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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씨(夫婁氏)가 천부天符를 아들 읍루씨에게 전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고조선이 사라진 것을 조선은 다시 개국
5수 중화 사상 으로 평화가 깨짐 금토는 같이 본 천부
8방에서 4방의 사이는 5가 아님 9수 율려의 주기
마고성 : 천부를 봉수
로 볼 때 천부3인은 원방각 제단
출성 : 황국씨가 천부를 나눠줌(복본의 신표)
24~26장 단군조선의 최후는? 천부를 전하지 않고, 훗날을 기약하다
1. 단군조선의 최후는?
2. 읍루씨는 누구인가?
3 천부天符, 천부삼인天符三印은 무엇인가? 천부天符는 한민족의 정체성
4. 천부天符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는?
유호씨 ->우(임금)-계(아들) 하나라를 설득하지 못하고, 서남제국에게 마고의 법 전수
하나라, 은나라의 성장과 단군조선의 쇠퇴
제24장
유호씨가 우에게 잡다한 법을 폐하고 부도로 돌아오라 했으나 우가 말을 듣지 않고 유호씨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는 죽고 많은 자들이 죽었다. 이들은 우와 함께 치수하던 자들이었다. 우의 아들 계가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여 왔으나 하나라 군사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였다. 우의 아들 계는 반성은 하지 않고 분통해하였다. 이에 유호씨가 하나라 무리들이 어리석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서남쪽으로 종족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고을이 자연히 없어졌다.
제25장
이로부터 천산의 남쪽 태원지역이 어지러워져 주인이 없는 것 같아서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백성은 장님이 되어 어둠이 겹겹이 쌓이게 되었다. 강한 자는 위에 있고, 약한 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임명하는 풍습과 백성을 지배하고 괴롭히는 폐해가 만연하여 마침내 이로부터 서로 침략하게 되니 무리 지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한 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하나라, 은나라가 모두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니 이것은 스스로 부도와 단절하여 진리의 도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유호씨는 무리를 이끌고 월식주, 성생주의 땅에 들어가니 이곳은 백소와 흑소씨가 살던 땅이었다. 백소씨와 흑소씨의 후예들은 마고성에서의 높은 집(소)을 짓던 풍속을 잊지 않고 높은 탑(고탑)과 높은 집(층대)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의 본래소리를 잃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유래가 마고성에서 온 것을 깨닫지 못하여 본래의 도가 그릇되게 바뀌어 다른 도가 되어 서로시기하고 의심하며, 싸우고 정벌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마고성에서의 일은 기괴하게 바뀌고 허망하게 잊혀져 유호씨가 각 지역을 다니면서 마고의 도와 천부의 이치를 말하였으나 무리가 이상하게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옛일을 맡아보는 사람이 황송하게 일어나 맞이하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래 이치를 설명하여 전하였다.
제26장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적을 듣고 그의 일을 장하게 여겨유호씨 족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도록 하였다. 이때 임검씨가 하나라의 형세를 심히 걱정하고 어리석음을 풀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도(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한 후 산으로 들어갔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로 돌아가는 것을 증명(天地之爲一理)하여 사람들이 모두 한가족이 되어 크게 조상의 도를 일으키고 널리 천웅의 법을 행하여 인간 세상에 이치를 증명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운해주에 사는 운해족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하나라가 하나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다른 도가 날로 강성해져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天符를 아들 읍루씨에게 전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읍루씨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대한 큰 사랑과 애통함(大悲之源)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이어받고 하나라 종족이 고통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여기고, 진리가 거짓된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였다.
마침내 밝은 땅의 제단에 천부를 봉쇄하고 복본의 큰 원력을 세상에 전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백년동안 나오지 않으니 남겨진 백성들이 통곡하며 슬퍼하였다.(단군조선의 문을 스스로 닫다.)
임검씨가 후천의 말기, 초에 태어나 세상의 일을 미리 살피고 부도 건설을 시범하니 천년 사이에 그 공과 일이 크게 이루어졌다. 마침내 천부의 전해짐이 끊어지니 마고성에서 나온 이래로 황궁씨, 유인씨, 환인씨, 환웅씨, 임검씨, 부루씨, 읍루씨 7세에 천부가 전해지니 7천 년이었다.
1. 단군조선의 최후는? -> 스스로문을 닫음
단군조선의 건국목적 -> 홍익인간, 복본 = 인류화합, 하나 됨
당도(요)가 오행의 법, 제왕지도, 잘못된 역법으로 일어나고
-> 인류가 부도로 모이는 수로육로를 차단하여 -> 부도의 목적을 실행하지 못했다.
2. 읍루씨는 누구인가?
환단고기(단군세기): 1대 왕검, 2대 부루 ... 47대 고열가
부도지 : 1대 임검씨, 2대 부루씨, 3대 읍루씨
(부도의) 존재 이유가 사라짐
-> 공동체 해산 : 천부 봉쇄, 입산
-> 훗날을 기약 : 복본의 원력(複本之大源)을 전함
천부삼인을 가지고 가지 않으시고 감춰놓고 가신 이유는?
3 천부天符, 천부삼인天符三印은 무엇인가? 천부天符는 한민족의 정체성
-> 복본을 주관하는 자,
-> 홍익임간의 사명을 가진 자에게 대대로 전수 읍루씨(고열가단군)
-> 천부를 더 이상 전하지 않음(복본의 원력, 약속만 전수)
마고성 : 천부를 봉수
출성 : 황국씨가 천부를 나눠줌(복본의 신표)
황궁씨->유인씨->환인씨(천부삼인)~읍루씨
부도의 존재 이유가 사라짐
-> 공동체 해산: 천부 봉쇄, 입산
-> 훗날을 기약: 복본의 원력을 전함
천부天符, 천부삼인天符三印
1) 모든 것이 진실로 하나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2) 쓰임에 따라 2가지 추정,
하나-오직 복본을 주관하는 자(단군)에게만 전수(마고성~황궁씨~읍루씨),
둘 - 보급형 14장 모든 종족이 일곱 가지 보물인 옥을 캐어 천부를 새기고 방장해인이라 하여
7가지 재앙을 없애고 돌아갔다.
모든 것이 진실로 하나임을 알게 하는 것
1) 천부경: 하늘, 땅, 사람이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감
2) 유적에서 발굴된: 검(힘,권위상징),거울(광명,밝음,태양),방울(법을 알림) -> 일본천왕은 방울대신곡옥
3) 원방각○□△(하늘, 땅, 사람)
4. 천부天符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는?
읍루씨(고열가단군), 단군조선을 해산하며 -> 천부를 더 이상 전하지 않음(복본의 원력, 약속만 전수)
-> 천부를 갖고 가셨다면 -> 영영 회복할 기회가 없음
-> 천부를 두고 가셨다는 건 -> 후손을 믿고 훗날을 기약함
복본 -> 천부 -> 열쇠 -> 수증修證:<개인적/수행>; <전체/널리 이롭게하라>
해혹解惑-어리석음을 없앰, 인세증리人世證理 인간세상을 이치로 증명=홍익
단군조선 이후 기자(箕子), 위만은 누구인가? 삼한(三韓)은 무엇인가?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한은 무엇인가?
단군조선 BC 2333~ BC 238
하 은 주 진(연) 한
요순우 BC 1600~BC1040
BC 1766~BC1122
기자는 은나라 사람 25대 단군 시대
-> 주나라가 기자조선을 제후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기자는 신하가 되지 않았다. - 사기사마천
사대주의 : 큰 나라=중국을 섬김
삼국사기 12세기(김부식)~조선말
유교 사대주의와 기자 동래설의 결합 -> 기자조선의 비중이 점점 커짐(고려말~조선)
고려말(위만등장) 삼국유사(위서근거): 고조선->위만(연나라)->삼한->삼국
제왕운기 : 전조선->후조선->위만(연나라)->한사군->열국->삼국
조선의 건국세력
- 사대주의(대중화, 소중화)
- 성리학 : "기자가 와서 우리를 교화시켰다." <- 아 미친자들이다. 통탄할 일이다.
조선(朝鮮)이라는 국명
- 이성계 " 화령, 조선 중 택일하여 주십시오.
- 명나라 : 조선으로 하라. ' 주나라가 기자조선을 제후 삼았으므로.(사기)'
사대주의 세력이 700년 넘게 우리나라의 주류 기득권 세력 형성
소수의 반론 제기 세력
변계량(1369~1430) 고려말, 조선초 "우리나라는 시조단군이 독자적으로 시작했다."
정조대왕 원구단 복원 명령 했으나 -대부분 중국 중심의 사고방식 역사관 형성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고조선을 신화로(최남선의 이의제기 묵살)
21세기 대한민국이 만든 역사는? 한국 역사학계의 고정관념, 틀에 갇혀 있음.
우리 역사 무엇이 문제인가?
(단재 신채호 조선상고사)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 같이 소경, 귀머거리, 절뚝발이, 앉은뱅이가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조중엽이전에는 <동국통감><고려사>등 몇 종의 관에서 발행한 사서 이외에는 개인의 역사저술이나 소장을 금지하였으므로...(국가에서 역사를 통제함) 이수광은 내각(규장각)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고려이전의 비사를 많이 볼 수 있었고, 이언적은 <사벌국전>을 썼으나 친구에게 보이기를 꺼려하였다. 현 왕조의 득실을 기록하지 못하게 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간혹 있는 일이지만, 지나간 고대 역사를 개인이 쓰지 못하게 하거나, 개인이 보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우리나라(조선)에만 있었던 일이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 가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역사보다 중국역사를 더 공부함)...(역사를) 말살하려고만 하였다. 그리하여 사료가 빈약하게 된 것이다.
우리 역사 말살抹殺 -조선
우리 역사를 공부하려면 '역사말살사'부터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조선 건국 후 약 100년간 성리학, 사대주의에 반하는 역사서를 민간에서 금지시켜 수거함.( 이방원, 세도, 중종 때까지) 수서령(收書令, 책을 수거하라는 어명) 세조 3년 고조선 비사, 대변설, 조대기, 표훈삼성밀기,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 예정1년 표훈천사, 삼성밀기, 진역유기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수서령(收書令) 책의 정체
고대 역사서 : 환단고기에 전문, 또는 인용되어 등장
고조선 비사, 대변설, 조대기, 표훈삼성밀기,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진역유기 등
환단고기 구성
- 삼성기(안함로, 원동중 저)
- 단군세기
- 북부여기
- 태백일사 : 이맥 저
<단군세기> 저 행촌 이암의 후손. 연산군 때 괴산으로 귀양, 중종 또 소환, 1520년 찬수관이 되어 비장서적을 접함. 가문의 책 + 귀양 중 괴산에서 읽은 책 + 국가 비장서적 = 태백일사 저술. 표훈천사, 조대기, 대변경 등 수서령에 등장하는 다수 서적 인용. 그러나 감히(두려워) 세상에 내놓지 못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공개. 일제감점기에 또 20만권 수거했으나 일본 왕실도서관에 있을 가능성 있음.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진실은? 결론은 거짓^^
한국상고사입문에 밝혀져 있음. 해방 이후 역사서를 보다가 일제 역사서와 동일하여 깜짝 몰람. 최태영(법학) 박사 이병도를 설득하여 공동저술한 책의 내용
기자나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영내 변방의 한구석에 위치했고... 소위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하여 한동안 고조선의 주류의 지위에 있었던 것처럼 오전(誤傳)되어 온 것은 사대주의 사관과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사관에 의하여 왜곡, 조작된 것을 그대로 답습한 잘못이다. 기자는 중국에 살다가 거기서 죽었고, 그 후손 기비는 고조선 말기에 조선으로 피난해 와서 간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가 그 아들 기준이 탈출하여 조선으로 들어온 위만을 신인하여...위만에게 다시 나라를 내주었다.(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삼한(진, 막, 번) 중 번조선(번한)을 말함) 위만조선은 점점세력이 강해져서 제법 큰 나라를 이루었다. 위만조선의 영토일부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나 부여를 위시하여 삼한(진, 막, 번) 등 고조선의 열국이 고조선 영역의 대부분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었다. 기자가 동으로 이동하여 기자국을 세운 것은 맞으나 하남성 서화지역 -> 요서지역(단군조선변방 번조선)으로 이동 -> 후에 위만에게 넘어가 한사군이 됨. 한사군이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요서직역이었
27~29장 박혁거세, 부도를 복원하다. 금척은 무엇인가?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서이며,
부도지(符都誌)는 임검씨(단군왕검)가 세움 부도(符都)(단군조선)에 대한 책입니다.
소부도지는 박혁거세가 소부도(신라)를 세운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27장 (소부도지)
은나라(BCE1600~BCE1046)에서 기자가 패잔병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으로 도망하여 왔다. 당우(唐虞, 요순)의 법(帝王之道)을 행하고 오행(五行)과 삼정(三正)을 쓰고 , 홍범무함(洪範巫咸)을 시행했다. 천웅의 도(天雄之道) 와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은나라의 패잔병과 난민이 무력으로 부도(符都)의 남겨진 백성들을 억압하므로 부도의 백성들이 천부(天符)가 묻혀있는 밝은 땅의 제단(明地之檀)을 금지하여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봉금,封禁) 동해 바닷가에 피난하여 살았다. 그것은 옛날 서라벌(사례벌)의 빈땅이었다. 서라벌은 긴 깃발을 뜻하는데, 원래 광야에서 유배된 죄인이 긴 기(깃발)을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 먼 곳에서 지키는 관리로 하여금 자신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했던 것이다.
부도의 유민들은 육촌을 만들고 제족과 접하여 이웃이 도어 일을 분담하여 함께 지켜내니 이것을 한(韓) 이라 했다. 한은 지키고 방비(保衛) 한다는 뜻이다. 북쪽에는 마한, 남쪽에는 변한, 동쪽에는 진한이 있어 삼한이라
했다. 각각 부족이 스스로 다스리고, 선조로부터 내려온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동안 은나라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키고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때 하나라의 땅(지나, China)에 전쟁과 약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해지니 동요와 혼란이 삼한(三韓)에까지 미쳤다. 이에 육촌 사람들이 서로 대책을 논의하여 서쪽의 화가 점차 다가오는데 지키고 방비하기가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서로 통합하여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경계선을 정하고 요새를 세우고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솔하고 다스리는 일을 위임하였다. 다른 부족도 역시 수령을 추대하여 방비하였는데, 남쪽은 백제요. 북쪽은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곧 북쪽에 있는 부도의 보가 있던 땅을 회복하여 서쪽에서 침략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히 지켜냈다.
제28장
이보다 앞서 육촌의 촌장들이 약초 캐는 날 함께 모였는데, 선도산 사당의 성스러운 여인이 알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 가서 보았다. 동쪽에 있는 우물에 데려가 장막을 가리고 물로 씻어 껍질을 벗겨내니 남자아이였다.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박으로 성씨를 삼고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박은 박달나무를 뜻하는 단에서 따온 것으로 성을 삼은 것이며, 혁은 빛을 의미하니, 광명으로써 암흑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육촌의 사람들이 함께 기르니 점차 자라면서 신령한 기운이 밝게 솟고 큰 사람이 되었다. 13살에 여러 사람이 추대하여 거서간이 되니 거는 거(일하다)라는 뜻이오 간은 방을 뜻하고 수장을 의미하니 이것은 서방을 방어하여 지키고 경계하는 수장, 즉 방어장이라는 뜻이다 서방은 서쪽에서 침략하여 삿된 도를 행하는 자 들이다.
도교권 황제국의 제단[편집]
도교의 영향을 받은 천자가 하늘인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환구는 예기에 기록된 천자가 행해야 할 천제(天祭)이다. 이 제사의 본단을 환구단(圜丘壇)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황제가 도교의 영향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 이외의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로 보며 오직 자국 군주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같이 도교의 영향을 받고 외왕내제의 성격을 가진 나라들은 모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일반적인 동양 전통건축물과 달리 원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동양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이다.
圜이 '둥글 원', '돌 환' 두 가지 훈음으로 읽으면서 생긴 혼란이다. 본래 圜은 圓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쓰여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다. 圜은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圜이라 하고 한글로는 "환"이 아니라 "원"이라 표기하고 있다. 즉, 애초에 圜은 원으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53년 화폐개혁시 화폐단위를 圓에서 圜으로 바꾸고 음독을 '환'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24년11월24일, 1925년6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한글로는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聖域)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 본단(本壇)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皇穹宇)'만 남았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 조선호텔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