俛宇先生文集卷之百四十七 : 면우 곽종석 高麗端誠輔理翊贊功臣,三重大匡密直提學,鷄林君謚文靖,霽亭李公神道碑。 고려단성보리익찬공신 삼중대광밀직제학 계림군시문정 제정이공신도비 有隆然斧封於廣陵之炭洞。而歷五百載瞻式于行過者。麗季名臣霽亭先生李公諱達衷字仲權之玄宅也。 광주(廣州)의 제릉(齊陵) 북쪽 탄동(炭洞)에 높직하게 봉분을 만들어 五百年을 지내면서 行人까지 바라보고 공경하는 것은 高麗末期(고려말기)에 名臣(명신) 霽亭先生(제정선생) 李公 휘 達衷(달충) 字(자)는 中權(중권)의 묘소이다.
其雲裔將勒銘於神道。以詔告于無極。謁其辭于鍾錫。竊惟公剛毅大節。炳於史傳。宏詞雅章。纍纍於文選諸家。卽此而公之不朽。可與造化者並。其何須於陳言之有無於石顔者之有時而泐也。辭之固而其請愈至矣。則亦有不得以終己者焉。 그 後孫(후손)들이 장차 神道碑(신도비)를 세워서 오는 世上(세상)에 고하고자 하여 鍾錫(종석)에게 銘(명)을 청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公(공)의 强直(강직)한 大節(대절)이 사기에 빛이 있으며 굉장하고 청아한 文章(문장) 詩句(시구)가 文選(문선)의 모든 작가에 누누히 나와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서 公(공)의 썩지 않음이 가히 天地造化(천지조화)로 더불어 같을 것인데 그 무엇을 진부한 말의 有無를 기다릴까? 碑石(비석)에 새기는 것은 때로는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양하지 못할 자도 있다.
公初諱達中。恭愍王以御筆改中爲衷。系出新羅阿飧諱謁平之後。世以慶州爲貫。有諱金書。佐麗祖官戶部郞中。繼有冠冕。曾祖翮門下評理。祖世基密直提學謚文僖。考蒨月城府院君謚文孝號菊堂。 公(공)의 처음 휘는 達中(달중)이요, 공민왕이 중(中)을 충(衷) 개명해 주었으며, 先系(선계)가 신라 아찬 휘 謁平(알평)의 後孫(후손)이고, 慶州로 本貫(본관)을 삼았다. 휘 金書(금서)가 있으니 高麗(고려)의 조정을 도와서 벼슬이 戶部郞中이고 이어서 冠冕(관면)이 있으니 曾祖(증조) 翮(핵)은 門下評理(문하평리)요, 祖考(조고) 世基(세기)는 大提學(대제학)으로 시호는 文僖(문희)요, 先考(선고) 蒨(천)은 大提學 月城府院君(대제학 월성부원군)이며, 시호는 文孝(문효)요,號(호)는 菊堂(국당)이다.
妣延昌郡夫人朴氏。忠宣王己酉生公。公文章華敏。志節偉然。年十八擢魁第。由史翰正言。累遷爲成均祭酒。 선비는 竹山郡夫人(죽산군부인)朴氏니 竹城君 뇌의 따님인데 忠宣王(충선왕) 己酉年(1209년)에 公을 낳았는데 公의 文章이 빛나고 민첩하며 뜻과 절개가 넓고 위대하였다. 恭愍王(공민왕) 元年에 十八歲인데 一等 과거에 급제하여 史翰 正言(사한 정언)을 거쳐 여러번 옮기어 成均祭酒(성균좨주)가 되었다.
忠穆王四年。與張元,金允誠諸人。同判吏部都監事。盖極選也。恭愍元年拜典理判書。明年以監察御史轉戶部尙書。 忠穆王(충목왕) 四年에 張沆 金允誠(장항 김윤성)여러 사람으로 더불어 같이 史部都監事를 맡게되었으니 대개 극도의 선출이다. 恭愍王(공민왕) 元年에 典理判書(전리판서)를 배수하고 監察御史(감찰어사)로 戶部尙書(호부상서)에 전직 되었다.
時設八關會。雜戱于僕射廳。竪藩于盥洗幕前。以限內外。公在廳上。令撤其藩。盖欲沮其會也。王怒命係獄。尋以爲名儒不可辱。陞拜密直提學。 이 때에 八關會(팔관회)를 창설하고 僕射廳(복사청)에서 잡된 유희를 벌리니 公이 僕射廳(복사청)위에 있으매 그 울타리를 철거하도록 명령하니 王이 성내어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가 조금후에 이름 있는 儒賢(유현)을 욕 보일 수가 없다 하여 密直提學(밀직제학)을 승진했다.
七年夏出爲東北面兵馬使。將還。我桓祖以朔方道萬戶。餞于咸州之鶴仙亭。太祖侍立于後。適有獐羣而過對岸。公曰可得一以佐酒乎。太祖抽弓一發。疊貫五獐。及酒進。桓祖行則公立飮。太祖行則跪而飮。桓祖怪問之。公曰此子非公所及。必大公家。因以子孫託焉。 七年여름에 외직으로 東北面兵馬使가 되었고 장차 돌아올 때에 桓祖(太祖의 아버지)가 朔方道萬戶로써 咸州(함주)의 鶴仙亭(학선정)에서 전송하매 太祖가 후측에 모시고 있었는데 술이 나와서 桓祖(환조)가 술을 돌린즉 公이 서서 마시고 太祖가 술을 돌린즉 꿇어앉아 마시었다. 桓조(환조)가 괴이하게 여기어 물으니 公이 대답하기를 『이 아들은 公이 미칠 바가 아니요 반드시家門을 大昌할 것이라.』하고 子孫으로서 부탁하였다.
後公之子有犯者。太祖特原之。命名以立。盖志其立飮也。已而王惑於妖僧辛旽。旽淫於酒色。勢傾內外。人莫敢忤。 후에 공의 아들이 범죄한 자가 있으매 太祖가 특별히 풀어주고 설립(立)자로서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였으니 데저 그 서서 마심을 기록한 것이다. 얼마 후에 王은 妖僧 辛旽(요승 신돈)에게 미혹하고 辛旽(신돈)은 酒色(주색)에 음란하여 나라형세가 안팎으로 기울어 졌으나 남들이 감히 거슬리지 못하였다.
公甞於稠中面質旽曰人謂公好酒色。旽不悅。公遂見罷。史氏稱公剛直不撓。後出尹鷄林。以輔理勳封鷄林府院君。 公이 일찍이 여럿이 모인 가운데에서 낯대고 辛旽(신돈)을 꾸짖으며 이르기를 『사람들이 公한테 酒色(주색)을 좋아한다고.』하니 辛旽(신돈)이 公을 좋아하지 않고 드디어 파면을 시켰다. 史家(사가)들이 公을 칭하되 『强直하여 흔들리지 않는다.』하였다. 후일에 외직으로 慶州府尹(경주부윤)이 되었고 또, 輔理(보리)의 훈공으로 鷄林府院君(계림부원군)을 봉하였다.
歸老于家。壽七十六而終。乃廢王禑十一年八月十八日也。謚曰文靖。霽亭者公之所甞自號也。公初配靖和宅主橫城趙氏。政堂文學文瑾女。再娶忠州安氏。忠烈公祐女。三娶平壤趙氏。尙書千祐女。 집에 돌아와서 七十六의 壽로 마치니 廢主(폐주) 辛禑十年(신우십년)甲子(1384년)八月十八日이고 시호는 文靖(문정)이다. 배위는 靖和宅主 橫城趙氏(정화택주 횡성조씨)니 政堂文學 文瑾(정당문학 문근)의 따님이요, 재취 배위는 忠州安氏(충주안씨)니 忠烈王 佑(충렬왕 우) 의 따님이요, 삼취 배위는 平壤趙氏(평양조씨)니 尙書 千裕(상서 천유)의 따님이다. 다음은 궐 한다.
有八子。典書竴,月城君竱,判書䇕及竑四男也。內侍尹尹發,判事方恂及金明理,尹承烈四女婿也。典書一男允商府使。月城君一男升商鷄林君謚恭懿。判書四男具商鷄安君,寧商參判,興商鷄林君謚襄僖,榮商副正,竑無嗣。曾玄而下蕃熾而昌。名宦偉績文學行誼。裒然爲國中之望。盖公之積之厚而流祚于無窮也。
公文學旣優。識度冲遠。大爲同堂父益齋先生所器重。其纂國史。引公及白忠簡文寶。與修紀傳。遂成完史。其他著作之盛。可奕奕然終古。而滄桑迭變。梓簡屢灰。今百千而不一二存。其詩文遺者。廑若干篇。而猶可想公之守而知其學之有本也。 公은 文學이 우수하고 도량이 원대하여 크게 당숙부 益齋先生(익재선생)의 器重(기중)하는 바가 되어 國史를 편찬하매 公과 및 白忠簡公 文寶(백충간공 문보)로 더불어 紀年傳(기년전)을제작하여 드디어 完史(완사)를 성취하였고 기타에 著作(저작)의 성대함이 혁혁하여 옛날에도 드물었는데 滄海(창해)와 桑田(상전)이 여러번 변하므로 판각이 불타 버리어 百千에서 하나둘도 보존하지 못하고 詩文(시문)의 남은 자가 겨우 약간의 편질에 불과하나 오히려 공의 지킨 바를 생각하며 학문의 근본이 있음을 알겠다.
詩沉蓄雄勁而不尙浮華。跌宕而必止於禮。怨誹而不及於亂。駸駸有風雅之響。其 지은 詩가 함축성이 있고 웅장하여 浮華(부화)를 숭상하지 않으며 호탕하였으니 반드시 예에 그치고 원망하고 비방하여도 어지러움에 비치지 않고 전진으로 나아가 風雅(풍아)의 소리가 있었다.
箴惕若齋以毋不敬毋自欺。爲念玆之實。其爲動齋說曰其靜也不養之以敬。則其發也或歸於躁妄。曰動靜之理。循環無端。靜而動動而靜。互爲其根。曰寂無思爲。人知其爲靜而不知其有不動之動也。論其世而求之。苟非眞用力於居敬之方而灼見乎靜中有物之妙。其能依俙揣摸而發此於脫口肆筆之餘者難矣。是以其進止行藏。不苟於倖。不撓於邪。剛毅自持。不踰於中正之軌。夫豈無所修而至哉。或者疑咸州跪飮。有乖於人臣之義。然公豈有將心者哉。其見我藝祖之天表英異。武藝精絶。謂可以大顯而作鎭于邦也。將來之天與人歸。公安得以逆其未形也。公之辭表曰區區之心。未嘗不在王室。明窓凈几。敬焚一炷之香。寶籙瑤圖。恒祝萬年之算。公之乃心王室。質之神明者盖如此。
圃隱鄭文忠先生甞拜公遺像於淸瀾亭。有詩曰傳家聲烈忠移孝。盖世文章道業儒。老朝誰更匡王志。淚灑淸瀾乞與湖。於乎其知公矣。吾於公無間然矣。 圃隱 鄭文忠公(포은 정몽주)이 일찌기 淸瀾정(청란정)에서 公의 遺像을 절하여 뵙고 詩를 지어 이르되 『가문에 유전하는聲烈은 忠이 孝에서 옮겨오고 世上을 덮는 文章(문장)은 도학이 儒業(유업)을 일삼았네라.』하였으니, 아 ! 公을 알았다.하겠으며 나도 公에게 疑心(의심)이 없노라. 銘曰。銘(명)에 이르되,
內直者敬。마음이 곧은 것은 공경이니, 其動亦靜。그러하면 動(동)도 靜(정)이리라. 蔽之一言。한 말로 이르자면 昏衢獨檠。어둔 거리에 홀로 밝힌 등불이네. 我諦之精。의리를 인식함에 정밀하였으니 立此本領。이러한本領(본령)을 確立하였네. 旣富其蘊。이미 그 쌓음이 풍부하고 亦確其秉。또한 그 의리를 잡음도 확실하였네. 發之餘事。나머지 일에 발견하여 文彩煒炳。문채가 빛나고 밝았네. 載揚于庭。王庭(왕정)에 드날리니 爲珪爲珽。珪(규)도 되고 珽(정)도되었지. 百僚是儀。百官 同僚(백관 동료)가 법칙을 삼았으니 孰淫而逞。누가 음란함을 들어낼까 引君以道。임군을 도로 이끄니 敢忘俄頃。감히 잠깐인들 잊으랴? 乍黜乍處。잠시 물러나고 잠시 들어오니 匪爾悻悻。좁은 소견으로 고집을 취함이 아니네. 一炷明窓。한 줄기 향불 밝은 창에 丹衷炯炯。一片丹心(일편단심)이 밝고 밝았네. 勤學令終。학문에 부지런하고 고종명으로 마치었으니 是曰文靖。이것을 이르되 文靖(문정)이라 하였네. 烏川有詩。鄭圃隱(정포은)의 詩는 千載發省。天年後에도 일깨움을 발하였으니 我爰作銘。내가 銘詞(명사)를 지어 用諗來永。먼 세상에 고하노라 |