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폭동 증거 (6)
이렇듯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무성하였으되, 5.18측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정보의 출처를 제공하는 이기 없다. 그러나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김일성의 어록도 있고, 탈북자들과 탈북군인들의 증언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육하원칙에 입각한 서술이 너무도 명확하다.
먼저 1976년 4월 김일성이 대남 공작원들과 했던 담화 내용을 살펴보자:
<<노동계에 침투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투쟁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조직원을 산업현장에 새로 입사시키는 방법과 각 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경향성이 좋은 노동자들을 외부에서 몰색하여 포섭하는 방법 등 크게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 가장 좋은 방법은 학생운동 출신 핵심당원들을 고졸자로 신분위장하여 취직시키는 방법이고, 후자의 경우는 중요 위장취업 조건이 여의치 않은 공단지역 곳곳에 '노동상담소' '야학방' 같은 것을 차려놓고 노동자들이 몰려오게 하여 자연스러운 대인관겡를 형성해 가지고 물색 포섭하는 방법입니다. 지하당 조직들은 현실 실정에 맞게 각 산업현장에 핵심들을 침투시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해야 합니다.>>
과연 김일성의 목적이 남한에서의 민주화운동이었겠는가? 그리고 이처럼 김일성이 원하는 역할을 윤상원이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음이 어찜인가? 들불야학을 통해 청소년들을 의식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졸자 신분을 감추고 노동자로 위장 취직하여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있었다. 광주사태를 점화시킨 이들은 항간에 잘못 알려진 대로 전남대생들이 아니라, 바로 이 들불야학 청소년들과 노동자들이었다.
청진에 소재한 3호청사가 바로 광주사태 때 유언비어 삐라를 살포한 곳이었다. 그러면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교시를 살펴보자: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
김일성은 10.26사태를 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길 호재로 이용하려 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전민봉기를 선택했다. 김대중 역시 그 무렵부터 전민봉기(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광주사태는 그의 전민봉기음모가 광주에 국한되어 일어난 사태를 말한다. 남한에서의 전민봉기 음모가 성공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었는가? 전민봉기는 김일성이 이기기 위한 수순이었다. 우리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며칠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한 말의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북한 사회 안전부 소속 특수부대 군관 출신 탈북자, 특수부대 정치군관 출신으로 임 천용씨와 더불어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인 최 중현씨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직전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를 이렇게 인용한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 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한국논단 2007년 2월호 )
그리고 아래의 대자보에서 보듯 5월 22일 윤상원이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한 후에 발행한 투사회보를 통해 지시하는 전민 항쟁 전개 수순이 김일성의 비밀교시 내용과 상당히 흡사함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있었으며, 해방구 본부가 임시 혁명정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2006년 12월 20일의 기자회견중 “5.18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급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못 벗고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는 광주사태의 긴급 속보를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을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시 경험을 전한 최대표는 그 후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 병남과 참모장 김 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투입됐는데 희생이 컸지만 공로도 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북한군 침투설에 대한 흔한 반론이 "1개대대라면 5백명 정도의 인원인데, 이 많은 인원이 광주에 들키지 않고 진입하는게 가능 하였을까?"이다. 그런데,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최 대표의 이어지는 증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아직 광주사태의 분명한 팩트를 보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모든 탈북군인들과 탈북자들의 일치하는 증언은 600명이 동시에 침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300명씩 두 떼거리로 나뉘어 한 때거리씩 침투하였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4군단 70정찰대대 출신 이 덕선 씨에게 당시 인민 무력부 정찰국 소속 정찰 대대들이 광주에 투입된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들었다고 했다. 이 덕선씨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된 인원은 모두 600명. 선봉 부대는 2군단 정찰대대 300여 명이었다. 나머지 300여 명은 인민군 각 군단, 저격여단 등에서 차출한 정예 병력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대동강 하류에 있는 남포시 인근에서 고깃배로 위장한 대형 공작선에 300명을 태우고 출발, 공해상을 거쳐 북한에서는 백암이라고 알려진 서해상으로 침투했다. 나머지 300명은 북한 동해안 신포지역의 馬養島(마양도)에서 출발해 잠수함을 타고 전남 지역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찰국 5부장이 공해상에서 대기 중인 배에 타고 현장을 지휘했다고 한다. 사회 안전부 소속 특수부대에서 수송 장교였던 탈북자도 1980년 5월 당시 ‘머구리(潛り=잠수라는 일본말이 전화됨) 작전’이라는 비밀 임무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 8명에서 12명 정도의 사람들이 M-1소총을 들고 남조선 군복을 입고 대동강 하류로 빠져 나가는 것을 봤다”며 북한군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M-1 소총과 남조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뮤지컬 요덕 스토리의 안무가로도 유명한 김영순 씨는 요덕 수용소 생활 후 ‘장진광산’이라는 곳에 있으면서 특수부대 군관 출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때 군관 출신들은 “광주 사건 당시 500~700명 정도 투입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그녀는 증언한다.
이렇듯 모든 탈북자들의 증언은 300명씩 두 팀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키거니와 그 사건 전개 과정에 대해 이어지는 증언을 좀 더 들어보자. 1980년 초에 김일성은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 중린을 개별적으로 불러 한국내의 현 정세를 이용하여 비밀공작 조직을 더욱 활발히 움직이는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