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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주 테마여행 / 4차
1. 일 시 : 2010. 05. 09(일)
2. 시 간 : 무양청사 / 6시 출발
3. 장 소 : 서울 인왕산 / 북악산 / 길상사 / 경복궁 ? / 양평 두물머리 ?
4. 테마여행 일정
◇등산코스 : 사직공원-인왕산-창의문-북악산-청운대-숙정문-삼청공원 / 4시간30분
◇문화탐방 : 길상사 / 경북궁(일정봐서 진행예정)
◇별미탐방 : ?
5. 산행길라잡이
◇조선왕조는 개국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서, 이성계는 스승인
무학대사의 자문을 받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다.
무학대사는 8도를 물색끝에 하늘높이 정기가 솟구치고 있는 삼각산(현 북한산)기슭이 최적임지라고
정하고 한양땅으로 도읍지를 결정한다. 자고로 우리나라는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백년대계를 세웠었
다. 좌청룡,우백호. 북악산에서 남산타워를 보면서 머리속에 그림을 그려보자.
낙산(보문사뒷산 현 무허가 건물이 많은곳)은 좌청룡이요 인왕산은 우백호이다. 한양땅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은 동서남북에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남쪽에는 목멱산(현 남산)/ 북쪽에는 백악산(현 북악산)/ 동쪽에는 낙산(현 낙산)/ 서쪽에는 서산(현
인왕산)이 있다.
안쪽 도성에는 비~잉 성곽을 쌓고 대문과 소문을 만들었다.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과 남소문/ 북
쪽에는 숙정문(북대문)과 북소문(현 창의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과 동소문/ 서쪽에는 돈의문
(서대문)과 서소문이 있다.
이곳 궁터를 잡을때 신하들의 의견이 양분되었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자락이 좋다고 하였고, 정도
전등 신흥세력은 북악산자락이 좋다고 하였으나, 결국은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되어 북악산으로 궁
터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무학대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조선왕조의 앞날에 커다란 환란이 올것이다 라고
예언한바 있어 그후 예언은 적중하여 병자호란,정묘호란,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경복궁도
불타 버리고 명성황후도 일본자객들에게 시해되는등 경복궁이 화를 입게 된다.
19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들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위기를 맞았었다.
자하문 고개마루에 서있는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최경무관은 68년 1월21일 종로 경찰서장으로 재직
할 당시 이곳에서 청와대를 습격한 김신조등 무장간첩 31명과 교전 하다가 전사한곳이다.
6. 테마여행 길라잡이 /사직공원/인왕산/북악산/삼청공원/길상사
◇사직공원의 사직단 :사적 제121호. 이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단이라고 한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위치한다. 사단(社壇)은 동쪽, 직단(稷壇)을 서쪽에 설치한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
에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인왕산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38m. 산 전체에 화강암으로 된 암반이 노출되어 있으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조선시대부터 명산으로 알려져왔다. 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중이 장삼을 입은 듯한 선바위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는 예로부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잘 이루어졌다고 하여 유명
하다. 일제강점기에 남산에 있던 무신당인 국사당을 선바위 옆으로 옮긴 뒤부터 무속신앙과 더욱 밀착
되었으며, 주위에 많은 무신당이 생겨 지금도 굿이 성행하고 있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성
곽이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자하문·명륜동·동대문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사직동·홍제동까지
이어진다. 군사적인 이유로 한때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사직공원·청원 아파트·무악재길
등에서 출발하여 성곽을 따라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다.
◇창의문 :창의문(彰義門)은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로 그중 서북쪽 문이다.
그 때에는 이 곳은 양주와 북한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 이 곳은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
(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졌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
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여 닫혔다. 이곳에는
인조반정때 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으나 나중에 세워지게
된다. 창의문은 4소문 중 가장 원 모습을 잘 유지한 문이다.
◇북악산 :북악(北岳)·백악(白岳)·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높이 342m. 기반암은 화강암이다. 인왕산
·북한산·낙산·남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서울 북쪽 경복궁의 진산이다. 1395년(태조 5)
시축한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기점으로서 북악산에서 낙산·남산·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정도
전이 성저(城底)를 측정한 뒤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따라 97구로 나누고 북악산의 정상에서부터 각 구마
다 순서대로 번호를 동쪽으로 붙여 나가면서 97번째 글자인 조(弔)자에서 다시 북악산에 이르도록 했다.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의 등산이 금지되었다. 서쪽 인왕산과의 안부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
며, 남동쪽 기슭에 삼청 터널과 삼청공원이 있다.
◇숙정문: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 시대에 건축한 서울 성곽의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대문' 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
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청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
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숙청문이 숙정문으로 바뀐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
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
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기라고 명령한 기록이 보이는데,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숙정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성곽의 나머지 문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
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기로 하였
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다.
◇곡장 : 성벽을 기어 오르는 적군을 막아 내기 위한 방어 시설로 성벽중의 일부를 자연지세에 맞추어 돌
출시킨 부분으로 꿩의 머릴 닮았다고 해서 치(雉)라고도 하며 굽으러진 성이라는 의미에서 곡성이라고
부른다
◇길상사 : 길상사는 법정스님 때문에 유명한 절이지만 우린 길상사라는 사찰이 탄생하기 까지 보시를 실
천한 대원각 여주인인 김영한 보살님의 생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길상화 김영한님은 일제치하,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아나 성장하다, 16살의 나이에,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 음악과 가무 일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하였다.
한때 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라는 아명으로 불리었던 그녀는, 분단 조국의 남한에서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뒤에 몇편의 수필 저술을 내기도 하였다
일찍이 그녀는 바위 사이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배밭골을 사들여 잠깐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
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이
되었다.
길상화님은 노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몀 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생애의 높고 아름다운 회향
을 생각하고,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하였다. 그후
10년에 걸쳐 사양하시는 스님께 받아 주시기를 거듭 청하여 결국, 1995년 뜻을 이루게 된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그 아름다운 법석에서 그녀는 법정스님으로부터 그저 염
주 하나와 길상화 라는 법명만을 받았고, 7천여평 절터의 전각 모두를 보시하는 그녀의 바람은 단하나,
이곳이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앞에 단 두어 마디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죄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 입는 곳입니다. 저의 소원은 저 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
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간결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 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곡절 많은 그녀 인생의 슬픔을 넘
어선 위대한 비원이 담겨 있었다
1999년 11월14일 그녀는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그녀는 목욕재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
헌에서 생에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후 그녀의 유골은 49재후 유언대로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
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길상사에서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 세워 그녀의 뜻을 기리고, 매년 음력 10
월7일에는 기재를 모셔 그녀를 추모한다. 또한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명 안팎의 고교생을 선발, 학비를 지원하며 그녀의
뜻을 잇고 있다.
7. 산행지도
서울 성곽 전체 개념도
김신조 체포 당시 사진
자야/김영한 보살님의 생전에 기거하던 처소
☞ : 반드시 신분증은 필참입니다 / 신분증없으면 산행이 불가합니다
첫댓글 길손님 수고 했어요
조선의 도읍을 정하고
경제 문화 정치 예술의 고장 서울....
태조 왕사인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할때 상주 우봉동 명당터도
후보에 올랐는데 명실상주테마는 그 흔적을 따라 갑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속으로 떠나는 과거여행..... 정말 기대됩니다
산행계획 잘 보고, 조선의 도읍 한양이라 또 한번 기대되네요
아무리 바쁘도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9일날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