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마-!’
아침상을 들고 자기를 부르며 오는 미호의 목소리가 익숙해진 아침이다.
오늘 아침상에는 꿀물이 함께 왔다.
‘전하가 꿀물을 같이 내어드리라 했대요’
꿀은 어딜가나 상한 목에 좋은가보다.
밥을 먹기 전 들이킨 꿀물이 그렇게 달 수가 없었다.
‘마마 근데 저 종이는 뭡니까?’
‘이거? 전하가 써주신 건데..’
‘근데 어찌 매번 품에 품고 다니시다가 잘 때 저리 펼쳐두고 주무세요?’
‘미호야…어디 가서 말 안 할 거지?’
‘…뭐를요?’
‘…진짜 비밀이다. 이거는?’
‘…그니까 뭐길래요- 마마’
‘내가…한자를 몰라’
‘…아니 어찌- 한자를 안 배우셨어요?!’
‘그러게..이럴 줄 알았으면 좀 배워둘 걸’
철없는 소리나 하며 밥을 먹는 마마가 궁 밖을 나서면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을까 걱정되는 미호다.
‘그래서 말인데 미호야.. 이거 뭐라고 써있는 거야?’
‘이거 전하 이름이잖아요-..!’
‘..그니까..전하 이름인 거는 아는데 어떻게 읽는 거야..’
‘..마마-..진짜 모르셔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응’
마마의 눈빛을 보니 정말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감히 전하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는 본인의 목소리를 행여나 누가 들을까 미호는 은하에게 작게 속삭인다.
‘…서지환 이라고 쓰여있습니다-…서지환’
은하는 더 이상 밥술을 넘길 수 없었다.
-
곧장 아침상을 물린 뒤 검은 색 수첩을 찾은 은하는 수첩을 펼쳤다.
여전히 수첩 맨 뒤에는 한글로 “서지환” 이라 적혀있다.
-
‘전하- 들어갑니다..!’
언제나 그랬듯 들어오라는 말이 없어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하다.
그런 은하가 항상 앵두색 연지와 그때 산 비녀를 꽂은 채 들어온다는 걸 아는 전하다.
그런데 오늘 비녀는커녕 연지도 바르지 않고 빠른 발걸음을 재촉해 온 은하에 전하는 놀란다.
‘전하 이름이 서지환 맞아요?’
아침 인사도 건너뛰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묻는다는 게 자신의 이름 석 자라는 게 그저 의아스럽기만 하다.
‘맞습니다’
‘…나 진짜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그죠?! 나 알죠?! 그때 수첩 떨어트리고 갔잖아요-!’
검은 색 수첩을 지환 앞에서 흔들어 보이지만 전혀 모르는 눈치에 은하는 답답하다.
‘…나쁜 꿈이라도 꾸신 겁니까’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은하가 걱정되는 지환이다.
‘…뭐가 꿈인지 모르겠어요. 이제-..’
이곳에 적응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지
돌아갈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수첩 그리고 겨우 찾은 수첩 주인에도 여전히 깨지 않는 꿈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은하다.
-
‘…그니까 안 믿기실 거 아는데-..’
‘믿습니다’
‘…’
‘걱정 말고 말씀하세요’
‘….긴 꿈을 꿨는데..그게 너무 오래 꾼 꿈인 건지 너무 복잡해요..’
자기를 믿는다는 지환의 말에도 본인조차 믿기 힘든 지금, 지내왔던 그날들을 그저 꿈이라고 치부하며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은하였다.
‘…분명 그때 어떤 사람이 수첩을 떨어트리고 갔고..’
‘…’
‘제가 그걸 주웠는데 돌려주지를 못해서..집에 가져왔고’
‘….’
‘그대로 잠에 들었는데 깨보니까 여기였어요..’
‘…’
‘근데.. 도무지 자고 일어나도 이 꿈이 깨질.. 않아요’
‘…’
‘..어떡하면 좋죠 이제-..’
울먹이는 은하를 바라만 보던 지환은 어떤 말도 없이 은하를 안는다.
‘미안합니다’
‘…’
‘…미안합니다. 울지 마세요’
‘…전하가 왜요-..전하가 왜 미안해요’
‘..꿈에서조차.. 고생을 시키고 이렇게 울려서 미안합니다’
‘…’
결국엔 고여 흐르는 은하의 눈물을 엄지로 훔쳐주며 미안하다고 되뇌이는 지환이다.
‘…품에서 조금 쉬세요’
그렇게 한참을 지환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다 지쳐 쓰러지듯 잠에 든 은하다.
-
잠에서 깬 은하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딱딱한 바닥에 앉아 자가의 손을잡고 엎드려 잠에 든 지환이 보인다.
은하는 여전히 복잡한 생각을 떨칠 수 없고 잠든 지환을 깨우지않는다.
‘..서지환..’
아주 작게 읊조려본다.
‘그래..긴 꿈을 꿨나보지..’
그렇게 체념하면서도 지환과 잡고있는 손을 놓지않는 은하다.
‘..꿈에서조차.. 고생을 시키고 이렇게 울려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던 지환의 모습이 계속 생각나서 또 나오려는 눈물을 꼭 참고 애써 다시 눈을 감는다. 잡은 손을 더 세게 잡으면서.
-
날이 밝았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네’
‘…오늘도 여전히 꿈에서 깨지 못해.. 힘듭니까’
지환의 질문에 은하는 애써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요. 어제는 유독 악몽을 꿨나 봐요. 괜찮아요- 이제는’
곧 다시 울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도 괜찮다는 은하가 안쓰러운 지환이다.
‘..조금 더 몸을 눕히고 편히 하세요’
‘…전하 저..소갈비..먹을래요’
‘..궁인들에게 내오라 하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익숙해져 버린 아침상의 소갈비를 찾으며 이제는 긴 꿈이었을지 모를 그날들을 떨치려 해보는 은하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궁인들에게 가보려는 지환의 손을 은하가 다시 잡아 이끈다.
‘…곧장 돌아오셔야 해요’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뿐입니다’
그런 위태로워 보이는 은하를 안심시키는 지환이다.
-
오늘따라 말수가 적은 아침상에서 묵묵히 밥을 먹는 은하와 지환 사이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걸 서로 알고 있지만 혹여나 또 노여움을 주고 미안함을 줘버릴까 넘기는 밥과 함께 같이 삼켜낸다.
상을 물리고 돌아갈 채비를 하는 은하에게 지환은 말한다.
‘…돌아가 또 악몽을 꿀까 걱정입니다’
‘저 이제 진짜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습니다’
‘…’
‘여기에서 깊은 잠이 들 때까지 쉬다 가세요’
‘…여기서요?’
‘…오랜만에 동화..이야기를 해주겠습니까’
‘..그래요.그럼’
어떤 동화를 이야기해야할까
지금 은하의 하루도 동화 같다. 다른 동화는 모두 결말을 아는데 이 동화만큼은 결말조차 알 수 없어서 답답한 은하다.
'...성냥팔이 소녀할까요?'
'..좋습니다'
-
'...마지막 성냥을 꺼질 때 소녀는 영원히 잠에 들었대요'
'…항상 하던 예쁘고 즐거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오늘은 유달리 해피엔딩이 생각이 안 나요'
'해피..엔딩..'
어눌한 발음으로 따라 말하는 지환을 보며 은하는 실없이 웃으며 말한다.
'...행복한 결말이요'
'…'
'또 뭐할까요. 신데렐라해줄까요? 신데렐-'
'유독 길게 꿨던 그 꿈에서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
그 꿈에 많은 것을 두고 온 듯한 은하가 내내 마음에 걸렸던 지환이다.
'그 꿈에서는-…'
'...'
'앞머리가 꼬불했어요.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직업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
'혼자 살았고 거기는 이런 창호지가 아니고 빨간색 꽃이 그려진 종이가 붙어있었어요'
'…빨간색 꽃을 좋아했습니까'
'살던 곳 주인분이 붙여 놓으신 거긴 한데...생각해보면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
'나름..행복했던 것 같아요-…'
'...이번 꿈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긴 꿈을 그리워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하겠지만'
'…'
'못지않은 행복한 꿈이 될 수 있도록 할게요’
'…'
'...이번엔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믿을게요'
미련도 정도 두지 말라 했는데 벌써 믿음을 주고받아 버린 두 사람이다.
'..대신..가끔은-…'
'...'
'아주 가끔은...그 꿈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울 것 같아요'
'…그러세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마다 나를 찾아오세요'
-
그다음 날부터 은하의 방에는 매일 아침 빨간색 꽃 하나가 꽂힌 화병이 시들지 않고 놓여있었다.
-
은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지환을 찾아간다. 그리고 각자 방에서 먹던 아침을 함께 먹는다.
어느 날은 잠이 덜 깼는지 눈이 비비면서도 ‘전하-‘하며 자기 방을 찾는 은하를 보고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기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차마 꽂지 못한 비녀를 잠결에도 챙겨온 은하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도 하며 은하의 머리를 대신 정돈해주는 지환이다.
‘..애 같으십니다’
‘이게 버릇이 돼서요’
‘비녀를 하나 더 사드려야겠습니다’
‘…이게 좋아요. 저는’
그렇게 서로를 웃게 하는 버릇이 은하에게도 지환에게도 고쳐야 할 버릇은 아니었다.
점차 지환이 정돈해주는 은하의 머리도 하루가 다르게 모양새를 갖추게되었다.
-
가끔 지환은 은하에게 저쪽 이야기를 먼저 묻곤 한다.
‘…저쪽에서는 서로를 어떻게 부릅니까’
‘친구는 야 너 하기도하고 정중하게 은하씨- 하기도하고’
‘...’
‘전하는 저한테 야,너,은하씨,은하야 다 해도 돼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
‘…은하야’
이쪽에 와서 처음으로 불려보는 호칭에 문득 생경해진 은하는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상합니까’
‘…아니요. 좋아요. 제 이름 불러주는 거’
‘…’
‘생각해 보니까.. 옥국에 오고부터 제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은하야’
‘…’
‘은하씨’
‘…생각보다 이름으로 불린다는 게 되게 좋은 거였네요. 몰랐어요 거기서는’
‘…’
‘은하씨. 더 빨리 물어보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전하는 뭐가 자꾸 미안해요’
‘더 빨리 물어보고 더 많이 불렀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이제 많이 불러주시면 되죠’
웃어 보이는 은하에 지환은 그러겠다 약속했다.
-
은하는 지환에게 반말을 가르쳐줬다.
‘전하 은하야- 해보세요’
‘은하야’
‘밥 먹었어? 해보세요’
‘…밥..먹..었..습니까’
‘맨날 여기서 막히시네’
‘…어색합니다’
‘지환아-밥먹었어?’
여전히 당돌한 은하가 도무지 미워지질 않는 지환은 다그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웃기만 한다.
그러다가도 가끔은 예상치도 못한 순간이 있기도 하다.
곧 죽어도 존대를 고집해 보이는 지환에 이상한 오기가 생겨 하루 종일 반말을 해보라며 조르던 은하는 거의 포기 상태로 풀이 죽어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날.
은하를 멈춰 세운 지환은 은하에게 하얀색 털 목도리를 해주며 말을 건넨다.
‘…은하야. 밤 공기가 차니까 이거 하고..가-..’
‘..어..반말…’
‘…내가 반말을 해야만 은하 너가 웃으면서 돌아갈 것 같아서…’
‘…’
‘..너가 울상으로 방을 나가면 내 맘도 내내 걸릴 것 같아서’
‘…’
‘..이제 됐어..?’
‘..네. 이제.. 잘하시네요’
하고 웃지는 못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얼이 빠진 듯 급히 방을 나가는 은하와 그걸 지켜보며 자기 반말이 많이 이상했나..반대로 풀이 죽은 지환이다.
지환의 방을 나온 은하는 전부터 빠르게 뛰던 심장의 이유를 오늘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아서 뛰는 가슴에 손을 얹어보며 ‘…이제 반말시키면 안 되겠다’ 다짐을 되뇌고 달림질하듯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마당이 옅은 흰색으로 덮여있다.
매듭달(12월)을 맞이한 옥국은 눈이 내린다.
‘눈이네..’
괜시리 처마 밖으로 손을 뻗어보는 은하다.
돌아가는 짧은 길에 지환이 해준 목도리는 은하를 따뜻하게 했다.
-
‘전하- 눈이 옵니다-!’
오늘도 아침을 거른 은하는 평소와는 달리 연지도, 비녀도 한 채로 지환을 찾는다.
그게 내심 아쉬운 지환이다.
‘그러게. 은하야. 눈이 많이 내렸네…나가볼까?’
하루 사이에 익숙해진 지환이다.
‘..반말하지 마세요..!’
곧장 은하에게 금지당해버렸지만 말이다.
-
‘어제까지만 해도 반말을 듣지 못해 투정이시더니 갑자기 또 왜 하지말라 변덕이십니까’
‘…너무..’
‘…제 반말이 그렇게 듣기에 좋지 못합니까’
‘..그게 아니고..’
‘….'
답지않게 당돌하지 못하고 대답을 머뭇거리는 은하를 그저 의아스럽게 쳐다보기만하는 지환에 빨리 뛰는 심장 소리가 자기 귀에도 들리는 것만 같은 은하다.
‘…그게..너무 좋..아서 탈인거죠…’
‘…’
당돌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솔직했던 은하는 조금 뜬 정적 속에 뛰는 자기 심장 소리가 이제는 지환에게도 들릴까 걱정한다.
‘..그럼 더 해야하는 거 아니야.?‘
‘..하지마시라니까요-!’
'…은하야'
은하에게 장난도 쳐보는 지환은 은하의 반응에 웃어 보인다.
‘…은하 너가 좋다며’
‘…’
‘은하 너가 좋아하는 건 아무리 어렵더라도 다 해줄게’
지환과 은하는 한동안 서로에게 시선을 놓치지 못하고 꽤 오랜 시간 애틋한 눈을 하고 서로를 마주 봤다. 눈이 내린 길에는 그런 두 사람의 발자국만 찍혀 예쁜 그림을 그린 채로.
-
넓은 부지에 목조들이 이리저리 땅에 박혀 건물이 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목조들을 나르는 노동꾼들도 바삐 움직인다.
동시에 궁 안에서는 선생님을 선발하는 첫 과거시험이 열렸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어 서술하시오'였다.
-
은하는 이따금 생각나는 그곳에 멍해질 때를 빼고는 점차 일상으로 돌아왔고 지환은 그 이후로 여전히 반말을 금지당했다.
‘유치원의 이름은 어떤 것이 좋을지 생각해 주세요. 은하씨에게 내드리는 숙제입니다’
지환이 내준 숙제에 은하는 며칠 내내 손에 붓과 한지를 끼고 산다.
여느 때 같으면 지환의 방, 지환의 옆에서 했겠지만 요 며칠 지환은 지어지는 유치원의 설계도를 수없이 고쳐내고 현장을 확인하러 궁 밖을 나가는 일이 잦아졌고 덩달아 방을 비우는 시간도 많아졌다.
여기저기 구겨져있는 한지에는 지환이네 유치원,옥국놀이터,전하와놀아요 여러 이름들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새로 꺼낸 종이에 여전히 서툰 글씨로 적어 내리는 은하다.
‘…그래. 심플이즈베스트다’
은하는 해가 지기 무섭게 넓은 여백에 몇 글자 안 되는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넣은 한지를 접어들고 이제는 익숙한 전하의 방을 찾는다.
-
‘전하- 저 들어갑니다-‘
은하의 방에 빨간 꽃이 지키기 시작할 때부터 지환의 방에도 빨간 꽃이 항상 있다. 생각해 보면 은하의 발 길이 자주 닿는 곳에는 항상 있었다.
'혼자 살았고 거기는 이런 창호지가 아니고 빨간색 꽃이 그려진 종이가 붙어있었어요'
'…빨간색 꽃을 좋아했습니까'
'살던 곳 주인분이 붙여 놓으신 거긴한데...생각해 보면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빨간 꽃을 볼 때면 며칠 전에 대화가 맴도는 은하는 그곳을 그리워하는 듯한 자기를 이렇게나마 위로하려는 지환을 알아서인지 굳이 왜냐고도 괜찮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숙제 끝냈습니다’
‘..수고많았습니다’
지환도 그런 은하를 알기에 아무말 않고 매일 아침 가장 예쁜 빨간 꽃을 손수 골라 미호에게 전달할 뿐이다.
-
‘이런 거 저런 거 많이 써봤는데 이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옥국..유치원’
‘..별로예요?’
‘좋습니다. 가장 간결하면서도 잘 와닿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걸 저쪽 꿈에서는 뭐라고 하게요’
‘…뭐라고 합니까’
‘심플..’
‘…심..플’
‘이즈’
‘..이즈..’
‘베스트’
‘…베스트..발음하기가 까다로운 것 같습니다’
처음 발음하는 단어의 낯간지러운 듯 웃어버리는 지환의 은하도 웃는다.
‘매듭달(12월)이 끝나갈 때쯤이면 유치원은 다 지어질 것 같습니다’
‘보름 정도 남았네요. 추워지기 시작했으니까 노역하시는 분들 고생 많으시겠어요’
‘충분한 휴식 시간과 따뜻한 새참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짱’
언젠가부터 저쪽에서는 최고를 짱이라고 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이따금 내밀어 보이는 은하다.
그런 은하를 지환은 못 말린다는 듯 지켜본다.
‘시험은요?’
‘제출된 답안 중에 10개 정도를 추렸습니다. 고되겠지만.. 어느 답안이 가장 좋을지 선별해 줄 수 있겠습니까’
‘또 숙제예요?’
‘이건..부탁입니다’
알차게 부려 먹는다며 투덜거리는 은하를 웃으며 보다 지환은 말한다.
‘…대신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뭔데요?’
옷깃에서 꺼내 내미는 지환의 손에는 옥색 가락지 한 개가 있다.
‘..반지네요?’
‘저쪽 꿈에서는 반지라고 하나 봅니다’
지환은 은하의 4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다.
‘옥국에서도 결혼한 사람은 네 번째 손가락에 끼나 봐요?’
‘….아닙니다’
‘…그럼 우정반지 뭐 그런 거예요?’
‘….’
그저 고개를 젓는 지환의 은하는 대답을 재촉하는 쳐다본다.
‘…네 번째 손가락은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
‘혼인식을 치른 다음 날에는 세 번째 손가락에’
‘…’
‘합방한 다음 날에는 엄지에 반지를 끼곤 합니다’
‘..그럼..저는 세 번째 손가락에 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은하의 질문에 대답을 조금 미뤄두고 반지를 은하의 손가락에 마저 끼우는 지환.
어느새 옥색 가락지는 은하의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들어맞았다.
‘아직 말을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한다고’
‘…’
‘순서가 바뀌어 미안합니다’
‘…’
‘…그리고 많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
‘…사랑합니다’
-
어쩐지 모르게 나도 사랑한다 쉬이 대답을 못했던 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