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첫째 날2.2. 둘째 날2.3. 셋째 날2.4. 넷째 날
3. 이후 영향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서. 1632년 출간 되었다.
당시 천문학의 헤게모니를 지배하던 천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과 맞서 지동설을 주장하며 내놓은 책이다. 제목의 두 우주 체계는 천동설과 지동설을 말하며 양 가설을 저울질하며 어느게 맞는지를 조명하는 방식이다. 정확히는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 관한 대화. 제목대로 대화형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살비아티(Salviati)와 사그레도(Sagredo), 심플리치오(Simplicio) 세 사람이 나와서 나흘간 천동설과 지동설로 대화를 하는 구성이다.
한국에서는 '천문 대화'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2016년 4월에 대화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다.
살비아티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지지자로 곧 갈릴레이 자신의 오너캐다. 심플리치오는 천동설을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대표[1]로 나오고 사그레도는 대화를 중재하는 MC 역할인데 묘하게 지동설로 기울어져 있다.[2]
지구가 하늘에서 움직이는 물체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에 대해 토론한다.
현대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소요학파[3] 사람들은 지구와 천체가 서로 다른 물질[4]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지구의 물질은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고 직선운동을 하며 이와 반대로 천체의 물질은 변하지 않고 완벽한 운동인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지구의 자전에 대해 토론한다.
지구의 공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한다
밀물과 썰물에 대해 토론한다.
특이한 부분은, 여기서 갈릴레오는 조수간만이 지구의 운동에 따라 발생하는 현상이라 주장한다는 점이다. 현대 과학에서는 조석 현상이 달의 공전과 태양에 의한 것임이 밝혀져 있다. 같은 지동설론자인 케플러도 달과의 관련성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는 이렇게 일축한다. '달이 물을 끌어당긴다는 소리는 귀신의 허깨비 같은 소리다. 자연적이지 않고 초자연적인 이야기다. 이런 거에 귀가 솔깃하는 사람은 지능이 없는 것이 틀림 없다.'
갈릴레이가 저런 고집을 피운 이유는 당시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은 기계론적 우주관과 점성술적 우주관의 대립이기도 했던 탓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우주관(천동설)에서는 별의 운동이 지상의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점성술적인 성격이 짙었다.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부정하는 도그마에 빠져서 관찰에 따른 사실은 무시하고 자신의 가설을 고집한 것이다.
당시 갈릴레이의 지동설 주장은 충분치 못했다. 구 천동설보다 지동설이 더 설득력 있었던 부분은 목성 위성, 금성 위상변화 정도였는데 그나마 이것도 이미 티코 브라헤가 만든 새 천동설 모델에서는 설명이 되는 범주였다.
가장 결정적인 관측 증거가 될 수 있는 연주시차는 당대 기술로는 관측 불가능한 것이었으며[5], 갈릴레이가 지지한 코페르니쿠스 모델은 행성궤도를 원으로 가정해서 당대 관측 자료와 약간의 오류가 발견되었다. 또한 갈릴레이는 그가 지지하던 코페르니쿠스 모델에 대해서 새로운 근거나 수정된 이론을 내놓지 못했다.
또한 교황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갈릴레이가 끌려온 대목이 있기도 한데, 교황을 모욕했다고 간주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소에 끌려오게 된 사정은 이랬더랬다.(...) 이 때문에 이 넷째날 부분은 검열관에 의해 잘려나간다.[7]
갈릴레이는 이러한 내용을 두고 진술하기를 "지동설을 부당하게 옹호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풍자하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했다. 평소 다른 이들을 '정신적 난쟁이'로 여겼다는 갈릴레이지만 심문관들이 이것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의문이다.
이 책이 남긴 영향 중 무엇보다 큰 것은, 이 책으로 말미암은 재판으로 인해 당시 갈릴레이와 교회 사이의 갈등 관계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왜곡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갈릴레이는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인물이었다. 그는 물에 대한 달의 인력을 거부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신비주의적 원격작용'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케플러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타원 궤도 또한 한사코 거부했다.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원이야 말로 천상에 어울리는 완벽한 운동이기 때문에. 그의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이었다.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론으로 무장한 자연철학자였던 갈릴레이는 근대적 자연과학의 선구자이자 순교자로 세상에 남았다. 갈릴레이의 제자들이 스승이 벌인 교회와의 약속 위반을 과학을 대표하는 순교이자 양심 선언으로 포장한 반면, 교회는 이를 부당하게 억누른 시대착오적인 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사실 지동설은 천주교 교리 문제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갈릴레이 사건 이전에 한 추기경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누가 한 말일까? 교황 즉위 이전의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 아니다. 조르다노 브루노를 화형시킨 것으로 악명높은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이다.[8]
뜻밖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엄연히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출판된 책이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갈릴레이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기 때문에, 두 우주 체계를 공정하게 다루며, 결론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우주의 본질을 알 수 없다는 암묵적 조건으로 출판 허가를 받았다. 다만 당시 가톨릭 내부의 정치적 상황[9]에 갈릴레이가 연루되고, 이 저서의 심플리치오가 교황을 풍자하는 캐릭터라는 소문이 돌고,[10] 결정적으로 책을 읽어보니 누가 봐도 두 우주 체계를 불균형적으로 다뤘고,[11] 약속된 결론의 경우 틀린 말만 하는 심플리치오가 하게 하는 등(...)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 유죄를 받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때,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지동설)을 부정하도록 권고받았는데, 이를 거역하면 사형이였다. 결국 갈릴레이는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투옥을 면하는 대신 피렌체의 자택에서 죽을 때까지 연금을 당했다.
게다가 이 사건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본인의 연구에 관한 평가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아이작 뉴턴 경의 고전 물리학 정립 과정에서도 지동설은 케플러의 것이었지 갈릴레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작 뉴턴 경은 분명 갈릴레이에게서 중요한 것을 배웠다. 직선관성이다. 대체로 인력이 감안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뉴턴 역학은 갈릴레이의 직선관성에 단초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윤색들은 갈릴레이의 이러한 업적을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았던 지동설에 가려지고 있다. 그렇게 오늘날에도 갈릴레이의 대표작은, 마땅히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와 수학적 증명>이 아니라 프로파간다 팜플렛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이다.
이 책과 관련되어 일어난 재판을 받은 갈릴레이가, 그 유명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재판장을 나오면서 남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해당 항목에서 언급하듯 증거는 없으며 갈릴레이를 과학의 순교자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후기에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