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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隆)과 양(陽)...금단의 비밀(태을금화종지) 4/4
회개( repent )라는 낱말은 돌이킴( metanoia )을 의미한다. 돌이키는 것, 180도 돌아서는 것, 계속 밖으로만 흐른다면 그대는 물로 남는다. 안으로 돌아설 때 그대는 불이 된다. 그리고 양 눈, 양 불꽃, 의식의 양쪽이 교합하여 완전히 연결되어 하나의 불꽃이 되는 것, 이것을 가리켜 플라톤은 '홀로를 향한 흘로의 비상( flight of 沆e alone to the alone )'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하나( The great one )란 무상(無上)의 것을 일컬음이다.
그대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대는 그 위대한 하나가 된 것이다. 이것이 도가들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대가 하나가 된다면 그대는 하나님이 된다.
단(丹)의 오묘한 비밀은 유위 가운데서 무위( non-action )를 얻는 데 있다.
이것은 잠재적인 말이다. 양 눈을 하나로 만드는 비밀은 무엇인가? 음과 양을 합일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대가 더 이상 양극이지 않도록 그리하여 모든 것이 하나가 되도록 그대의 남성과 여성을 서로의 속으로 용해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하나됨 속에 축복이 있는 것은 모든 긴장이 사라지고 갈등이 사라지고 근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
단(丹)의 오묘한 비밀은 유위 가운데서 무위를 얻는데 있다.
남성은 행위를 대표하고, 여성은 무위를 대표한다. 그대는 무위에 도달하기 위하여 행위를 이용해야 한다. 노력없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그대는 움직여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하고 아무것도 남겨둠이 없이 완전히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 그 창조성 속으로 모든 에너지가 녹아지게 될 때 모든 에너지가 빨려 들어간 바로 그때 갑자기 변형이 일어난다. 물이 100도에서 증발하듯 전체적이 될 때 행위가 증발하고 무위가 뒤에 남게 된다.
먼저 그대는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하고 모든 에너지를 춤 속으로 몰입 시켜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무위의 춤이 시작될 때 그 신비한 경험이 시작된다. 그때 그것이 무위이다. 첫째 그대는 무위 속으로 가기 위하여 행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명상의 전부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묻는다. 왜 행위의 명상을 가르치냐고 그것이 무위를 발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극한까지 격렬하게 미친 듯이 춤을 추어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가 그 속에 들어있게 되면 그 순간이 찾아온다. 그대는 춤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도 아무런 노력도 없다. 그것은 행위없는 행위이다.
황금 꽃은 빛이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 '물고을(water-region )의 납
(lead )은 한 맛을 낼 뿐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황금 꽃은 하나의 상징, 그대의 에너지에 양극이 사라지고 하나가 되었을 때의 상징이다. 그때 엄청난 빛이 방출되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 그것은 마치 황금 꽃이 그대 속에서 핀 것과 같다. 그것은 상징이다. 말 그대로 거의 사실인 상징이다. 꼭 그와 같이 일어난다. 지금 그대는 어둠으로, 어두운 밤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때 그대는 새벽이 된다. 그대는 어디에서도 그대의 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빛은 존재한다. 어떠한 원천도 없다. 그것은 원천이 없는 빛이다. 그러나 일단 그 황금빛을 알게 되면 그대는 불멸자가 된다. 더 이상 죽음은 없게 된다. 빛은 결코 죽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생명, 전존재가 오직 빛으로 되어 있다. 모든 것은 빛의 형상이다. 그대는 현대 물리학에 조회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은 모든 것이 빛이라고 하는 도(道)와 완전히 의견을 같이한다. 형태는 변한다. 그러나 빛은 계속된다. 빛은 영원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경전들이 빛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그것이 시작이다. 만약 태초가 있었다면 달리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빛으로라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초란 결코 없었다. 이것은 하나의 우화일 뿐이다. 사실 빛은 언제나 존재해 온 것이다. 코란은 하나님이 빛이라고 말한다. 수피( Sufi )들에 의해 하나님에게 붙여진 이름 중의 하나가 누르( Nur)이다. 누르는 빛을 의미한다.
그리고 맛은 동일하다.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든 그대 안에서 일어나든 맛은 같다. 불성( Buddhahood)의 맛은 동일하다. 붓다는 말했다. 불성의 맛은 바다와 같다고 그 맛은 북쪽에서도 볼 수 있고 남쪽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쪽에서도 볼 수 있고 저쪽에서도 볼 수 있고 가장자리에서도 볼 수 있고 한가운데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의 맛은 똑같다. 불성의 맛이 바로 그렇다. 영원한 빛을 얻는 순간 사람의 삶은 단일한 향기를 풍긴다. 그 향기는 완전한 각성 속에 들어있다. 그의 무의식은 사라졌다. 그의 존재 속에 더 이상 어두운 곳이 없다.
만약 프로이트주의자들이 그런 사람을 진단해 본다면 의식, 단지 의식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코 무의식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프로이트주의자들이 그대를 들여다본다면 한 곳만이 의식이고 나머지 아홉은 무의식, 즉 그대 마음의 단지 십분의 일만이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100%가 의식이다.
빛을 회전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되돌리는 법( backward -flowing
movement )에 의존하며 그리하여 상념들이 응집된다. 하늘의 마음은
해와 달 가운데 위치한다.
다시 기억하라. 해는 남성 에너지를 대표하고 달은 여성 에너지를 대표한다. 그리고 심장은 그 중간에 있다. 심장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것이 심장의 아름다움이다. 심장은 신성하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리고 정확히 양자의 사이에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남성 에너지 쪽으로 너무 많이 추구하게 되면 너무 능동적이 되어 수동적이 되는 법을 모른다. 그러한 일이 바로 서양에서 일어났다. 서양은 해 지향적이다. 너무 능동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동성으로 미칠 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스피드 시대, 모든 것이 즉시 처리되어야 하고 인내와 기다림이란 없다. 그들은 수동적이 되는 법, 인내하는 법, 기다리는 법을 잊어 버렸다. 그들은 수동적일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상실했다. 그들은 휴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모른다.
그들은 휴일에 가서조차도 오히려 더 능동적이다. 서양에서는 일요일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심장마비를 일으킨다. 휴일이라서 그렇다. 사람들은 너무 여유가 없다. 그들은 일주일 내내 휴일이 오면 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휴일이 오면 그들에게는 천만 가지 할 일 투성이다. 해야 할 의무나 필요가 있어서냐 하면 절대로 아니다. 휴식하며 쉴 줄을 모를 뿐이다. 그들은 잔디밭에 누워 대지와 함께 할 줄 모른다. 나무 아래 말없이 앉아 그냥 있어볼 줄 모른다. 기어이 그들은 집 주위에서 잡다한 일들을 시작하게 마련이다. 이걸 뜯었다 저걸 고쳤다 차 엔진을 열었다가 그리고 일을 시작하고야 말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끝까지 능동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일평생 내내 은퇴하면 그때 가서 즐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즐길 수 없고 쉴 수도 없다. 사람들은 은퇴하고 나면 쉬 죽는다. 심리학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십 년은 더 일찍 죽는다고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의미없게 되었고 의미없어 왔고 쓰레기에 불과했던 삶을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돌진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시 원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마음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도 않은 채 빨리, 보다 빨리 가야 한다는 것뿐이다.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원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서양은 해 지향적이다. 동양은 달 지향적이다. 동양은 너무 수동적이고 너무 운명론적이다.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 그냥 기다려라.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어리석음이요, 바보짓이다. 동양은 가난하고 게으르고 너절너절하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 도처에 비참함과 빈곤과 거지와 질병이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 무엇을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단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일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하나님은 오실 것이다. 다른 무슨 할 일이 있단 말인가? 이것은 여성적인 마음이다.
『태을금화종지』는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말고 극단으로 치우치지도 말고 정확히 한가운데 머무르라고 말한다. 그때 균형이 있게 된다. 그때 사람은 능동적이면서도 그의 깊은 내면은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바깥은 해 지향적이지만 안은 달 지향적이다. 그대 가운데 해와 달이 만나게 하라. 그리고 정확히 한가운데 머무르라. 초월은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빛을 회전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되돌리는 법에 의존하며
그리하여 상념들이 응집된다.
남성은 중심이자 주변이다. 그대가 주변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많은 사념들이 나타난다. 주변은 다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심은 하나이다. 그대가 중심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중심핵에서는 모든 사념들이 사라진다. 각성만이 남아있다. 이 신비한 문구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념들이 응집된다.
빛은 내면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그대가 나무를 바라볼 때 그대의 눈은 나무에게 빛을 던지고 있다. 그럴때 빛은 밖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빛은 내면으로 돌아선다. 메타노이아( metanoia), 회개, 돌아섬, 그리고 빛이 자신의 존재를 향할 때 거기에 자기 인식과 자각이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자기 인식은 그대에게 자유, 즉 모든 혼란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 육체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 그대 속에는 영혼이 창조된다. 이것이 바로 구제프가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던 것이다. 그대들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것은 메타노이아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황정경( The book of 撫e Yellow Castle )』은 말한다.
방촌(方寸)의 터와 방척(方尺)의 집 안에서 생명이 다스려진다.
육체라고 하는 이 작은 사원 안에서 생명은 조절이 가능하다.
방촌(方寸)의 한가운데 고요의 자리(簫台)가 빛을 발한다. 그 보옥의
도성 보랏빛 궁궐에 지극히 비어있고 신령한 신이 거하신다.
이 모순을 보라. 비어있음과 생명. 생명은 남성이요, 비어있음은 여성이다. 생명과 비어있음은 둘다 내면의 하나님의 양면이다. 차별을 두어 선택하지 않을 때,전혀 선택하지 않을 때,그대가 단순히 주시자가 될 때 그대는 한 면이 삶이고 다른 면이 죽음인, 한 면은 완성이고 다른 면은 무( nothingness)인 하나님이 된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할 때는 몸 전체의 에너지가 그의 왕좌( throne )앞
에 조회(輧會)한다.
그리고 빛이 안으로 움직여 내부에서 회전할 때 바깥으로는 유출이 전혀 없게 되어‥‥‥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그것이 바로 붓다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하던 것이다. 조용히 앉아 모든 문을 닫아라. 그러면 빛이 내면에서 순환한다. 그때 난생 처음으로 그대는 모든 신비가 담겨 있는 육체를 인식하게 된다. 이 작은 육체가 우주의 전신비를 담고 있다. 그것은 소우주다.
그러므로 빛이 회전할 때 몸 전체의 에너지가 그의 왕좌 앞에 조회한다.
마치 성스러운 왕이 도읍을 정하고 기본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을 때
모든 나라가 공물을 가지고 다가오듯이, 또는 주인이 고요히 하여
현명하면 남녀 하인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각자 자기
일을 하듯이.
그리고 이 빛이 내면에서 움직일 때 몸은 하인이 된다. 감각들은 매우 양순한 하인들이 된다. 그대는 그들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대를 따른다. 이것이 도의 아름다움이다.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며 어떤 성품도 개발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는 말한다. 그냥 빛으로 충만되거라. 그러면 모든 것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빛만 회전시키면 된다. 이것이 가장 깊고 오묘한 비밀이다.
빛은 움직이기 쉽지만 고정되기는 어렵다. 충분히 오래 회전만
되면 빛은 스스로 응집( cristallization )된다. 이것이 바로 '고요히
날아오른다. '고 말해지는 경지이다.
이 경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언급되고 있다. 빛은 움직이기는 쉬우나 고정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고정시키려고 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요가가 시도하고 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이다. 요가의 어려움과 힘듬이 여기에 있다. 요가는 빛을 고정시키려 한다. 그것은 양 눈 사이의 빛조차도 고정시키려고 한다. 제3의 눈이 위치한 미간에 말이다. 요가는 고정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요가와 도의 차이점이다. 요가는 그것을 고정시키기를 원한다. 제3의 눈에 집중하라. 한 마디로 말해 이것이 요가 철학의 전부이다. 그대가 만약 그대의 전의식을 제3의 눈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대는 변형이 될 것이다. 그대의 두 눈이 하나가 되고 그대는 빛으로 충만 될 것이다.
그리고 제3의 눈은 요가의 의식 도표상 여섯 번째 센타인데 바로 그 제3의 눈 너머 여섯번째 위에는 일곱번째가 존재한다. 그 일곱 번째는 '일천 잎의 연꽃( The one-燃ousand-petalled lotus )'이라고 불리운다. 빛이 제3의 눈에 응축되면, 그리하여 너무 많아지게 되면 일곱번째 센타로 밀어붙여지게 된다. 그것은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분출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일곱 번째 센타로의 분출은 수세기 동안 수백만 삶 동안 닫혀있던 봉오리를 개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도는 다른 견지에서 출발한다. 도는 말한다. 빛을 고정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것을 고정시키는 일 따위에 신경을 쓰지 말라. 그것을 순환시키는 편이 쉽다. 움직이는 것이 마음의 본질이다. 마음은 언제나 집중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왜 마음의 역량을 사용하지 않는가? 왜 그 흐름을 타지 않는가? 도는 자연스런 학문이다. 조작하지 말라. 강요하지 말라. 스스로 문제거리를 만들어 내지 말라. 마음의 자연스런 힘을 이용하라. 마음은 움직이며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방랑자이다. 그것을 이용하라. 빛으로 하여금 길을 뚫게, 길을 발견하게 하라. 우리는 길을 여는 방법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빛으로 하여금 순환하게 하라.
순환을 통하여 도가들은 700개의 혈자리( point of acupuncture )를 발견하게 되었다. 몸 구석구석으로 유통시키면서 그들은 빛이 매우 강렬해지는 700개의 지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를 정확히 계산해 냈다. 이제 과학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정확히 700개의 지점이 존재한다. 이제 심지어 700개의 지점을 그려낼 수 있고 어디에 기(氣)가 부족하며, 어디에서 에너지가 올바른 경락( mendian )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는가 않은가를 알아낼 수 있는 기계까지 발명이 되어 있다. 도가들은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기계도 기술도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기법은 빛[氣]을 순환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실질적인 방법, 그것을 순환시키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들의 접근 방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배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대가 계속해서 빛을 순환시킨다면 어느 지점에 가서 그것 스스로 응축된다고 한다. 그대는 고정시키는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순환시키고 순환시키고 또 순환시키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가가 목적으로 삼고 노력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도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자연발생이지만 요가에 있어서 그것은 노력에 의한 힘들고도 긴 여행이다.
요가는 남성 지향적이다. 그러나 도는 남성지향적도 아니고 여성지향적도 아니다. 도는 양자의 통합이다. 순환은 남성적 에너지요, 고정은 여성적 에너지다. 무위에의 도달, 행위를 통한 수동에의 도달, 노력을 통한 무위자연에의 도달.
이 근본 원칙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다른 방법은 구할 필요가 없다.
상념을 거기에 순화시키기만 하면 된다. 상념을 순화시킴으로써 날아올라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황금 꽃은 불사약( The elixir of life )이다.
이것이 영생( ,mmortality )의 전비밀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 The philosopher's stone )의 전비밀이라고 부르던 것이며, 인도에서 암릿( imrit ), 불사약( elixir ) , 감로(nectar)라고 부르던 것이다. 이것은 연금술적인 문구이다. 이것은 그대의 화학을 연금술로 탈바꿈시키는 비밀들을 전해 준다. 조잡한 금속을 황금으로 탈바꿈시키는것. 지금 그대는 조잡한 금속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대는 비법들을 안고 있다. 만약 그 비법들이 작동된다면 그대는 황금으로 탈바꿈된다. 황금은 영원 불멸이다.
황금 꽃은 불사약이다. 이 가르침은 아주 완전하지만 또 유동적이기도 해서
최고의 지성과 총명과 가장 완전한 몰입과 평정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최고 수준의 지성과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실현
할 수 없다. 이러한 몰입과 평정을 위한 고도의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야
그것을 수지획득(守持獲得)할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지성과 총명이다.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는 말라. 만약 내가 영리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영리하게 태어난다. 지성은 선천적으로 갖추어진 자질이다. 누구나가 숨을 쉬며 태어나듯 누구나 영리하게 태어난다. 몇몇 사람은 영리하고 몇몇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비인간화시켜 온 아주 모욕적이고 퇴폐적인 관념이다. 비록 그들의 영리함이 표현에 있어 차이가 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은 영리하게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음악에 소질이 있고, 어떤 사람은 수학에 소질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수학을 기준으로 삼을 때 음악가는 멍청하게 보인다. 만약 두 사람을 수학이 기준인 곳에서 시험을 치르게 하면 음악가는 뒤떨어지게 된다. 기준을 바꾸어라. 음악이 기준이 되게 하여보라. 그리고 두 사람을 음악이 기준인 곳에서 시험을 치게 하여 보라. 그러면 수학가가 멍청하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기준들을 선택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이유이다. 그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멍청한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성이 독특할 수는 있다. 시인은 사업가와는 다른 지성을 필요로 한다. 시인이 사업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사업가도 자신이 시인이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다. 정치가가 되는 데에 어떤 종류의 지성이 필요하다면 화가가 되는 데는 다른 종류의 지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백만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기억하라. 모든 사람은 영리하게 태어난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대는 그대의 지성을 발견해야 한다.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일단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대는 명석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들을 갸지고 있기 때문에 명철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가, 학교 선생이나 교장이나 대학이 그대더러 영리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준이란 게 기존의 기준일 뿐이다. 그들의 기준이 모두에게 통용될 수는 없다. 대학들은 아직 우주적이 아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지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지성의 현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단 그대의 지성을 받아들였으면 그것을 존중해라. 그대는 명석해질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시인은 그가 훌륭한 사업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멍청하다고 느낀다. 이제 이것이 혼란을 야기한다. 그는 스스로 열등 의식에 빠져 자기를 멸시하고 비난하게 된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보고자 하나 실패한다. 이것이 그의 주위에 흑막을 드리운다. 만약 그가 자신은 시인으로서 사업가가 될 기질이 아니며 사업에 성공하는 것이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이해만 한다면 그는 시인으로서 성공할 것이다. 그것이 그의 지성이다.
그리고 그의 지성은 그 자신의 방식으로 꽃피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모방해서는 안된다. 사회가 그를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는 폭탄이 필요한 만큼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증오가 필요한 만큼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영화와 라디오와 TV에서 살인이 허용되는 이유이다. 그것은 추잡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장면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외설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 사회는 증오를 통해 살고 있지, 사랑을 통해 살고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살인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오케이다. 만약 누군가가 단검을 그대의 심장에 꽂아 피가 철철 흐른다면 그것은 완전히 오케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사랑을 연출한다면 사회가 두려워한다.
사랑은 외설적인데 살인은 그렇지 않고, 연인들은 비난을 받는데 군인들은 상을 받으며, 전쟁은 괜찮은데 사랑은 안 된다는 것은 이상하다. 만약 그대가 그대의 지성을 받아들인다면, 그대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그야말로 완전히 영리해질 것이다. 모든 구름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대에겐 몰입과 평정이 필요하다. 지성과 총명은 마음의 남성적인 부분이다. 몰입과 평정은 여성적인 부분이다. 여성만이 몰입할 수 있다. 그것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녀는 자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다. 그대가 지적이지 못하면 그대는 말하여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스승이 그대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여성적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것을 흡수할 수 없고 그것으로 잉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둘 다 필요하다. 요점을 보기 위하여 그대는 완전히 지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간직하기 위하여, 그것이 그대의 일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빛을 순환시키는 기법으로 들어갈 것이다. 주의깊게 똑똑하게 들어라. 이것을 흡수해 들여라. 이것은 그대의 일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경험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