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춘추 가을호 청탁 원고)
(동화)
김삿갓과 어린 도사
이성교
“죽창에 삿갓 쓰고 방라앙 사암처얼리……”
바람에 날리는 송홧가루가 뿌옇게 눈앞을 흐리는 나른한 오후입니다. 김삿갓 노래를 흥얼거리며 학교에서 돌아온 승이는 서죽당 마루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승이는 친구들이 도사라고 부릅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자기들이 모르는 옛날이야기를 잘 아는 것을 본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오늘은 서죽당에서 하룻밤을 지낸 김삿갓 할아버지에 대해 꼭 알아야겠어.”
서죽당은 윗대 할아버지의 호를 따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죽당 할아버지께서 지내실 때 김삿갓 방랑 시인이 하룻밤을 머물렀다고도 하는데 그 이상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숙부님이 계셨더라면……. 아니 그 많은 책을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승이가 숙부님 곁에 있을 때는 한글도 알지 못한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끝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승이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자꾸 떠오릅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 머리를 좌우로 흔듭니다.
“너희들 김삿갓 방랑 시인 알지.”
“그래 들어봤지. 우리 화순을 세 번이나 오셨다고 들었어.”
“그런데 말이야, 마지막에는 우리 화순에서 돌아가셨대.”
“맞아,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그런데 우리 집에도 다녀가신 것 같아.”
“뭐? 너희 집을”
“아마도 어쩌면 내 느낌이 그래.”
그날도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이 승이 도사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여느 때처럼 승이의 입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우쭐해진 승이는 평소에 품고 있던 말을 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꾸며낸 거짓말로 허세를 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승이는 며칠 전에 서죽당 구석에서 한문과 한글이 섞여 있는 서죽시집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무심코 그 책을 넘기다 ‘매화 핀 날, 시 주머니, 나그네’라는 말과 ‘명산, 관서 지방 유람, 경치, 행인’이라는 글을 보고 지나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친구들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금강산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김삿갓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혹시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후 학교에서 돌아오면 서죽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앗, 삿갓 할아버지다. 혹시 할아버지께서 방랑시인 김삿갓 님이세요.?”
“응,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지. 그런데 너는 누구냐?”
“네 저는 저기 보이는 강 건너 마을에 사는 승이라고 하는데요. 친구들이 승이 도
사라고 해요.”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승이는 매년 겨울이면 사랑채에서 서당을 열었던 숙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그래서 한글보다 천자문을 먼저 배우며 한자를 익혔습니다. 그 덕분에 중학교 수준 이상의 한문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승이 도사라, 참 흥미로운 별명이로구나!”
어린아이에게 도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면 필시 그럴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김삿갓 할아버지는 승이에게 관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혼자 어디를 가는 거냐?”
“삿갓 할아버지께서 걸으셨을 길을 생각하면서 걷고 있어요.”
“그건 왜?”
할아버지의 짐작대로 재미있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궁금해집니다.
“오랜 옛날에 김삿갓 할아버지께서 제가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셨다는 이야기 가 전해 내려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요.”
“그건 또 왜?”
그렇지 않아도 날이 저물어 가는데 하룻밤 머무를 곳이 필요했던 김삿갓 할아버지는 승이의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사실은 며칠 전 친구들에게 옛날에 김삿갓 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
내셨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믿지를 않아서 내일까지 그 증거를 찾아서 알려주기로
약속했거든요”
“무슨 근거라도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거니?”
“그것이 아니라 한 친구가 돌팔이 도사라고 놀려서 그만…….”
승이는 친구들이 도사라는 별명을 부를 때마다 우쭐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만 자기를 돌팔이 도사라고 놀려서 홧김에 약속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이 그 근거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
“아니요. 하도 답답해서요.”
“그래도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 길을 걷고 있을 것이 아니냐?”
“사실은 이 길은 제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요. 할아버지께서 세 번째 화순에 오
실 때는 장흥을 넘어오셨잖아요.”
“응, 그랬지.”
“그랬다면 반드시 능주를 지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승이는 삿갓 할아버지가 마을에 다녀가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 관아와 향교가 있던 능주에서 머무셨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십 리 밖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능주를 지나게 되면 너희 마을을 들렀으리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느냐?”
“네, 제가 사는 마을은 봉황이 알을 품은 지형에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으음,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란 말이지.”
“네, 그뿐만 아니라 봄이면 화다산에 만발한 꽃을 본 인근 마을 사람들이 꽃마을이 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화다산이라면 꽃이 많이 핀다는 뜻이니 만발하면 멀리서도 눈에 띌만했겠구나.”
“네 할아버지, 그래서 시인이셨던 삿갓 할아버지께서 우리 마을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승이는 이제까지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걷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와 승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지석천 두물머리를 지나고 있습니다.
“참 대단한 추리력을 가진 아이로다. 친구들이 도사로 부를만한 해. 그런데 반은 맞
고 반을 잘못 알고 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승이는 할아버지께서 자기를 도사라고 인정하시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마을에 오신 길이 더욱 궁금했습니다.
“내가 너희 마을에 들른 것과 너희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은 모두 사실이다.”
“아~앗 싸, 다행이다.”
승이는 내일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약속한 김삿갓 할아버지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래서 너무 기쁜 나머지 환호를 질렀습니다. 특히 지금까지 자기를 돌팔이 도사라고 놀리는 친구의 코를 납작하게 할 일을 생각하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할아버지, 이번에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나는 세 번째로 화순에 올 때 장흥 보림사에서 화순 땅으로 들어왔지. 그런데 능
주로 온 것이 아니라 화순 도암면으로 넘어왔다.”
“네?”
장흥에서 화순을 오려면 능주를 지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 승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도암면은 아직도 첩첩산중으로 장흥과는 큰 산이 막혀 있어서 그쪽 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그때 나는 장흥 보림사에서 천불천탑이 있는 도암 운주사로 가기 위해 영암 금정
면에서 큰 재를 넘었단다.”
승이는 지금과는 달리 김삿갓 할아버지가 유람하셨던 시대의 주 교통수단이 걷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는데 봄과 같지 않구나)”
대문 앞에 선 김삿갓 할아버지는 떨어져 나간 바람벽을 거미줄로 얽어 놓은 문간방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가세가 옛날만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사자성어를 읊조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승이는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은 알 수 있으나 앞말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의 사는 형편이 전과 같지 않다는 정도만 이해하고 삿갓 할아버지를 사랑채로 모셨습니다.
사랑채로 들어온 김삿갓 할아버지는 무엇에 홀린 듯이 자꾸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전에 사당이었던 곳으로 들어가 마루판을 발로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어디쯤인데? 옳지 이곳이렷다.”
앞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혼잣말을 남긴 김삿갓 할아버지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승이는 갑자기 머릿발이 서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니 이게 뭐지? 내가 그동안 누구를 따라왔지?”
너무 놀란 승이는 할아버지를 부르며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때 승이의 눈앞에 한줄기 가느다란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승이는 조심스럽게 그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앗, 오~ 하나님”
한쪽 눈을 감고 빛이 새어 나오는 마룻장 밑을 본 승이는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습니다. 동시에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마룻장 밑에서 나오는 빛은 어떤 물건에 반사되고 있었는데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꽈다다당”
그때 지나가던 바람이 양동이를 내동댕이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습니다. 그 소리에 놀란 승이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이 모두 꿈이었단 말인가? 허허 남가일몽(南柯一夢 남쪽
나뭇가지 아래에서의 한바탕 꿈)이로다”
승이는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모두 꿈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순간 짧은 꿈이었지만 자기가 마치 도사가 된 듯한 착각으로 김삿갓 할아버지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승이는 너무 답답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깐 잠이 든 것입니다.
“아니 저게 뭐지”
안채로 들어가려고 마루를 내려섰을 때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긴 햇살이 꿈속에 보았던 마룻장 밑을 비추고 있습니다. 햇살이 멈춘 끝에는 히끄무리한 물체가 보입니다.
‘이야기로 흐르는 대한민국 소도시 기행’
먼지투성이가 된 승이가 마루 밑에서 가지고 나온 책입니다. 그 책은 대학교수님이셨던 승이의 부친께서 김삿갓의 유람 길을 따라가면서 쓰신 책이었습니다.
몇 해 전에 서당을 하시던 숙부님께서 돌아가시자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랑채에 있는 사당을 개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책을 옮기면서 마룻장 밑으로 빠졌나 봅니다.
‘나그네가 있어 관서 지방의 경치를 한껏 말하다’
이 시의 내용은 세 번째 화순을 찾은 김삿갓이 종명지인 동복 땅으로 가던 중 서죽당이 있는 죽청리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야기였습니다.
승이는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김삿갓 시인의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5장16절에서18절 말
씀 아멘”
교회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낭송했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