성에서 반추(反芻)하는 그리움과 기다림의 진솔한 정념(情念)이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칠월의 열기와 작열하는 태양이 지금 ‘용솟음치는 정열이 있고 / 살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소중한 각성(覺醒)을 갖게 된다. 이러한 정감들이 ‘비가 오시는 날이면 그리움에 젖고 / 은은한 향기가 / 코끝을 스치면 기다려지는 당신’이라는 ‘편지’의 간절한 소회(所懷)를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단순한 심정의 발현이지만, 이 여름에 띄우는 그리움의 언어는 상당한 설득력을 내포하고 있어서 그의 칠월은 아마도 불망(不忘)의 계절인가 보다.
둥치 안으로 삭힌 언어에서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
옹이가 된 바람의 불립문자들
속 깊이 메아리치다
껍질을 뚫고 나와 허공을 찌른다
녹음을 입은 느티나무 가지에
산들바람 불어오면
매미 한 마리 날아 든다
정희정의 「초여름」중에서는 기승전결 구도를 응용한 시법에서 상당한 시적 경력이 축적된 언어의 구사를 엿볼 수 있다. 이는 그가 ‘둥치 안으로 삭힌 언어’나 ‘옹이가 된 바람의 불립문자들’이라는 어조의 다양성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그가 시적 언어의 조탁(彫琢)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이러한 언어들이 ‘속 깊이 메아리치다 / 껍질을 뚫고 나와 허공을 찌른다’는 주지적(主知的)인 결론의 주제는 시적 의미성과 그의 지향점인 인생관까지도 유추할 수 있는 탁월한 시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국보문학』 2014. 9.)
염천(炎天)에서 꽃 피운 자연 서정시편
박두진 시인은 그의 작품 「8월의 강」에서 ‘팔월의 강이 손뼉 친다 / 팔월의 강이 몸부림 친다 / 팔월의 강이 번민한다 / 팔월의 강이 침체한다 / 강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 흘림을, 죽음들을 기억한다 / 어제의 분노와, 비원과, 배반을 가슴 지닌 / ......., 강은 팔월의 강은 유유하고 왕성하다 / 늠름하게 의지한다 / 손뼉을 치며 깃발을 날리며, 오직 /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한다’라고 읊었다. 이렇게 8월의 번민과 한숨은 오로지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하는 어조는 염천에서 새로운 향기의 메아리를 창출하는 ‘팔월의 강’으로 흐르고 있다. 이러한 시적 모티프나 흐름은 어떤 형이상적인 인식의 전개가 한 편의 작품으로 창작되는 결과물로 보아진다.
8월 염천에서는 휴가다, 피서다, 해외여행이다, 나름대로의 혹서(酷暑)를 이기는 방법들이 있겠으나 우리는 오직 한 편의 시를 위해서 땀을 흘리는 열정이 다가올 추수의 수확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매진하고 있다.
휘돌아온 바람으로 네
비로소 자리하여
하늘 가장 가차이
춤을 추는 몸짓으로
너는 꽃으로 피고
나는 별밭으로 남아
네 향기 속에
내 이름 사르련다
우리 땅 한가운데 너
지난 7월에 ‘특별초대시’로 게재한 최은하 시인의 「꽃밭에서」전문이다. 그는 ‘꽃밭’과 ‘별밭’을 대칭적으로 교차하면서 이미지를 적출(摘出)하고 있다. 그의 아호가 ‘별밭’임을 상기하면 작품의 상황이나 그 전개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최은하 시인은 1938년 나주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1959년에 김광섭 선생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별밭 최은하 원로시인은 『왕십리 안개』『바람의 초상』『최은하 시선집』 등 18권의 시집과 『그래도 마저 못한 말 한 마디』 외 1권의 수필집을 상재하였다.
메마른 땅
뿌리는 보슬비
하늘 찌르듯 삼라만상
생존의 단비가 휘날린다
--중략--
보슬비 내리면
걷고 싶은 연인의 마음
살금살금 발걸음 놓는다
풀잎 맺힌 이슬방울
생기 솟아 물방울 되어
사랑수로 마시는 보슬비.
--서병진의 「보슬비」중에서
우선 서병진은 8월의 가뭄이나 장마로 인한 어려움에서 안온과 생기를 염원하는 ‘보슬비’가 ‘촉촉이 적셔주는 사랑비’로 전환하는 이미지의 변신을 탐색하고 있다. 그는 이 ‘생존의 단비’에서 염천의 황량한 심저(心底)들을 정화하는 기능의 시법으로 ‘연인’과의 흠모(欽慕)를 형상화하고 있다. 8월 장맛비와는 대조적인 ‘보슬비’에서 ‘메마른 땅’과 ‘사랑수로 마시는 보슬비’와의 비교는 상당한 상상력으로 유추하는 시법으로써 고갈과 생기의 대지를 연상케 하는 시적 진실을 이해하게 한다.
그대여!
초록 장미 피는 그 길로
그리 가시면 주신다던 ‘행복’ 뉘에게서 받나요
그리 돌아 보며보며
멈칫멈칫 떨어지지 않는 발길
의구심 가득한 눈동자로 가셔야만 하나요
자유롭고 아름다운 갈망
지평 끝 초롱불 따라 어디까지 가시나요
저는 청정하게 그대 오시기 기다리고 있겠어요.
--정진수의 「바람에게 쓰는 편지」 전문
정진수는 바람이라는 자연물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는 어조에서 ‘뉘에게서 받나요’나 ‘가셔야만 하나요’ 그리고 ‘어디까지 가시나요’ 등의 의문형 어법으로 문장을 이어가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는 결론으로 ‘저는 청정하게 그대 오시기 기다리고 있겠어요.’라는 해법을 적시하여 바람과의 교감을 조화롭게 마무리하고 있어서 그가 간직한 내면의 정서가 ‘행복’과 ‘자유롭고 아름다운 갈망’을 염원하는 이미지가 공감을 유로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
물빛 고요히
은빛 찬란하게 흐르고
허공의 여백 가득 채운 연분홍 고운 꽃잎
미풍에 눈꽃 흩날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는 숲길
뭉게구름이 피었다가 사라지고
뻐꾸기 울음소리 처연하게 스미는 봄날
나뭇잎 그림자 배웅하는 오솔길
뒷동산을 하얗게 물들인 아카시아꽃
허공에 주저리주저리 내려뜨리면
벌, 나비의 사랑 누리가 달아오르고
엉겨 붙고 젖어 흐르면
붓을 들고
수줍은 손짓으로
봄의 화폭에 고운 수를 놓는.
--정희정의 「봄의 풍경화」 전문
정희정도 자연 서정에 시각을 고정시키고 있다. ‘봄의 풍경화’를 그리면서 전개하는 서정성의 진수(眞髓)는 아무래도 주변 정경(情景)의 봄 이미지의 아름다움이다. 그는 이러한 계절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붓을 들고 / 수줍은 손짓으로 / 봄의 화폭에 고운 수를 놓’는 다감한 시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허공의 여백’, ‘연분홍 꽃잎’, ‘미풍’, ‘뭉게구름’, ‘뻐꾸기 울음’, ‘오솔기’, 그리고 ‘아카시아꽃’과 ‘벌, 나비’ 등등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현현됨으로써 시적 전개의 효율성을 상승시키고 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 없는 야생화
목젖 보이도록 웃고 있다
뉘도 눈총주지 않는 야생화
초록색 물감 치마 두르고
가슴 열어 사랑편지 쓴다
--중략--
돌 틈에 핀 야생화
분장 미소 초롱초롱
내게도 순정은 있다고
행복의 꿈 편지 띄운다.
--조한국의 「야생화 편지」 중에서
조환국의 서정성은 어떠한가. ‘야생화’라는 사물이 우리들에게 띄우는 편지인지, 객관적 사물로서의 인간이 관망하거나 감응(感應)하는 시적 대상물인지는 차근차근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그는 ‘초록색 물감 치마 두르고 / 가슴 열어 사랑편지 쓴다’거나 ‘선한 눈망울 이리저리 / 찾는 님 지금쯤 가슴 조인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내게도 순정은 있다고 / 행복의 꿈 편지 띄운다.’는 어조에서 명징(明澄)하게 현현되듯이 ‘야생화’의 순정적 이미지가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하얀 꿈 서려 있는
그 섬에 가고 싶다
환하게 열어주는 푸른 물결 위
힘차게 날갯짓하는 너를 보고 싶다
담백한 마음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
가만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만 싶다
--중략--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도
한없이 넉넉히 감싸는 수평선도
속울음 우는 너의 마음 알 이 없지만
먼 하늘가에서 사랑담아 그 마음 헤아려보며
물에 비친 얼굴 위로 애꿎게 수제비만 동동 띄운다
--채 린의 「하얀 새가 앉아 있는 섬」 중에서
채 린 역시 ‘하얀 새’와 ‘섬’이 조화를 이루어 ‘힘차게 날갯짓하는 너를 보고 싶다’거나 ‘가만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만 싶다’는 기원 의식이 부드럽게 분사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싶다’라는 어휘로 그의 여망이나 갈구(渴求)하는 심적인 내면이 적나라(赤裸裸)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다시 ‘하얀 꿈’과 ‘푸른 물결’, ‘담백한 마음’, ‘사랑’,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 ‘넉넉히 감싸는 수평선’ 등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속울음 우는 너의 마음 알 이 없지만 / 먼 하늘가에서 사랑담아 그 마음 헤아려보며 / 물에 비친 얼굴 위로 애꿎게 수제비만 동동 띄운다’는 결론에서 그리움의 이미지가 형상화하고 있다.
한 줄 한 줄 읽지 않아도 문장이 되는
띄엄띄엄 읽어도 푸르고 푸른
한 장 한 장 넘기도 않아도 책이 되는
보이는 것마다 글이 되는
하늘도
바람도
꽃도
강물도
모두 스승이다
우리 함께 읽으면 행복을 주는
자연은
살아있는 살아가야 할 길을 열어주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자연은 스승.
--이소영의 「자연은 스승」 전문
이소영은 ‘자연은 스승’이라는 결론을 부각함으로써 그가 만유(萬有)의 대자연에 대한 경외(敬畏)와 ‘위대한 가르침’을 간과(看過)하지 않는 사물 응시(凝視)의 집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읽지 않아도 문장이 되’고 ‘넘기지 않아도 책이 되’고 또 ‘보이는 것마다 글이 되는’ 것이 하늘이며 바람이며 꽃이며 강물이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초연(超然)하는 경지를 내밀하게 절규하고 있다. 이것이 자연 서정의 본령이며 시의 위의(威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조환국의 「생명의 소리」홍대식의「경춘선」김해리의「벌이 웃느다」김민희의「꽃과 나비」배미영의「은비」송태환의「파도」가 자연 서정을 물씬 젖게하는 작품들이다.(『국보문학』 2014. 8.)
‘세월호’ 참사와 분노의 시적 형상화
벌써 7월이다. 장마철이 시작되려나 보다. 신록이 우거져 만물을 생동감 넘치게 하는 청순의 계절이다. 7월이 되면 ‘내 고장 칠월은 /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이육사의 작품 「청포도」가 떠오른다. 박두진 시인도 「칠월의 편지」에서 ‘칠월의 태양에서 사자 새끼 냄새가 난다 / 칠월의 태양에서는 장미꽃 수술 냄새가 난다’라고 노래했다. 지난 5월과 6월은 사랑의 계절이었다. 많은 시인들이 사랑을 노래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등 사랑이 넘치는 5월과 현충일과 6.25 사변일 등 우리의 가슴에 한으로 깊이 남아있는 아픔을 화해하는 사랑의 원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사랑의 이미지는 ‘바보처럼이나 사랑하고 싶네 / 그렇다 / 오월의 밤은 / 뜨겁고 차디차다는 것을 / 이제야 알 것도 / 같지만....(홍중기의 「고통의 계절」중에서)’이라거나 ‘사랑은 사랑을 하고 / 그 사랑은 또 그 사랑을 가슴에 묻는다 / 초록이 초록이기를 바라면서 / 그 사랑 향기에 취하나 보다(이철호의 「5월의 사랑」중에서)’ 그리고 ‘6월만 되면 훗날 후세 / 날아다니는 숨바꼭질하는 문자 / 감곷 피는 잎 모양을 보면 / 붙어있는 파릇한 이파리가 떨어지기 전에 / 떨림의 숨은 소리는 온다간다 말도 없는 / 너였다(황주철의 「6월이면」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사랑과 ‘떨림의 숨은 소리’와 같은 간절한 사랑의 노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못다푼 비극의 현실이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는 세월호 침몰사건은 온국민의 분노와 슬픔을 절규하고 있지만 지금도 12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또한 이 배의 주인인 유모씨도 잡히지가 않아서 분노는 더욱 절정에 달하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인 비극을 절감한 시인들이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노력을 지난달 국보문학에서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전남 진도 팽목항에는 마지막 실종자를 찾기 위한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정조(停潮) 등의 해류의 움직임에 따라서 잠수사들이 물속에 잠긴 선박을 탐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뜨거운 목숨의 줄 끊지 말어라
고통과 분노를 씹어 삼켜라
이미 죄다 찢어진 혈육의 가슴
피륙을 벗기는 통증을
그 누군들 대신할까
이제 막 영글려던 꽃몽우리
처절하게 꺾이는 순간의 도피
비겁자의 대피소는 바다처럼 넓지 않다
누가 이들의 아우성을
누가 이들의 통한을 안단 말인가
--이성미의 「세월호」중에서
이성미는 승객을 대피방송도 없이 그냥 탈출하여 자기 목숨만을 구한 선장과 선원 일당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다. ‘비겁자의 대피소는 바다처럼 넓지 않다’는 통한의 분노가 처절하게 생을 마감한 뭇 생명들을 위로하고 있다.
엉터리 같은 사고가
대형 참사로 변했구나
눈물만 하염없이 흐를 뿐
어이없어 분노할 수도 없구나
나는 믿기지 않도다
놀라니 자율신경이 헝클어지고
미친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구나
--김낙형의 「끊어진 카톡」중에서
김낙형도 그 당시 선내에서 벌어진 상황을 인지하고 분노를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엄청난 대형 참사가 인명을 앗아간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형상화하고 있어서 처참한 현장의 이미지가 생생하게 적시되고 있다.
얼마를 더 가져야 만족할 수 있어서
생명을 담보로 헛된 짓을 했느냐
이 버러지 같은 굴통이들
다 낡은 배를 사고 그것도 모자라
까대기를 만들어서 욕심을 채웠더냐
천벌을 받아도 모자랄 뇌 없는 인간들아
너희 무거운 죄는 자자손손
피맺힌 원한으로 남아 우세를 당할 것이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날마다
너희가 한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
생각할수록 소름이 돋는다.
--권영미의 「품행도 덕성도 잊은 인간들」중에서
권영미는 우리의 인성에서 가장 중요한 품행과 덕성을 망각한 인간들을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생명을 담보로 헛된 짓’을 적시하면서 ‘천벌을 받아도 모자랄 뇌 없는 인간’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너희 무거운 죄는 자자손손 / 피맺힌 원한으로 남아’있을 저주의 어조로 분노하고 있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희생한 누구를 위해
우리는 언젠가는 촛불이 되자
서로를 아끼는 불을 켜자
촛불이 되자
안전은 대통령과 정부가 해나가야 할 국민의 대명사다.
--박윤주의 「촛불」전문
박윤주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촛불’을 밝혀 들고 그들을 애도하자는 호소력을 형상화하는 절규이다. 안전 불감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함께 전하고 있어서 ‘서로를 아끼는 불’이 필요한 현실의 시대적 아픔도 현현되고 있다.
한탄스런 어른들의 잘못된 행동은
이제 어떻게 자식들의 울분에
고개 들고 부모라 말할 수 있을런지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있지만
아픈 상처 분노로 잊혀지지 않을 터
그 어디서 예쁜 꽃들이 다시 피어날까
간성으로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우리 아이들 영전에
노란 리본 하나 달아두고 속죄의 눈물만 흘리고 만다.
--홍대식의 「먹먹한 시간」중에서
홍대식의 ‘먹먹한 시간’은 바로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있지만 / 아픈 상처 분노로 잊혀지지 않을 터 / 그 어디서 예쁜 꽃들이 다시 피어날까’라는 의문형 수사법으로 당시 참사의 현장에서 탈출한 선원들을 분노하면서 그들 영전에 ‘노란 리본 하나 달아두고 속죄의 눈물만 흘리고’ 있다. 그는 ‘한탄스런 어른들’과 ‘아이들’ 그리고 ‘자식’과 ‘부모’가 대칭을 이루면서 ‘다시 피어’나지 못할 ‘예쁜꽃들’의 상처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분노로 현현되고 있어서 공감을 유로하고 있다.
하늘땅도 바다도 울고
산천초목도 고개를 떨궜다
사욕의 우매한 자여
창파에 널브러진 국화꽃을 보라
물꽃 튀는 비명소리 귀 찢는다
피지 못한 봉오리들
살려서 품으로 돌려주오
억장 무너지는 절규의 선지피
온누리 붉게 물들인다
방글방글 날뛰며
평생 추억 쌓는 수학여행길
피눈물 피바다가 왼 말이냐
네 초인종 소리 온통 곡두뿐이다.
--조환국의 「천지도 울고」전문
조환국 역시 ‘하늘땅도 바다도 울고 / 산천초목도 고개를 떨궜다’는 상황에서 읽을 수 있듯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그의 진솔한 내면의 정서는 엄숙하면서도 ‘사욕의 우매한 자여 / 창파에 널브러진 국화꽃을 보라’라는 경고의 메시지까지 동행하고 있다. 그는 다시 ‘물꽃 튀는 비명소리’와 ‘억장 무너지는 절규의 선지피’라는 극단적인 언어의 활용으로 시의 위의(威儀)를 더욱 승화하는 시적 전개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진실과 정감을 유로해서 ‘평생 추억 쌓는 수학여행길 / 피눈물 피바다가 왼 말이냐’라는 감동의 어조로 작품의 주제로 형상화하고 있다.
지난 호에는 ‘국보문예창작대학원’ 수강생들의 작품이 특집으로 게재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세월호’의 상황과 이미지의 투영이 두드러지게 현현되고 있다. ‘진도앞 바다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 / 고통을 함께하고 눈물을 닦아주며 / 침몰된 세월 뒤로 하고 십자가로 일어난다.(이재호의 「세월호」중에서)’거나 ‘삼백여 희생자의 유가족 애절 통곡 / 온나라 울리더니 대통령도 울렸다 / 이 나라 어찌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정태은의 「세월호 사고」중에서)라는 작품이 눈에 뜨인다. 이는 시조라는 정형적 운율을 중시하는 특징이 현대시와는 별개의 양상으로 현시되지만 ‘희생자 유족’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온국민의 분노를 화해로 흡인하는 시법은 우리들을 공감으로 형성하는 시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떠나버린 빈집
삶의 발자국은 사라지고
빈 그림자만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두 번째 인생은 없다
비비고 견주며 사는 삶의 종착역
사는 일이 벅차다고
주어진 운명의 시간 헛되지 않게
절제하고 버리며
바람처럼 살다가는 인생의 주인공
매 순간 순간
불타는 열정으로 그려가야 할 나이테.
--조진현의 「빈집」중에서
여기 조진현은 지금까지 살펴본 세월호 사건과는 별개의 이미지로 그의 심저(心底)에서 숙성된 시적 위의와 본령을 탐색하는 정수(精髓)를 읽을 수 있다. 그는 ‘빈집’이라는 이미지에서 공허(空虛)에서 창출하는 주제가 삶과 인생이 복합적으로 상관성을 적시함으로써 ‘주어진 운명’과 ‘바람처럼 살다가는 /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진실로 발현하고 있다. 시는 현실적인 사건이나 외적(外的)인 사물에서 이미지나 주제를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물에서 재생되는 체험이 어느 부분과 상관물로 현현되느냐 하는 문제도 결국 우리 인생관의 재창조를 모색하는 작업이 곧 시법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보문학』 2014. 7.)
Persona의 수사적 목적과 진실
지난 4월은 잔인했다. 엘리엇의 작품 「황무지」첫 행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우리들의 4월은 어린 생명들이 한꺼번에 사라져간 비극의 잔인한 4월이었다. 온 국민들이 슬픔에 잠긴 채 아직도 못다푼 원혼들이 저 남쪽 진도 앞바다 팽목항에서 한으로 울부짖고 있다. 그것도 인재(人災)라는 후진국의 비극이 인간의 조그마한 부주의와 부실로 엄청난 슬픔을 남기고 말았다. 지금도 그 비극의 현장에는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추모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이제 유월이다. 유월은 우리의 고전 「농가월령가」에서 ‘농부야 근심마라 수고하는 값이 있네 / 오조 이삭 청태공이 어느 사이 익었구나 / 일로 보아 짐작하면 양식 걱정 오랠소냐 / 해진 후 돌아올제 노래 끝에 웃음이라 / 애애한 저녁 내는 산촌에 잠겨 있고 / 월색은 몽롱하여 발길에 비칠거다’라고 해서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의 의미가 풍기는 성하(盛夏)로 접어든다. 지난 호의 작품들에서 우리 시의 형태를 살펴보면 수사적으로 퍼소나를 통한 소통이나 주제의 창출을 모색하는 경향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이 퍼소나는 시 작품에서 말하는 사람 또는 화자(話者)를 일컫는다. 이것은 대체로 많은 시인들이 응용하는 구성 요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퍼소나는 『시학사전』(이정일 편저)에서 보면 배우의 가면을 의미하는 라틴어 퍼소난도(personando)에 유래된 용어로서 가면을 쓴 인물이 퍼소나는 물론 시인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무수한 얼굴과 개성을 가질 수 있다. 시인은 퍼소나를 통해서 수많은 인생과 세계를 폭넓게 조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적 화자라고 불리는 퍼소나가 작품 속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시에서 화자는 춘향이나 님과 같은 사람이 되지만 때로는 관념이나 사물이 될 수도 있다. 대체로 작품 속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는 ‘나’‘너’ 또는 ‘그’ 등의 인칭대명사로 나타나는 예를 많이 접하게 되는데 1인칭인 ‘나(혹은 우리)’와 2인칭인 ‘너(혹은 당신, 그대)’ 그리고 3인칭인 ‘그’가 있는가 하면 부정칭인 ‘아무개’도 작품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쓰인다.
- 제1인칭 : 나, 내, 저희, 본관, 본인, 소인, 소생, 소직, 소신, 오인(吾人) 등
- 지2인칭 : 너, 그대, 당신, 댁, 인형, 귀형, 귀관, 공(公), 나으리, 경(卿) 등
- 제3인칭 : 이사람, 그자 저놈, 저 자식, 등
- 부정칭 : 누구, 아무개, 실명, 등
그렇다면 제1인칭 대명사가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바람에 휘날리며
흔들거리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무심결에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덧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나 자신을 바라본다.
--김민희의「코스모스」중에서
허공에 엎드린 거미야
은빛 외줄에 몸을 달고
밤손님으로 내릴거니
별꽃으로 오를거니
조막 가슴 그늘로 내려
묵음에 들고
내 마음은 사다리 타는구나
--김해리의「생명의 끈」중에서
위의 두 작품에서는 ‘나 자신을 바라본다.’거나 ‘내 마음은 사다리 타는구나’라는 어조로 ‘나’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서 간과(看過)할 수없는 부분이 김민희는 ‘코스모스’라는 사물을 제목으로 했으나 김해리는 ‘생명의 끈’이라는 관념이미지로 제목을 했다. 이러한 경우, ‘코스모스’가 의인화하여 ‘나’가 되는 방식으로 결국 ‘코스모스=나’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김민희는 자신이 노래(또는 절규)하는 음조(音調)가 코스모스를 대행시키는 형식이어서 이러한 시법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요즘의 화자라고 할 수 이다. 이와 반대로 관념 이미지에서 ‘나’는 실제로 김해리의 목소리이거나 그의 진실이 노골적으로 반영되는 자신과 일치하는 화자가 되어 김해리의 내면을 노출하는 경향의 시법으로 변해서 자칫하면 독백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영순도 작품「사는 게 우습다」중에서 ‘은은한 음악이 좋다가도 / 나도 모르게 경쾌한 음악이 좋고’라거나 또는 ‘잘 팔리지 않는 글을 쓰는 / 내 모습도 오늘따라 어쩐지 우습다’ 그리고 작품「매화꽃을 보며」중에서도 ‘내 발이 풍금을 치며 / 가람 같은 마음으로 / 따라 부르며 흐놀다 보니 // 나는 어디 가고 매화만 있구나’라는 어조로 ‘나(혹은 내)’에 대한 실재(實在)의 언술로 현현되는 것은 역시 독백이나 넋두리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처럼 ‘나’를 화자로 해서 시적 진실을 탐색한 작품은 정희정의 「끝없는 물음」중에서 ‘강물은 강물로 흐르고 / 바람은 바람으로 부는데 /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이천도의 작품「봄」에서 ‘내 마음이 그새 / 꽃이 되었다’, 김성훈의 작품「자갈치 아지매」에서 ‘자갈치 아지매 / 억센 사투리 / 나를 당긴다’ 그리고 권영미의 작품 「떡고물」에서 ‘내가 너희 살렸다고 / 거짓깃발 높이 들고 소리를 지르지만’ 등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화자 ‘너(혹은 당신, 그대)’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살펴보자.
당신의 투지력이 나에게
버팀목이 되어 준다면
지울 수 없는 은혜롭게
삶을 채워질 것을
--공정식의「도연선갱 별곡」중에서
너 없는 술자리에서 거나이 통음하다
술잔에 일렁이는 얼굴 하나 띄워놓고
취하니 흐린 안개 속 무엇인가 보이더라
--이성미의「취하니 알겠더라」중에서
켜져만 가는 상심의 너울
곱게곱게 갈아
잔잔한 호수에 희석한다면
그대 생각 잊혀질까
--홍대식의「커피 한 잔」중에서
여기에서 나타난 화자 곧 ‘당신’이나 ‘너’ 그리고 ‘그대’는 의인화가 아니고 실재(實在)하는 2인칭 화자라고 할 수 있다. ‘당신=도연선생’, ‘너=술 상대’, ‘그대=연인’ 등으로 화자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화자는 김기원이 작품 「당신에게」에서 ‘때때로 / 차 한 잔 나누고 싶은 당신 / 가슴 그림자로 / 봄바람 불어’ 또는 어광선의 작품 「지상 천국」에서 ‘소녀처럼 기뻐하는 / 그대의 손 잡고 길을 나섰다’거나 조환국이 작품「상처난 고목」에서 ‘증오심의 포로가 된 / 아픔의 생명 / 너를 더욱 아프게 할 뿐이다’ 조현광이 작품「야생화」에서 ‘그대, 음지에 가려져도 / 홀로 꼿꼿이 서서 / 온갖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며’ 그리고 송형기의 작품 「교육」에서 ‘너 가는 길이 / 바른 길이냐 / 그른 길이냐’라는 등의 화자 설정과 같이 작품 중에서 대화의 대상이 2인칭으로 다양한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제3인칭인 ‘그’에 대한 교감의 작품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모든 상념들을 망각의 바다에
던져버리고
그는 황금빛 날개를 달고
훨훨 하늘을 날은다
--류시희의「슬픈 남자의 하루」중에서
류시희는 ‘그는’이라는 화자가 그의 시적 진실을 대변해주는 형상이다. ‘나는’이나 ‘너는’과 같이 화자는 언제나 그 시인과 동행하면서 상황과 전개를 동시에 행하는 불가분의 상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시적 화자의 특성은 실제 시인이든 허구적인 시인이 언어를 특수하게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태도를 표현하는 사실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시를 읽게 되는데 시론에서 ‘몰개성론(沒個性論)’의 시관(詩觀)은 퍼소나(탈)라는 용어로써 시적 화자를 실제의 시인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시가 하나의 창조물인 이상 ‘탈’이란 시적 화자를 ‘자전적으로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상상적으로 동일시해야 할 것’이라고 고 김준오 평론가는 주장한다. 시적 화자는 제재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기 위해 창조된 극적 개성이기 때문에 시는 고백이고 자전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허구적이고 극적이라는 시론이다. 마지막으로 부정칭의 화자는 어떻게 펴현하고 있는가 알아보자.
- 시인이여 / 시를 가슴에 품고 구도의 길을 가는 이여(정성수의「시인에게」중에서)
- 처음부터 시인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김용수의「시인」중에서)
- 마음씨 고운 산처녀 같은 얼굴-한번 안아보고 싶은 / 복스러운 아낙네 같다(이학주의「호 박꽃」중에서)
- 한 그릇 나누어도 / 복에 겨운 친구(이일현의「친구」중에서)
- 기다림 / 배를 불리던 / 어머니가 보고 싶다. (임연혁의「봄비」중에서)
- 몇 년 전만 해도 동네 골목은 / 조무래기들의 놀이터였죠.(이길옥의「풍경 4」중에서)
- 솟재 밑 홀아비 짝귀 아제 / 이랴 낄낄 / 쟁기 한 짐 지고 소 몰아 / 몽실네 밭 갈러 가 는데(김덕원의「짝귀 아제」중에서)
- 우리 아내 / 맵시 좋아 / 곱기도 알뜰하고(송형기의「네 가지」중에서)
- 어머니의 가슴은 가마솥이다(이소영의「어머니의 가마솥」중에서)
- 무언의 / 침묵 속에 / 사유하는 노 뱃사공(정진수의「세월」중에서)
이러하듯이 많은 시인들이 인칭대명사 이외에 ‘시인’, ‘아낙네’, ‘산처녀’, ‘친구’, ‘어머니’, ‘조무래기’, ‘홀아비’, ‘몽실’, ‘아내’ 그리고 ‘노 뱃사공’ 등등의 다양한 화자가 등장해서 시적 진실을 탐색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일찍이 박목월 시인은 그의 작품「일상사」중에서 ‘청마는 가고 / 지훈도 가고 / 그리고 수영의 영결식 / 그날 아침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었다 / 그들이 없는 / 서울의 거리, / 청마도 지훈도 수영도 / 꿈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았다’라는 어조로 청마 유치환, 지훈 조동탁 그리고 김수영 시인들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시법도 우리는 눈여겨 음미할 필요가 있으리라.(『국보문학』 2014. 6.)
봄의 향훈과 서정적 이미지
오월이다. ‘오월은 계절의 여왕(노천명)’이니 ‘아름다운 오월이 되어 꽃봉오리 싹 틀 때 / 내 가슴도 사랑의 그리움에 싹튼다(H. 하이네)’라는 말처럼 오월은 사랑의 계절이다. ‘오월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도 사랑한다(이어령)’는 어휘에서 오월의 생명성은 그 이미지가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가는 역할이 우리 인간에게 사랑을 요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하듯이 ‘꽃샘추위가 있는 삼월과 /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오월 / 중간에 있는 봄의 계절 사월(배미영의「사월」중에서)’이거나 ‘올챙이 / 살얼음에 뒷다리 으라차차 / 시리던 꽃샘추위 성급한 울음소리에 / 운석에 / 스모그 현상에 / 꿈꾸는 삼월이 간다(임정봉의「사월이 오면」중에서)’는 ‘사월’의 아쉬움이 오월을 더욱 정감으로 현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달에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김종철 시인이 취임하고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에 손해일 시인이 취임해서 양대 시인협회가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행사들이 많이 있었다. ‘매년 오월을 시의 달’로 삼아서 ‘시인과 대중이 소통하는 새롭고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정부 관계 기관에 건의하겠다’는 김종철 회장의 시에 대한 집념이 그가 내건 ‘한 줄의 시가 세상을 살립니다’의 향훈으로 활짝 피어나기를 기원한다.
오월에 관한 시인들과 수필가들은 많은 이미지를 투영하고 오월을 노래했다. 수필가 피천득의 「오월」에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이 보드랍다.’는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4월호에서는 특히 봄의 향훈에 관한 작품들이 많아서 마지막 떠나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보편적인 상념의 시편들을 대할 수가 있어서 봄의 서정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봄을 만끽(滿喫)하는 자리가 되었다.
안개 너머로
보이는
수줍음
보일 듯 보일 듯
동그란
웃음이
거리로
여울져
내 조그마한
심목(心木)
싹을 틔운다
--홍중기의 「춘망(春望)」전문
오랜만에 홍중기의 작품을 대한다. ‘춘망’이라, 글쎄 봄에 걸어보는 기대나 희망은 무엇일까. 그의 ‘조그마한 / 심목’을 싹 틔우는 여망(輿望) 속에는 ‘수줍음’과 ‘동그란 / 웃음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심목’에서 생기 있게 탄생하기를 염원하는 생명성의 기원이다.
찬바람 이겨낸 가지마다
샛노랑 꽃망울 달아 놓았네
겨울을 참아낸 나뭇가지에
아기손보다 더 연한
분홍 꽃송이 매달아 놓았네
수줍은 봄 햇살
매화향보다 더 보드란 봄바람이
다투어 목련가지에도
환한 꽃다발을 꽂아 놓겠지.
--조성설의 「봄」전문
여기 조성설의 ‘봄’은 어떠한가. 그는 ‘수줍은 봄 햇살’에서 탐색하는 봄의 향훈은 ‘보드란 봄바람’과 더불어 ‘겨울을 참아낸’ 새생명의 탄생을 노래하고 있다. 거기에는 ‘샛노랑 꽃망울’, ‘분홍 꽃송이’와 ‘매화’, ‘목련’ 등의 ‘환한 꽃다발’로 매달거나 꽂아지기를 기원하는 생명성의 이미지이다.
꽃이 피는 봄
그림 같은 사랑으로
행복을 담아요
행복한 생각과 마음을
선택하는 삶에 피는
행복의 꽃
여백의 미가 있는
벚꽃 아래에는
표현되지 않는 사랑
--배미영의 「그림 같은 사랑」전문
배미영은 ‘꽃이 피는 봄’은 바로 ‘사랑’과 연결되는 봄의 이미지이다. 거기에는 ‘행복’이 내재되어 있어서 역시 봄은 ‘삶’과 동질의 개념으로 서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봄의 향훈과 소통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백의 미가 있는 / 벚꽃 아래에는 /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결로돠 같이 그 ‘여백’에 가려져 있는 미지의 사랑을 갈구(渴求)하는 이미지는 ‘행복’에 대한 진실의 토로(吐露)라고 할 수 있다.
겨우내 얼었던 몸이 풀리며
온몸에 두드러기가 솟았다
어머니는
서둘러 자라 등껍질을
넣고 약을 달여 주셨다
이른 봄이면 잊지 않고
가시처럼 돋아나던 병
열꽃이 오를 때마다
엄지만큼 키를 높혀주고는
어느 날 밤
빨간 꽃봉오리 초경을 데려왔다
--김해리의 「봄」중에서
김해리의 ‘봄’은 ‘어머니’와 함께 시작한다. 그는 ‘이른 봄이면 잊지 않고 / 가시처럼 돋아나던 병’에서 ‘어머니’와의 해후(邂逅)가 시작되고 ‘빨간 꽃봉오리 초경’으로 생명과 삶의 진정한 의미를 노래한다. 그는 함께 발표한「낮에 뜨는 달」에서도 ‘봄비를 기다리는 우수 / 겨우내 빈뜰을 지키던 / 마른 고춧대를 뽑아 사른다 --중략-- 하루해를 등지고 / 불꽃을 피우는 그을음에 젖은 / 가장의 머리가 하얗다 / 수직으로 오르는 연기 / 발밑에 꿈틀거리는 봄의 입김.’라는 어조에서 읽을 수 있듯이 생명성 탐구에 더욱 절실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꽃들의 고향에는
흙 향기 춤을 추고
별들의 고향에선
밤하늘 창문 열고
새하얀
마음의 고향
시한 그루 베는구나.
--송경태의 「봄」전문
송경태의 ‘봄’은 어떠한가. 그는 시조를 통해서 ‘봄’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꽃들의 고향’에서 교감하는 ‘흙 향기’와 ‘시 한 그루’는 그가 여망하는 새로운 세상이거나 새로운 생명의 향훈이다.
방울방울 내리는 그대의 손길이
아직 찬기 서린 몸으로 내려와
내일의 꽃길을 꿈꾸는
봄의 길목으로 이끌어 낸다
--중략--
보슬보슬 내리는 은혜의 가락들에
영육을 깨끗이 씻어줄 수 있도록
내 속에 있는 사랑의 새싹을
자라게 하고 싶은가 보다.
--이철호의 「영혼에 내리는 비」중에서
이철호는 ‘봄의 길목’에서 맞이한 ‘봄비’가 ‘내일의 꽃길을 꿈꾸’거나 ‘내 속에 있는 사랑의 새싹을 / 자라게 하고 싶은’ 여망의 한 단면으로 ‘영육’의 정화를 절실하게 현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대’라는 화자가 바로 ‘봄비’의 의인화이며 ‘내’라는 화자는 ‘사랑의 새싹’을 염원하는 생명의 화신(化身)이다.
이 밖에도 이우창이 「비가 온다」중에서 ‘겨울인데 / 봄을 기다리는 비를 기다린다 / 하늘이 자리를 비켜 / 봄을 외면하고 있다’라거나 조환국이 「못잊어 찾아온 님」에서 ‘못잊어 찾아온 님 / 온 세상을 위해서 / 하얀 꽃가루 가지고 / 다시 찾아온 님이여 // 봄의 축제에 / 축하하기 위해서 / 오신 님이시여’ 또는 어광선의 「봄의 소리」에서 ‘눈감고 들어보니 / 음반 두드리는 소리와 흡사하다’거나 「아리랑」에서 ‘오늘 비가 촉촉이 내리듯 / 그날도 촉촉이 땅을 적셨다 // 나도 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어조들은 생명 탐구와 서정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창출된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정다겸도 「봄비」에서 ‘하늘 먼지를 안고 / 사뿐히 내린 봄눈이 / 다녀간지 4일째 / 소록소록 봄비가 옵니다’라거나 정다운은 「다시 피는 봄」에서 ‘시대 흐름이 바꾸어 놓은 것들 /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지만 /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공경하며 / 푸른 송백처럼 바르게 살라고 / 사람은 다 때가 있다고 / 난 다시 피는 봄날이고 싶다’는 생명성의 기원은 공감을 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하듯이 봄에 대한 이미지는 다양하게 발현하는데 대체로 봄은 새생명의 탄생에 키워드를 맞추면서 우리 시인들은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다 하다.(『국보문학』 2014. 5.)
지적 이미지와 문명 풍자 비평
이제 춘분이 지나고 서울 기온이 20도에 육박하는데도 영동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진다. 이상 기온이 계속되는 일이 작금(昨今)의 일은 아니어서 우리들은 모두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친다. 그러나 어김없이 산야가 푸르게 바뀌기 시작한다. 멀리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일찍이 독일의 시인 하이네(H. Heine)는 ‘즐거운 봄이 찾아와 / 온갖 꽃들이 피어날 때에 / 그 때 내 가슴 속에는 / 사랑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네 // 즐거운 봄이 찾아와 / 온갖 새들이 노래할 때에 / 그리운 사람의 손목을 잡고 // 불타는 이 심정을 호소하였네’라고 노래했다.
이 봄의 이미지는 탄생이거나 새 새명이다. 겨우내 잠들었던 만물이 소생하여 새로운 기운을 일으키는 호시절(好時節)이다. 이 봄에는 멋진 서정시 한 편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하이네처럼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랑시도 한 편 쓰고 싶은 계절이다. 어떤 때에는 자연의 섭리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에서 무엇인가 잘 풀리지 않는 현상을 가리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해서 봄같지 않은 봄을 비꼬기도 하는 세태를 볼 수 도 있었다. 그래서 ‘(졸시「봄 詩―어쩐지 봄을 느낄 수 없는」전문). 꽃샘바람 춥다 / 어쩐지 / 봄이 외도 봄같지 않는 날 / 되는 일도 없는 몽롱 / 그렇다고 안 되는 일도 없는 / 그저 적당한 바람만 온 몸 감싸고 / 울어라 / 우리 모두 이 봄을 슬프게 울어야 하리 / 화사한 생명 / 겨울을 빠져나가는 편법을 꿈꾸고 / 버들강아지 숨소리 거칠다 / 저기 파헤쳐진 산등성이 / 아파라 / 아픔이 봄기운을 밀어낸 채 / 홀로 / 떨고 있는 무명의 나무 한 그루 / 어쩐지 아직도 춥다 / 추워서 터뜨리는 꽃망울 / 될 일이 안 되고 오히려 / 안 되어야 할 일이 쉽게 풀리는 / 그 어느 날 우리들 / 갑자기.’라는 작품도 있다.
지난 호에서는 -동인 방문- 특집으로 ‘청송시인회’ 회원들의 작품을 집대성, 조명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한 바가 있다. 이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 시에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주지적인 주제를 창출하는 경향을 많이 대할 수 가 있었다. 이 주지시(主知詩-intellectual poetry)는 지적인 요소가 강한 시를 말한다. 시는 감정만으로 되지 않고 소재와 언어를 처리하는 지적 능력이 함께 작용해야 가능한 것이므로 모든 시에 어느 정도는 지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작품은 흔히 주지주의(主知主義), 모더니즘, 이미지즘 등으로 불려지는 계열의 시인들은 사물을 관찰하고 노래하는 데 있어서 지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까닭에 그들의 작품 중에서 주지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구석구석 별난 것 잡화점 차린 마음
누가 볼까 겁이 난다
스치고 지나가면 가는대로 그냥 두어야 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끈질기게 따라 붙는 것 알면서도
그 끝에 매달려온 희미한 자국은 왜 기억하지
나름에는 비우면 없어질 것 같아
털어내도 무엇인가 꼭 남아 있는 흔적
엉킨 실타래 같은 잡동사니
묻어 들어온 것인지 어떤지 당최 모르는
작은 먼지, 알갱이들에 엉켜
밤새 늪을 헤매다가
머리만 잔뜩 무거운 채 뒤죽박죽, 참 어렵다
부수수한 몰골로 새벽, 고개 주억거리며
쓰레기만 한 아름 버리고 왔다.
--임길성의「털어내기 연습」전문
우선 임길성이 주제로 투영한 부분은 ‘나름에는 비우면 없어질 것 같아 / 털어내도 무엇인가 꼭 남아 있는 흔적’이다. 이러한 공허의식을 작품 전체에 구도적으로 연출하면서 그가 지향하려는 지적인 주제 곧 비움의 미학을 전제로 하는 시법(詩法)이 공감을 확산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주지주의적인 철학성을 표면화함으로써 그의 인식 내면에는 지적인 주제의 발현에 고뇌와 갈등이 생성하고 있다. 그것은 ‘작은 먼지, 알갱이들에 엉켜 / 밤새 늪을 헤매다가 / 머리만 잔뜩 무거운 채 뒤죽박죽, 참 어렵다’는 진솔한 해법을 적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누가 볼까 겁이 난다’고 했으나 ‘쓰레기만 한 아름 버리고 왔다.’는 어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적 주제의 창출에는 상당한 현실적인 고뇌가 동반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황금빛 물비늘 부서지는 흰 파도
하늘 끝자락 푸르게 비추이고
은모래 부드러운 감촉 여인의 살결인 듯
뜨겁게 타오르는 석양으로 밀려드는데
‘티끌 없이 비우라’
살면서 쌓인 욕심 넘쳐 속삭이는 바람결
함께하던 이들 쓸쓸히 돌아간 저녁
고요한 바다에 어둠이 스민다
무심히 기울어진 해 그림자
고즈넉한 자태로 선홍빛 물들이다가
묵묵히 걸어가는 여행길 마치는 날
수평선 걸린 노을 닮은 흔적이면 좋으리.
--이서빈의「겨울바다의 흔적」전문
이서빈도 나름대로의 지적 주제를 탐색하고 있는데 ‘티끌 없이 비우라’는 공허감을 주제로 도출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겨울바다’에서 조망한 ‘흔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살면서 쌓인 욕심 넘쳐 속삭이는 바람결 / 함께하던 이들 쓸쓸히 돌아간 저녁 / 고요한 바다에 어둠이 스민다’는 고독과 동행하는 고뇌가 현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적인 해법을 탐구하기 위해서 그가 자성(自省)한 진실은 마지막 연의 끝 세 행에서 ‘고즈넉한 자태로 선홍빛 물들이다가 / 묵묵히 걸어가는 여행길 마치는 날 / 수평선 걸린 노을 닮은 흔적이면 좋으리.’라는 여망(輿望)이 그를 잔잔한 명상으로 흡인하고 있다.
가을 끝이 되면 성형왕국 길마다
성형을 하는 환자들로 북새통이다
병이 든 건 언제인데 왜 가을이 너무 시린가
그래서 한 해가 가기 전에 몽땅 상처를 봉하기 위해서일까
통행에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시킨 일이 아닌데 나에게 충성을 위해
그래서 한 자리 주어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성형미인처럼 보인다고 말한다면
그건 예의가 아니라 범죄행위입니다
외모가 출세의 지름길이니까요
수술 받다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해야 돼요
적당히 겉으로 남 보기에 좋아 보이면 돼요
속은 별 문제가 아니어요
그래야 내년에 또 민초들이 세금 때문에 울어요
나무를 다 비틀어 병신 만들면 아름답지요
그래서 성형은 예술입니다
하지만 다만 연말이나 출퇴근 때만은 피해 주세요
너무 짜증이 나 서로 물어뜯었어요.
--임명규의「성형왕국」전문
임명규는 지적 주제의 창출을 예감하면서 문명적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찍이 영국의 시인이며 비평가였던 아놀드(M. Arnold)는 ‘시는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을 원용(援用)해 보면 인생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비평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임명규는 ‘성형완국’을 통해서 지금 현실적으로 통용하고 있는 일련의 현실적인 사건들이 작품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사회적인 경각심이나 자성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어서 공감을 유로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아이러니(ieony)나 풍자(satire)적인 수사법이다. 그는 ‘당신이 성형미인처럼 보인다고 말한다면 / 그건 예의가 아니라 범죄행위입니다 / 외모가 출세의 지름길이니까요’라는 어조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적시하고 있는가. 현실적인 모순 등을 빗대거나 비웃는 형상으로 꼬집고 폭로하고 깎아내리는 표현법이다. 그는 다시 ‘나무를 다 비틀어 병신 만들면 아름답지요 / 그래서 성형은 예술입니다’라는 어조에서 비꼬기의 절정에 이른다. 이러한 시적 구성이나 상황 설정은 많은 시인들이 시도해 보고 실험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함께 발표한 「누가 소금을 치랴」에서도 이러한 비평정신이 풍자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춘향전’에서는 어사 이몽룡이 남원에 당도해서 변사또의 생일잔치 말석에 앉아 한 수 읊은 것이 당시 사회적인 부조리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시로 그의 의미는 백성을 위하는 충정이 서려 있다. 물론 이 시를 듣고 일부 눈치 빠른 관속들은 줄행랑을 쳤지만, 변학도 사또는 술에 취해서 흥청망청하다가 암행어사 출도를 접하고 체포되어 봉고파직(封庫罷職) 되었다는 소설 속의 스토리이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금동이에 담긴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반가효만성고(玉盤佳肴萬性膏)-옥소반 올려진 진미의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낙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樂)-촛물이 흐를 때 백성도 눈물 흘리고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성도 높더라
이와 같이 문명이나 사회에 대한 시각화와 물질화에 대한 비판이나 이를 고발하면서 개선하고자 하는 풍자는 어디까지나 비평적 태도를 가져야 하며 감정보다는 이성에 의한 풍자가 오늘의 문학적 요청이라고도 할 수 있다. 풍자시는 사회, 인물의 결함, 죄악, 모순 등을 정면에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비유 등의 표현을 통해서 재치를 활용하거나 비평하는 것이다. 풍자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도 시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다하여 그 속에 풍자정신을 둔다고 하는 종래보다 한층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어야 한다.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부드럽게 노래로 불려지는 것도 있으며 명확한 이미지와 리듬을 살리는 것도 있다. 시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무엇보다도 시로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풍자시의 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 밖에 ‘청송시인회’ 방지원 회장의 소개와 함께 30명 회원들의 작품이 고른 어조로 주제의식이 확고하게 현현되는 시법의 충실성을 읽을 수 있어서 감동을 더했기로 지난 달의 시는 풍성한 수확을 실감한 한 달이었다.(『국보문학』 2014. 4.)
내면의 계절 ‘겨울’ 이미지의 재생
벌써 겨울이 지나가고 봄의 전령이 푸른 소식을 산야에 가득 전하고 있다. 봄은 일년지대계(一年之大計)의 시발점이며 성취를 여망하는 기원의 출발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직도 지난달에 내린 영동지역의 폭설 여파가 아물지 않고 그 기세가 남아 있어서 올해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체로 겨울에 대한 이미지의 분류는 눈이나 얼음 외에도 한풍(寒風), 한행(寒行), 설경(雪景) 등 다양하게 창출할 수 있는 계절적인 상상력의 재생으로 내외적(內外的) 형상화를 투영할 수 있어서 시적 구조도 다변적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원로 김윤성 시인은 그의 작품「겨울」에서 ‘겨울 / 차운 기류에 씻기어 / 유리알처럼 투명해진 풍경 / 조그마한 입김에도 흐린 / 차운 / 거울 속 풍경 / 낙엽수림에 / 흰 눈이 쌓여 / 냉혈동물의 체온 같은 / 난만한 꽃들 // 겨울 / 들 / 길 / 이 길을 어디메쯤 걸어서 / 봄은 있느뇨’라고 읊어서 겨울에 대한 정취와 그 메시지를 적절하게 전해주고 있다. 지난호 국보문학의 작품들은 지난 겨울에 창작된 작품들이 2월호에 대거 발표됨으로써 봄날에 다시 지난 겨울의 정취를 재생하면서 그 이미지의 다변화를 음미하게 된다.
눈 되지 못한 설움에
눈물을 쏟으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살아내는 것은 견디는 일이라고
죽은 땅 잠든 뿌리 깨우고
딛고선 발밑에 스며들어
얼었던 사색에 온기를 주네
죽어있던 몸에 생기를 주네
구브리고 잠들던 의식이
기지개를 펴고 깨어나
새롭게 돋아나는 핏줄 속에서
싹이 돋고 꽃이 피기 시작하네
자신을 담금질하며
꿈의 기둥에 못질해대며
마침내 푸르게 서있네
우뚝 서있네.
--송선우의 「겨울비」전문
송선우는 이 ‘겨울비’라는 약간 특수한 상황에서 이미지를 추출하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사물이 그 시간과 공간의 적정성에서 추출하는 이미지가 바로 ‘눈물이 되지 못한 설움’으로 현현되고 있다. 다시 이것은 ‘얼었던 사색에 온기를 주’거나 ‘죽어있던 몸에 생기를 주’는 ‘겨울비’의 메시지는 일반론적인 겨울 이미지와는 상이하게 나타나지만 ‘겨울비’라는 특수 상황에서 설정하는 시적 구조에서부터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이 아주 완만하면서도 정적인 교감을 할 수 있는 잔잔한 심저(心底)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그는 ‘죽은 땅 잠든 뿌리 깨우고’나 ‘구브리고 잠들었던 의식이 / 기지개를 펴고 깨어나’는 어조에서는 벌써 도래할 봄의 예감이 이 겨울에서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의 시법은 동일 사물에서 창조하려는 새로운 상황으로 전개하여 주제를 더욱 확고하게 정리하는 그의 의식이 분명함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이름 모를 철새가 날아와
드넓은 들판에 내려앉아
눈 덮힌 볏짚위에 발자욱 남기면
양지바른 곳 홀로 앉은
초로의 빠꿈담배
하연 뭉게구름 만든다
세월이 멈춘 둣 조용한 시골 마을
외딴지기 미닫이는 바람소리 머금고
그리움 토해내며 촐삭거린다
하얀 눈 속 헤집는 철새들은
세월의 무게를 알기나 할까
그저 하얀 눈 속 낱알이 고마울 뿐이겠지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지
단순한 먹이 외에 무엇을 생각할까
초로의 한숨은 무상함 배어 있거늘....
--박형근의 「겨울초상」전문
박형근의 겨울은 우선 외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 현대시의 구조상 외적인 사물이미지를 설정해 놓고 다시 내적인 관념이미지로 마무리하여 주제를 부각시키는 시법인데 그는 들판에 새가 날아와 ‘눈덮힌 볏집위에 발자욱 남기’는 시각의 효과를 먼저 적시하고 그가 평소에 구상했던 체험들이 상상력을 통해서 ‘그리움을 토해내’거나 ‘세월의 무게를’ 투영하고 있다. 이러한 철새의 외형적인 모습에서 조감(鳥瞰)하는 ‘단순한 먹이’와 ‘초로의 긴 한숨은 무상함’이 배어 있다는 대칭적인 의미는 우리 인간들의 ‘초상’이라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산기슭에서
날선 바람으로 울던
시린 속도의 유린
붉은 잎이
노란 잎이
그들의 눈물이었다니
불린 살갗을 뚫고
뛰어올라 바스라지는 핏줄
흘린 눈물의 깊이로
바람의 집을 짓는 손
흥을 거둔 밤
달빛은 숲의 침묵 한 소절 켜놓고
새벽 속으로 미끄러진다.
--김해리의 「겨울로 가는 나무」전문
여기 김해리의 겨울은 ‘나무’라는 사물과의 교감이다. 박형근이 ‘철새’를 등장시켜서 하나의 인간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김해리는 ‘겨울로 가는 나무’의 측은한 심성의 유로이다. 그가 가을 단풍잎이(‘붉은 잎 / 노란 잎’) 모두 ‘그들의 눈물이’라는 단정으로서 그 ‘흘린 눈물의 깊이로 / 바람의 집을 짓’는 그의 시법은 시적 구성에서부터 전개과정이 공감을 깊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그는 ‘마지막 연에서 ‘달빛은 숲의 침묵 한 소절 켜놓고 / 새벽 속으로 미끄러진다.’는 결론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하면서 그가 토로(吐露)하고자 했던 ‘겨울’과 ‘나무’의 이미지 융합이 상당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시적 효과와 진실의 승화가 동시에 형성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몹시 추운 겨울 아침
아침밥을 짓기 위해
부엌에 들어선 어머니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툭툭 때린다
--중략--
그제서야 마음 놓고 아궁이 속에
불을 지피시는 어머니
어느새 햇좁살 같은 햇살이
어머니 손등을 간질이며
생긋 웃는다
오붓한 우리집 아침밥이 맛이 있다.
--김선영의 「겨울」중에서
김선영의 ‘겨울’은 어떠한가. 김선영은 어머니가 겨울에 아침밥을 짓는 정경(情景)에서 겨울의 이미지를 생성시키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일상성에서도 그가 취택하려는 미적 감응이 잔잔한 선율로 흐르고 있다. 그는 ‘불을 지피시는 어머니 / 어느새 햇좁살 같은 햇살이 / 어머니 손등을 간질이며 / 생긋 웃는다 / 오붓한 우리집 아침밥이 맛이 있다.’는 결론의 도출은 어머니에 대한 회억(回憶)이 그의 상상력에서 융화하고 있어서 한 가정의 단란한 정취가 발현되고 있어서 공감을 유발하는 이미지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타닥타닥
알밤 익는 소리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
화롯불 안에서 함께 타오른다
--중략--
고요한 방안에
정물화처럼
할머니의 고운 미소가
문풍지에 묻어난다
겨울밤이 저만치서 소리친다.
--노유정의 「겨울밤 이야기」중에서
노유정도 할머니가 화롯불에 알밤을 구우면서 들려주는 옛 이야기로부터 구성해서 할머니의 인자힌 ‘고운 미소’로 까지 일련의 상상력이 ‘겨울밤 이야기’로 재생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김선영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소재와 주제가 동시성을 갖는 표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홍대식의 작품「흰눈」과 배미영의 두 작품「겨울카페에서의 친구」「눈꽃이 필 때」가 내면의 계절인 겨울 이미지의 형상화를 위해서 많은 체험과 상상력을 재생하고 있어서 이 봄날에 다시 지나간 겨울을 음미해보는 좋은 작품들이었다.(『국보문학』 201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