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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담임선생을 찾아온 엄마
[1] ‘스승’이 되기까지
나는 내 인생의 첫 직장으로, 1980년 3월 중순경부터 1981년 2월말까지 일 년 조금 못 되는 기간을, 경북 상주군 함창읍 소재의 상지여자중상업고등학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근무하였다.
대학(영남대 문리대 국문과) 3학년을 마친 나는 77년 1월초에 입대하여 79년 4월 초에 제대하였다. 33개월의 복무기간 중 교련혜택으로 6개월을 단축하여 27개월을 복무했다(당시 대학생들은 1학년에서 3학년까지 3년 동안 일주일에 3시간씩 학내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그 대가로 6개월의 군복무기간 단축혜택이 있었다). 보통 군 입대 휴학은 3년이 필요한데, 나는 6개월을 일찍 제대하는 바람에 2년 반만 휴학하고 79년 9월에 복학하였고, 다음 해 8월에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될 참이었다(8월 졸업을 코스모스가 필 때라고 하여 코스모스 졸업이라고 했다).
복학을 하면서 학교 앞 주택에 방을 구하고 이제 철이 좀 들었으니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그런데 예비군복 입고 도서관에 들락거릴 즈음에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였다. 전국비상계엄과 휴교령이 내려 학교는 거의 못 가고, 과제물 내고 학점을 받으며 복학 첫 학기를 보냈다. 이듬해인 1980년 3월부터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다. 이 학기만 끝나면, 어디든지 취직이 될 터이고, 그러면 담배도 당시 중하품이었던 ‘청자’ 대신에 고급인 ‘선’을 피우고, 막걸리나 소주 대신에 맥주를 마시며, 옷도 거지같은 것 좀 버리고 깔끔하게 사 입을 수 있을 것이라는 벅찬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랬겠지만 용돈이 늘 부족했다. 제대 후 전에 신던 구두를 신으니, 군 생활 중 발이 커졌는지 크기가 맞지 않아, 뒷부분을 구겨 슬리퍼처럼 신고 다녔다. 군대 가기 전에는 참 철도 없었다. 어려운 형편의 부모님에게 요리조리 온갖 구실을 붙여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 애쓰면서 공부는 게을리 하였다. 공부가 부족한 탓에 아버지가 원하시는 만큼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한 번도 짜증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등록금을 마련해 주신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고희를 넘긴 지금에서야 막 사무친다(나는 여덟 남매의 다섯째라 부모님과는 오래 전에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으니, 고희를 넘기며 철이 조금 든 것 같다.
대학 입학 후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가서 용돈을 받아 왔다. 나의 안태봉인(安胎峰, 태를 묻은 봉우리니, 태어난 곳을 가리킨다. 특정한 산 이름으로는 많이 쓰이나 보통명사로는 쓰이지 않는다고 보아 국어사전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우리 고향의 어르신들이 쓰시던 말이다) 경남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대정부락은 5일장이 서는 동네였다. 부모님은 이 동네에서 제법 규모가 큰 가게를 하셨다. 시골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을 팔면서 돈을 제법 벌어 나의 유년 시절은 유복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장이 서는 날에는 근방의 여러 고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작로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우리 동네로 모여 들었고, 우리 가게에서 물건을 사 갔다. 그러나 시골 자갈길이 아스팔트길로 바뀌면서 교통이 편리해 지니 도시로 출입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전기가 들어오고 라디오도 보급되면서, 시골 사람들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시골 가게의 물건 값이 마산 같은 도회지 큰 가게의 물건 값보다 무척 비싸다는 점을 알게 되니 버스를 타고 마산시에 가서 생필품을 구매해 오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시골 5일장은 점차 쇠퇴해 져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부터는 가게 수입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집에 가면 한 밤을 자고 다음날 대구로 오는데, 올 차비를 차린 다음, 점빵(‘가게’를 ‘점빵’이라고 했다)으로 가면 아버지가 금고 안에서 돈을 꺼내 주신다. 그 액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용돈 받기를 거부하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조금 더 주소.”라고 하면서 중재를 한다. 어머니가 돈을 조금 더 받아 나에게 건네주신다. 나는 또 거부한다. 어머니는 또 중재를 하신다. 이러 절차를 서너 번 거쳐 상호 불만족스러운 결과지만 협상이 타결된다. 나는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와 신흥여객이라는 직행버스를 타고 대구로 오는데, 마산서 대구까지 전부 비포장 자갈길이어서 3시간이나 걸렸고, 서부정류장(성당주차장)에 내리면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그 때 받아온 용돈은 액수가 적어 한 달을 버티기가 힘들었고, 나는 늘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냈다. 온갖 희한한 핑계를 대며 돈을 더 부쳐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추가로 요구하는 금액에서 절반 정도를 보내주셨다. 시골 우체국으로 한참을 걸어가셔서 소액환으로 바꾼 다음 등기 편지로 나에게 보내주시면, 나는 그것을 경산의 어떤 우체국으로 가서 현금으로 바꾸어 기분 좋은 낯빛으로 기숙사로 왔다. 철부지였다.
제대 후 복학하고 나서는 차마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다. 학교 앞 대동에 친구하고 둘이서 방 하나를 얻어 밥은 적당히 해먹기도 하고 사먹기도 하며 지내던 때였다. 꼭 한 달에 한두 번씩 돈을 더 보내달라는 편지를 하던 자식이 그런 편지를 안 하니, 시골 부모님이 나의 안위에 대해 엄청난 걱정을 하신 모양이었다. 당시엔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많았지 않은가.
내가 살던 자취방은 방이 두 개 있는 조그만 슬라브 지붕의 무척 낡은 집이었고, 마당에 포도나무가 많았다(나는 96년도에 부산의 경성대학교에서 모교로 옮겼고, 그 집에 찾아가 보았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같이 되어 있었지만, 집은 그대로 있었다. 인걸은 간 데 없지만 산천은 의구하다는 고시조 생각을 하면서 감흥에 젖었던 적이 있다.) 대구에 살면서 땅값 오르기만 기다리는 주인은 집을 방치하며 신경을 전혀 쓰지 않아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고, 농땡이 자식 장사 자금 댄다고 집을 판 원래 주인인, 자그만 체구의 수척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대신 월세를 받아갔다. 내가 살던 방은 제법 컸는데, 나의 국문과 동기 둘(부산에서 교직생활을 한 문학청년 김원기와 부산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정년한 안창수)이 살고 있다가 안창수가 나가고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방 안에 연탄가스가 들어와 죽을 뻔 한 적이 있다고 하면서, 겨울에도 연탄을 때지 않고 냉골로 보냈다고 했다(그런 방에 대학생들을 들이고 가스가 새는지 비가 새는지 전혀 신경도 안 쓰는 주인은 어떤 심보였을까?). 친구들은 가스가 들어오는 원인을 모르고 있었다. 방 안 윗목에는 빈 술병이 즐비하고, 비닐장판은 온통 땟자국이었다. 술 병을 치우고 방 청소를 말끔히 한 다음 비닐 장판을 들춰 보니 방바닥에 여기 저기 금이 가 있었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데 참 난감했다. 우리 고향 집 같으면, 가게에 시멘트가 있으니, 시멘트 가루를 물에 개어 빗자루로 쓸 듯이 바르면 가스를 막을 수 있는데, 시멘트도 없을 뿐더러 여러가지 도구들도 없어 어려웠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잠시 고민했다. 나는 청 테이프를 몇 개 사와 비닐장판 두 장의 이음새와 장판과 벽 사이를 철저히 밀봉하여 연탄가스의 침입을 막았다(당시의 우리나라는 후진국이었다). 연탄가스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아이디어였다.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그런 꾀 덕분에 나는 따끈따끈한 구둘막(아랫목)에 엉덩이를 지지며 잤다. 친구 김원기는 내 덕분에 냉골을 피했으니 친구 잘 만난 덕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만들기도 잘하고 생활의 편의를 위한 꾀를 잘 내었다.
한 달이 멀다하고 돈 부치라는 편지를 보내던 자식이 편지를 안 하니, 걱정에 잠을 못 이루시던 아버지께서 비상한 프로젝트를 수립하셨다. 당시 대입 재수를 하던 셋째 아들(지금 경상남도 교육감인 박종훈, 나보다 여섯 살 아래다)을 불러, “당장 대구 옆 경산이라는 데로 가서 니(네) 둘째 생이(형)를 찾아 봐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것다.” 라고 하시며, ‘한 번도 주신 적이 없는 거금’(내 동생 표현)을 주시더란다. 정보는 ‘경산 영남대 근방이고 포도밭 가운데 있는 집’뿐이었다. 전에 마당에 포도나무가 많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동생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경산으로 와 둘째 형을 찾는데, 얼마나 막막했겠는가. 오후 너댓 시 경에 도착하여 옛날 75번 종점 근방에 와서, 탐문하기 시작했는데, ‘포도나무 밭 사이에 있는 집’을 물으니, 동네 사람들이 여기는 온통 포도밭이라 그렇게 해서는 못 찾는다고 하더란다. 금방 날이 어두워 여인숙에서 한 밤을 자고 나 생각해 보니 기가 찼을 것이다. 왼손 바닥에 침을 뱉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탁 치니 침이 서쪽으로 튀기에, 영대 정문 맞은 편 대동 쪽으로 오는 뒷길로 내려왔다고 했다. 포도밭 이야기는 소용이 없겠다 싶어, 인상착의를 중심으로 찾아야겠다는 작전을 세웠다고 했다. 좀 걸어 내려오는데 마침 조그만 반찬가게가 눈에 띄어, 주인 아주머니에게 내 인상착의를 말하며 물어보니, 바로 앞집에 사는 학생 같다고 하더란다. 그날 아침에 처음으로 말을 걸어본 사람이 내가 간혹 반찬을 사먹던 반찬가게 아주머니였으니, 천재일우, 천우신조라고 할까 참 일이 쉽게 풀린 것이다.
방안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헹님, 작은 헹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내 동생이 엄청나게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확인하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이 무슨 일인가? 동생을 방에 들여 사연을 들었다. 아들은 청 테이프로 연탄가스를 막고 잘 있는데, 그걸 모르는 아버지는 잠을 못 주무시고 걱정을 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엘리트 코스를 밞고 있는 첫째 아들에 비해 부족해 보이는 둘째 아들이라 장래에 대해 불안해 하며 나중에 취직이나 될지 걱정하시고, ‘형은 그렇지 않은데 너는 왜 돈을 헤프게 쓰냐’며 꾸중하시던 아버지가 내가 돈 더 부쳐 달라는 편지를 안 하니, 또 다른 엄청난 걱정을 하신 것이다(나는 우리 집안 친인척들에게 돈을 헤프게 잘 쓴다고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는데, 한 번도 그럴 만한 돈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과 누나들이 첫째와 비교해 판단한 편견임이 확실하다). 잡비(용돈) 더 부치라고 편지를 하면 꾸중하던 아버지가, 이제 그런 편지를 안 하니, 놀라서 거금(?)을 들여 자식의 안위를 확인하시려 한 것이다. 얼마나 자정이 유다른 분인가.
나는 그때는 아버지의 자식사랑을 깊이 느끼기보다는 정말 엉뚱한 해프닝이라고 여겼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야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목이 멘다.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자기를 보냈으니, 동생도 내심 걱정이 좀 되었는데, 형이 멀쩡히 살아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동생도 얼마나 기뻤겠는가. 남은 밥을 같이 먹고 동생은 이 기쁜 소식을 아버지께 전하기 위해 바로 시골 집로 내려갔다(동생은 아버지한테서 받은 자금의 반도 안 쓰고 과업을 완수했을 터인데, 남은 돈은 그대로 꿀꺽했을 것이다. ㅎㅎㅎ).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이 된 셈이다(동생은 어릴 적부터 무척 영리하여 공부든 뭐든 다 잘했는데, 경상남도 최초로 3선 교육감을 수행하고 있으니 그 재주가 남다름을 알 수 있다). 편지나 전보 말고는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 초등학생들까지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요즘 세상에서 보면 조선시대 봉홧불 통신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게 오래 전 얘기는 아니다. 1979년도 일이니 불과 45년 전이다. 세상의 변화속도가 엄청나게 빠름을 알 수 있다.
그런 여건 속에서 살던 가난한 대학생이었으니 졸업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제 한 여섯 달만 버티면, 비록 지금은 이렇게 가난하지만 곧 부자 청년이 된다는 꿈같은 비단길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자 말자, 뜻밖에 그러한 부자 청년이 될 기회가 여섯 달이나 일찍 찾아 왔다. 당시엔 중등학교의 교사가 부족하였는데, 농촌지역 학교는 더 심하여, 이수해야 할 학점이 많지 않은 경우는 졸업 한 학기 전에 시골 학교의 교사로 나가는 일이 왕왕 있었다. 3월 중순이 채 되기 전으로 기억되는데, 학교 안에서 국문과의 고(故) 이봉린 교수님과 마주쳐 인사를 하니, “너 몇 학점 남았노?”라고 물으셨고, 6학점 남았다고 하니, “야 그건 적당하게 알아서 하고, 상주에 있는 어떤 학교로 가거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학교의 교감 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적당한 대상을 찾고 있으셨던 모양이었다.
아!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그 지긋지긋한 가난뱅이 삶이 끝나는구나. 이제 나도 좀 사람답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날 바로 이불보따리를 싸들고, 북부정류장에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그 학교로 갔다. 당장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없는 상황이니 면접이고 뭐고 없이 다음 날부터 바로 근무하라는 교장 수녀님의 엄명을 받고, 여중 3학년 담임을 맡으며 꿈에 그리던 봉급 받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졸업을 하기 전이고 아직 교사 자격증도 없으니 ‘전임강사’라고 했다. 뭐든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달마다 봉급을 받게 되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또 필요하겠는가? 그 학교가 바로 서두에서 말한 상지여자중상업고등학교다.
학점 이수는 국문과 교수님들은 바로 과제물을 내어주셔서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는 그런 경우에 교수님들이 학점을 쉽게 딸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시곤 했다. 교육학과에서 개설한 교직과목 한 과목이 걸려 있었는데, 첫 월급을 탄 돈으로 소주 대병에 든 양봉꿀을 사들고 만촌동 교수촌에 있는 담당 교수님(지금은 고인이 되셨음) 댁으로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니, 과제물을 내 주셨다. 그런데 교수님이 학기말 성적 처리 때까지 나와의 이러한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계실지에 대해 심히 걱정이 되었다. 교수님이 약속을 해 놓고는 잊어버리시고 학점을 날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내 동기 하나는 그런 일로 ROTC에서 탈락할 뻔 하기도 했다. 내가 꿀을 한 되 사다 드린 것은 그 정도 양을 다 드시려면 최소한 한 학기 이상이 걸릴 것이니, 한 학기 내내 꿀을 드시면, 나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계략(?)이 깔려 있었다.
다행히 졸업에 필요한 학점 이수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교생실습도 그 학교에서 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실제로는 중3 담임의 교사인데, 한 달 넘는 기간을 서류상으로는 교생을 하는 식으로 꾸며 주는 혜택을 받았으니, 그 시절은 대학생의 황금기였다. 졸업과 교사자격증 획득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무리 하고, 그 해 10월 중순에(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으로 수업일수가 부족하여 1학기가 8월말이 아닌 10월 중순에 끝나게 되었음.) 명실상부한 2급 정교사 자격을 갖춘 정식 교사가 되었다.
[2] 드디어 ‘스승’이 되고
상지여자중상업고등학교는 여자중학교와 여자상업고등학교가 하나의 단위 학교로 통합되어 설치되어 있었기에 비교적 큰 규모였다. 당시 안동교구청의 두봉 주교님이 재단이사장인 가톨릭재단의 학교였다. 두봉 주교님은 고등학교 졸업식 같은 행사 때 와서 축사를 하면 학생들을 무척 웃기셨다. “여러분들은 이제 영화관에 마음대로 가도 됩니다.”와 같은 식이었다. 파란 눈의 주교님은 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교정 안에 성당과 수녀원이 있고, 교장 선생님과 서무과장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명의 수녀 선생님이 계셨다. 가톨릭안동교구청이 세우고 그 운영은 왜관성베네딕도수도원에 위탁한 학교라고 하였다. 내가 근무하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수녀가 되기 위해 수녀원으로 가는 젊은 여자 선생님이 몇 분 계셨다. 그 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수녀원으로 출발할 때, 선생님들이 건물 입구 근처에서 도열하여 박수치며 작별인사를 나누던 광경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상주군 함창이라는 동네가 원래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옹기를 구워 팔며 목숨을 부지하던 사람들의 후손이 많이 산다고 했다. 나는 군대생활 중에 영세를 받은 가톨릭신자였다. 군대에서 영세를 받았다는 것은 교리공부 등 신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교육이 매우 부실했음을 함축한다. 강원도 철원의 최전방 부대라 영세 받는 날을 제외하고는 성당에 가 본 일이 없고, 연대 단위로 한 분씩 계시는 군종신부님(당시의 군종신부님은 계급이 대위였고 성함이 이종남이었다)으로부터 대대 본부 교육장에서 졸면서 듣는 강의를 몇 차례 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고된 일을 피하고 잠시라도 편안한 시간을 갖기 위해 교육 받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성당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만일 종교를 갖는다면 가톨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 후로 결혼식도 성당(범어 성당)에서 올리는 등 착실한 신자가 되고자 했으나, 신앙의 근본이 부족하여 성당에 다닌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중도 포기자를 냉담자라고 하는데, 보통은 ‘냉장고에 들어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트럭을 타고 영세 받으러 가기 위해 여러 명이 모여 있는데, 중대 행정관님(준위 계급)이 내 머리가 길어 두발상태가 불량하다며 화를 내고는 다른 병사를 대신 보내라고 고함을 쳤다. 이발소가 따로 없고 소대의 고참 한 명이 시간 나면 적당히 깎아 주는데, 바쁘다며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었다. 마침 우리의 대부가 되어 주시기로 한 6중대 위찬주 중대장님이 옆에 계셨고, “어떻게 영세를 대리로 받나?”라고 하시며 개입하여, 무사히 넘어갔다(당시에 몇 번 만나지도 않았던 군종 신부님과 옆 중대 중대장님의 이름을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때 받은 아주 조그마한 성경을 지금껏 보관하고 있는데, 그 성경 뒷표지 안쪽에 내가 해 두었던 기록이 있어서다).
학교의 분위기는 좀 차분하고 엄숙한 듯했다. 교장 수녀님은 뭔가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함과 엄격함을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른들은 그렇지만 아이들은 중고교 학생답게 떠들고 까부는 소란함과 즐거움과 순진함 그대로였다. 교무실의 분위기는, 나중에 근무했던 다른 학교와 비교해 보면, 좀 가라앉고 약간은 엄숙하고 점잖음이 묻어나는 듯했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이, 지금 생각해 보면, 교무실 여기저기에 앉아 있는 수녀선생님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녀님들이 주변에 여럿이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좀 젊잖아지고 싶어하는 바람이 생기지 않겠는가. 수녀 선생님들도 항상 성스럽고 엄숙한 자세로 사는 것은 아니고 농담도 잘하고 명랑쾌활하게 교사 생활을 하지만, 복장 자체가 다르니, 문득문득 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선생님들도 대부분 신자였다. 나는 사이비 신자였기에 좀 불편함도 있었다. 학교 안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서 처형당하는 과정이 그림사진으로 붙어 있는 특별교실이 있었는데, 4월 달인가 사순절이 되면 선생님들이 점심 식사 후에 그 교실로 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점심 식사 후 담배 한 대 피우고 몸이 노곤해 져 좀 쉬고 싶은데, 눈치 보며 체면치례로 따라 올라가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신자임을 밝힌 것을 후회하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사이비였다. 그리고 학교 안 성당의 신부님이 우리 교사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는데, 부활절과 성탄절이 되면 필수적으로 하는 고백성사 때 나를 알아보고 훈계조의 말씀을 하셔서 좀 부끄러웠다. 그 신부님은 간혹 젊은 선생님들을 불러 술자리도 마련해 주신 적도 있다. 5.18 광주사태 때는 언론보도통제로 전혀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광주의 여러 성당에서 비밀리에 보내온 시민군들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다.
나는 이러한 분위기의 학교에서도 타고난 성품대로 거리낌 없이 교사생활을 한 편이다. 아직 교사자격증도 없는 전임강사라 봉급이 좀 적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는 일에 비해 대우가 소홀한 것 같아, 교장실로 가서 교장 수녀님에게 항의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같은 숙소에 있던 동료 총각 선생님들은 아직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이니, 이대로 만족하며 열심히 근무하라는 충고도 했지만, 한쪽 귀로 흘리고 내 식대로 한 것이었다. 지금도 한 번씩 그 때 생각을 생각하면 고소를 금치 못 한다(나중에 그 학교를 퇴임한 한참 뒤 당시의 교장 수녀님이 대구 파티마 병원 원무과에서 근무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찾아뵐 생각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3]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담임선생을 찾아온 엄마
여중 3학년 담임을 그런대로 원만히 수행하며 봉급 받아쓰는 재미를 누리며 잘 살고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고교 진학 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 반에서 돈이 없어 고교 진학을 못하는 학생이 한 3할쯤 되었다. 그런 학생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늘 표정이 어두운 학생이 여럿 있었다.
당시엔 ‘산업체특별학교’라는 게 있었다. 제일합섬이나 코롱 같은 방직회사엔 많은 수의 소녀 직원(‘여공’이라고 불렀음)들이 있었는데, 회사 안에 학교(주로 고등학교였고, 중학교인 경우도 있었음)를 만들어 야간에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 정규 학교이고 시설도 좋은 편이어서 인기가 많았다. 경제적으로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진학의 기회를 주는 좋은 취지였다. 또 그렇게 해야 많은 수의 소녀 인력도 확보할 수 있었으니, 서로 상생하는 효과를 내었다.
제일합섬 부설 산업체특별학교에서 대구 경북의 여자 중학교에 한 반에 입시원서 한 장씩을 보냈다. 담임이 추천한 학생에게 그 원서가 주어지고, 그렇게 추천된 학생은 합격이 보장되는 시스템이었다. 제일합섬은 크고 유명한 대기업 회사라 학교 시설과 근무여건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고, 진학을 못 하는 학생들에게 워낙 인기가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 학교 진학을 원하는 학생 중 성적이 제일 좋은 학생을 추천하겠다고 했다.
며칠 뒤 어떤 학모 한 분이 담임인 나를 찾아왔다. 등에는 갓난아기를 들쳐 업었고, 밭에서 일하다가 바로 온 듯 치마에 흙이 묻어 있었으며, 남루한 옷차림이 확 눈에 띄었다. 누구누구 엄마라고 하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 아이를 제일합섬 고등학교에 추천해 주면 정말 고맙겠다고 하였다. 신문지로 대충대충 둘둘 말아 가져온 무엇을 내밀어 얼떨결에 받았다. 성적순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나의 설명은 깊이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 딸을 추천해 달라고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나중에 신문지를 펼쳐보니, 청자 담배 두 갑과 밭에서 뽑아 흙도 털어내지 않은 상태의 땅콩이 뿌리 채 한 묶음 정도 들어 있었다. 갓난아기를 들쳐업고 밭에서 일하다가 땅콩 너댓 뿌리를 캐어 신문지로 둘둘 말아가지고 학교로 오다가 담배 가게에 들러 청자 두 갑을 사 신문지 말이 속으로 넣어 온 정황이 눈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청자는 당시 중하품이었고(나는 봉급 받는 부자청년이 된 지 6개월 만에 청자도 겨우 사 피우던 올챙이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쓴웃음을 지었다), 땅콩도 수확 후 까서 말린 것도 아니고 막 뿌리 채 뽑아 온 것이어서 어떻게 먹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엄마가 마련할 수 있는 물품 중 최고의 선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3 딸이 있는데, 등에 업은 갓난아기가 있으니, 자식도 많은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정말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학생은 여러 가지로 모범적이었지만, 학기말에 가서 최종성적이 나왔을 때, 비진학 학생 중 1등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만일 1등이 못 되면 당연히 추천할 수 없을 터인데, 그 엄마와의 짧은 만남에서 느낀 절박함과 간절함, 애처로움을 어떻게 삭일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드디어 기말시험을 치르고 최종성적을 산출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런 일을 할 때는 대부분 같이 있던 상고 여학생들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의 상고에서는 주산, 부기 등을 필수적으로 배웠으므로, 주산 실력이 6단, 7단 정도 되는 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주산 고단자들은 암산도 매우 잘하여, 웬만한 수치들은 엄지와 검지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암산으로 처리했는데, 참으로 탄복할 정도였다. 나는 옆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 산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천우신조란 말이 어울릴까. 그 학생이 비진학 학생 중 1등을 한 것이 아닌가. 나는 다음 날 조례시간에 제일모직 산업체특별학교 추천은 성적순에 의해 000를 추천한다고 공표하였다. 그 학생이 기뻐하던 표정은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쁨을 주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교사요 담임이었다. 2학기부터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학교의 허락도 득하지 않고 몰래 다녔다. 학생 지도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 개인 공부를 더 할 수 있을까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 아쉽고 미안하다. 그때 그 학생들은 지금 회갑 정도의 나이가 되어 초로의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상지여자중상업고등학교는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찾아가 장학금을 희사하고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고자 하는 학교 중 하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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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 학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말씀을 제 순간에 기발하게 하시는 이상으로 글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제일모직 산업체특별학교에 들어가게 된 그 학생과 엄마께 축하드립니다. 교수님께서 영세받은 신자셨군요!!!!! 영세명은 무엇으로 하셨을까요? 두봉 주교님 아직 생존해 계십니다. 아마 그때보다도 더 큰소리로 웃으시면서요. 교장 수녀님도 사수동으로 들어가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렸을 때는 국영수가 중요한 줄 알았고, 이제는 예체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생활하신다는 말씀을 깊이 들었는데..... 글도 중요히 여기시는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와, 바로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젊은 날의 박교수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다음 다음 글들도 기대합니다!
두 분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통기타 공연 동영상은 한 달이 넘어도 조회 수가 고만고만한데, 이 글은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일흔에 가까운 분들이 보셨군요.
저 같으면 공연 동영상 조회를 우선적으로 하고 글은 잘 보지 않을 것 같은데, 교수님들 카페라 역시 文이 樂을 누르는군요. ㅎㅎㅎ
앞으로 지속적으로 교정을 하겠습니다. 시원찮은 글이라 많은 분들의 시간만 뺏지 않았나 싶어 걱정입니다.
감사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