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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
이광복
시루봉 아래 시루메마을이 있었다. 나는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고향인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에는 우리 동네 시루메를 필두로 인근 십자거리, 마르디, 연화, 중락동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인심 좋고 평화로운 농촌이었다.
부여는 백제의 도읍지이자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니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석성(石城) 또한 삼국시대 이래로 유서가 깊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돌[石]로 쌓은 성[城]이라는, 즉 석성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에 돌로 축조한 옥녀봉 일대의 산성에서 유래하고 있었다.
석성은 본래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다. 신라 신문왕 때 석산현(石山縣)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석성현으로 개칭한 이래 그 이름이 굳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공주목의 속현으로 감무를 두었고, 조선왕조 태종 때부터는 현감이 관아에 상주하면서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증산리의 증산은 시루메, 즉 ‘시루 증(甑)’ 자와 ‘뫼 산(山)’ 자를 조합한 한자 표기였다. 그중에서도 우리 동네 시루메 만을 딱 떼어 별도로 지칭할 때에는 원래의 증산리, 곧 증산리의 모체랄까 원조라는 뜻으로 특별히 ‘으뜸 원(元)’ 자를 붙여 원증산(元甑山)이라고 했다.
을미년, 즉 1895년 종래의 석성현이 석성군으로 승격할 때 시루메 지역은 증산면으로 한 단계 올라섰다. 그 당시 증산면 면청은 당연히 우리 동네 시루메에 있었다. 석성군에는 증산면 이외에도 현내면(縣內面) 북면(北面) 비당면(碑堂面) 우곤면(牛昆面) 삼산면(三山面) 원북면(院北面) 병촌면(甁村面) 정지면(定止面) 등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1914년 일제는 전국 군·면을 모조리 개편하면서 기존의 임천군 홍산군 전역, 공주군과 석성군 일부를 분할해 부여군에 통합했다. 석성군에서 부여군으로 통합된 지역은 증산면 현내면 북면 비당면이었다. 그때 조선총독부는 석성군의 5개 면, 즉 우곤면 삼산면 원북면 병촌면 정지면을 떼어 논산군(지금의 논산시)으로 붙이고 성동면(城東面)을 신설했다. 그 5개 면은 성동면 소속의 리(里)로 하향 조정되었다. ‘성동’이란 ‘석성의 동쪽’이라는 뜻이었다.
우리 동네의 행정구역은 결국 지금처럼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로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석성군이 석성면으로, 증산면이 증산리로 강등된 셈이었다. 그런 변화 속에 언제부터인지 한자어가 순수한 우리말을 뒤로 밀어내면서 서서히 앞자리로 불거져 나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시루메’가 ‘원증산’보다 훨씬 더 널리 통용되었다. 군대나 객지로 나간 사람들이 보내오는 편지 주소에도 대부분 ‘충남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 시루메’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다가 대충 우리 또래들이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시루메’ 대신 ‘원증산’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가령 면민들이 학교 운동장에 집결하여 3·1절과 광복절 경축식을 거행할 때는 물론이고 재일교포 북송 반대, 무장공비 남파 규탄 등 한바탕 궐기대회를 벌일 때에도 우리 동네 주민들은 ‘시루메’가 아닌 ‘원증산’이라는 팻말을 들고 참가했다. 학교 운동회 날 마을끼리 대항전을 벌일 때에도 십자거리는 ‘십자가(十字街)’로, 마르디는 ‘종북(宗北)’이라는 깃발을 들었다.
그때쯤 해서는 마을 이름 뒤에 ‘마을’보다는 ‘부락’을 붙이는 사례가 훨씬 더 많아졌다. 가령 운동 경기를 할 경우에도 ‘부락 대항’이라고 했지 ‘마을 대항’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관공서의 공문에서도 ‘시루메마을’이 아닌 ‘원증산 부락’으로 명기되었다. 결국 우리말 이름인 ‘시루메’가 서서히 저물어 갔고, 그 대신 한자어 명칭인 ‘원증산’이 더 익숙하게 떠올랐다. 그러다가 이 근래 동네 입구 잿무덤부리에 세운 안내 표지석에는 ‘원증산 마을’이라고 새겨졌다.
우리 동네 원증산은 예부터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시루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잠깐 잘록하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당산 쪽으로 반달처럼 휘돌아 나가고 있었다. 당산 끄트머리에는 도라무텡이가 있었다. 시루봉과 당산 사이의 동그란 능선을 등에 업고 도라무텡이까지 20여 호의 농가가 오순도순 눌러 앉아 마치 삼태기나 말발굽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매년 봄 동네 곳곳에 개나리꽃 살구꽃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산제당이 있는 당산 너머 광대골이나 사기장골에서는 종달새가 수직으로 높이 떠올라 파르르 파르르 날갯짓하며 재재골재재골 지저귀었다. 바람이 불면 파랗게 자란 보리가 살랑살랑 물결 쳤고, 시루봉이나 당산 소나무에서는 노란 송화가루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여름에는 뻐꾸기와 꾀꼬리가 노래를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지서 말단 경찰관만 봐도 무슨 죄나 지은 듯 괜히 쩔쩔 매고 벌벌 떨 만큼 순박했다. 외지에서 처가살이 들어온 정 서방처럼 몰상식한 악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 탯줄을 묻고 살아온 본바닥 토박이들은 한결같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증산 주변은 뺑뺑 돌아가면서 거의 모두 윤구병씨네 땅이었다. 어느 누구라도 원증산에서 윤씨네 땅을 밟지 않고서는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지만, 부호였던 윤구병씨는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설날 세배를 가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빳빳한 새 지폐로 어김없이 얼마간의 세뱃돈을 주었다.
한편, (큰)아버지는 일찍이 그런 윤구병씨의 특별한 배려와 호의로 시루봉 들머리 우람한 감나무 곁 한 자락을 깎아 집을 지었다. 단칸 오두막집으로 추녀조차 없는,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린 모말처럼 생긴 말집이었다. 울도 담도 번지도 없었다. 다른 집들과의 거리가 조금 떨어진 외딴집이었다. 감나무와 집을 한 덩어리로 결부시킨다면 우리 집은 일견 감나무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부엌모퉁이에는 참나무가지 섶 울타리로 둘러친 뒷간이 있었다. 뒷간에는 두 개의 항아리가 묻혀 있었다. 한쪽에는 대변을, 또 다른 한쪽에는 소변을 보았다. 밤에는 요강에 대소변을 보았고, 분뇨를 모아 논밭 거름으로 쓰던 시절이었다. 뒷간 쪽은 시루봉과 잇닿아 있었으며, 굴뚝모퉁이 쪽에는 말랭이와 이어지는 작은 오르막길이 있었다. 우리는 집 언저리의 손바닥만 한 밭 몇 뙈기를 경작했다.
(큰)아버지보다 예닐곱 살 연상인 윤구병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덕인이었다. 재산도 많았지만 덕망이 높았다. 부전자전이라고나 할까, 최고학부를 나와 한때 대전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돌아온 외아들 현중씨 또한 도량이 넓고 인정이 많았다. 윤구병씨가 작고한 뒤에는 현중씨가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큰)아버지는 오두막집 텃도지와 밭뙈기 소작료로 윤씨네 집에 해마다 품 네 개씩을 물었다. 우리 형편상 현금이나 곡물 부담이 어려웠던지라 품으로 대신한 것이었다. 과도하지 않은 헐한 조건이었다. 윤씨네는 농토가 방대한 만큼 품도 많이 필요했다. (큰)아버지 내외분은 농번기 때 윤씨네 집에 가서 한 해 나흘씩 농사일을 해주었다.
그전에도 밝혔다시피 나는 세 살 때 큰집, 즉 (큰)아버지 내외분 슬하에 후사로 들어가 성장했다. 나보다 아홉 살 많은 작은누님은 훨씬 이전에 들어가 있었다. 우리 남매는 (큰)아버지 (큰)어머니를 부를 때 굳이 ‘큰’ 자를 붙이지 않고 그냥 아버지 어머니라 부르며 자랐다. 본가에도 당연히 아버지 어머니가 계셨다.
우리 동기간은 본래 10남매였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 작은누님 밑으로 내리 3남매가 태어나자마자 숨지는 9년 동안의 비운과 우여곡절을 거쳐 내가 태어났다. 신해생인 아버지의 연세 마흔한 살이었다. 환갑에 잔치를 벌이던, 즉 장수 시대가 아니었던 그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나는 가위 늦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 동기간은 최종적으로 4남 3녀 7남매가 성장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보다 5년 연장이었다. 당신께서는 일찍이 대한제국 광무 10년, 즉 1906년에 태어나 어느덧 지천명에 다가서 있었다. 신묘생, 즉 6·25 전쟁 중이던 1951년에 태어난 나하고는 무려 45년이라는 간극이 있었다. 더군다나 당신은 수염까지 부얼부얼해서 연세가 실지보다 훨씬 더 높아 보였다.
그런 (큰)아버지는 일찍이 석성보통학교를 다닌, 양가와 본가의 부모님 네 분 중 유일하게 학교 문턱을 밟아 보신 분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까막눈 일색이었던 그때, 비록 졸업을 못하고 중퇴로 끝났을지언정 다른 문맹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부모가 자식을 잃으면 땅이 아닌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자라 보고 놀란 소가 솥뚜껑 보고 놀란다던가, 아버지는 3남매를 내리 잃고 나서 나를 얻었던 터라 긴가 민가 출생 신고도 뒤로 미루면서 이 핏덩이의 싹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쩌면 형들이나 누나의 뒤를 따라 곧 죽을지도 모를 기저귀 찬 젖먹이 갓난아기. 그런데 나는 죽지 않고 새록새록 자라났다. 아버지는 2년 뒤 비로소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 수속을 밟았다. 그 바람에 내 호적 나이는 실제보다 두 살이나 줄어 1953년생으로 등재되었다. 물론 생일도 진짜 생일과는 얼토당토않은 엉터리 날짜로 기록되었다. 도대체 종통 세습이 뭔지 아버지 어머니는 그렇게 귀한 맏아들을 큰집에 입후로 들여보냈다.
나는 갓 태어난 형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졸지에 장남이 되고, 이 무슨 운명인지 어느 날 갑자기 종가의 종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인습을 중시한 어른들의 결정이었다. 아랫집 본가 아버지 어머니는 나로 말미암아 이래저래 한평생 가슴에 피못을 박고 살았다.
나는 나대로 일약 문중의 종손으로 막중한 책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내 호적까지 아예 큰집으로 옮겼다. 나는 석양국민학교에 들어가 3,4학년 쯤 되었을 때 비로소 양가와 본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양가에서 바라보면 저 아래 본가가 있었다. 우물에서 작은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둔 강도현씨네 뒷집이었다. 그 옆 갓집을 돌아나간 도라무텡이 쪽 용보들 건너로는 채종말과 고추골이 있었다. 본가에는 아버지 어머니와 5남매의 동기간이 살고 있었다. 큰누님과 동생들 넷이었다.
양가인 윗집은 북향이었고, 본가인 아랫집은 남향이었다. 두 집은 손에 잡힐 듯 빤히 보였다. 나는 그 두 집, 즉 윗집과 아랫집을 책임져야 할 입장이었다. 나는 주로 윗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랫집 본가에도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윗집과 가까운 말랭이에 앞재너머가 있었다. 앞재너머는 ‘앞’과 ‘재’와 ‘너머’가 합쳐진 말이었다. 앞재너머와 당산 사이에 질빵너머가 있었고, 당산 너머 십자거리 쪽으로는 광대골과 새뱅이가 있었다.
말랭이 앞재너머에는 윤구병씨네 집과 두어 채의 농가가 더 있었다. 모두가 초가집 일색이었던 반면 윤씨네 가옥만 함석집이었다. 말랭이에서 남쪽을 바라볼 경우 시루봉에서 제4호 국도, 즉 신작로 쪽으로 뻗어나간 한 자락이 좌청룡이라면 질빵너머에서 잿무덤부리로 뻗어나가 신작로와 맞닿은 또 다른 한 자락은 우백호에 해당되었다.
앞재너머는 신작로로 넘나드는 원증산의 관문이었다. 여기저기 사통오달로 좁다란 샛길들이 있었지만, 이 앞재너머야말로 사람은 물론 우마차까지 왕래하는 원증산의 요충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상여가 나갈 때에도 이 앞재너머에서는 일단 멈춘 뒤 정든 마을을 영원히 떠나가는 망자의 심정을 대변하듯 고개를 넘지 않으려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면서 뜸을 들였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못 가겠네 못 가겠어 정을 두고 못 가겠네, 어허, 어허이, 어허, 어허이, 어허, 어헤… 상여소리도 구슬펐다.
시야가 탁 트인 말랭이는 동네의 망루 같은 곳이었다. 동네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주민들이 이곳으로 집결했다. 어느 집에 불이 나거나, 부역 또는 공동 작업을 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일제히 불러 모을 때에도 구장이든 반장이든 누군가가 이 말랭이에서 징을 쳤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재빨리 행동에 들어갔다.
앞재너머로는 타동네 사람들도 자주 드나들었고, 길목을 사이에 둔 양쪽 언덕에는 쥐엄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서 있었다. 별로 크지 않은,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은 쥐엄나무는 마치 동네 어귀를 지키는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동쪽 말랭이에 있는 나무는 오톨도톨한 밑둥 두 갈래를 꽈배기 꼬듯 8자 모양으로 몸을 비틀어 꼬면서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길 건너에서 마주 보고 있는 서쪽 나무는 그보다 약간 작았고, 밑바닥 토양이 메말라서 그런지 시들삐들 자주 몸살을 앓았다. 누군가가 나무뿌리 다치지 않도록 멀찌감치 둥그렇게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듬뿍 넣어 주었지만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말랭이 쥐엄나무 언저리는 우리 또래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였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우리는 딱지치기, 구슬치기, 못치기, 공치기, 연날리기, 술래잡기, 제기차기, 굴렁쇠 굴리기, 기차놀이, 땅따먹기, 윷놀이 등등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누군가는 Y 자 모양의 작은 나뭇가지에 고무줄을 매달아 새총이랍시고 공깃돌을 매겨 쏘아대기도 했다. 말랭이는 사시사철 전천후 놀이터라고 말할 수 있었다.
동네 안쪽 방향으로는 좁고 밋밋한 언덕이 있었다. 소나무 서너 그루가 듬성듬성 서 있는 그 경사면에 쪼그리고 앉아 쭐쭐 미끄럼을 타면 더욱 신바람이 났다. 고무신이 닳거나 바지 엉덩이에 흙이 묻는 줄도 몰랐다. 날씨가 따뜻한 어느 봄날이었다. 우리 또래는 마치 세련된 합창단처럼 음정과 박자를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사는 우리 삼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삼천리 아름다운 이 내 강산에, 억만년 이어 나갈 배달의 자손, 길러온 힘과 재주 모두 합하니, 우리들의 앞길은 탄탄하도다. 보아라 이 강산에 날이 새나니, 삼천만 너도 나도 함께 나가자, 광명한 아침 해가 솟아오르니, 빛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우리는 종종 다람쥐나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쥐엄나무에 올라가서 놀았고, 쥐엄나무 열매가 어느 정도 통통하게 여물면 우리는 그걸 뭐 대단한 과일이나 되는 줄 알고 기분 좋게 따먹었다. 먹을 것이 워낙 귀하다 보니 우리들에게는 비리치근한 그 열매까지도 일종의 군것질거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두 쥐엄나무는 그 나름의 정자나무였다. 여름에는 동네 사람들이 서쪽 쥐엄나무가 아닌, 좀 더 넓고 평평한 동쪽 쥐엄나무 아래에서 쉬거나 낮잠을 즐기곤 했다. 거기 쥐엄나무 밑에는 묵직한 들독이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이따금 심심풀이 삼아 들독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근력을 키웠다. 나도 열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들독을 앞가슴까지 번쩍번쩍 들어 올리면서 내심 힘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두레 때에는 말랭이에 농기를 높이 세웠고, 주민들이 꾸다당 꾸다당 퉁탕퉁탕 풍장을 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십자거리 주민들까지 농기와 농악대를 앞세우고 와서 합세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쥐엄나무 아래 공터에서 열두 발 상모가 휘휘 땅바닥을 쓸며 눈부시게 돌아갈 때에는 저절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쥐엄나무는 국기게양대나 안테나 역할도 했다.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같은 국경일에는 구장이나 반장이 태극기를 장대에 매달아 가장 높이 치솟은 쥐엄나무 맨 꼭대기 우듬지에 새끼줄로 묶어 세웠다. 훗날 유선방송이 보급되었을 때 쥐엄나무에 거미줄 모양의 안테나를 세웠고, 동네의 자체 방송이 개시되었을 때에는 서쪽 쥐엄나무 꼭대기에 확성기를 높이 매달았다.
굳이 쥐엄나무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말랭이에서는 잿무덤부리 쪽의 제4호 국도가 잘 보였다. 우리는 자갈과 흙으로 다져진, 여기저기 움푹움푹 파여 울퉁불퉁한 국도를 통상 신작로라 불렀다. 큰 차량이 지나갈 때에는 우당탕 퉁탕 자갈이 튀어 올랐고, 한여름 장마철에는 웅덩이에 고인 물이 쫘악쫘악 물벼락을 날렸다. 그 도로는 십자거리를 거쳐 부여로, 새다리를 거쳐 논산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버즘나무와 개가죽나무가 높이 서 있는 신작로 건너 마르디 일부와 꾸억산이나 귀신보가 시야에 들어왔다. 잿무덤부리 길가에 집 한 채가 있었다. 어른들이 부여나 논산으로 내왕할 때에는 잿무덤부리 앞에서 버스를 타고 내렸다. 아주 어렸을 때 우리 또래는 잿무덤부리 분묘 펀데기에 모여 어쩌다 한 번씩 지나가는 버스와 트럭 같은 자동차를 구경했다.
우리 또래라면 누구나 아주 신기한 자동차를 언젠가는 꼭 타보고 싶어 했다. 어떤 녀석은 버스가 잠깐 멈춘 사이 뒤쪽에 장착한 스페어타이어를 붙잡고 범퍼에 아슬아슬 발을 디딘 채 매달려 새다리나 십자거리까지 갔다가 거기에서 내린 뒤 터덜터덜 되짚어 걸어왔다. 그런가 하면 어느 별쭝맞은 아이는 버스가 멈추지 않고 줄곧 달리는 바람에 손을 놓으면 떨어져 죽을까 봐 기를 쓰면서 저 멀리 논산까지 매달려 갔다가 되돌아오는 졸경을 치르기도 했다. 죽을 줄 모르고 벌인, 철딱서니 없는 개구쟁이의 모험이었다.
너덧 살 때였다. 나는 (큰)아버지한테 한글과 천자문을 배웠다. 며칠 만에 뚝딱 한글을 깨친 나는 곧바로 한자 공부에 몰입했다. 하늘천(天) 따지(地) 검을현(玄) 누를황(黃) 집우(宇) 집주(宙) 넓을홍(洪) 거칠황(荒)… (큰)아버지는 잣대처럼 생긴 서산대로 책에 있는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짚으면서 그 뜻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벼루에 먹을 갈아 그 글자들을 다문다문 붓으로 썼다. 종이가 귀해 분판 위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여러 한자들을 속속 익혀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버지가 담뱃대 대꼬바리에 불을 붙이고 나서 내게 말했다.
“윤복아, 너는 재주가 참 비상하구나. 총기가 있어. 열심히 공부해서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자고로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느니라. 내가 볼 때 너는 아주 괜찮은 떡잎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할 날이 있을 것이다.”
당신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나를 격려해 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당신과 동네 어른들의 칭찬을 먹고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방과 축문 쓰는 법을 배우던 날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나서 잠시 쉴 때 내가 (큰)아버지에게 직접 여쭤 보았다.
“아버지, 우리 동네는 언제 생겼어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감나무하고 샴(샘)을 보면 수백 년 전에 생긴 건 분명하지. 맨처음 윤구병씨네 선조가 들어와 살았다고 하더라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우리 집 마당에는 윤구병씨네 소유의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몸통이 조금씩 삭아 내리면서 수피(樹皮)에 숭숭 구멍이 나 있는 고목이었다. (큰)아버지가 시루봉 끝자락 감나무 가까운 곳에 오두막집을 짓고 그 언저리를 마당으로 삼은 것이었다. 감나무 언덕 아래에는 정 서방네 밭이 퍼져 있었다.
나는 감나무에서 톡톡 떨어져 마당에 나뒹구는 감꽃을 풀대에 꿰어 바지랑대나 마당가 개복숭아나무 가지에 길다랗게 걸어놓고 꼬들꼬들해질 때까지 잘 말려서 한 톨 한 톨 쏙쏙 빼먹었다. 띠 뿌리든 뭐든 독성 있는 것이 아니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던 허기진 시절이었다. 감꽃은 약간 떫었고 시장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걸 입에 넣고 자근자근 씹으면 간에 기별이 간다고나 할까 어쨌든 쫄쫄 굶는 것보다는 눈곱만큼 나았다.
감꽃이 지고 나면 이번에는 감이 떨어졌다. 감은 콩알만 한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하루 조금씩 굵어졌다. 그건 감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제법 그럴싸한 ‘과일’이었다. 땡감을 구정물통에 며칠 동안 담가 놓고 우려내면 떫은맛이 사라졌다. 위생이니 뭐니 그런 것은 배부른 사람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았다.
태풍이 부는 날에는 감이 더 많이 쏟아졌다. 휘익휘익 비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툭탁툭탁 떨어지는 감. 가을날 소슬바람이 불어올라치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홍시들이 그네 타듯 흐늘흐늘 흔들거렸다. 그때쯤 해서는 동네 아이들이 벌겋게 떨어진 감을 주우러 왔다. 어떤 애들은 감을 떨어뜨리고 말랭이에서 감나무을 향해 돌팔매질을 퍼부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핏대를 올리곤 했다.
우물은 세 군데에 있었다. 저쪽 당산 기슭 대식이네 집 앞, 저 아래 강도현씨네 집 앞, 앞재너머 윤구병씨네 집 앞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향나무가 늘어진, 강씨네 집 앞에 있는 우물이 가장 크고 깊었다. 기미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이었다. 우물가의 빨랫돌이 매끈했고, 확독 또한 반들반들하면서도 우멍하게 닳아 있었다. 어른들은 대개 7월 칠석날 샘을 품어 내부의 이끼를 깨끗이 닦아냈다. 우물 청소가 끝나면 진입로를 닦고 길가의 풀을 깎는 등 동네 안팎을 말끔하게 손질했다. 내가 또 여쭤 보았다.
“그럼 우리는 언제부터 이 동네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어요?”
“우리 가문은 본래 연화에서 살았느니라. 그러다가 가세가 급격히 기우는 바람에 우리 형제가 이 동네로 이사 왔지. 연화에 살 때에는 남부럽지 않은 부자였는데…”
‘우리 형제’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의미했다. 그 어른들의 동기간은 모두 12남매였는데 집안이 결딴날 때 10남매가 잇따라 몰사하고 단 두 분이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었다. 명절에 연화로 성묘 갈 때마다 (큰)아버지가 선대의 유허를 알려 주었다. 연화에는 당신의 4촌 동생, 즉 나의 당숙어른 세 분과 당숙모 한 분이 살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학벌에 비해 학식이 높았고, 가문의 역사와 전통에 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당신은 과거 연화를 떠나올 때 집이다 뭐다 다른 것은 다 포기했으면서도 보첩을 비롯한 수십 권의 고서만큼은 끝까지 큼지막한 고리짝에 챙겨 짊어지고 나섰다. 안방 시렁의 고리짝에는 당신께서 애지중지하는 각종 목판본과 필사본 한적(漢籍)이 가득했다. 시렁 위를 올려다보면서 내가 다시 여쭈었다.
“저 책들은 옛날부터 우리 집에 있었나요?”
“당연하지. 선조님들께서 물려주신 책이란다. 가문의 연원을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 한산이문은 일찍이 한산(지금의 서천군 한산면)에서 발원했다. 시조 호장공(戶長公) 선조님과 6세 가정(稼亭) 선조님과 7세 목은(牧隱) 선조님의 묘소가 그곳에 있고, 후손들이 대대손손 번창하면서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갈 때 그 일파가 공주 탄천에 정착했다. 15세 병사공(兵使公) 자손인 21세 선조님 두 형제분 중 제씨 되시는, 휘(諱) ‘낙(洛)’자 ‘일(一)’자 할아버지께서 큰집으로부터 분가한 이후 또 하나의 새로운 지파가 형성되었다. 27세 (큰)아버지는 그 계보를 잇는 종손이었다. 내가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아버지처럼 분명하게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특히 가정 선조님의 유훈 아지자손백대지친(我之子孫百代至親)과 목은 선조님의 정훈 시예전가충효입신(詩禮傳家忠孝立身)을 잘 명심하거라. 아지자손백대지친이란 ‘내 자손은 백대에 이르도록 친족’이라는 뜻이니 어디를 가든 한산이씨를 만나면 초면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한 가족으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느니라. 항렬을 따져서 ‘구슬 규(珪)’ 자면 대부, ‘구할 구(求)’ 자면 아저씨로 모시는 것은 물론, 너하고 같은 ‘향기 복(馥)’ 자면 나이를 알아본 뒤 즉석에서 형님 아우로 응대하거라. 우리 한산이문에서는 촌수가 가깝거나 멀거나 일가 간에 ‘종씨’란 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도 잘 유념하거라. 시예전가충효입신이란 문자 그대로 ‘시와 예를 대대손손 가문에 전하고 충과 효로써 입신하라’는 뜻이니 시와 예를 중시하고 충과 효를 다하여 훌륭한 인물로 우뚝 서기 바란다.”
나는 그 금과옥조를 가슴 깊이 새겼다. 내가 우리 집으로 마실 오는 동네 어른들에게 거의 매일이다시피 『춘향전(春香傳)』『심청전(沈淸傳)』『흥부전(興夫傳)』『홍길동전(洪吉童傳)』『삼국지(三國志)』『유충열전(劉忠烈傳)』『장국진전(張國振傳)』 같은 소설을 읽어드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단골 마실꾼 중에는 강도현씨도 있었다.
어느 집이나 대가족이 버글거리던 그때, 우리 윗집은 식구가 단출해서 마실꾼들 모이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른 집과 달리 시루봉에서 긁어온 불땀 좋은 솔가루와 삭정이 같은 땔감이 흔한 편이어서 온돌방도 따뜻했다. 나는 가물가물한 등잔불 아래 여러 활자본을 읽었다.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어른들은 나에게 ‘수재’니 ‘천재’니 ‘신동’이니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어른은 ‘우리 동네에 문장 났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또 어떤 어른은 나를 가리켜 ‘애 어른’이라 부르면서 여느 아이들과 달리 조숙하다고 말했다.
한편,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어른들을 입에 올릴 때에는 통상 그 집 자녀의 이름 뒤에 ‘을씬네’를 붙였다. ‘을씬네’는 ‘어르신네’의 줄임말 된발음이었다. 춘삼이 아버지는 ‘춘삼이 을씬네’였고, 복순이 아버지는 ‘복순이 을씬네’였다. 만일 (큰)아버지께서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후사를 두었더라면 당연히 ‘아무개 을씬네’라는 호칭으로 지칭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오랜 세월 자녀를 두지 못했고, 개나 걸이나 남들에게 다 회자되는 ‘아무개 을씬네’라는 호칭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자녀를 두지 못한 그 어른의 비애이자 통한이었다. 당신은 보통 ‘안골양반’이나 ‘안골어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훗날 내가 자라나면서 마지못해 ‘윤복이 을씬네’로 부르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윤복이 을씬네’도 마땅한 호칭은 아니었다. 저 아랫집 본가에 우리 아버지가 또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고로 몇몇 어른들 중에 더러는 ‘윤복이 큰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큰)어머니에 대한 호칭은 당연히 ‘안골댁’ ‘안골 아주머니’ 또는 ‘윤복이 어머니’ ‘윤복이 큰어머니’ 등 여러 명칭들이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통용되었다.
집안의 과거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큰)아버지가 ‘안골양반’ ‘안골어른’으로, (큰)어머니가 ‘안골댁’ ‘안골 아주머니’로 불리는 데에도 뼈아픈 사연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큰)아버지가 말을 타고 가서 맞이한 첫 부인 무안박씨의 친정이 저 논산 땅 노성면 안골이었다.
그런 연유로 ‘안골양반’ ‘안골어른’ ‘안골댁’이라는 택호가 생겨났던 것인데, 명문가 출신의 새댁이었던 그 무안박씨는 아기를 낳던 중 극심한 산고로 목숨을 잃었다. 산모와 신생아가 동시에 숨을 거둔 처절한 참극으로 무안박씨의 제삿날은 음력 3월 스무사흘날이었다.
(큰)아버지는 지금의 (큰)어머니 진주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큰)아버지 내외분에게는 여전히 자손이 없어 그 흔해빠진 ‘아무개 을씬네’ ‘아무개 어머니’라는 호칭을 얻지 못한 터라 종래부터 써오던 무안박씨 시절의 택호를 그대로 승계한 것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앞냇갈 뒷냇갈이 있었다. 냇갈은 우리가 흔히 쓰는, 냇물과 냇둑과 냇가를 통째로 아우르는 말이었다. 앞냇갈은 초촌면 신암리에서 발원하여 우리 동네와 연화 사이로 흐르는 증산천이었고, 뒷냇갈은 정각리 지경고개 감나무골에서 발원하여 십자거리를 거쳐 우리 동네와 마르디 사이로 흐르는 정각천이었다. 두 하천은 새다리에서 만나 석성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앞냇갈은 우리가 멱 감는 곳이었다. 물이 깊지 않고 바닥이 고운 모래밭이어서 물장구치며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모래 바닥에는 돌이나 사금파리 따위가 없어 맨발로 들어가더라도 전혀 찔리거나 다칠 일이 없었다. 물이 얼마나 맑은지 물속에서 이리저리 헤엄치는 붕어 떼와 송사리 떼는 물론이고 밑바닥의 모래알까지 훤히 드러나 보였다. 비단결보다 더 고운 윤슬이 반짝거렸다.
우리는 냇물 가득 채운 고무신에 붕어나 송사리를 잡아 놓았고, 어떤 녀석은 대나무 동가리를 잘라 만든 물총으로 물을 찍찍 쏘아댔다. 배가 고플 때에는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다. 넓고 길게 펼쳐진 둔치에는 보리나 밀이 자랐고, 잔디와 부드러운 잡초들이 뒤섞여 융단처럼 깔린 냇둑에서는 밧줄에 매인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땡볕에 비스듬히 누워 게슴츠레한 눈으로 끄덕끄덕 졸면서 질근질근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뒷냇갈은 앞냇갈보다 약간 멀었다. 뒷냇갈로 가려면 앞재너머를 넘어 신작로를 건넌 뒤 논두렁길을 지나야 했다. 뒷냇갈은 앞냇갈에 비해 폭이 좁고 모래도 다소 거칠었다. 우리는 그런 뒷냇갈보다 강도현씨네 집 앞 샘터만 지나면 되는, 동네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앞냇갈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마음껏 놀았다.
강도현씨네 집 앞 우물가에 수랑논이 있었다. 앞냇갈이 여름 놀이터라면 수랑논은 겨울 놀이터였다. 수랑논은 수랑이 있는 논이라는 뜻으로 우리 고장 사람들이 말하는 수랑이란 수렁을 의미했다. 수랑논은 너덧 마지기 정도의 제법 큰 논인데 모내기철 쟁기로 논을 갈고 써레로 써레질을 할 때에는 멍에를 짊어진 소가 수렁으로 푹푹 빠져 애를 먹곤 했다.
수랑논 임자는 벼를 베고 추수를 마친 뒤 꼭 논에 물을 가뒀고, 날마다 우물 쪽에서 끊임없이 흘러드는 물 또한 적지 않은 터라 그 논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었다. 겨울에 논물이 얼면 저절로 빙판이 형성되어 썰매 타고 팽이 치며 놀기에는 그만이었다. 우리는 겨울 내내 그 얼음판에서 놀았고, 수도 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깔깔댔다. 샘가와 잇닿은 수랑논 귀퉁이에는 미나리꽝이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시도 때도 없이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른들 심부름과 학교생활은 기본이고 농번기에는 논밭에 나가 부모님을 도와 드렸다. 나는 낫으로 보리를 베고 호미로 콩밭을 매기도 했다. 가끔은 지게질을 했고, 겨울에는 시루봉에서 땔나무를 해가지고 집으로 가져왔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원증산 4-H구락부’ 서기를 맡고 있던 나는 부여군 4-H구락부를 통해 보급되던 은행나무 묘목 두 그루를 사서 한 그루는 마당가에 심고 또 한 그루는 부엌모퉁이와 뒷간 사이의 골담초 언덕에 심었다. 은행나무 두 그루 값은 그때 돈으로 5원이었다. 훗날 웬만큼 성목이 되었을 때 학비에 보태려고 마당가의 나무 한 그루를 논산의 어느 조경회사에 팔았다.
우리 집은 아주 곤궁했다. 농토라고는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농촌에서 농토를 갖지 못했다면 마땅히 소작농 아니면 머슴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소작농도 머슴살이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처지에 있었다. 농사일이나 막노동에 서툴기 때문이었다.
(큰)아버지의 사전에는 아예 품앗이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논밭을 소유하고 있어야 다른 농민들과 어우리를 하든 품앗이를 할 텐데 농토 자체를 갖지 못했으니 누군가와 품을 주고받을 사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를 할 수도 없었다. 농촌에는 아예 그럴 만한 일거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뭄에 콩 나듯 간혹 품삯을 받을 수 있는 일감이 생기는 실정이었다.
무슨 장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본도 자본이지만 그 방면에는 소질이나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사무직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보통학교 중퇴 학력만으로는 그 어디 발붙일 데가 없었다. 가난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었다.
(큰)아버지 내외분과 본가 부모님은 내 학비를 마련하느라 피를 말리고 뼈를 깎았다. 나는 아주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냈고, 1970년 1월 가까스로 논산대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고는 그해 여름 논산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상경 길에 올라 영등포에 내렸다. 고향을 떠나오던 날 잿무덤부리에서 멧비둘기가 얼마나 슬피 울던지 미상불 내가 객지에서 흘려야 할 피눈물을 예고해 주는 듯했다.
집도 절도 없는, 사돈의 팔촌도 살지 않는 서울은 당초 예상보다 훨씬 잔인했다. 달랑 불알 두 쪽 차고 집을 나선 촌놈이 서울특별시민으로 신분을 바꾸는 데에는 강고한 정신무장이 필요했다. 빼지도 박지도 못할 절박한 상황에서 죽지 않고 최후의 일각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으로, 깡다구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식이었다. 고생이 심하면 심할수록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러면서도 마당의 감나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저간의 경위를 돌아보면 정나미가 확 떨어졌다. 하긴 시루봉 계단식 개간이다 뭐다 해서 실패를 거듭한 윤현중씨가 자포자기에 빠져 임야와 전답 관리를 방치한 채 어디론가 이사 갈 준비를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윤씨는 감나무 따위를 거들떠볼 여력이 없었다.
그때였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호시탐탐 감나무를 노리던 정 서방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기습적으로 감나무를 뿌리째 캐서 없애버렸다. 구실인즉, 자기네 밭에 감나무 그늘이 들어 작물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이었다. 날강도 같은 수작에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궤변이었고, 수령이 높은 노거수를 잘 보호하지는 못할지언정 뿌리까지 캐 없앤 무지막지한 폭거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악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감나무를 무참히 살해한 그는 얼마 안 가 폭삭 망했고, 그 밭을 헐값에 팔아먹은 뒤 도망치듯 대전으로 이사 가자마자 병들어 죽었다. 그 꼴난 밭뙈기를 대대손손 마르고 닳도록 수백 년 지어 먹을 줄 알았겠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자 개꿈일 따름이었다. 그는 어리석고 멍청한 천하의 바보 천치 머저리일 뿐이었다.
객지로 나온 이후 나는 원증산을 종종 내왕했다. 그곳에는 우리 4형제 중 둘째, 즉 내 바로 밑의 차복 아우와 계복 막내아우가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착하고 순박했다. 새로 지은 2층집에서 남부럽지 않을 만큼 야무지게 살던 두 아우는 몇 해 전 돌연 빚구덩이에 빠져 어느 날 갑자기 파산했다. 전연 예기치 못한,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나는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미상불 사기를 당했든지 아니면 부채가 과도했든지 분명 무슨 원인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 경위를 꼬치꼬치 캐물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그 원인을 밝혀본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우들의 파탄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자 시위 떠난 화살이었다. 아우들이 자발적으로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내가 괜히 수사관처럼 자초지종을 파헤칠 경우 도리어 그들의 아픈 상처를 박박 후비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아우들이 무척 딱했다. 그들은 말 못할 모진 풍파를 겪은 뒤 2층 집과 먼젓번에 살던 집터 등 모든 토지를 외지인에게 몽땅 넘겨주고 맨손으로 빠져나와 잠시 말랭이 남의 빈집에 들어가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이라기에는 그 충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성실한 아우들이 어쩌다 이렇게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는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차피 인생이 남가일몽이라지만, 나는 아우들의 처절한 낭패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호인 중의 호인인 아우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곤경이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그동안 사랑하는 아우들이 헤쳐 나온, 차마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파란과 신산고초를 생각할라치면 앞이 캄캄해지면서 뼈마디가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아우들의 정신력은 매우 강인했다. 그들은 그 어마어마한 환난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굳건히 버티는 가운데 육신의 건강까지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날품을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들도 다 알다시피 손상이 너무 커서 재산상 원상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막막했다. 간혹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면 낯이 뜨거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차복 아우는 연전에 제수와 사별까지 했다. 하지만 장성한 조카 형제는 당진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가솔들과 더불어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 반면 계복 아우는 무슨 까닭에선지 결혼을 외면한 채 비혼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몹시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아무리 형제간이라 해도 나로서는 그의 인생에 관해 섣불리 따따부따 왈가왈부할 수가 없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내가 객지로 나온 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동안 원증산은 상전이 벽해 되듯 대폭 변모했다. 특히 신작로와 인접한, ‘원증산 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동네 입구 도로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 버즘나무와 개가죽나무가 있던 신작로 옆의 논을 메우고 경화궁가든이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시루봉 끝자락에서부터 질빵너머와 광대골 어귀는 물론 사기장골에 이르기까지 각종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신작로를 따라 중국 음식점, 노인복지센터, 공장, 중장비 검사장, 모텔, 뷔페식당, 요양원, 주유소가 들어와 있었다.
윤현중씨네가 살던 집터는 폐허나 다름없었고, 말랭이 쥐엄나무는 두 그루 모두 시름시름 앓다가 고사해서 흔적조차 찾을 길 없이 사라졌다. 우리가 신나게 놀던 놀이터에는 ‘시루뫼정’이라는 정자와 마을회관과 농산물집하장이 들어섰다. 전국의 다른 마을들이 전부 다 그렇듯 우리 원증산도 아주 오래 전부터 저출산 인구 절벽과 노령화에 들어가 놀이터에서 귀염둥이 어린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앞냇갈 뒷냇갈은 냇물이 부쩍 줄어 발목이 찰까말까 할 정도의 작은 개울이랄까 실개천 같은 모양으로 쫄아 있었다. 물가의 돌멩이에 엉겨 붙은 이끼가 거무칙칙하였다. 붕어와 송사리는 찾아볼 수 없었고, 달뿌리풀과 억새와 엉겅퀴와 갖가지 거칠거칠한 잡초들이 심란하게 뒤엉켜 있었다.
동네 안쪽도 크게 달라졌다. 왕년의 초가집은 전부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었고, 여기저기 큼직큼직한 양송이 재배사와 축산업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일찍이 시궁창으로 추락한 정 서방네 집터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이 그들먹하게 쌓여 코를 찌르는 악취가 등천하고 있었다.
헐린 집과 빈 집도 한둘이 아니었다. 집이 헐린 곳은 남새밭 아니면 풀밭으로 변했고, 빈 집은 폐가가 되어 폭삭 찌그러진 채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가구 수도 많이 줄었다. 토박이들이 속속 사망하거나 타지로 떠나는 대신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마을 인심도 그전 같지 않았다.
작년 여름이었다. 다시 원증산을 찾았다. 윗집 집터는 누군가가 왕창 밀어다 붙인 흙무더기로 뒤덮인 채 완전히 땅에 파묻혔고, 내가 부엌모퉁이에 심었던 은행나무만 거목으로 자라 흙무더기 경계 지점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울창한 가지마다 은행 열매가 포도 알처럼 다글다글 맺혀 있었고, 저 밑 수랑논에서부터 도라무텡이를 지나 채종말과 고추골에 이르는 용보들에는 거름을 듬뿍 머금은 벼가 거무룩하게 자라고 있었다.
내가 말랭이에 서서 동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 시루봉 정상 쪽으로부터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온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허공을 박차고 하늘 높이 치솟는 듯 하더니 은행나무 꼭대기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만감이 뒤죽박죽으로 교차하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꾀꼴 꾀꼴 꾀꾀꼴 꾀꼴 큰 소리로 무정한 노래를 불렀다. 때마침 당산 쪽에서는 산비둘기가 울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게 마련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우들이 경천동지할 대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를 빌고 또 빌었다. 시루메, 즉 원증산은 몽매에도 잊지 못할 영원한 내 고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