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입학하여 하숙집에서 만난 네 친구. 30대가 되어 한 사람은 자살, 40대에 한 사람은 배신(동료이자 친구의 남편을 감옥에 넣고 교직을 차지함), 한 사람은 배신을 당하여 가족이 고통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처럼 이들은 이미 자신의 과거로부터 인생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화자만은 넷이 친구였던 과거에 머물러 살고 싶어 한다. 화자를 제외한 셋은 자살하거나 원수가 되어 서로 간에 섞일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나는 자살한 친구의 추모식에 두 사람을 초대한다. 그렇게 하여 죽은 자에 대해서는 영혼을 불러내고, 원수가 된 두 사람은 화해시켜, 넷 사이의 좋았던 옛날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헛된 꿈을 꾼다.
계속해서 변전하는 인생의 여정을 만들어가지 못한 주인공의 상태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깜깜한 터널이라는 말로 형상화되어 있다. 터널을 지나는 과정은 사라지고 단지 터널의 이쪽과 저쪽만 있을 때, 이쪽과 저쪽은 구분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과거 속에서 자신의 현재를 본다. 그것을 겹기억이라고 부르며, 다른 친구들도 그럴까 하지만 아니올시다다. 그는 홀로 박제되어 있는 과거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C’est la vie인가.
비판적 관점:
작품구성에서 시간흐름의 과도한 재배치는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고 본다. 굳이 이렇게 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사슴벌레식 문답 = '든' 이라는 조사의 과도한 부각 또한, 왜 굳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외 숱한 부분이 설명이 부족한 상태로 넘어가는데, 이렇게 써도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화자가 1년 반동안 뭘 했길래 환관 상궁인지, 30쪽 경애가 범했다는 과오가 뭔지, 등등
참고사항: 80년대 학생운동권은 서울대 법대 82학번 김영환이 1986년에 작성배포한 '강철서신'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 때 이른바 주체사상파가 전면에 부상한다.
'강철서신'에서 '강철'은 1930년대 소련의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에서 따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학생들은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의 혁명이론에 심취해 있었으며, 레닌주의의 철학을 형상화한 동 작가의 작품명을 이용하여 혁명이론을 갈구하던 학생들의 심정에 호소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작품에서 '정원'이 자살한 37세가 된 해가 김영환이 주도했던 민족민주혁명당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던 1999년 - 2000년 전후였다는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작품에서 정원이 사슴벌레식 문답놀이를 할 때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정원이 이러한 과정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1999년말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조직의 핵심멤버가 체포되었는데, 이 때 김영환은 수사당국과 적극 협조하여 공소유예를 받았으며, (김영환은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지도부와 만났었다), 북한을 방문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진(사실은 하지 않은) 하영옥은 8년형을 선고받고 실형을 살고 나왔다. 작품에서 부영의 남편 두진의 이야기와 오버랩된다.
작가는 뭔가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난해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첫댓글 비판적 관점 모두 공감합니다.
가독성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작가가 얻고 싶었던 게 무엇일까요.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타산지석으로 보완하고, 장점은 내 것으로 가져오시면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슴프레하게 느껴졌던 시대적 배경을 참고사항으로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쩌면 숨겨진 뒷 이야기의 무게 때문에 더욱 드러내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아직 끝나지 않은 논의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