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열전-신동문 5작성자페드라|작성시간09.06.05|조회수203목록댓글 1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60년대 얘기가 나왔으니 신태양사 얘기도 좀 하자. 상당히 견고한 출판사로 대구피난시절 다방에서 출판사를 탄생시켰고 소설가 유주현이 주간을 맡기로 했다. 출판사 신태양사에서 펴내는 잡지가 바로 여상女像이다. 여성지 여상에서 신동문에게 청탁을 했다. 신동문은 청춘의 방황기와도 같은 ‘청춘의 병든 계단’-부제 청년 시인의 사랑과 투병과 시심의 편력기-이란 제목으로 연재를 했다. 1962년 12월부터 다음해 11월호까지였다. 신동문의 ‘청춘의 병든 계단’은 장안의 화제를 뿌렸고 여상도 덩달아 많은 부수가 팔려나갔다. 이름 꽤나 있는 문인치고 신문에 연재를 할 때인데 잡지에 연재한 신동문의 인기를 따라가진 못했다.
신동문의 시린 아픔이 있는 글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시인의 육성에 시심이 곁들여져 그랬을까? 여하튼 가는 곳마다 세간의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 글은 파릇파릇한 청춘의 애틋한 이야기와 전쟁이라는 한계상황과 공군에 입대해 비행장 관제탑에서 수신호로 비행기를 유도한 이야기며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풍선기’를 쓰던 시절의 추억담이었다.
1963년 새벽이 정상괘도에서 서서히 내려올 때쯤 시인 구상이 신동문을 찾아와 ‘신형, 이제 잡지는 정상에 세워놨으니 자리를 바꿔봅시다.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는 것도 괜찮습니다’라고. 이렇게 해서 신동문은 잡지사를 그만 두고 경향신문 특집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문사에서도 그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특집을 만들어냈다. ‘김삿갓 따라 강산 천리’를 비롯해 많은 글이 특집으로 꾸며졌다.
1964년 5월, 별것도 아닌 글이 문제가 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가 특집부장으로 재직할 때인데 어느 독자의 투고가 발단이 되었다. 1964년도 역시 한국은 가난했고 한 톨의 쌀이 아쉽던 시기였지만 북한의 쌀농사는 괜찮았는지 독자가 북한에서 쌀을 수입해다 먹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투고했고 그 투고는 담당기자가 데스크의 허락도 없이 그 글을 그대로 게재했다. 이게 빌미가 돼 편집부장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취조를 받아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사건이 일선기자의 잘못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신동문은 그예 사표를 내고 경향신문사를 떠났다.
신문사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신동문은 이번엔 출판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만들어낸다. 그는 1965년 신구문화사에 둥지를 튼다. 그 시절 신구문화사는 책의 르네상스를 꽃피워낸 출판사로서 뿐만 아니라 기획과 편집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이정표를 세워놓았다. 하긴 새벽에서 최인훈의 ‘광장’을 게재해 장안의 화제를 불러 모은 그를 출판사에서 그냥 둘리도 만무했다. 그가 주간, 편집과 기획위원으로 있으면서 기획해낸 책이 ‘세계전후문학전집’ 12권이다.
세계문학하면 정음사나 을유문화사 판본이 독서시장을 지배할 때였지만 기실 일반에 회자되는 영미판이 주류를 이루었고 제3세계나 새로운 사조의 세계문학이 아니었다. 번역 또한 거의가 일본판을 번역한 중역이었거나 원문을 번역했다고 해도 읽히는 맛이 떨어지는 낯선 문장이었다. 그런데 신구문화사에서 출간한 ‘세계전후문학전집’은 독자들에게 아주 낯선 작가들뿐만 아니라 제3세계권의 작품들이 있어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했다.
신동문의 기획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10여권이 넘는 묵직한 전집에도 불구하고 책은 날개 돋치듯 팔려나갔다. 이런 걸 공전의 히트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신구문화사는 하루아침에 유수의 출판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 시절 책으로 번 돈이 신구전문대학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어 ‘세계의 인간상’ 12권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도 상당히 팔렸지만 전후문학전집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다음에 기획한 책이 ‘한국의 인간상’ 전6권이다. 이 책은 다른 출판사들이 인물전을 만드는 원전 노릇을 톡톡히 해왔고 지금도 한국의 인간상은 고서를 즐겨 찾는 이들에겐 구입할 목록 중의 하나가 됐다. 하지만 한국의 인간상을 비롯해 신동문이 기획 편집한 전집들은 고서점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한국의 인간상 이후 기획한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친 ‘현대한국문학전집’ 18권이다.
현대문학사에 빚진 장용학과 손창섭 그리고 신동문이 기획한 최인훈의 광장이 자리한 현대한국문학전집은 다시금 신구문화사를 튼튼한 방석 위에 앉게 했다. 마지막으로 나온 책이 ‘현대세계문학전집’ 18권이다. 세계문학하면 거의 영미문학 중심으로 짜여 졌는데 그렇다고 참신하고 새로운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자들이 식상해 하는 소설들이다. 그렇다 보니 현대작가들이 망라된 이 책은 또 다른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많은 책들을 펴냈지만 타출판사와 중복이 되는 책이 없었다는 게 장점이다.
글을 쓰다가 우연히 세계전후문학전집이 눈에 띄어 책을 펼치니 정가가 1600원으로 되었다. 60년대 초엽의 1600원은 지금으로 환원하면 얼마만한 가치를 지녔을까. 가장 힘겹던 시절인데도 큰돈을 주고 책을 사봤다는 독자들을 상상해볼 때 책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