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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DHAMMACAKKAPP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행복한 숲
제2장
미얀마력 1324년(서력1962년) 따딩윳(Thadingyut)1의 여섯 번째 우안거 때 설하시다.
우리는 지난 달 초에 이 법문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Dve 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비구들이여, 수행자가 따라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나니.”
그러면 수행자는 왜 이러한 것을 따라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수행자의 주된 목적이 탐욕이나 성냄과 같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두 극단에 빠져서는 성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두 극단은 탐욕과 성냄을 더욱더 키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두 극단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욕망의 대상인 감각 대상을 좋아하는 것,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는 세속 사람들의 습관으로 저급하고 속된 것이며, 범부들이 탐닉하는 것이고, 성자들이 추구하지 않는 것이며 품위 없고 청정하지 못해서 우리가 찾는 참된 이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하나의 극단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섯 가지, 욕망의 감각대상이 있습니다. 즉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이라는 다섯 가지 욕망의 대상인 감각 대상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은 생명이 있든 없든 모든 물질적 대상을 즐깁니다.
시각적으로 즐거운 대상[色]을 좋아하거나 즐기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의 감각대상은, 단순히 빛이나 색깔이라는 기본 요소가 눈에 닿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 여자, 혹은 보는 것의 근원이나 원천의 형태인 대상 전체를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소리, 냄새, 감촉과 관련해서도, 남자든 여자든 혹은 다른 물질적 대상이든, 모든 요소가 감각 대상이 됩니다. 맛의 경우, 다양한 음식이나 맛있는 과일뿐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고 차려놓는 남자, 여자, 사람들도 감각 대상입니다.
즐거운 소리를 듣거나 감미롭고 향기로운 냄새를 맡거나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호화롭고 편안한 침대에 눕거나,
이성(異性)과 신체적 접촉을 가지는 것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1.감각적만족은 저속하다
감각적 쾌락을 기뻐하고 즐기는 것은 속된 습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즐김으로써 더욱 더 많은 탐욕이 일어나고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차츰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즐기는 것을 원치 않게 되고 자기만 누리겠다는 자만심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복을 나누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을 시기, 질투하고 부정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맞서는 사람에겐 악의가 생기고, 성공과 풍족함으로 우쭐해져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동을 하며 파렴치하고 무모해져서 악행도 쉽게 저지릅니다. 이처럼 나의 행복과 번영이라는 어리석음(moha)에 속아 넘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 안에 영혼인 아따(atta)가 있다는 사견(邪見)에 빠져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결과로 생긴 과보의 업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좋아하는 데서 비롯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낮고 천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동물이나 아귀 등과 같은 저열한 중생들의 습관입니다. 존재의 상층에 있는 비구와 사미는 낮은 세계의 중생처럼 속되고 원초적인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출가자의 본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각적 쾌락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사람들은 쾌락이 커질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권력자와 부자들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데 몰두했습니다. 감각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폭력적인 정복사업을 벌였습니다.
현대에도 이와 같은 정복사업은 여전하지만, 권력자와 부자들만이 감각적 쾌락을 찾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세속의 소유물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열중합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 친구를 찾고 성적인 만족을 추구하려는 본능이 일어납니다. 부처님 법을 모르는 세속의 범부들은 감각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2.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붓다가 출현하기 전에도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감각적 쾌락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쾌락은 지금 이 생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내생의 지복을 기다리며 즐거움을 누릴 귀중한 현재의 순간을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을 완벽하게 누릴 시간은 바로 이 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으로서, 디가 니까야, <계온품(戒蘊品)〉의「범망경(梵網經 Brahmājala Sutta)」(D1)에서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61가지 사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세속 사람들이 열중하는 문제이지 수행자와 비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비구에게 있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비난했던 세속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비구가 세속의 번잡스러움이나 이성(異性)의 유혹에 교란 받지 않고 출세간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매우 공경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이 아니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필요한 것까지도 희생해가면서 수행자들에게 제일 좋은 음식과 가사를 바칩니다. 비구가 사람들의 보시로 생활하면서 재가자와 똑같이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매우 부적절 합니다.
더구나 비구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세상을 버립니다. 만약 비구가 재가자처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고귀한 이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자는 즐거운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3. 저속한 수행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일과 생계수단을 찾는 데 몰두하는 범부입니다. 이것을 뛰어 넘어 법을 통찰하고 출세간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들만이 범부중생들의 주요 관심사인 세속적인 쾌락에 탐닉하지 않습니다.
4. 성자가 행할 바가 아니다
세속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성자(ariya)가 행할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위사까2, 아나따삔디까3, 천인들의 왕인 제석천(帝釋天)의 경우와 같이 이미 성인(聖人)의 첫 단계인 수다원을 성취하고도 왜 감각적 쾌락을 추구했는가를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다원의 상태에서는 아직 탐욕과 애욕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관능적 쾌락을 즐기는 즐거움의 인식(樂想 sukha-saññā) 기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이를 발정 난 코끼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똥으로 가득 찬 더러운 곳으로 몸을 피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품위 없고 청정하지 못한, 그래서 오염되고 열등한 습관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5.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행동은 자신의 행복과 안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보통사람의 관점에서는 돈을 벌고 재산을 축적하고, 가솔(家率)과 친지들로 이루어진 가정생활을 꾸리는 것, 요컨대 이 세상에서는, 성공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 자신의 행복을 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세속의 성공과 번영은 실제로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이익은 늙음, 질병,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데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계· 정· 혜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 계· 정· 혜만을 자신의 진정한 이익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 늙음, 질병, 죽음과 같은 괴로움을 정복할 수 없으며 부적절한 성관계와 같은 도덕적 계율을 어기게 됩니다.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남을 속여서 세속의 이득을 구하는 것도 도덕적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몸으로 하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감각적 쾌락을 즐기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과 혜의 계발을 가로막아 모든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도덕적 계율을 어기면 사악처(四惡處)로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지 않고 계(戒)만 잘 지켜서는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행복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늙음, 질병, 죽음과 같은 갖가지 괴로움이 따르는 존재로 윤회를 합니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는 열반을 얻겠다는 원을 세우고 세속을 떠난 수행자와 비구는 계· 정· 혜를 계발하는 데 장애가 되는 감각적 쾌락의 추구에 조금도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요약하면,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저속한 것으로, 청정하지 못하고 고귀하지 못하며 낮은 지성을 가진 범부들의 주요 관심사로, 성자들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계· 정· 혜를 닦는데 방해가 되며 불사(不死)의 경지인 열반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이익에 반하는 것입니다.
6. 재가자는 감각적 쾌락에 빠져도 되는가
경전에서는, ‘출가자는 감각적 쾌락에 빠져서는 안된다.’라고만 간단히 설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속적인 환경에 살고 있는 일반 재가자는 감각적 쾌락을 마음껏 즐겨도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범부들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금지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법을 실현하겠다고 발심한 재가자는 수행을 하는 데 필요한 만큼은 이런 쾌락을 지혜롭게 피해야 합니다. 오계(五戒)를 지키면 육체적인 욕망으로 인한 죄를 짓지 않습니다. 또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남을 속여서 물건을 소유해서도 안 됩니다.
7. 네 가지 세속의 즐거움에 빠지는 것
부처님께서는 디가 니까야의 〈당학품(當學品)〉,「정신경(淨信經 Pāsādika Sutta)」에서 네 가지 세속적 즐거움에 빠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쭌다(Sunda)여, 이 세상에는 소, 돼지, 닭, 물고기 같은 동물들을 도살하여 부를 챙기려는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도둑질, 약탈, 강도질이 두 번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남을 속여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네 번째 즐거움은 이들 세 가지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세속적 부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4
경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비구들은 이러한 즐거움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합니다. 팔계(八戒)와 십계(十戒)를 지키는 재가자는 성적인 금욕을 지키고, 정오 이후에는 음식을 먹거나 춤추고 노래하는 것과 같은 모든 감각적 쾌락을 피해야 합니다.
재가자라도 수행에 매진하고 있을 때에는, 출가한 비구처럼 모든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고, 계· 정· 혜를 닦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재가자라 할지라도 세속적 즐거움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극단의 한 형태, 즉 세속적 즐거움에 빠지는 것에 관해서는 이 정도 설명하면 충분하겠습니다.
8. 고행고행을 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극단으로서 자기학대와 고통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고행은 성자의 수행이 아니기 때문에
품위가 없고 청정하지 못하며, 행복과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이 극단적인 수행도 역시 피해야 합니다.
오직 고통만을 주는 고행은, 호화로운 생활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의 원인이 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수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는 음식이나 옷과 같은 감각대상을 거부하는 금욕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고행만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상태인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9. 고행의 방법
올바른 비구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더위와 추위, 벌레, 파리, 모기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사와 옷을 걸칩니다. 하지만 고행자들은 아무런 옷도 입지 않고 다닙니다. 날씨가 추울 때는 물속에 몸을 담구고, 더울 때에는 네 군데의 불이 있는 곳 한 가운데 서서 햇빛에 몸을 노출시킵니다. 그래서 다섯 방향에서 오는 열을 온몸으로 받습니다. 이것을 다섯 겹의 열(熱) 고행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침대를 쓰지 않고 맨땅에 누워서 쉽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한 장의 옷만 덮은 가시바늘 위에 눕습니다. 며칠 동안 앉은 자세로 있는가 하면 눕거나 앉지 않고 선자세로 지내기도 합니다.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 물구나무자세로 서 있는 것 등도 고행에 속합니다.
정상적인 비구의 경우, 음식을 섭취해서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 일상적인 습관으로 되어 있지만, 일부 자학행위자들은 음식과 물을 완전히 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짜를 번갈아 가며 식사를 하기도 하고 이틀에 한 번씩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고행자들은 4일, 5일, 6일, 7일씩 단식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마지막에 가서 15일 동안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량을 한 줌 분량까지 줄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오직 푸른 채소와 풀, 혹은 소똥으로 연명하기도 합니다.
앙굿따라 니가야, <일집(一集)〉,「로마함싸 경(Lomahamsa Sutta)」의 주석서에 따르면 보살도 91겁 전인 전생에 이러한 수행법을 따랐다고 합니다. 죽음이 다가올 때, 비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표상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그릇된 수행을 버렸고, 그 결과 천상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한 모든 자학행위는 고행에 속합니다. 이것은 붓다가 출현하기 오래 전부터 나형외도(裸形外道)인 니간타 나따뿌따 교파가 행해오던 수행법입니다.
오늘날의 자이나교도는 이 나형외도 니간타 나따뿌따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의 고행법은 그 당시에 대중들의 호평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보살이 고행을 버리고 일상의 음식을 다시 들기 시작하자, 친밀했던 동료들은 보살이 바른 수행, 바른 노력을 포기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고 보살을 떠났던 것입니다.
10. 니간타 경전
니간다(Nigan.d.a) 경전에 따르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억제(saṃvara) - 이 방법은 몸으로 들어오는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과 같은 감각 대상들을 억제하는 것으로, 이러한 감각대상들이 아뜨만(atta)5과 결합하여 새로운 업을 만들고 이 업이 새로운 생(존재)을 만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고통스러운 고행을 닦아서 과거 업의 과보를 소멸시킴 - 자신을 모질게 학대함으로써 과거 불선업의 죄업을 속죄하고 구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믿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행을 하고 있는 나체 수행자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대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과거생에 지은 불선업을 소멸시킨다고 말하지만, 과거생에 진짜로 불선업을 지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가?”
그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과거에 얼마나 많은 불선업을 지었는지, 그리고 고행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불선업을 속죄했는지, 그리고 남은 불선업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모두 부정적인 것으로,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들에게, 과거에 얼마나 많은 불선업을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또 그 불선업이 얼마나 소멸되었는지도 모르면서 고행을 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어서 지식 향상의 씨앗을 심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더 나아가 고행을 닦아 과거의 불선업을 면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큰 불선업을 짓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은 과거의 불선업을 속죄할 의도로 고행을 한 것이 아니라, 높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이러한 고행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6년간의 치열한 노력 끝에, 극단적인 수행은 지혜나 통찰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고행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11. 육체적인 고통
고행은 오직 육체적인 고통만을 안겨줄 따름이지만 나체 수행자들은 이를 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무애해도6 주석서(제 2권. p.215)에 설명되어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이 수행법을, 보통 사람들이 하는 수행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범부들이 하는 저속하고 통속적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방법이 고통스럽고, 청정하지 못하며, 품위 없는 것으로, 성자들이 행하지 않는다고만 간략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2. 이익 없는 노력
극단적인 고행은 우리가 찾는 진정한 이익과도 관련이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계·정·혜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진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고행은 이익 없는 노력이며 오직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줄 뿐, 지나치게 열중하면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정등각자인 붓다께서 출현하기 전, 중부국(Majjhima-desa)7인 인도 전역에서는 고행이야 말로, 과거의 나쁜 악업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수행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다섯 수행자들도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극단적인 수행은 청정하지 못하고 품위가 없으며, 오직 고통만 주기 때문에 성자가 가는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행은 수행자가 찾고자 하는 어떤 이익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출가한 수행자들은 이러한 고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충고하셨습니다.
“오직 고행만이 높은 지혜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고, 다섯 수행자들도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극단적인 고행의 무익함에 대해 분명하게 선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견해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한 팔정도(八正道)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행은 오직 육체적인 고통만을 안겨주는 무익한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공개적으로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첫 번째 극단적인 면, 즉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마음과 몸의 고삐를 풀어놓아 너무 느슨하거나 유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집중 수행이나 통찰지혜 수행을 통해 마음이 제어되지 않으면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일부 스승들은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고삐를 풀게 하는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마음은 끊임없는 보호가 필요합니다.
비록 수행을 해서 지속적으로 제어한다고 해도 마음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그래서 수행으로 보호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반드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에 젖어들고 맙니다.
두 번째 극단적인 면은, 음식이나 옷과 같은 일상의 필수품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강직하여 일상적인 편안함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역시 피해야 합니다.
13. 고행에 대한 잘못된 해석
일부 스승들은 고행이 무엇인지 대해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해석을 내립니다. 그들은 수행을 위한 열정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고행이라고 합니다. 이 견해는, 집중과 통찰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과 팔다리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열성을 다하여 그리고 흔들림 없이 노력하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내 피부와 근육과 뼈만 남고 살과 피는 모두 말라버려라. 내가 이루고자 하는 도과를 얻기 전까지는 결코 정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조언하신 목적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확고부동한 결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과 통찰지혜를 얻는 수행을 위해서, 열과 성을 다하여 확고부동한 노력을 하는 것을 고행의 한 형태로 잘못 아는 것은 곤란합니다. 수행은 논외로 하더라도 계율을 지키는데서 오는 육체적 고통마저도 고행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젊은 사람들과 사미들은 8계를 지키는 동안, 저녁때면 심하게 배가 고프지만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합니다. 이는 고행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살생계(不殺生戒)가 일종의 희생입니다. 그들은 계율을 지킨 결과로 불이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계율을 지키는 선업을 짓기 때문에 고행의 한 형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찌마 니까야,〈근본오십품(根本五拾品)〉의「득법대경(得法大經 Mahādhamma Samadana Sutta)」(M46)에서, 현재의 그런 희생은 미래에 유익한 과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살생하지 않는 것 때문에 약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살생하지 않겠다는) 바른 견해(正見)를 가졌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스스로 원해서 고통을 감내하며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목숨이 다하고 나면 그들은 더 높은 천상 세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십선업(十善業)8는 현재의 고통을 통하여 내생에 유익한 과보를 가져오는 좋은 수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 정· 혜를 계발하는 수행은 유익하며, 고행을 탐닉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중도의 길입니다.
그와 반대로 계·정·혜를 계발하지 않고 육체적 고통만 안겨주는 수행은 고행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14. 느낌을 주시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견해
즐거운 느낌(樂受)9을 지켜보는 것은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것으로 첫 번째 극단이고, 괴로운 느낌(苦受)을 주시하는 것은 고행으로 두 번째 극단이라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두 가지 느낌을 주시해서는 안 되고 오직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만을 주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합리적이지 못한 잘못된 생각으로 어떠한 경전에도 그 근거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대념처경」에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다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다른 경전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든, 오취온(五取蘊) 안에 포함되면 모두 알아차릴 수행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5. 어떤 스승의 견해
어떤 재가 수행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행을 하는 중에 만약 어떤 동작을 취하고 나서 팔다리가 피곤하거나 고통스럽거나 마비되거나 열이 나고 불쾌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그 즉시 자세를 바꿔야 한다. 만약 불쾌한 느낌이 있거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계속 한다면 실제로는 고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편안함을 고려하여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무분별한 말입니다. 집중수련이나 통찰지혜수행에 있어서, 인내와 자기절제(khanti sam.vara)는 아주 중요하며 수행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몸의 불편함을 끈기 있게 견디어 내야 하나로 집중된 마음 (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10, 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세를 끊임없이 바꾸면 집중을 계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수행을 진지하게 해본 사람들이면 누구나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즐겁지 못한 몸의 불편은 강한 인내로 버텨야 합니다.
이런 극기는 단순히 고통이 목적이 아니므로 고행이 아니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 정· 혜를 증장하기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능하다면, 자세를 바꿔 수행을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고 앉아, 가장 고귀한 아라한과를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찌마 니까야,〈근본오십품(根本五拾品)〉「우각림대경(牛角林大經 Maha Gosinga Sutta)」(M3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는 번뇌(漏 āsava)11가 제거되기 전까지 가부좌의 자세를 풀지 않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심을 하고 수행에 임한다. 그러한 비구는 사라나무 숲속의 고싱가 사원을 아름답게 빛내는 숲속거처의 귀중한 보물이다.”
그러므로 괴로운 느낌을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을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또 수행자는 자세를 바꾸지 않아서 일어나는 고통을 통해서 집중과 통찰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고행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의 바른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입니다.
요점: 이 가르침에서 비구는 추위, 더위, 배고픔, 목마름, 벌레나 파충류의 공격, 바람과 태양의 영향, 자책과 학대, 불편한 고통, 격렬하고 예리하고, 참을 수 없으며, 불쾌하고, 지루하고, 그리고 두려운(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통증 등을 신중히 숙고한 후에 강인하게 인내합니다. 더위, 추위, 배고픔, 목마름, 벌레들의 공격, 창피함, 몸의 불편함을 끈기 있게 참아서 감내함으로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는 번뇌, 오염(不淨), 고통, 불길 등이 사라지는 유익한 결과를 얻습니다.
세존께서는 마찌마 니까야,「일체루경(一切漏經 Sabbāsava Sutta)」(M2)12에서, 자신의 목숨이 끊어질 만큼 심한 통증과 고통도 견뎌야 한다고 충고하셨음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경의 주석서에는 로마싸 나가 장로가 1, 2월 보름 경, 야외에 앉아 눈발에 뒤덮여 있으면서도 수행을 계속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장로는 의도적으로 로깐따리타 지옥13의 극심한 추위를 생각하여 몸을 둘러싸고 있는 추위를 이겨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인내한다고 한 사례는 많은 경전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팔다리의 뻣뻣함, 뜨거운 감각 등과 같이 비교적 가벼운 통증은 원래의 수행의 자세를 바꾸지 않고 인내심으로 참아야 합니다. 인욕과 절제, 집중, 통찰을 증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설령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끈기 있는 노력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불편한 통증과 감각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지면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 집중, 통찰에 방해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그리고 살며시 몸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정·혜의 증장과 관련이 없이 오직 고통만을 위해 닦는 수행법은 분명히 고행의 일종입니다. 반면에 계·정·혜를 계발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은 비록 아프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고행이 아닙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중도, 즉 팔정도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극단적인 수행 즉,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너무 느슨하고, 고행은 너무 강력하므로 모두 피하고, 중도를 따름으로써 부처의 자리에 이르고 깨달음을 성취하셨습니다.
16. 중도(中道), 그 실천과 이익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a patipada. Tathagatena abhisambuddha - Cakkhukarani, Ñãnakarani, upasamaya, abhinnaya, Sambodhaya, Nibbãnaya Samvattati.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적인 수행을 피함으로써 혜안[眼]과 지혜[智]가 생기고 고요함(upasama), 최상의 지혜(abhiññā)와 바른 깨달음(sambodha)14과 열반(nibbāna)으로 인도하는 중도(majjhima-patipada)를 얻었다.”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두 극단적인 수행을 버리고 몸소 중도를 실천하셔서 혜안과 고요함을 얻으셨음을 다섯 비구들이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보살은 16살부터 29살 때까지 13년 동안 극단적인 감각적인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29살에 출가해서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6년 간 극단적인 고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6년 동안 혹독한 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어떤 지혜도 얻지 못했으며, 결국 극단적인 고행은 잘못된 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고행을 버리고 체력을 강화해서 호흡 수행을 통한 선정을 얻기 위해서 평상시대로 음식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식을 다시 들기로 한 것은 스스로 중도의 한 부분인 호흡 명상수행을 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신중하게 고려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알아차리면서 음식을 적당히 먹었기 때문에 이것을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음식을 거부하는 고통이 없기 때문에 고행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 극단적인 수행과는 관련이 없는 중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식사를 하여 체력을 회복하면서, 보살은 수행에 몰입하여 네 가지의 선정을 얻었습니다. 이 네 가지 선정은 성자의 길에 이르는 전조(前兆), 즉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이것이 중도인 8정도의 바른 집중(正定)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바른 집중을 근거로 완전히 집중된 마음을 얻고 통찰지혜와 정견(正見)을 계발하셨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성스러운 길, 즉 팔정도를 스스로 찾아내셨습니다. 고행을 하거나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중도를 실천하여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극단적인 수행을 피함으로써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를 얻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감각적 쾌락과 자기학대라는 두 잘못된 수행을 버림으로써,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엄격하지도 않은, 중도의 지혜를 를 얻은 것입니다.
두 극단적인 길은 잘못된 것으로,
피해야 한다.
중도가 바른 길이다.
17. 두 극단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가지 감각 대상의 경우, 계율에 어긋나지도 않고, 법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 이런 대상들은 향유해도 무방합니다. 먹을 때가 되면 먹고, 필요할 때 옷을 입으면, 편안하게 법을 닦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므로, 극단적 고행인 금욕을 피하는 것입니다.
음식, 옷, 약, 거처와 같은 필수품을 사용할 때에는, 사려 깊은 숙고[분명한 앎]를 하거나 집중 수련[사마타]을 하거나 혹은 통찰지혜 수행[위빠사나]을 해야 합니다. 다섯 가지 감각대상이 부딪칠 때마다15, 통찰지혜 수행의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숙고하는 것을 몸에 익히거나 혹은 이 감각대상을 통찰지혜수행의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필수적인 음식과 옷을 사용하는 것이 즐거움이나 쾌락으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감각적 쾌락이라는 극단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두 극단적인 수행을 피함으로써 나는 중도를 얻었다.”
18. 중도는 소화제와 같다
사려 깊은 숙고와 통찰지혜 수행은 알아차림과 집중, 지혜를 계발하고 팔정도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것은 소화 안 되는 음식을 먹은 후 소화제를 복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와 같습니다. 중병을 앓고 난 회복기 환자는 섭생에 주의해야 하는데도 해롭고 부적절한 음식을 먹었다면, 자기가 먹은 음식의 나쁜 영향을 중화할 수 있는 소화제를 먹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환자는 먹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고 또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영향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기가 사용하는 물품을 숙고하거나 수행의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여기에 빠져 감각적 즐거움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보고 듣고 감촉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면, 보거나 들어서 생긴 탐욕과 성냄이 더 커지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음식, 옷, 약, 거처 등 네 가지 필수품과 같이 할 때마다, 그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으면, 이에 따르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수행자는 사려 깊은 숙고와 집중 수련, 통찰지혜 수행 등을 하면서 편리한 생활필수품을 사용할 수 있고 또 여기에서 기쁨이나 쾌락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두 극단을 피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을 때도 중도 수행을 합니다.
중도의 수행을 하면, 육문(六門)16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고, 이로서 진정한 대상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되어, 혜안이 생기고, 통찰지혜가 열려, 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중도를 실천하여 얻는 이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혜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다.”
19. 혜안[眼]과 지혜[智]는 어떻게 계발 되는가
누구든 중도인, 팔정도를 계발하면 혜안과 지혜가 생깁니다. 여기서 혜안과 지혜는 같은 뜻입니다. 법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법을 보는 눈(眼), 즉 지혜가 생깁니다.
혜안과 지혜는 감각적 쾌락에 젖거나 자기를 학대해서는 생겨날 수 없고 오직 팔정도를 닦아야만 일어납니다. 지혜와 혜안을 계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명상수행은 팔정도를 계발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면 정신(nāma)과 물질(rūpa)17의 자연적 성품을 마치 자기 눈으로 보듯이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정신과 물질 현상은 영원하지 않고[無常], 괴로운 것이고[苦], 실체가 없다는 것[無我]은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가 아니라 몸소 체험함으로써 아주 분명해집니다. 궁극에 가서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루지는 행(行, saṅkhāra)18 을 멈추고 윤회의 괴로움이 종식되는 열반을 체험합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20. 혜안과 지혜를 얻는 방법
수행자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에 매진하면 법에 대한 혜안과 지혜가 아주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수행 초기단계에서는 아무리 수행자가 매 순간, 배의 일어남과 꺼짐, 앉음, 닿음, 봄, 들음을 하면서 일어난 현상을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아직 집중의 힘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에 초월지(超越智)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수행자의 마음은 고요해지고 집중의 힘은 커집니다. 실제로 마음이 다른 감각 대상으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마음은 선택된 수행 대상, 즉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는 곳에 고정됩니다. 그때 알아차림의 대상인 몸(rūpa)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인 마음(nāma)의 구별이 분명해집니다.
실제로 수행자가 처음 수행을 시작하면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물질적 현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 현상을 거의 구별하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이런 물질과 정신적인 현상이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점차 집중력이 강화되면 몸과 마음을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즉, 정신과 물질이 섞이지 않고 분리되어 보입니다.
그때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만 있지, 그 안에 ‘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으며 오직 물질적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라는, 두 가지 요소만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 지혜는 그냥 생각으로 유추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직접 손에 쥔 것처럼 확실합니다. 이것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눈(眼)이라고 표현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집중의 힘인 사마디(samādhi)가 커지면 그에 따라 바른 이해가 생깁니다. 눈이 있기 때문에 봄이 있고, 귀가 있기 때문에 들음이 있고, 구부리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구부림이 있고, 뻗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뻗음이 있고, 움직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좋아함이 있고, 좋아함이 있기 때문에 갈애, 집착이 있습니다. 이 집착은 선하거나 불선한 과보를 낳는 행동을 일으킨다는 것을 아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바르게 이해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점차 집중력이 커지면 알아차림의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함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자기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생멸하는 현상을 보고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고 괴로움이며, 이런 현상 안에 나라고 할 만한 어떤 실체도 없기 때문에 이들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도 없는, 오직 조건 지어진 현상만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또렷이 알게 됩니다.
수행자가 이처럼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지혜를 완벽하게 계발하면 성스러운 도를 아는 지혜가 생겨서 정신과 물질의 모든 행(行)과 모든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실현합니다. 그래서 물질과 정신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자는 대념처경(大念處經)에 언급된 것처럼, 열반을 실현하는 길은 팔정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높은 지혜인 무상, 고, 무아는 아비담마, 논장(論藏)을 배우고, 그 내용을 사유하는 것만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관념적인 무상. 고. 무아가 아니라 통찰지혜 수행을 통한 깨달음만이 소중한 것입니다.
21.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깊어지다
수행을 해서 직접적인 체험을 얻으면 대체로, 시간이 갈수록 지혜가 깊어집니다. 한번은 아난다 존자가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비구니들이 말하기를 그들은 사념처 수행을 하는데, 법에 대한 지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깊어진다고 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동의하며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나중에 아난다가 이 사실을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실제로 그러하다. 만약 어느 비구나 비구니라도 사념처 수행에 머물고 있으면 그들은 이전에 알았던 것보다 더 깊이, 더 확실히 사성제(四聖諦)를 알 수 있다.”
22. 주석서의 설명
주석서에서는, 맨 처음 얻는 지혜19는 네 가지 근본 물질[四大]을 구별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만, 다음에 일어나는 지혜는 파생된 물질20을 구별하는 것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에 대한 지혜가 생기면, 다음으로 숙고에 의해서 정신적 요소에 대한 지혜가 일어납니다. 또 정신과 물질에 대한 지혜가 일어나면 다음은 원인에 대하여 아는 지혜21가 일어납니다.
정신과 물질을 일으키는 원인을 아는 지혜가 일어나면 다음은,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삼법인22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지혜가 일어나면 결국 고귀한 초월지(abhiññā)에 이르게 됩니다. 상윳따 니까야,〈대품(大品)〉근상응(根相應) 32번째 경인「수다원경(Sotãpanna Sutta)」(S.iii.160)에 의하면, 신념처(身念處)수행은 가고, 서고, 앉고, 눕고, 구부리고, 뻗고, 움직이는 등, 물질의 형태를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밀고, 뻗고, 움직이는 등의 특성을 가진 바람의 요소[風大 vāyo-dhātu]에 대한 성품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네 가지 근본 물질인 사대(四大)를 철저히 이해해야만 비로소 수행자는 보거나 듣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로서 눈<眼>, 형상<色>, 귀<耳>, 소리<聲>등과 같은 파생된 요소들의 작용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물질적 형상을 통달하고 나면,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최고의 지혜가 순서를 밟아서 단계적으로 일어납니다.
23. 경전의 정의에 따라 한 단계에서부터 시작
논장을 통해, 정신과 물질 등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해설을 알고 나면, 네 가지 근본 물질이 아니라 파생된 요소를 보는 것으로부터 수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 몸[身, rupa]을 탐구하기 전에 먼저 마음[心, nāma]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정신과 물질은 제쳐두고 12연기에 따른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는 것,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주시하거나 혹은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을 주시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aama-rupa pariccheda n~aan.a)에서부터 시작하는 과정은 느리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생멸의 지혜(udayabhaya n~aan,a)와 소멸의 지혜(bhan*ga n~aan.a)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자신들은 그러한 더 빠른 방법을 선호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논장을 통해 정신과 물질에 대한 정의와 해설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단계에서부터 몸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하면 진정한 위빠사나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가르침에 따르면, 앞 단계의 지혜 없이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학생이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반복해서 외우듯 하는 그런 수행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정의와 해설을 기억하는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최상의 통찰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유명한 수행센터에서, 경전에서 배운 순서대로 한 단계씩 한 단계씩 모든 지혜 계발의 과정을 다 거쳐보려는 시도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nkharupekkha n~aan.a)에 이르고
적응의 지혜(anuloma n~an.a)와
성숙의 지혜(gotrabhu n~aan.a),
도과의 지혜(magga phaala n~aan.a)에 이르렀을 때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것은 위빠사나 지혜가 지름길로 가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입니다.23
「대념처경」에 따라 수행하고 중도인 팔정도를 닦으면「초전법륜경」에 나와 있듯이 혜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순서대로 각각의 지혜를 거치고 나서 깊고 뛰어난 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4. 번뇌를 잠재우다
중도는 번뇌를 잠재우고 고요하게 합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면 번뇌를 잠재웁니다.24 위빠사나의 도는 순간적인 고요함을 가져오지만 성스러운 도는 번뇌의 완전한 소멸을 가져옵니다.
감각적 쾌락에 빠지면 번뇌는 절대 소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번뇌가 더욱 더 커집니다. 한 번 감각적 쾌락의 유혹에 빠지면 계속해서 더 큰 감각적 쾌락을 요구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하나의 감각 대상을 가지면 더욱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납니다. 하나의 갈애는 더 많은 갈애를 유발합니다. 여기에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선진국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의 예를 한번 봐야 합니다. 그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욕망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행동은 번뇌의 소멸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번뇌를 더 키워나갈 뿐입니다.
고행도 번뇌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이 수행법을 닦는 사람들은 극심한 추위와 더위에 몸을 노출시키고 절식을 하면 번뇌가 제거된다는 믿음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수행의 결과, 기운이 없어져서 일시적으로 번뇌가 멈추는 것일 뿐입니다.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질병으로 괴로워하거나, 체력이 쇠퇴해지면 번뇌가 숨어버립니다. 하지만 병이 나아서 일상의 건강과 체력을 회복하면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기를 학대하는 수련이 끝나거나 중단하고 난 후, 활기를 회복하면 예전처럼 번뇌가 일어납니다. 심지어 거친 번뇌를 억누르는 고행을 하는 중에도 섬세하고 미세한 번뇌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편안하게 살고 싶고, 고행의 불편함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이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는 유신견(有身見)25과, ‘어느 누구도 이러한 수행을 할 수 없다.’는 자만심이 생기고, 그리고 ‘이 수행법으로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수행법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생겨납니다.
25. 잘못된 믿음, 계금취견(戒禁取見)
그릇된 수행을 바른 수행이라고 믿는 것이,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계금취(戒禁取)26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계· 정· 혜를 계발하는 팔정도를 벗어나면 모두 그릇된 수행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바른 수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고
도에 벗어나 있으면서,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것이,
바로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다.
육문(六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정신과 물질의 오취온(五取蘊)으로 고성제(苦聖諦)27입니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명상수행을 하는 것은 사성제(四聖諦)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도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사성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다른 수행법을 믿거나 따르는 것이 바로 계금취견(戒禁取見)입니다.
“수행을 하거나 계율을 지킬 필요는 없다. 법문을 잘 듣고 정신과 물질의 성품을 암기해서 알면 된다.”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견해가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에 속하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의견대로라면, 이런 수행법은 계·정·혜의 세 가지 도를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가르침이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사견이라는 것입니다.
수다원은 위빠사나 수행의 바른 지혜를 잘 확립하였기 때문에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 내생에도 수다원은 그러한 그릇된 믿음에 빠질 위험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도의 힘으로 번뇌를 잠재운다는 것입니다.
26. 일시적인 제거
감각대상을 주시하여 무상· 고· 무아로 알아차리면 영원하고, 즐겁고, 실체가 있다고 하는 사견(邪見)으로 인해 생기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청정도론」(Vis.XXⅢ.112)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상호 대칭되기 때문에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일시적으로 번뇌를 제거하게 됩니다.28
이것이, 알아차림이 없을 경우 감각대상에 잠재되어버리는 번뇌를 없애는 방법으로, 위빠사나 통찰지혜의 힘으로 부분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청정도론」에 나오는 이러한 비유를 잘 숙고해야 합니다.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로 단순히 문혜(聞慧)29를 숙고함으로써 위빠사나에 이를 수 있다면, 과연 그렇게 얻어진 위빠사나 통찰지혜로 감각대상에 잠재하는 번뇌를 제거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명확히 알아차릴 대상이 없기 때문에 질문에 답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정신과 물질이 형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수행자에게는 분명히 알아차릴 대상이 있습니다. 동시에 알아차릴 대상에서 벗어난 대상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에 잠재되어 있는 번뇌 중에서 알아차려진 번뇌는 제거할 수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번뇌는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수행자들에게는 이 해답이 쉽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으로써 대상에 잠재된 번뇌를 일시적으로 제거하고 나면 이제 성스러운 도를 통해서만 제거되는 번뇌가 남습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지혜의 단계에 이른 예류자(豫流者)인 수다원은,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 계율에 대한 집착, 그리고 지옥에 떨어질 원인이 되는 온갖 번뇌를 제거하게 됩니다. 일래자(一來者)인 사다함은 거친 번뇌인 탐욕과 악의가 모두 제거됩니다. 불환자(不換者)인 아나함은 미세한 번뇌인 탐욕과 악의에서 벗어나고 아라한(阿羅漢)은 모든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이렇게 위빠사나 도(道)와 성스러운 도(道)는 번뇌를 일시적으로 물리치거나 영원히 제거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중도는 고요함으로 인도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7. 최상의 지혜(ABHIÑÑĀ)가 생기다
중도는 최상의 지혜로 인도합니다. 최상의 지혜(超越智)인 아빈냐나(abhiññāa-n.a)31는 혜안이나 지혜와 유사하지만 영향력이 더 심오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합니다. 사성제는 위빠사나 지혜와 성스러운 도가 일어난 다음에 알게 됩니다. 위빠사나 도가 먼저 계발된 다음에, 사성제를 알 수 있는 위빠사나 지혜(아빈냐나)가 일어납니다. 이 지혜가 결국은 사성제를 알게 합니다. 사실, 실제로 우리의 관심사는 수행과정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고성제(苦聖諦) 또는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정신과 물질, 즉 고성제는 무상. 고. 무아를 알게 합니다. 이렇게 아는 순간에는 갈애와 집착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갈애와 집착에서 벗어납니다. 이를 일러, 실제로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집착(samudaya)을 버린다고 해서, 번뇌의 소멸에 대한 이론적 이해란 의미의 사단현관(捨斷現觀, pahānabhisamāya)31 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매 순간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고, 잘못된 길로 이끄는 무명(無明)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이렇게 무명에서 벗어남으로써 수행자는 업의 형성[行]과 의식[識]의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일시적 소멸의 진리(tadan*ga nirodha saccaa)입니다. 이 일시적인 괴로움의 소멸은, 매 순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지, 이것이 알아차릴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행위에 대해 알아차리는 것은 위빠사나의 도를 계발하는 것인데 바른 견해[正見]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러, 수행에 대한 이론적 이해라는 의미에서 수습현관(修習現觀)이라 하고, 이것은 위빠사나 도의 진리를 스스로 계발하여 알게 됩니다.
이 지혜는 알아차리는 순간을 주시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발하여 얻는 것으로, 숙고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알아차림으로써 고성제(苦聖諦)를 알면, 동시에 나머지 세 가지 진리32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특별한 위빠사나의 지혜로 사성제(四聖諦)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가, 진리에 대한 최상의 지혜(abhiññā)를 낳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중도는 특별히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일어나게 합니다. 위빠사나 지혜가 완전하게 성숙하면 열반이 실현되고, 성스러운 도가 계발됩니다. 그리하여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얻어야 알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를 알게 됩니다. 역시 이러한 이유로, 중도는 최상의 지혜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8. 통찰지혜
중도는 또한 바른 깨달음[正覺]으로 인도합니다. 아빈냐(abhiññā)란 이전에 계발되지 않았던 위빠사나 지혜와 성스러운 도에 대한 초월지, 즉 최상의 지혜를 뜻합니다. 삼보다(sam*bodha)는 통찰지, 즉 바른 깨달음을 말합니다. 큰 장막이나 두꺼운 벽 뒤에 가려져 있는 사물은 이 벽이 산산이 부서지거나 장막이 활짝 열리면 보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것이 뒤덮여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잘된 것으로 아는 무명(avijiā) 때문에, 사성제가 무명에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가, 수행을 통해 팔정도를 계발함으로써, 위빠사나 지혜와 성스러운 도의 지혜를 얻고 명확해집니다. 그렇게 바른 깨달음으로 무명을 꿰뚫어 사성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쾌락에 빠지고 자기를 학대하면, 최상의 지혜나 바른 깨달음이 절대로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29. 열반의 실현
마지막으로, 팔정도인 중도는 열반(nibbāna)으로 인도합니다. 아라한 도의 지혜로 사성제를 꿰뚫어 봄으로써 열반을 실현하게 됩니다. 열반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수행하는 사람들의 최종적이고 가장 고귀한 목표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따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팔정도를 계발하면 성스러운 도의 힘으로 사성제를 꿰뚫어 보는 통찰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 아라한과를 거쳐 열반을 실현합니다. 그렇게 열반을 실현하면,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마지막 죽는 마음[死沒心]에서, 정신과 물질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팔정도로 모든 괴로움의 종식인 열반을 실현합니다.
중도를 따름으로써 얻는 이익을 정리해보면,
1 감각적 쾌락을 피합니다.
2 고행을 하지 않습니다.
3 그릇된 길인 두 가지 극단을 피합니다.
4 중도는 바른 길입니다.
5 이 바른 도를 닦으면 통찰지혜가 계발되고 열반을 실현합니다.
이상 중도를 따를 때 얻는 이익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이것들은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목표이며 이 외의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무엇이 중도34를 이루는지 알아보는 일만 남았습니다. 중도를 설명하시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당시의 전통적인 관례대로 질문으로 법문을 시작하셨습니다.
Katamã ca sã, bhikkhavã, majjhima patipadã
Tathãgatena abhisambuddhã-Cakkhukarani,
Nãnakarani, upasamãya, abhiññãya, Sambodhãya,
Nibbãnã ya Samvattati?
“비구들이여, 여래가 깨달은 것, 혜안과 지혜를 생기게 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와 통찰지혜인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몸소 이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Ayameva ariyo atthan.giko maggo - Seyya thidam;
Sammādiṭṭhi, Samôãsan.kappo, Sammāvãcã, Sammākammanto,
Summãjivo, Sammāvãyama, Sammāsati, Sammāsamādhi.
“그것은 바로 팔정도다. (세존께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듯이, 또는 손바닥 안에 쥐고 있듯이 팔정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바른 말(正語 Sammā-vãcã)
바른 행동(正業 Sammā-sammānta)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
이것이 중도인 팔정도로서, 여래께서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을 때 혜안과 지혜가 생기고, 최상의 지혜가 생기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여, 최상의 지혜와 통찰지혜인, 열반에 이르셨습니다.
이제 중도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습니다. 이 팔정도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이「초전법륜경」의 큰 법문을 경청한 공덕으로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모두 잘못된 길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두 극단을 피하고 고귀한 여덟 가지 중도를 따르며 그로 인해 혜안과 높은 지혜를 얻어서 모든 괴로움의 끝인 열반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 역주(譯註) :
1. 따딩윳(Thadingyut)은 양력 10월에 해당한다.
2. 위사까(Visākha)는 부처님의 대표적인 재가 여신도였다. 앙가국의 바띠야에서 태어난 그녀는 7살 때 그 고장을 방문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이 되었다. 남편인 미가라는 원래 나형외도의 신자였지만 아내로 인하여 불법을 접하게 되고 수다원까지 얻자 아내를 어머님과 같이 공경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사까를 어머니라 불렀다. 위사까는 기원정사 동쪽에 녹자모강당, 즉 동원정사(東園精舍)을 지어 승가에 헌납하였다.
3.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는 부처님의 대표적인 재가신도였다.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했으므로 급고독(給孤獨)장자라고 불렸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한림(寒林)으로 부처님을 찾아가 설법을 듣고는 수다원이 되었다. 그후 제따왕자의 소유인 사와티의 제따 숲에 황금을 바닥에 깔아서 사들이고는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승가에 헌납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 기원정사에서 나머지 22년간을 보내셨다. 부처님이 아난다 존자를 시자로 삼으신 것도 여기에 거주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불교 교단사로 본다면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하신 기간의 절반 정도를 특히 말년을 이곳 한 군데에 머무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초기불교 경들이 이 기원정사에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나며 특히 마찌마 니까야와 상윳따 니까야 같은 경들은 거의 절반이 이곳에서 설해졌다.
4. 본문에 인용된 경전문장을 원어에 충실하게 전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쭌다여, 여기 어떤 어리석은 자는 생명들을 계속 죽이면서 자신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주지 않은 것을 계속 가지면서 자신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거짓말을 계속 하면서 자신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시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빠지고 사로잡혀서 맴돈다.
이것이 네 번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D29)
5. 아트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梵)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자아인 아트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s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함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불변하는 아트만이 태어날 때마다 재육화(再肉化)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트만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이다.
6.「무애해도(無碍解道 Patisambhidamagga)」는 빨리어 경장, 쿠다까 니까야에 들어있는 논서적인 성격이 매우 짙은 경으로 상좌부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경이다.「청정도론」의 주요 설명 특히〈혜품〉, 그 가운데서도 위빠사나를 설명하고 있는 18장부터 22장까지는 대부분이 무애해도를 인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7. 중부국(中部國)이라 번역한 마찌마데사(Majjhima-desa)는 majihima(가운데, 중간의)와 desa(지방, 나라, 지역)의 합성어로 인도, 정확하게는 갠지스강 유역의 중인도를 가리킨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부처님들이 출현하는 중인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불전에는 이외에도 잠부디빠(Jambu-dīpa)가 나오는데 이는 수미산(須彌山) 남쪽에 있는 대륙으로 잠부나무(閻浮樹)가 무성하게 자라는 땅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염부제(閻浮堤), 또는 남섬부주(南贍部洲)로 번역했고, 뒤에 이 인간세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되었다.
8. 십악업(十惡業)은 십선업(十善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선업도(善業道), 불선업도(不善業道)라고도 한다. 십악업에는 몸(身)으로 짓는 것 3가지인, ➀ 살생 ➁ 도둑질 ➂ 삿된 음행, 입(口)으로 짓는 것, 4가지인, ➃ 거짓말 ➄ 중상모략 ➅ 욕설 ➆ 잡담, 그리고 마음(意)으로 짓는 것 3가지인, ➇ 간탐 ➈ 악의 ➉ 사견이 있다.
9. 즐거운 느낌(樂受 sukkha-vedanā)에서 ‘즐거운’으로 번역한 숙카(sukkha)는 3가지 느낌 가운데 하나이면서 dukkha(괴로움, 고통)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육체적인 즐거움을 말하기 때문에 ‘즐거운’이라 옮겼다. 하지만 선(禪)의 경지에서 나타나는 sukkha는 그러한 육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지복(至福)’이라고 할 수 있는 고귀한 선의 각지(覺支)이므로 여기서 sukkha는 모두 ‘행복’으로 번역했다.
10. 마음이 대상 한곳에 집중된 상태(心一境性)로 번역되는 cittassa-ekaggatā에서, citta는 마음(心), eka는 하나, agga는 끝을 뜻하고 ta는 추상명사 어미이다. 그래서 ‘한 끝으로 됨, 한 끝으로 된 상태. 혹은 하나 됨’으로 직역할 수 있다.「청정도론」(Vis.Ⅲ.2)에는 ‘집중이란, 유익한 마음의 하나됨(善心一境性).’ 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그 외 대부분의 주석서들과 복주서 문헌들에서도 한결 같이 집중(samādhi)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동의어로 설명하고 있다.
11. 번뇌(漏)로 옮긴 아사와(āsava)는 ‘흐르는 것’이라는 뜻에서 '마음속의 해로운 상태나 더러움이 외부로 표출된다‘는 뜻으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루(漏), 번뇌(煩惱)로 옮겼고 서구에서는 influxes, 또는 더 정확한 뜻으로, canker, taint로 옮긴다.「법집론」의 주석서「아따살리니」(Asl.48)에는 번뇌를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뜻인 <아사와>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존재하는 것으로는 가장 높은 세계까지 흘러가고, 법으로는 종성(種姓 gotrabhu)의 영역에까지 흘러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번뇌(漏)에는 네 가지가 있다.
①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 kāmā-āsava) ② 존재의 번뇌(有漏 bhava-āsava) ③ 사견의 번뇌(見漏 diṭṭhi-āsava) ④ 무명의 번뇌(無明漏 avijjā-āsava)
그리고 이 네 가지 번뇌(漏)는 <네 가지 폭류(ogha)>와 <네 가지 속박(yoga)>이란 이름으로도 경전과 주석서에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육신통(六神通) 중의 하나인 누진통(漏盡通)이 바로 위빠사나를 통한 통찰의 힘으로 이러한 모든 번뇌(漏 āsava)를 부순 지혜를 가리킨다.
본서에서는 아사와(āsava)와 낄레사(kilesa)를 그냥 구분하지 않고 모두 번뇌로 옮겼지만 같은 번뇌라도 원어가 아사와인 경우는 괄호 안에 āsava와 한자 漏를 병기하였으며 낄레사는 본문에서 자주 반복되는 술어이므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도로 빨리어를 병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괄호 없이 그냥 번뇌라고 옮긴 경우는 대부분 이 낄레사의 역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12. 마찌마 니까야,「일체루경(一切漏經)」(M2)은 어떻게 번뇌(漏 āsava)를 단속하고
이를 소멸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할 것인가 하는 주제를 다룬 경으로 번뇌를 다음의 일곱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관함(見)으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들
② 억제함(saṃvara)으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들.
③ 수용함(patisevanā)으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들.
④ 인내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들.
⑤ 피함으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들.
⑥ 버림으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들.
⑦ 수행으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인내로서 제거해야할 번뇌를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인내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서 비구는 숙고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인욕을 한다.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파리, 모기, 바람, 햇빛 파충류에 닿음과, 받아들이기 힘든 나쁜 말들과, 몸에 생겨난 괴롭고 날카롭고 거칠고 심하고 좋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느낌들을 감내한다. 비구들이여, 감내하지 않으면 그에게 속상하고 참을 수 없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이다. 감내하면 그러한 속상하고 열 받는 번뇌들이 없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감내해서 제거해야할 번뇌들이라 한다."
13. 로깐따리까 지옥은, [청정도론」(Vis.Ⅶ)등의 주석서에 따르면, 인간계, 지옥계, 천상계라는 세 개의 우주(鐵圍山 cakka-vāḷa)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이 지옥 중생들은 때때로 아주 차디찬 산성의 바다에 빠져서 마치 소금이 물에 녹듯이 녹아 없어지는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AA.ii.532). 또한 이 지옥 중생들은 극심한 추위로 고통 받는다고 한다.(Nid A.8; SNA.i.59) 그리고 삿된 견해를 가졌던 중생들이 여기에 태어난다고 한다.(J.vi.247)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지옥은 31가지 중생계(三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세계로서 전생의 악업의 대가로 극심한 고통만이 있는 곳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여덟 가지 대지옥(八熱地獄)이 있는데 ➀ 등활(等活 Sañjīva) ➁ 흑승(黑繩 Kālasutta) ➂ 중합(Saṅghāta) ➃ 규환(叫喚 Roruva) ➄ 대규환(大叫喚 Mahā Roruva) ➅ 초열(焦熱 Tāpana) ➆ 대초열(大焦熱 Mahā Tāpana) ➇ 무간(無間 Avīci)지옥이 그것이다. 뒤의 지옥으로 갈수록 고통은 더 심해지며 이들 가운데 무간지옥이 제일 아래 있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다. 이 팔열지옥의 사방은 다시 다섯 가지 작은 지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석서에서 설한다. 그래서 모두 5×4×8 + 8 = 168가지 지옥이 있게 된다.
14. 상윳따 니까야의「초전법륜경」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혜안을 생기게 한다는 것은 통찰지와 지혜를 생기게 한다는 뜻이다. 고요함이란 번뇌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다. 최상의 지혜란 사성제(四聖諦)를 초월지로 알았다는 뜻이고 바른 깨달음인 통찰지혜(sambodha)도 이 사성제를 바르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열반이란 열반을 실현함을 말한다.”
15. 다섯 감각의 대상(ārammaṇa)은 눈,·귀, 코, 혀, 몸(眼耳鼻舌身)이라는 물질적 토대(處)이고, 그것들과 만나는 접촉이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色聲香味觸))의 다섯 가지이다. 그리고 의(意)를 통해 이러한 다섯 감각의 대상을 통해 받아들인 현상. 즉 전오식(前五識)을 판독하고 인식한다. 즉 눈의 대상인 형상이 눈의 문(眼門)에 나타나면 제일 먼저 오문전향의 마음(다섯 감각의 문들 가운데 하나로 향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눈의 문으로 향하고 그 다음에 눈의 아는 마음(眼識)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받아들이는 마음이, 그 다음에 조사하는 마음이, 그 다음에 결정하는 마음이, 그 다음에 그 대상을 경험하는 마음인 7가지 속행(速行)의 마음이, 그 다음에 등록하는 마음 두 가지가 일어난다. 하나의 인식과정에서 대상을 인식할 때 생기는 안식(眼識)은 한 찰나(心刹那)동안만 일어나지만 마음은 13개의 심찰라 동안 지속된다. 그러니까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오식(前五識)은 의식이 없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다음 단계의 마음인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등이 없으면 판독불능으로 그들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16. 여기서 문(門 dvāra)이라는 것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6가지 감각기관(六根)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식(識)이 대상을 인지하는 통로 혹은 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眼識)은 눈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고, 신식(身識)은 몸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한다. 같은 방법으로 의식(意識)은 의(mano)를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는데 이때 의문(意門)은 구체적으로 유분심(有分心 bhavaṅga)다. 이처럼 의(意), 의문(意門)은 정신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의문(意門)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법이라 불리는 대상은, 감성 물질, 미세한 물질, 과거의 마음, 52가지 마음의 작용, 열반, 개념이다. 그리고 이 여섯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때 이 여섯을 장소(處 āyatana)라고 하고 육처(六處)나 육입(六入)이라도 한다. 각각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는 그것을 기능(根 indriya)이라고 부르며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말한다.
그리고 의(意)는 정신적 대상을 아는 감각기능<根> 또는 감각장소<處>다. 눈<眼>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이나 색깔<色>이라는 대상에 대한 안 식(眼識)이 일어나고 귀<耳>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聲>라는 대상에 대해 이식(耳識)이 일어나듯이 마노(mano)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意識)이 일어난다. 이처럼 마노<意>는 정신적인 대상을 아는 감각장소 또는 기능이다. 안·이·비·설·신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의(意)는 정신적인 감각 장소다. 그리고 감각대상이란 식(識)이 일어날 때 의지하는 물질적 토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은 눈이라는 감성 물질을 토대로 하고 이식은 귀를, 비식은 코를, 설식은 혀를, 신식은 몸이라는 감성 물질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 의식은 모두 심장이라는 물질을 토대로 한다.
여기서 요점을 간추리면 전오식(前五識)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은 모두 문과 토대가 같다. 즉 안식은 눈이라는 물질을 그 문으로 하고 눈이라는 감성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모든 의식에는 반드시 의(意)라는 문이 있다. 즉 모든 의식은 반드시 심장이라는 물질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의식은 그 문이 다르다. 그러므로 눈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눈을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을 토대로 한다. 귀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귀를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이라는 물질을 토대로 한다. 의문(意門)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모든 의식(意識)은 의(意)를 문으로 하고 심장을 토대로 한다.
17. 정신과 물질로 번역되는 나마(nāma)와 루빠(rūpa)는 정신과 물질이란 말이고 둘을 합쳐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정신은 비물질적인 요소이며, 이것과 함께 물질적 요소가 있다. 이 물질적 요소란 몸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몸과 마음이란 용어를 정신과 물질로 표현하는 것은 이 용어가 법의 고유성질(自性)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마(nāma)는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의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名蘊)이고, 루빠(rūpa)는 물질의 무더기(色蘊)로, 이 오온(五蘊)이 존재(有)를 구성하는 것이다. 12연기(十二緣起)에서는 4번째 해당하는 것인데, 식(識)이 있어서 물질과 정신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을 조건으로 6가지 감각장소(六處)가 일어난다.
18. 빨리어 상카라(saṅkhāra)는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r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 행(行)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행이라는 한역 단어만을 가지고는 문맥에 따라 행(行), 의도적 행위나 작용, 형성된 것(有爲法), 업의 형성력 등으로 달리 해석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서 문맥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데 대체로 행이나 업의 형성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상카라는 빨리 성전에서 크게 다음 네 가지 의미로 나타난다.
①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그 외 수명의 상카라, 존재의 상카라, 생명의 상카라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② 오온(五蘊)의 네째는 행온(行蘊)이다. 이 경우에도 항상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은 논장에서 말하는 물질이고 수(受),상(想), 행(行)은 논장에서 말하는 마음의 작용(心所)이고 식(識)은 논장에서 말하는 심(心)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 행(行)은 상좌부 논장에 나오는 52가지 마음의 작용 가운데서 느낌(受)과 상(想)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의 작용을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 선한 심리현상들, 불선한 심리현상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의 행은‘심리현상들’로 이해해야 한다.
③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청정도론」에서는 ‘공덕이 있는 행위, 공덕이 없는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업의 과보’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mma)과 동의어 이다.
④ 넷째,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 구행, 의행으로 나타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三行)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력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 그래서 신행, 구행, 의행은 각각 신업, 구업, 의업의 삼업(三業)과 일치한다.
19. 맨 처음 얻는 지혜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말한다.
20. 파생된 물질을 구분해서 일어난 지혜란,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모두 28가지 형태의 물질을 나열한다. 이것은 크게 네 가지 근본 물질<四大 mahābhūta>과 파생된 물질(upādā-rūpa)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은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이며 파생된 물질은 이러한 사대(四大)에서 파생되었거나 사대를 의지해서 생긴 물질이다. 비유하자면 사대는 땅과 같고 파생된 물질은 땅에서 자라는 나무나 넝쿨과 같다고 하겠다. 이 파생된 물질은 모두 24가지다. 그래서 네 가지 근본 물질과 24가지 파생된 물질로 이루어진 총 28가지 형태의 물질은 크게 11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일곱은 구체적인 물질인데 이들은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위빠사나로써 주시하고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 네 부류는 그 성질상 아주 추상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물질이라 부른다. 자세한 것은 다음 도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물질의 개요
물질의 개요 | |
구체적인 물질(nipphana-rūpa)-18 I. 근본 물질(bhūta-rūpa) 1. 땅의 요소(地界 paṭhavī-dhātu) 2. 물의 요소(水界 āpo-dhātu) 3. 불의 요소(火界 tejo-dhāthu) 4. 바람의 요소(風界 vāyo-dhātu) II. 감성 물질(pasāda-rūpa) 5. 눈의 감성(cakkhu-pasāda) 6. 귀의 감성(sota-pasāda) 7. 코의 감성(ghāna-pasāda) 8. 혀의 감성(jivhā-pasāda) 9. 몸의 감성(kāya-pasāda) III. 대상의 물질(gocara-rūpa) 10. 색(色 rūpa) 11. 소리(聲 sadda) 12. 냄새(香 gandha) 13. 맛(味 rasa) *감촉은 땅, 불, 바람의 3大임. IV. 性(bhāva-rūpa) 14. 여성(itthibhāva 혹은 itthatta) 15. 남성(pumbhāva 혹은 purisatta) V. 심장의 물질(hadaya-ruupa) 16. 심장토대(hadaya-vatthu) VI. 생명의 물질(jiivita-rūpa) 17. 생명기능(jiivitindriya, 命根) VII. 음식의 물질(āhāra-rūpa) 18. 영양소(ojā) |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10 VIII. 제한(pariccheda-rūpa) 19. 허공의 요소(空界 ākāsa-dhātu) IX. 암시(viññatti-rūpa) 20. 몸의 암시(kāya-viññatti) 21. 말의 암시(vacī-viññatti) X. 변화(vikāra-rūpa) 22. 물질의 가벼움(rūpassa-lahutā) 23. 물질의 부드러움(rūpassa-mudutā) 24. 물질의 적합함 (rūpassa-kammaññatā) XI. 특징(lakkhaṇa-rūpa) 25. 생성(upacaya) 26. 상속(santati) 27. 쇠퇴(jaratā) 28. 무상함(aniccatā) |
21. 이것을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라고 한다.
22. 삼법인(三法印)은 존재의 세 가지 보편적 속성이나 특징이란 뜻이다. 이 삼법인은 오온(五蘊)과 모든 유위법(有爲法)의 보편적 속성으로 통찰지혜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위빠사나를 통하여 이러한 삼법인을 반드시 철견해야 한다.
➀ 무상(無相 anicca): 무상으로 번역되는 아니짜(anica)는 무상함, 덧없음, 또는 항상하지 않음이란 뜻으로 모든 유위법(諸行)이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➁ 고(苦 dhkkha): 고로 번역되는 둑카(dukkha)란 불만스러움, 괴로움, 고통으로 모든 윤회하는 존재의 보편적 특성은 고(苦)라는 것, 즉 존재의 전반적 불만족성을 나태나는 말이다.
➂ 무아(無我 anatta): 무아로 번역되는 아나따(anatta)는 항상하는 자아가 없고 실재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빨리 경전의 도처에서 부처님은 무상· 고· 무아를 설하셨는데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의 무상· 고· 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나며 오온으로 대표되는 모든 개념적 존재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체해서 드러나는 유위법이 무상· 고· 무아임을 철견할 때 해탈열반은 실현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유위법<諸行>의 무상을 꿰뚫은 해탈을 무상해탈(無相解脫)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하고 무아를 꿰뚫어서 실현한 해탈을 공해탈(空解脫)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빨리 경전이나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어 dharma-mudra의 번역어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율장(律藏)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단어인 듯하고 이를 나중에 대승불교에서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대승불교의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적정열반(寂靜涅槃)으로 여기에 일체개고(一切槪苦)를 넣어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하기도 한다. 설일체유부는 인도의 부파불교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특한 종지를 내세워 대승불교와 각축했던 교파였는데, 이들은 이론투쟁을 많이 겪었던 만큼 자신과 외도들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할 필요성에서 법의 도장(法印)과 같은 확고한 잣대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무튼 상좌부 불교의 의미로 보면 삼특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도고도 볼 수 있는데, 삼법인을 상좌부 불교의 삼특상과 비교해 볼 때 수행에 관한 강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천명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23.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도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혜가 성숙되어야 한다. 이 지혜는 16가지(혹은 10가지)의 단계를 거쳐 성숙하는데 여기에 필요한 것이 청정(淸淨 visuddhi)이다. 이러한 청정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가 있다.
칠청정(七淸淨)과 16단계 지혜의 순서
청 정 | 지 혜 |
Ⅰ.계청정(戒淸淨 sila-visuddhi) | |
Ⅱ.심청정(心淸淨 citta-visuddhi) | ①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pariccheda-ñāṇa) |
Ⅲ.견청정(見淸淨 diṭṭhi-visuddhi) | ② 원인과 결과를 구별하는 지혜(paccaya-pariggaha-ñāṇa) |
Ⅳ.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度疑淸淨 kaṅkhāvitaraṇa-visuddhi) | ③ 명상의 지혜(sammasana-ñāṇa) ④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지혜(udayabbhaya-ñāṇa) |
Ⅴ. 도와 도 아님에 대한 지견에 의한 청정 (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ñāṇadassana-visuddhi) | |
Ⅵ. 도닦음에 대한 지견에 의한 청정(行道智見淸淨 paṭipadāñāṇadassana-visuddhi) | ⑤ 무너짐의 지혜(bhaga-ñāṇa) ⑥ 공포의 지혜(bhaya-ñāna) ⑦ 위험의 지혜(ādīnava-ñāna) ⑧ 역겨움의 지혜(nibbida-ñāṇa) ⑨ 해탈을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a-ñāṇa) ⑩ 깊이 숙고하는 지혜(paṭisaṅkhā-ñāṇa) ⑪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 ⑫ 수순의 지혜(auloma-ñāṇa) ⑬ 종성의 지혜(gotrabū-ñāṇa) ⑭ 도의 지혜(magga-ñāṇa) ⑮ 과의 지혜(phala-ñāṇa) |
Ⅶ. 지견에 의한 청정 (智見淸淨 ñāṇa-dassana-visuddhi) | ⑯ 반조의 지혜(paccavkkhaṇa-ñāṇa) |
24. 마하시 사야도의 이 말씀은 마찌마 니까야,「초전법륜경」주석서의 다음 설명과 일치한다. “혜안[眼]을 생기게 한다는 것은 통찰지의 눈을 생기게 하는 것이고 지혜[智 ñāṇa]를 생기게 한다는 것도 이 뜻이다. 고요함이란 번뇌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다. 최상의 지혜(abhiññā)란 네 가지 진리(四諦)를 초월지로 알았다는 뜻이고 바른 깨달음도 이 사성제를 바르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25. 사까야디띠(sakkāya-diṭṭhi)는 sakkāya(존재의 무더기=오온)와 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영역은 personality belief, wrong view of self등으로 풀이 된다.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로 중생들을 윤회에 묶어두고 있는 10가지 족쇄(saṃyojana)중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엔 네 가지가 있는데 ①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② 오온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③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생각 ④ 자아가 오온의 주관자란 생각이다. 빨리 경전에 나오는 유신견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지 못하여 물질[色]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느낌[受]을 … 인식[想]을 … 상카라[行]들을 … 아는 마음[識]을 자아라고 알아차린다. 아는 마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아는 마음이 자아 안에 있다고, 아는 마음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유신견이 있게 된다.”(M43)
이 유신견은 성자와 범부를 판단하고 걸러내는 금강석이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성자의 초보단계인 수다원도 될 수 없기 때문이고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족쇄들이 풀리지 않으면 아무리 깊고 미묘한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탐·진·치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26.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으로 옮긴 실라바따 빠라마사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례 ․ 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할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례 ․ 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역도 Wrong belief in the practise, 또는 attachment to mere rules and rites등으로 풀이된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10가지 족쇄 가운데 세 번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 중의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수다원도에 들면 유신견, 의심과 같은 족쇄들과 함께 모두 뿌리가 뽑히게 된다.
27. 여기서 보듯 고성제(苦聖諦)에서의 괴로움(dukkha)은 단순한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이나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서양의 일부 학자들이나 상좌부 불교권에서는 이 둑카(dukkha)를 suffering(괴로움), pain(고통)으로 옮기는 대신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로 옮기기도 한다. 그리고 고성제의 핵심은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이다.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중생계의 모든 물질과 정신은 반드시 집착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존재하는 모든 것(오온=오취온=일체유위법)은 반드시 집착을 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세한 집착은 아나함과<不還果>에 이르기까지 남아있으며 그래서 아나함과를 증득한 사람들은 정거천(淨居天)이라는 색계천(色界天)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오취온의 괴로움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28. 세 가지 버림(phāna)중의 하나인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에 해당한다. 세 가지 버림은 ➀ 억압에 의한 버림 ➁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 ➂ 근절에 의한 버림이다. 이와 관련하여「청정도론」(Vis.XXⅢ.112)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마치 밤에 켜놓은 등불에 의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위빠사나의 한 부분인 지혜의 구성요소로 그와 반대되는 버려야할 법들을 버림이,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버림이다. 즉,
① 정신과 물질을 분석함으로써 유신견을 버린다.
②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원인이 없다는 견해(無因論)를 가지는 것으로 거짓 원인을 주장하는 견해와 의심의 때를 버린다.
③ 깔라빠를 명상함으로써, ‘나’, ‘나의 것’이라는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④ 도와 도 아님을 구분함으로써 도 아닌 것이 도라는 인식을 버린다.
⑤ 일어나는 것을 봄으로써 허무하다는 견해를 버린다.
⑥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영원하다는 견해를 버린다.
⑦ 공포가 나타남으로써 두려움을 가진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인식을 버린다.
⑧ 위험을 봄으로써 안락하다는 견해를 버린다.
⑨ 해탈하기를 원함으로써 ‘해탈을 원치 않음’을 버린다.
⑩ 깊이 숙고함으로써 ‘깊이 숙고하지 않음’을 버린다.
⑪ 평온으로 ‘평온하지 않음’을 버린다.
⑫수순으로 ‘진리에 어긋나는 이해’를 버린다.”
29. 팔정도의 세 번째 도인 혜(慧 paññā)의 계발에는 세 단계가 있다.
(1) 들어서 아는 지혜[聞慧]: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생기는 지혜로 문소성지(聞所成智)라고도 한다.
(2) 사유해서 아는 지혜[思慧]: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여 생기는 지혜로 사소성지(思所成智)라고도 한다.
(3) 수행해서 아는 지혜[修慧]: 읽고 듣고 생각한 것을 실참 수행을 닦아서 생기는 지혜로 수소성지(修所成智)라고도 한다.
(1) 들어서 아는 지혜[聞慧]는 다른 사람의 법문을 듣거나 경전과 책을 읽어서 생기는 지혜이다. 이렇게 얻은 지혜는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지혜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빌려온 지혜이기 때문이다. 들어서 얻은 지혜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인 (2) 사유해서 아는 지혜[思慧]로 가야 한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들었던 것과 읽었던 것이 논리적이고 실제적이며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지적인 이해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의 지혜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의 지혜는 (3) 수행해서 아는 지혜[修慧]인데, 수행을 통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한 지혜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들어서 생기는 문혜나 사유해서 아는 사혜는 우리에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영감을 주고 길안내를 해주지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지혜는 오직 수행해서 생기는 수혜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지혜이기 때문이다.
30. 최상의 지혜로 옮긴 아빈냐(abhiññā)는 ‘넘어서 안다’는 문자적인 뜻에서 보통의 여섯 감각기능으로는 알수 없는 것을 넘어서 안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 최상의 지혜, 또는 초월지(超越智), 초범지(超凡智)로 옮길 수 있다. 때로 이 아빈냐(abhiññā)는 신통지(神通智)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때는 육신통(六神通)을 지칭한다 .육신통에는 ① 신족통(神足通) ② 천이통(天耳通) ③ 타심통(他心通) ④ 숙명통(宿命通) ⑤ 천안통(天眼通) ⑥ 누진통(漏盡通)이 있다.
31. 빠하나비싸마야(pahānabhisamāya, 捨斷現觀)는, 중국에서 버림(일어남)을 관통하는 것으로서, 현관(現觀)으로 옮겼다. 주석서 문헌에서 abhisamāya는 주로 사성제(四聖諦)를 관통하는 문맥에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 (Vis.XXⅡ.92)에서는 ‘통달지를 관통하여 괴로움을 관통한다. 버림을 관통하여 일어남을 관통한다. 닦음을 관통하여 도를 관통한다. 실현을 관통하여 소멸을 관통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32. 이와 관련하여마찌마 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나온다.
“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일어남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도 본다.” (S.v.437)
33. 이 마하시 사야도의 말씀 역시마찌마 니까야,「초전법륜경」주석서의 abhiññā에 대한 다음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혜안을 생기게 한다는 것은 통찰지의 눈을 생기게 하는 것이고 지혜(智 ñāṇ)를 생기게 한다는 것도 이 뜻이다. 고요함이란 번뇌들이 완전히 가라앉음이다. 최상의 지혜는 사성제(四聖諦)를 초월지로 알았다는 뜻이고 바른 깨달음도 이 사성제를 바르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열반(nibbāna)이란 열반을 실현함을 말한다.”
34. 중도(中道)라 번역되는 마찌마-빠띠빠다(majjhima-patipadã)에서 빠띠빠다(patipadã)는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ā)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철학이나 관념체계가 아닌 실천체계이다.
부처님께서는「대반열반경」(D16)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기 직전 수밧다라는 외도 유행자(流行者)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바따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바따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바따여, 이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수바따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는 사문들이 텅 비어 있다. 수바따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45년 설법의 최초와 최후 가르침으로 팔정도를 설하셨으며 팔정도가 바로 불교수행의 결정판인 중도이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께서 초기경전 정형화해 분명하게 밝힌 팔정도의 정형구를 정확하게 살펴봐야 한다.
첫째, 바른 견해(正見)는“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에 대한 지혜”로 정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가전연경(Kaccaayanagotta Sutta)」(S12:15)에서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를 질문 드리는 가전연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까짜야나여,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까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中)에 의지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신 뒤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의 정형구로 중을 표방하신다. 즉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다.
이처럼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연기의 가르침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는 연기의 유전문(고의 발생구조)과 연결되고, 멸성제는 연기의 환멸문(고의 소멸구조)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팔정도의 정견이다.
둘째, 바른 사유(正思惟)는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하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로 정의되는데 불자들이 세상과 남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할 바른 생각을 말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자애(慈), 연민(悲), 더불어 기뻐함(喜),
평온(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바른 말(正語)은“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넷째, 바른 행위(正業)는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이다.
다섯째, 바른 생계(正命)는“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다른 경들의 설명을 보면 출가자는 무소유와 걸식으로 삶을 영위해야하며 특히 사주, 관상, 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 재가자는 정당한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를 실천하는 지계의 생활은 그 자체가 팔정도의 고귀한 항목에 포함되고 있는 실제수행이다.
여섯째, 바른 정진(正精進)은“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불선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선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정진은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善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일곱째, 바른 알아차림(正念)은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고,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고,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고,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머무는 것”이다.
바른 알아차림(正念)은 팔정도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행기법이다. 부처님은 나라는 존재를 먼저 몸, 느낌, 마음,
· 마음의 대상<法>의 사념처(四念處)로 해체해서 이 중의 하나에 집중한 뒤, 그것을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할 것을 설하신다.
여덟째, 바른 집중(正定)은 초선(初禪)과 이선(二禪)과 삼선(三禪)과 사선(四禪)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집증(三昧) 혹은 선(禪)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 혼침, 들뜸. 후회,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장애들이 극복되어 마음의 행복과 고요와 평화가 가득한 경지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선이며 이를 바른 집중(正定)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